우동 한 그릇
구리 료헤이 지음, 최영혁 옮김 / 청조사 / 2010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흐르는 눈물을 멈출수가 없었습니다.

바쁘게 움직이는 현대인들에게 가슴속으로 우러나오는 감동을 선사하는 책이었습니다.

가난과 어려움 속에서도 우동 한 그릇이라는 음식을 통해 가족의 사랑과 남을 배려 할 줄 아는 북해정 가게 주인의 마음속에 현대인들이 잃어버리고 살았던 이웃의 사랑을 다시 한 번 느끼게 해주었고, 마지막 손님의 한 소녀의 아름다운 이야기를 통해 훈훈한 마음을 가지게 되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변함이 없다는 것


10년이 넘도록 매일 똑같은
옷만 입는다고 친구에게 핀잔을 들었다.
"난 새옷보다 입던 옷이 더 좋아."
"그래도 가끔씩은 새로운 옷도 입어 줘야지, 계속
같은 옷만 입으면 지겹잖아?"
"재윤아, 너랑 나랑 몇 년 친구냐?"
"응...그러니까 초등학교...벌써 24년이 됐네."
"맞다. 사람이나 헌옷이나 지겨울 때가 종종 있는 거야.
하지만 '지겹다'는 건 '변함이 없다'는 거 아닐까?"



- 심승현의 《파페포포 투게더》중에서 -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삼일내내 하늘이 뻥 뚫린모양으로 무섭게도 내리던 비가 드디어 거치고 가을을 재촉하는 파란하늘을 보니 내마음도 한결 가벼워지내요.

빨리 집에가고싶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서귀포칠십리?
 '서귀포칠십리(西歸浦七十里)'가 국내에 널리 알려진 직접적인 동기는 1938년대에 조명암씨에 의해 「서귀포칠십리」가 노랫말이 지어졌고, 박시춘
작곡, 남인수의 노래로 불려지면서 부터이다.

 당시 일제치하에 억눌려 살았던 국민들에게 끝없는 향수와 애틋한 그리움을 이끌어 내면서 큰 인기를 누리게 되었다.

 '서귀포칠십리'의 사실기록은 1416년(이조시대 태종16년) 안무사 오식(吳湜)에 의해 제주도 행정구역이 제주목, 대정현, 정의현으로 나누어 지게 되었으며, 1423년(세종 5년) 안무사 정간(鄭幹)에 의해 정의현청(고성)이 현재의 표선면 성읍마을로 옮겨지면서 70리의 거리적 개념이 싹트게 되었다.

 1653년 제주목사 이원진에 의해 발간된 『탐라지』에 의하면, 서귀포는 정의현청에서부터 서쪽 70리에 있으며, 원나라에 조공을 바칠 때 순풍을 기다리던 후풍처였다고 전하고 있다.

 서귀포칠십리가 처음에는 정의현청이 있었던 현재의 성읍마을에서 서귀포구까지 거리를 알려주는 개념이었으나, 오늘날에 와서는 서귀포칠십리가 단순한 '거리개념'이 아니라, 제주도민의 마음속에 언제나 안식과 위로, 그리고 꿈과 희망을 안겨주는 '이어도'처럼, '서귀포칠십리'라는 의미 그 자체가 서귀포시민의 마음속에 살아있는 영원한 이상향이자, 서귀포의 아름다움과 신비경을 대변하는 고유명사로 자리잡혀 왔다.

 이를테면, 서귀포칠십리는 '서귀포의 뿌리와 정서, 이미지' 를 함축한 발전된 개념으로 정착되어 '영원한 노스텔지어의 고향'으로 동경의 대상이 되고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