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정일의 신 택리지 : 전라도 - 두 발로 쓴 대한민국 국토 교과서 신정일의 신 택리지 2
신정일 지음 / 타임북스 / 2010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이번에 읽은 책은 신정일의 신 택리지 중 <전라도 편>이다. 전라도 곳곳을 직접 다니면서 이중환의 택리지를 다시 쓴 책인데 리뷰를 어떻게 쓸까 고민을 하다가 관심있는 지역에 대해서 발췌해서 쓰는 형식을 택하였다. 그리고 언제나 신정일의 신 택리지 시리즈를 읽으면서 느끼는 것이지만 [지도]를 첨부해 줬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나같은 서울 촌놈은 구례, 고부, 정읍과 같은 곳이 어디에 있는지 알기가 어려워 책을 읽으면서 마치 다른 나라 지역 소개 책을 읽는 듯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완산(전주) : 후백제의 견훤 - p.54~61

 

 오늘날 후백제에 대해 남은 사료는 김부식의 <삼국사기>와 일연의 <삼국유사>뿐일 것이다. 그러나 김부식의 경우 신라→고려의 정통성을 강조한 나머지 고구려와 후백제에 대해서는 편견에 사로잡혀 있는 것처럼 보인다. 후백제의 견훤은 삼국사기 50권 끝에 보면 매우 사악하고 잔인한 악당으로 묘사되어 있으나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란 것을 감안하면 사료에 남아 있는 견훤에 대한 평가는 잘 걸러 살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이에 대해 글쓴이 신정일은 '대다수의 학자들은 자료가 없다는 궁색한 변명한 늘어놓고 있으며 물왕말 일대에는 관심조차 기울이지 않고 있다. 나라 곳곳에서 소설 속 인물들까지도 부활되고 있으며 지역마다 잊힌 역사를 바로세우기 위해 혈안인 것과는 아주 대조적이다.'라고 비판하고 있다.(p.61)

 

 

 

전주 : 정여립은 모반자인가 그 시대의 스승인가? - p.63~74

 

정여립 모반사건, 혹은 기축옥사는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3년 전인 1589년에 일어난 것으로 천여 명이 희생된 사건이다. 정여립에 대해서는 기존 사서에서 모반자로 혹세무민하는 사람으로 부정적으로 그려지다가 단재 신채호에 의해 점점 새롭게 해석되고 있는 인물이다. 정여립은 벼슬을 그만두고 내려와 대동계를 조직하고 학문과 예법 뿐만 아니라 육예(六藝) - 예禮, 악樂, 사射, 어御, 서書, 수數를 모두 가르쳐 주는 등 기존 성리학자와는 확연히 다른 모습을 보여 준 사람이며 많은 사람들로부터 '호남에서 학문하는 사람 중에 정여립이 최고'라는 평가를 받을 정도로 뛰어난 인물이었다. 그러나 모반했다는 의심을 받고 자살하고 말았다.

 

 문제는 이 사건이 임진왜란 3년 전에 일어났던 일이라는 점이다. 많은 이들은 임진왜란 때 국토가 유린된 이유가 기축옥사를 통해 수많은 조선의 인재들을 희생시킨 벌로 일어났다고 수근거렸다고 한다. 특히 <관동 별곡>으로 유명한 송강 정철이 기축옥사를 담당했는데 자신의 당파(서인)을 위해 동인을 무차별 처벌하여 '인간백정'이라는 평가를 받았다는 점도 신선하다. 정말 정여립 모반사건은 조작된 것일까 아니면 사실일까? 그리고 만약 기축옥사 때 조선의 인재를 죽이지 않았다면 임진왜란의 피해가 이렇게 컸을까? 역사엔 '만약'이라는 단어가 없지만 심히 궁금해진다.

 

  또한 단재 신채호는 근대에 들어 정여립 모반 사건에 대해 재조명하면서 아래와 같이 평가하였다.

'이미 안정된 사회의 인물은 늘 전 사람의 필법을 배워서 그것을 부연하고 확장할 뿐이니, 인물 되기는 쉬우나 그 공이나 죄는 크지 못하며, 혁명성을 가진 인물(정여립 같은)은 매양 실패로 마칠 뿐 아니라, 사회에서도 그를 원망하고 미워하여 한 말이나 한 일의 종적까지 없애 버림으로써 후세에 끼치는 영향이 거의 영도(零度)되고, 오직 3백 년이나 5백 년 뒤에 한두 사람 마음이 서로 통하는 이가 있어 그의 유음(遺音)을 감상할 뿐이요… 인격적 자주성의 표현은 없고 노예적 습성만 발휘하여 전 민족의 항성을 파묻어버리고 변성만 조장하는 나쁜 기계가 되고 마나니, 이는 사회를 위하여 두려워하는바요, 인물 되기를 뜻하는 사람이 경계하고 삼가야 할 일이다.' 즉, 안정된 사회에서는 큰 인물이 나기 어렵고 혹여 혁명적인 사람이 있다 하더라도 대부분 실패로 돌아간다는 것인데…. 이렇게 세상을 바꿀 능력을 가진 사람이 자신의 뜻을 펼치지 못하고 죽어간 사람이 우리 나라 역사에 몇 명이나 될까?

 

 

 

고부, 정읍 : 조병갑과 동학농민운동 - p.134~148


 

 역사에 이름을 남기는 방법도 참으로 다양하다. 좋은 위인으로 역사에 이름을 남기는 방법도 있지만 <조병갑>처럼 탐관오리로 오늘날까지도 악명을 떨치는 방법도 있다. 어찌되었건 조병갑은 동학농민운동 당시 실력자이던 조 대비의 조카이자 이조판서 심상훈과 사돈 간이었는데 가장 큰 평야가 있던 고부에 군수로 부임하면서 사단이 발생하게 된다. 그의 악행에 대해서 일일이 언급할 필요는 없겠지만 그보다 웃긴 것은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나 고부군수에서 파면된 후 새롭게 고부군수에 임명된 사람들이 전부 군수 임명을 거절하였고 1년 동안 강진군 고금도에서 근신하는 척하다가 복권되어 동학교주 최시형에게 사형을 선고하는 고등재판관으로 승진하였다는 점이다.

 

 신임 고부 군수가 부임을 거절한 것은 이른바 '빽'이 좋았던 조병갑의 유임 공작이 치열했고 빽의 눈치를 보기 때문이였으며 특히 근신하는 척하다가 고등재판관으로 승진되어 오히려 동학교주에게 사형을 선고하는 것을 보면 당시 조선이 얼마나 부패했는지 알 수 있다. 일본에게 망하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수순이었다고 보인다.

 

 

 

나주 : 임나일본부설 - p.218

 

글쓴이는 이 책에서 나주시 반남면 자미산 일대에는 나주 반남 고분군이 있는데 그 고분군의 주인공을 마한의 부족장으로 보고 있으나 [후한서(後漢書)] 동이열전'마한은 서쪽에 있는데…남쪽은 왜(倭)와 접해 있다. 진한은 동쪽에 있다.… 변진은 진한의 남쪽에 있는데, 역시 12국이 있으며, 그 남쪽은 왜에 접해 있다.'고 기록된 것을 근거로 왜는 현재의 나주 일대에 근거해 백제와 신라를 영향력 아래에 두고 고구려의 남하 정책에 맞섰던 강력한 정치 집단의 하나로 추정된다고 하였다. 그래서 나주 반남 고분군은 한반도 내에서는 그와 같은 유례를 찾아볼 수가 없으며, 일본의 천황릉으로 추정되는 고분군들과 흡사하다고 말하고 있다.

 

 사실 이 부분을 읽었을 때 얼마나 인상 깊었는지 모른다. 오늘날 우리 나라에서 <임나일본부설>에 대해서는 허구라고 인식하고 있다. 그런데 이와 같은 주장을 하는 사람을 만날 줄이야…. 한편 이와 같은 역사적 사실(fact)가 있다면 무조건 무시할 것이 아니라 한 번 진지하게 사실 유무에 대해 살펴볼 필요도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 나라나 일본이나 스스로에게 불리한 역사는 감추려고 노력하는 마당이라 진실은 저 너머에 계속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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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1-01-02 22: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 재미있게 읽었어요, 특히 임나일본부설에 대한 내용을 보면서 지금 국사학과에
다니고 있는 역사학도 친구가 생각났습니다. 고등학생 때 저에게 임나일본부설에 대해서
진지하게 설명했던 기억이 나네요. 역사를 무척 좋아하는 친구라 전공도 국사학과을
선택했는데,,, 이 친구가 역사책만 보지 말고 과학책 읽기를 권해주고 싶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