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들은 잠을 잘 시간을 쪼개서 돈을 벌지만 나는 돈을 벌 시간을 쪼개서 잠을 자고 있다. 다시 말해 잠잘 시간도 부족한데 재테크니 뭐니 할 시간이 어딨냔 말이지.


재작년에 1억이 조금 넘는 차를 타고 계약직으로 온 사람에게 일이 힘들지 않으냐고 물었더니 자신의 나이를 말하면서 한창 때라서 라고 했다. 그의 나이를 듣고 피식했다. 나랑 동갑이어서. 그때나 지금이나 나는 계속해서 retire만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창 때는 무슨, 피곤해 죽겠구만. (출퇴근 하는 자동차 가격이 비해 터무니 없는 저임금의 계약직을 하러 온 사람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돈을 벌기 보단 그냥 어딘가 출퇴근 하고 싶어서 온 너낌!) 

한창 때임에도 불구하고 매일이 피곤해서 세상을 저주하던 나는 3만 5천원 짜리 미밴드로 구원을 얻었다. 미밴드로 수면시간을 측정해본 결과 조금이라도 수면시간이 줄어들면 낮동안에 졸리고, 충분히 자면 낮동안에 전혀 졸리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나는 수면시간 확보를 우선순위에 두기로 했다. 하루를 살더라도 졸리지 않는 낮을 살자라는 각오로! 그래서 주중 주말 상관없이 매일 8시간 이상의 수면시간을 확보하는 수면재벌이 되었다!!! 그랬더니 하루하루가 어찌나 살만한지!!!!!!!!

졸리지 않더라도 밤 9시 이후엔 누우면 언제든 금방 잠들 수 있다. 잠부심 하나!!! 
그리고 아침에도 그럭저럭 힘들지 않게 일어난다. 잠부심 둘!!!! 
한 번 잠들면 대체로 깨지 않고 계속 잔다. 잠부심 셋!!!!!

하하하하하하!!!


하루 미션이 하루에 8시간 밤잠 자기이다 보니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하루 미션 성공이다! 그래서 요즘은 나머지 시간들은 망하든 말든 무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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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업성을 고려해 유명 필자의 이름을 걸고 '기획'된 책, 쉬운 책, '위로'가 되는 책에 대한 대중의 강력한 요구가 있다. 이는 기후 위기만큼이나 우려스러운 현상이다. 모든 것이 양극화되는 시대에 생각하는 능력, 지성의 양극화는 절망적이다.

기술의 발전으로 매체가 인간의 문해력을 대신하더니, 이제 팬데믹과 기후 위기까지 가져왔다. 대중의 문해력 저하, 지성의 양극화는 발전주의와 그로 인한 매체의 질주 때문이다. 


***한국 사회에서 고료만으로 생활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 "재미있고 쉽게 써주세요."라는 독자 메일이 예전 같지 않은 부담으로 다가온다. 이런 시대, 어떻게 글쓰기의 의미에 대해서 질문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 그러나 최근 몇 년 사이 국내서든 번역서든 페미니즘 책들은 대개 '추천사'가 대신하고 논쟁은 불가능해졌다. 무조건 "어렵다", "어려우면 대중화가 안 된다."는 말을 매일 듣는다. 


<편협하게 읽고 치열하게 쓴다 / 정희진>


1.

최근 나는 업무 전달 내용을 읽지 않는 사람들, 안내장을 읽지 않는 사람들, 무엇이든 주변 사람에게 물어보는 즉 주변 사람을 네이버나 다음 사용하듯 하는 사람들로 인해 인간의 학습능력과 지능이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더더 심각하게 낮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중이기에 정희진의 신간 <편협하게 읽고 치열하게 쓴다> 머리말을 읽다가 저 문장들에 밑줄을 긋지 않을 수가 없었다. 실제로 형광펜을 들고 밑줄을 좍좍 그었다! 


정희진은 대중이 문해력이 저하되었다고 하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애초에 저하될 문해력도 없었던 사람들이 대다수다. 대개의 사람들은 자신이 이미 알고 있는 것만 읽는다. 그러려면 뭣하러 읽는지 모르겠지만 대체로 그렇다. 모르는 것을 읽어야 하는데 모르는 것은 문자가 아닌 검은색 선 정도로 여기는 듯하다. 알파벳을 사용하는 나라가 아닌 곳에 여행을 가면 본능적으로 알파벳만 읽어(??) 대는 것처럼... 사람들은 익숙하고 편한 것을 건성건성 대충대충 읽고 평소 자기가 생각하던 불만과 불평만을 쏟아낼 뿐이다. 


스마트폰 시대 이전에 나는 이렇게 생각했다. 사람들이 기회가 없어서, 상황이 여의치 않아서 무지한 것이라고... 하지만 지금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애초부터 딱 그 정도의 능력치뿐이었다고... 생각한다. 스마트폰 시대가 되고 추가로 알게 된 인류의 특징은 서로 편을 나눠서 서로를 비방하고 욕하고 싸우다가 서로를 죽이고 그것으로도 부족해서 기어이 전쟁을 하고 마는 것이라는 것이다.  


2.

거듭 말하지만 "내 몸은 나의 것이다."가 아니라 "내 몸이 나다." 우리의 정신이 몸을 소유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몸이 바로 나다. 정신은 몸에 속해 있다. 그런 의미에서 자신의 몸에 대한 생각은 곧 자아관이다. 문제는 이것이다. 지금 한국 사회는 자기 몸을 긍정하기 어려운 사회인데, 과학 기술의 발달로 자아만 팽창한다는 사실이다. 이 사실에 모든 '비극'이 있으며, 동시에 이러한 책이 절실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매체가 메시지다."라는 마셜 매클루언의 유명한 테제는 인간이 만든 도구(매체)가 몸이 확장이라는 사실에서 현대 문명과 몸을 이해하는 데 중요하다. 승용차의 크기, 아파트 평수가 '내가 되었다'. 즉 내가 소유한 물건은 나의 확장이고 자아는 비대해진다. 

<편협하게 읽고 치열하게 쓴다 / 정희진>


며칠 전 나를 절망케 했던 지독한 어깨 통증은 거의 다 사라졌으나, 만성적인 어깨 통증은 해결이 되지 않고 있다. 이번 정희진의 책 1장 제목은 '아픔에게 말 걸기'이다. 이 장은 매 페이지가 밑줄이다. 노화의 문턱을 갓 넘은 내가 노화로 인해 느끼는 각종 불편들로 인해 '몸이 없이 살 수는 없을까?'를 그 이전보다 더 강렬하게 바라는 와중에 정희진은 몸=나라고 한다. 나는 이 말에는 동의가 안되지만, 그래서 밑줄이 많았다. 위에 인용한 문장도 사실 거의 다 동의하지 않는다. 다만 생각해볼 여지는 충분해서 인용한 것이다. 


나는 몸이 주는 통증의 문제를 대체로 돈으로 해결하는 중이다. 매주 어깨 마사지를 받는 것으로는 부족해서 최근에는 침대를 바꿨다. 흰머리카락이 싫어서 염색을 시작했고 염색을 하니 안 그래도 좋지 않은 머릿결인데 더 엉망인 것 같아 클리닉도 시작했다. 할 수 있는 내에서는 보수하면서 이 몸과 남은 생을 살아내야 하는 것이 내 업보다 라고 생각하는 편이다. 태어난 것이 내 인생 최대의 과오라고 생각하는 것처럼. 


나에게 몸은 긍정이나 부정의 차원의 문제가 아니다. 내가 선택할 수 없었던 사실에 대해서 긍정하거나 부정하는 건 성립 자체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시력이 나빠지면 내 시력에 맞는 안경을 쓰고 계속 일상을 유지해 나가는 것처럼, 흰 머리가 생기면 염색을 하고, 어깨가 아프면 어떻게 해서든 덜 아프게 해서 일상을 유지해 나가는 것일 뿐이다 라고 나는 생각한다. 안경도 귀찮고 염색도 귀찮아서 '아 이럴 거면 몸 따위 없이 살면 좋을텐데.'라는 생각에까지 이르렀을 뿐이다. 나는 생각은 최악으로 행동은 최선으로 하는 편인데, 대체로 사람들은 반대인 것 같다. 생각은 최선이지만 행동은 최악인... 


요즘은 수면의 질을 확인하려고 미밴드를 손목에 끼고 잔다. 내 수면 점수는 주로 95점이고 백분율 98%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피곤하고 늘 졸리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는 게 싫어서 사표를 쓰고 싶은 심정이다. <명상록>을 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도 왜 일찍 일어나야 하냐고 반문했다지 않는가. 나는 많은 것을 바라는 게 아니다. 그저 주말처럼 아침7-8시 사이에 일어나서 23시 전에 자는 생활을 하고 싶다. 주중의 나는 5시 반에 일어나고 22시 전에 잔다. 아무튼 잠이라도 잘 자서 다행이다 싶다. 내 몸에게 많은 것을 바라지 말자. 그저 오늘도 어제처럼 잘 자주기만을 바라자. 몸이 없다면 제일 좋겠지만... 


나는 주변 사람에 대해서는 쉽게 포기해버리는 편이고, 나 자신에 대해서는 어떻게든 조금이라도 나은 방향이 있을 것이다라고 생각하고 애쓰는 편이다. 그래서 몇 번 도와줘도 개선의 기미가 없는 사람은 그냥 천성대로 살다 죽겠지 하고 손 뗀다. 마음도 뗀다. 이 책을 읽으면서 정희진 작가에게 "당신은 너무 마음을 쓴다. 그 마음 좀 거두고 편하게 사셔라."라고 말하고 싶었는데 그것이 즐거움이고 쾌락이라고 다른 페이지에 써뒀기에 나는 내 쪽에서 마음을 뗐다. 정희진은 정희진 식으로 즐겁고 아프게 살고 있구나, 그게 나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사회운동(?)하는 사람의 쾌락의 방식이구나 싶었다. 


아무튼 나는 나에게 선택의 기회가 주어진다면 현재 내 몸보다는 우사인 볼트나 장미란의 몸을 택할 것이다. 또한 태어날지 말지 선택할 수 있다면 태어나지 않는 편을 택할 것이다. 세상은 나 같은 천성의 사람이 살아가기엔 너무 하찮다. 타인의 고통에 둔감한 체력 좋고 양심 없고 이해타산에만 머리가 잘 돌아가는 사람이 잘 먹고 잘 사는 세상이라면 너무 하찮아서 거들떠도 보고 싶지가 않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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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하루도 오른쪽 어깨 통증이 없는 날이 없다. 병원에 입원했을 때 유일하게 좋았던 점은 진통제로 인해서 어깨 통증을 느끼지 못했다는 것. 그중 오늘이 제일 심각하다. 고개를 오른쪽으로 끝까지 돌리지 못하게 되었다. 끝가지 돌리면 통증이 밀려온다. 


나이가 들면 들수록 온갖 잡다한 만성통증이 생기겠지...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이렇게 금방 노화가 닥치는데!! 정말 살면 살수록 태어나야 할 이유가 확신만 쌓이고 있다. 

매주 어깨 마사지를 받는데도 불구하고 좋아지지 않는다. 

지금은 어깨에 찜질팩 올려두고 어찌해보는 중이다.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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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무줄이 몇 개 생겨서 엄마에게 필요하냐고 물었더니 장독에 망을 씌울 때 쓰면 좋다고 했다. 그래서 고무줄을 주었더니 어버이날에 고무줄만 주냐길래, 


엄마, 엄마는 아직도 남이 나를 챙겨주길 바라고 기다리는 거야? 그런 사람은 평생 불행할 수밖에 없어. 나는 타인에게 아무 기대가 없어. 내가 나를 챙겨주면 되지. 그래서 나는 내 생일 선물 내가 사잖아. 


엄마는 "그래도 남한테 받고, 주고 하면 재미있잖아."


나는 "그걸 호기롭게 재미로 주고받는 사람은 거의 못 봤는데, 내가 이만큼 줬으니 너도 이만큼 챙겨줘야지 따지고 또 따지고 하던데. 그리고 엄마, 나는 부모 덕분에 태어난 건지 부모 때문에 태어난 건지 그게 덕분에 인지 때문에 인지 여전히 고민인 사람인데, 어버이날 선물을 챙길 여유가 없어. 그리고 엄마 아빠가 내 덕분에 부모가 되었고, 나같이 훌륭한 딸을 가진 부모가 되었는데 무슨 선물을 더 바라는 거야? 정작 고마워해야 할 사람은 내가 아니라 엄마 아빠라고. 내 딸로 태어나줘서 고맙다고 절을 해도 모자랄 판에."


또 나는 "아, 남이 나를 챙겨주기를 바라는 사람들이 대체로 결혼하고 자식 낳고 하는 거구먼." 했더니 엄마는 "니랑은 대화가 안된다. 어려운 말 하지 마라."라고 했다.


말이 나온 김에 나는 엄마에게 "엄마, 그런데 진짜 자식은 왜 낳는 거야?"라고 했더니 엄마는 "그걸 왜 나한테 묻노?" 그래서 나는 "그럼 그걸 나를 낳은 사람한테 묻지 누구한테 물어? 다른 애 엄마한테 물을 수도 없잖아." 했더니 엄마의 대답은 이랬다. "뭐 아기가 귀엽고 원래 결혼하고 자식을 낳아야 되는 건 줄 알고 낳았지."였다.


그럼 덕분에 아니고 때문에 네.


내가 바란 대답은 사는 게 너무 좋고, 이 세상에서 하루라도 사는 게 너무 축복이고 그래서 이 축복 같은 시간을 누리게 해주고 싶었다 였으나, 그럴 리가 없지. 엄마 아빠의 인생은 축복이라기 보단 그저 하나의 불행과 고통, 생존 전쟁일 따름이었다. 


요즘 아빠는 나만 보면 아빠가 어린 시절 얼마나 힘들고 가난하게 살았었는지를 얘기한다. 아마도 그건 너는 그런 고난을 겪지 않았으니 얼마나 좋으냐, 그러니 행복을 자각하고 긍정적으로 살아라 라는 속 뜻이겠으나, 그걸 듣는 내 마음에는 '저토록 불행한 삶을 살면서도 굳이 자식을 낳는 긍정은 어디서 나오는 걸까? 본능인가, 무지인가, 아무 생각이 없는 건가.' 하는 의문이 꼬리에 꼬리를 무는 것이다. 나는 아빠에게는 자식 왜 낳았는지 묻지 않는다. 아빠는 번식이 생의 목적인 사람이고, 그런 아빠는 나를 온전한 삶을 사는 사람으로 여기지 않는다. 반면 내 관점에서 아빠는 손에 휴대폰이 아니라 뗀석기를 쥐어주면 더 잘 어울릴 것 같은, 21세기가 아니라 70만 전의 시대에 더 잘 살 것 같은 그런 인류이다.  "자궁이 없는 남자가 생의 목적을 번식에 두는 것은 정말 가련한 일이다. 하긴 자궁이 없기에 그것을 간절히 바라는 수컷의 운명과 비애."라는 평가받은 후로는 아빠는 내 앞에서는 번식, 번식, 자식, 자식 운운하지도 않는다. 그래 봤자 자궁이 없으니 열등감에 저런다 하는 말이나 듣게 될 뿐이라서. 


태어난 시대마다 그 시대에 해당하는 고난은 분명 존재한다. 전후 세대의 고난이 생존이었다면 내 고난은 생존이 더이상 의미가 없어진 시대를 살아내야만 하는 고난이다. 엄마의 말을 빌리자면 "뼈 빠지게 일해서 쓸데없는 옷 사는데 돈 다쓴다." 는 것이다. 내 식대로 표현하면 권태를 견디는 것! 그래서 몇 번 입지도 않을 우영미 티를 단지 새로운 것을 입어보자는 이유로 구입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 권태가 희석되니까. 이미 명품들은 21fw 신상품을 업데이트했다. 예쁘고 작고 비싼 것들을 감상하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조금 좋아진다. 살까 말까 망설이는 것만으로도 지루함이 희석된다. 내가 좋아하는 소설가나 영화감독의 신작은 1년 2년이 지나도 출시되지 않지만 패션은 성실하게 신상을 만들어 낸다. 패션이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내가 태어나서 지금 여기 이렇게 살아서 죽어가고 있는 이유는 부모가 나를 낳았기 때문이다. 그러니 나는 내 부모 특히 자궁이 있는 엄마에게 물어보는 것이다. 왜 나를 낳았는지, 어떤 비전을 가지고 낳았는지, 자식을 낳을 때 이 아이가 살아가면서 느낄 기쁨과 슬픔, 행복과 불행을 덧셈 뺄셈 해보지는 않았는지 등이 궁금한 것이다. 나는 내 자식을 낳지 않는 것을 택했고 여전히 이 선택이 최선이고 내가 태어나서 잘한 일 중 하나는 자식을 낳지 않은 것인데, 그렇다면 내 부모 특히 엄마는 어떤 생각인지 그것을 엄마에게 물어보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어떻게 그걸 부모에게 묻냐고 하는데 그럼 그걸 누구에게 물어보나? 나는 이것도 물어 보았다. "그런데 엄마, 사람은 태어나면 죽잖아? 어차피 죽을건데 왜 낳아?" 난 정말 진심으로 이것도 궁금해서 물어본 것이다. 


친한 동생에게도 물어봤다. 태어나면 고생이고 어차피 사람은 죽는데 왜 낳는지를... 내가 어떤 생각으로 살아가는지 아는 동생은 "내가 갖고 싶어서. 내 욕심."이라고 말했다. 그게 정답일까? 


내 생각은 그렇다. 생명이 있는 어떤 다른 존재를 단지 내가 갖고 싶어서 낳거나 구해서(구입해서) 키운다는 것은 어딘지 모르게 잔인해 보인다는 것이다. 그게 사람이든 동물이든 물고기든 간에... 그래서 나는 인간을 배우는 고양이, 두 발로 서려고 하는 고양이를 보면 그렇게 슬플 수가 없다. 고양이를 배우는 고양이는 두 발로 서지 않음을 알기에... 누워서 자는 고양이나 개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인간을 배워서 인간처럼 자는 것일 뿐. 고양이를 배우는 고양이는 결코 그렇게 잠자지 않는다. 인간에게 선택당했다는 이유만으로 번식권을 박탈당하는 반려동물도 불쌍하긴 마찬가지다. 동물 중성화 수술이야 말로 가장 잔인한 짓임을 나는 의심치 않는다. 2000년대를 살아가는 인간들은 중성화 수술에 대해서 별 생각이 없지만 후대에는 그것이 무척이나 잔인한 짓이었음을 깨닫게 될 거라고 생각한다. 


부모가 갖고 싶어서 자식을 낳은 건데 그것이 감사해야 할 일인가? 

반려동물을 중성화시키는 것이 정당한 일인가? 그게 동물 애호인가? 

이 두가지는 항상 의문이다. 


나는 나와 같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철학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 

가장 근본적인 것.

자식을 낳아 키우는 동시에 키우는 반려동물을 중성화 시키는 것이 가장 이해가 되지 않는다.


부모 때문에 태어나서 호기롭게 버티며 사는 중이다. 하지만 이 삶을 다른 타인에게 권하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어서 나는 낳지 않고 있다. 자궁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돌보는(바빠서 부모에게 좀 부탁을 했다. 사료는 내가 살 테니 사료 좀 매일 챙겨달라고) 야생 고양이는 10마리가 넘는다. 그 중 2마리는 임신을 해서 며칠 전에 출산을 했다. 나는 그 고양이들을 중성화시킬 생각이 전혀 없다. 고양이는 고양이로 자유롭게 살다 죽을 권리가 있으므로 내가 그들의 번식권을 박탈할 권리도 이유도 없다고 생각한다. 그 고양이들 중에서 주인에게 버림받은 중성화 수술 당한 수컷이 있는데, 야생 고양이들은 그 고양이가 너무 이상하기에 친하게 지내지 않는다. 수컷도 아니고 암컷도 아니고, 그것을 받아들일 수 없는 천연 고양이들인 것이다. 나는 그 중성화 수술 당한 버림받은 고양이가 너무 불쌍하다. 그 고양이가 짓는 불쌍한 표정이 있다. 그 표정은 내가 돌보는 야생 고양이들에게서는 단 한번도 못 적이 없기에 더 슬펐다. 


동물이든 인간이든 번식과 생존에 관한 지난한 이야기들이 지겨워서 나는 토성의 고리의 일부가 되고 싶다. 얼음덩어리... 내게 선택권이 있었다면 나는 토성의 고리를 선택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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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5-09 16:2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1-05-11 05:38   URL
비밀 댓글입니다.
 

자, 이제 내가 권하고 싶은 권태 이야기로 넘어가 보자. 그것은 아무런 할 일이 없거나, 그리 급할 것도 없는 일을 잠시 뒤로 밀쳐 놓을 수 있을 때, 느긋한 행복감에 젖어서 기분 좋게 기지개를 켜며 만족스러운 하품을 해댈 수 있는 그런 권태이다. 때때로 그런 권태에 빠져들 수만 있다면, 당신은 하나도 급할 것 없다는 기분으로 생활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행운은 많은 사람들에게 쉽게 찾아오는 것이 아니다. 그런 권태에 젖어들 수 있기 위해서는 일찌감치 준비를 해놓지 않으면 안 된다. 갖고 싶은 장난감을 갖지 못했기 때문에, 친구가 약속을 어겼기 때문에, 또는 엄마가 저녁 밥상에 시금치를 올려 놓았기 때문에 등, 아이가 칭얼댈 수 있는 이유를 미리미리 제거할 수 있어야만 가능한 일이다. 다행히도 당신은 평범한 일상 생활로 덮여 있는 마을에서 단조로움을 느끼고 있다. 당신은 다락방에 올라가 창문을 열고서, 뭔가 사건이 일어나 주기를 기대하며 밖을 내다본다. 하다못해 집시들을 가득 태운 대형 트레일러라도 지나가 주기를, 그것도 안 되면 오토바이 한 대라도 부-앙 소리를 내며 지나가 주기를 기대한다. 하지만 이런! 오늘도 먼지를 일으키며 지나가는 자동차는 단 한 대도 없다! 자, 다락방의 창문가에서 목을 길게 빼고 기다리는 동안 노근노근한 시간이 흘러간다. 오후가 거의 끝나갈 무렵, 당신은 다락방에서 보낸 평안하고 느긋한 시간을 흡족해하며 몸을 일으킨다. 나는 그런 당신의 태도에서 당신의 건강 상태를 점쳐 볼 수 있다. 당신은 아스팔트로 덮인 당신 집 앞 도로 위에서 먼지가 일어나기를 기다리며 보낼 수 있을 정도로 몸과 마음이 건강한 것이다. 

한가로움을 즐기는 권태에 빠지기 위해 당신은 일단 성공적인 출발을 한 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은 아직까지는 삶에 대해 감사하는 마음으로 충만해 있지 않을 수도 있다. 당신의 삶 속에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것에 대해 경탄할 수 있는 마음이 없는 것이다. 그런 당신은 오후 내내 허리를 굽힌 채 거리를 내려다보던 다락방에서 일단 내려오면, 이번엔 틀림없이 멋진 자연과 흥겨움을 약속해 주는 세상으로 눈을 돌리게 될 것이다. 비디오 테이프 녹화기를 들고 떠나는 로마 여행! 아니 영원한 도시 예루살렘으로 가볼까? (중략)

<느리게 산다는 것의 의미 / 피에르 쌍소>


권태 감별사 피에르 쌍소 옹의 진단에 의하면 나는 몸과 마음이 건강하다!!!!!!!!!!!


내가 나 자신에게 의아해하는 것이 무엇이었냐 하면, 나는 분명히 이 삶이 너무 지겹고 따분하고 태어난 것이 후회되는 그런 마음인데, 제 3자의 눈으로 내가 내 행동을 분석해보면 하루하루 사는 걸 아주 만족스러워하는 것처럼 보인다는 점이다. 권태로 인해 절망에 빠진 사람은 자신을 방치하던가 다른 무언가에 중독되기 십상인데 나는 삶에 대한 나의 불만족스러운 견해와는 달리 엄청나게 성실하게 하루하루를 살아낸다는 점이다. 


사실 나는 자기애가 너무 강해서 나 자신을 훼손할 수가 없는 부류의 인간일 뿐인지도 모른다. 내가 나를 아껴주지 않으면 누가 나를 아껴주나. 이 세상에 태어나짐 당해서 수준 낮은(질서의식이 없는 멍청한 사람들) 사람들과 어쩔 수 없이 공존해야 하는 내가 너무 가엽지 않은가. 그러니 적어도 나 자신만은 나 자신에게 최선을 다해서 잘해주자. 솔직히 나는 그 마음 하나로 사는 중이다. 나를 잘 입히고 잘 먹이고 편하게 해주고 싶고 좋은 것만 사주고 싶다. 나의 자기애는 타인에게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자기애다. 애초에 남이 나에게 잘해주지 않을 거라는 전제하에 어쩔 수 없지 나라도 나에게 잘해주자라는 식이었기에. 내가 그렇게 된 것의 가장 큰 원인은 내 부모가 나에게 잘해주지 않았던 탓이다. 부모가 내가 원하는 것을 해주지 않는 사람들이어서 부모가 안 해주면 내가 나에게 해주면 되지 하면서 독립적으로 살아온 게 지금에 이르렀다. 


자기애가 강한 독립적인 성격이라서 스스로를 잘 챙기고 살고 있음과 동시에 지루하고 따분하다. 피에르 쌍소에 의하면 나는 지금 '느긋한 권태'의 상태인 것 같다. 그래서 그 따분함을 만회하기 위해서 블랙유머를 찾는데, 내가 찾은 블랙유머는 리사이클 섬유나 에코 코튼으로 만든 의류다. 그냥 웃기다. 그런 것들이. 헛되고 부질없음이 그저 웃길 뿐이다. 또다른 블랙유머는 사치품(일반적으로 말하는 명품)이다. 성실한 노동의 댓가로 벌어들인 숫자를 명품이나 사는 골빈 것들이라고 욕하는 수준낮은 인간들의 욕지거리(주로는 동생이 링크해주는 샤넬런 등등의 명품관련 기사들의 댓글에서 본다. 다른 사람의 소비 취향에 그렇게 달려들어 댓글을 달 일인가 싶지만, 그게 나를 둘러싼 인간들의 수준. 아침 출근길 운전을 하면 알게 된다. 나를 둘러싼 인간들의 수준을 제대로 알게 된다. 차로변경위반, 신호위반, 끼어들기, 꼬리물기, 방향지시등 미사용 등등 즉 이 글을 읽는 너도 당연하다는 듯이 어기는 사소한 교통법규 위반들. 그 사소한 것 하나도 지키지 못해서 어기는 게 대다수 인간들의 준법 수준이고, 그것이 내가 인간에게 큰 기대를 하지 않는 이유이기도 하다.)를 들어가면서 그것을 구입해서 일상에서 입고 쓰고 다닐 때 나는 인생이 한없이 하찮고 가소롭게 여겨진다. 



가난한 어린 시절과 젊은 시절을 보낸 아버지는 가훈을 '근검절약'으로 정했고, 초등학교 시절 학교에서 호구 조사하는 통신문을 내어주면 항상 가훈에 근검절약이라고 적어줘서 날 부끄럽게 했었다. 그래서 지금도 나를 보면 돈을 아껴 쓰라고 한다. 그러면 나는 반문을 한다. 내가 돈을 아껴 써야 한다면 내가 새벽에 일어나서 출근을 해야 하는 이유는 도대체 무엇이냐고 질문한다. 나는 아껴 써서는 지금 내가 버는 돈을 다 쓸 수가 없어. 재산을 물려줄 자식도 없는데 돈 모아두는 게 무슨 의미가 있는지 반문하면 아버지는 당황해한다. 나에게 선택지는 딱 2가지다. 일을 그만두고 돈을 아껴 쓰고 살든지, 일을 계속하면서 사치를 하고 살든지. 둘 다 한심하고 따분하긴 매한가지. 



이 한심하고 따분한 상태가 쌍소가 말하는 아이가 칭얼댈 수 이유를 미리미리 제거한 준비된 상태인가 보다. 이 권태의 상태를 어떻게 즐겨야 할지 아직은 잘 모르겠다. 잘 모르겠고 불만족스러운 가장 큰 이유는 '고작 이게 최선인가? 이게 인생의 최정점이란 말인가?' 하는 생각이 너무 많이 들기 때문이다. 아는 동생은 자신이 나처럼 먹고 살 걱정이 없었다면 딩크를 선택하지 않았을 것이라라고 했다. 내가 자식을 낳지 않는 이유는 이 삶이 딱히 누군가에게 권할 정도로 좋지 않기 때문이다. 심지어 나이가 들어보니 청춘도 너무 잠깐이고 노화로 인한 각종 질환은 상상 이상이다. 남은 생을 노화로 인한 지병들을 감내하면서 살아야 하는 걸 생각하면 더더욱 사람으로 태어나서 너무 오래 사는 걸 태어나지 않아도 되는 존재에게 권하고 싶지 않다. 이것은 앞서 태어난 사람으로서의 최선의 도덕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나의 이 따분한 상태는 먹고 싶은 것이 없는 상태와 비슷하다고 볼 수도 있다. 내 동생은 맛있는 걸 먹는 걸 인생의 큰 낙으로 여기는데 그 즐거움의 치명적인 근심거리는 바로 뱃살이다. 그래서 늘 먹으면서도 살찔 것을 걱정하고 또 걱정한다. 그래서 내가 살찔 것에 대한 그 어떤 근심 걱정 없이 초코칩 쿠키를 우적우적 씹어먹고, 초밥 12피스를 다 먹고, 자바칩 프라프치노에 크림을 얻고 토핑도 추가해서 먹는 걸 보면서 "아 부럽다 부럽다 부럽다. 살찔 걱정 없는 사람은 정말 좋겠다 좋겠다 좋겠다." 하는데 사실 절대적으로 먹는 양을 보면 나는 동생의 반에 반도 먹지 않는다는 사실. 



내가 나 자신에게 주겠다는 인생도 사실 그렇게 거창한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내가 예상한 나이에 내가 설계했던 것들을 대충 다 가질 수 있게 되었고, 그 결과 권태의 단계에 이르렀을 따름이다. 영화 <패터슨>의 패터슨을 본받야 할 터. 그것만이 해결책이다. 나는 이 따분함을 극복하고자 인생 성취의 수준을 높인 후 다시 그것을 성취하기 위해 열심히 살 생각은 전혀 없기에. 따분함 다음 단계인 관조로 등업 하기만을 바랄 뿐이다. 




ps. 현재 <느리게 산다는 것의 의미>는 절판, <성공하는 사람들의 7가지 습관>은 스테디셀러로서의 위상을 굳건히 지키고 있다. 대체로 자기 계발서만 읽는 남자애들이 주로 말하던 책 제목을 지난주에 <책읽아웃>에서 김하나 작가가 추천해 주어서 제대로 한 방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김하나 너마저... 야 만다꼬라메!! 목차만 읽어도 내 눈에 이물질이 낀 것 같아서 안약을 넣아야겠다 싶은 책이다. 성공에 관심 없고요, 성공하는 사람들의 습관에도 관심없으므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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