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업성을 고려해 유명 필자의 이름을 걸고 '기획'된 책, 쉬운 책, '위로'가 되는 책에 대한 대중의 강력한 요구가 있다. 이는 기후 위기만큼이나 우려스러운 현상이다. 모든 것이 양극화되는 시대에 생각하는 능력, 지성의 양극화는 절망적이다.

기술의 발전으로 매체가 인간의 문해력을 대신하더니, 이제 팬데믹과 기후 위기까지 가져왔다. 대중의 문해력 저하, 지성의 양극화는 발전주의와 그로 인한 매체의 질주 때문이다. 


***한국 사회에서 고료만으로 생활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 "재미있고 쉽게 써주세요."라는 독자 메일이 예전 같지 않은 부담으로 다가온다. 이런 시대, 어떻게 글쓰기의 의미에 대해서 질문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 그러나 최근 몇 년 사이 국내서든 번역서든 페미니즘 책들은 대개 '추천사'가 대신하고 논쟁은 불가능해졌다. 무조건 "어렵다", "어려우면 대중화가 안 된다."는 말을 매일 듣는다. 


<편협하게 읽고 치열하게 쓴다 / 정희진>


1.

최근 나는 업무 전달 내용을 읽지 않는 사람들, 안내장을 읽지 않는 사람들, 무엇이든 주변 사람에게 물어보는 즉 주변 사람을 네이버나 다음 사용하듯 하는 사람들로 인해 인간의 학습능력과 지능이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더더 심각하게 낮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중이기에 정희진의 신간 <편협하게 읽고 치열하게 쓴다> 머리말을 읽다가 저 문장들에 밑줄을 긋지 않을 수가 없었다. 실제로 형광펜을 들고 밑줄을 좍좍 그었다! 


정희진은 대중이 문해력이 저하되었다고 하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애초에 저하될 문해력도 없었던 사람들이 대다수다. 대개의 사람들은 자신이 이미 알고 있는 것만 읽는다. 그러려면 뭣하러 읽는지 모르겠지만 대체로 그렇다. 모르는 것을 읽어야 하는데 모르는 것은 문자가 아닌 검은색 선 정도로 여기는 듯하다. 알파벳을 사용하는 나라가 아닌 곳에 여행을 가면 본능적으로 알파벳만 읽어(??) 대는 것처럼... 사람들은 익숙하고 편한 것을 건성건성 대충대충 읽고 평소 자기가 생각하던 불만과 불평만을 쏟아낼 뿐이다. 


스마트폰 시대 이전에 나는 이렇게 생각했다. 사람들이 기회가 없어서, 상황이 여의치 않아서 무지한 것이라고... 하지만 지금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애초부터 딱 그 정도의 능력치뿐이었다고... 생각한다. 스마트폰 시대가 되고 추가로 알게 된 인류의 특징은 서로 편을 나눠서 서로를 비방하고 욕하고 싸우다가 서로를 죽이고 그것으로도 부족해서 기어이 전쟁을 하고 마는 것이라는 것이다.  


2.

거듭 말하지만 "내 몸은 나의 것이다."가 아니라 "내 몸이 나다." 우리의 정신이 몸을 소유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몸이 바로 나다. 정신은 몸에 속해 있다. 그런 의미에서 자신의 몸에 대한 생각은 곧 자아관이다. 문제는 이것이다. 지금 한국 사회는 자기 몸을 긍정하기 어려운 사회인데, 과학 기술의 발달로 자아만 팽창한다는 사실이다. 이 사실에 모든 '비극'이 있으며, 동시에 이러한 책이 절실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매체가 메시지다."라는 마셜 매클루언의 유명한 테제는 인간이 만든 도구(매체)가 몸이 확장이라는 사실에서 현대 문명과 몸을 이해하는 데 중요하다. 승용차의 크기, 아파트 평수가 '내가 되었다'. 즉 내가 소유한 물건은 나의 확장이고 자아는 비대해진다. 

<편협하게 읽고 치열하게 쓴다 / 정희진>


며칠 전 나를 절망케 했던 지독한 어깨 통증은 거의 다 사라졌으나, 만성적인 어깨 통증은 해결이 되지 않고 있다. 이번 정희진의 책 1장 제목은 '아픔에게 말 걸기'이다. 이 장은 매 페이지가 밑줄이다. 노화의 문턱을 갓 넘은 내가 노화로 인해 느끼는 각종 불편들로 인해 '몸이 없이 살 수는 없을까?'를 그 이전보다 더 강렬하게 바라는 와중에 정희진은 몸=나라고 한다. 나는 이 말에는 동의가 안되지만, 그래서 밑줄이 많았다. 위에 인용한 문장도 사실 거의 다 동의하지 않는다. 다만 생각해볼 여지는 충분해서 인용한 것이다. 


나는 몸이 주는 통증의 문제를 대체로 돈으로 해결하는 중이다. 매주 어깨 마사지를 받는 것으로는 부족해서 최근에는 침대를 바꿨다. 흰머리카락이 싫어서 염색을 시작했고 염색을 하니 안 그래도 좋지 않은 머릿결인데 더 엉망인 것 같아 클리닉도 시작했다. 할 수 있는 내에서는 보수하면서 이 몸과 남은 생을 살아내야 하는 것이 내 업보다 라고 생각하는 편이다. 태어난 것이 내 인생 최대의 과오라고 생각하는 것처럼. 


나에게 몸은 긍정이나 부정의 차원의 문제가 아니다. 내가 선택할 수 없었던 사실에 대해서 긍정하거나 부정하는 건 성립 자체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시력이 나빠지면 내 시력에 맞는 안경을 쓰고 계속 일상을 유지해 나가는 것처럼, 흰 머리가 생기면 염색을 하고, 어깨가 아프면 어떻게 해서든 덜 아프게 해서 일상을 유지해 나가는 것일 뿐이다 라고 나는 생각한다. 안경도 귀찮고 염색도 귀찮아서 '아 이럴 거면 몸 따위 없이 살면 좋을텐데.'라는 생각에까지 이르렀을 뿐이다. 나는 생각은 최악으로 행동은 최선으로 하는 편인데, 대체로 사람들은 반대인 것 같다. 생각은 최선이지만 행동은 최악인... 


요즘은 수면의 질을 확인하려고 미밴드를 손목에 끼고 잔다. 내 수면 점수는 주로 95점이고 백분율 98%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피곤하고 늘 졸리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는 게 싫어서 사표를 쓰고 싶은 심정이다. <명상록>을 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도 왜 일찍 일어나야 하냐고 반문했다지 않는가. 나는 많은 것을 바라는 게 아니다. 그저 주말처럼 아침7-8시 사이에 일어나서 23시 전에 자는 생활을 하고 싶다. 주중의 나는 5시 반에 일어나고 22시 전에 잔다. 아무튼 잠이라도 잘 자서 다행이다 싶다. 내 몸에게 많은 것을 바라지 말자. 그저 오늘도 어제처럼 잘 자주기만을 바라자. 몸이 없다면 제일 좋겠지만... 


나는 주변 사람에 대해서는 쉽게 포기해버리는 편이고, 나 자신에 대해서는 어떻게든 조금이라도 나은 방향이 있을 것이다라고 생각하고 애쓰는 편이다. 그래서 몇 번 도와줘도 개선의 기미가 없는 사람은 그냥 천성대로 살다 죽겠지 하고 손 뗀다. 마음도 뗀다. 이 책을 읽으면서 정희진 작가에게 "당신은 너무 마음을 쓴다. 그 마음 좀 거두고 편하게 사셔라."라고 말하고 싶었는데 그것이 즐거움이고 쾌락이라고 다른 페이지에 써뒀기에 나는 내 쪽에서 마음을 뗐다. 정희진은 정희진 식으로 즐겁고 아프게 살고 있구나, 그게 나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사회운동(?)하는 사람의 쾌락의 방식이구나 싶었다. 


아무튼 나는 나에게 선택의 기회가 주어진다면 현재 내 몸보다는 우사인 볼트나 장미란의 몸을 택할 것이다. 또한 태어날지 말지 선택할 수 있다면 태어나지 않는 편을 택할 것이다. 세상은 나 같은 천성의 사람이 살아가기엔 너무 하찮다. 타인의 고통에 둔감한 체력 좋고 양심 없고 이해타산에만 머리가 잘 돌아가는 사람이 잘 먹고 잘 사는 세상이라면 너무 하찮아서 거들떠도 보고 싶지가 않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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