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무줄이 몇 개 생겨서 엄마에게 필요하냐고 물었더니 장독에 망을 씌울 때 쓰면 좋다고 했다. 그래서 고무줄을 주었더니 어버이날에 고무줄만 주냐길래, 


엄마, 엄마는 아직도 남이 나를 챙겨주길 바라고 기다리는 거야? 그런 사람은 평생 불행할 수밖에 없어. 나는 타인에게 아무 기대가 없어. 내가 나를 챙겨주면 되지. 그래서 나는 내 생일 선물 내가 사잖아. 


엄마는 "그래도 남한테 받고, 주고 하면 재미있잖아."


나는 "그걸 호기롭게 재미로 주고받는 사람은 거의 못 봤는데, 내가 이만큼 줬으니 너도 이만큼 챙겨줘야지 따지고 또 따지고 하던데. 그리고 엄마, 나는 부모 덕분에 태어난 건지 부모 때문에 태어난 건지 그게 덕분에 인지 때문에 인지 여전히 고민인 사람인데, 어버이날 선물을 챙길 여유가 없어. 그리고 엄마 아빠가 내 덕분에 부모가 되었고, 나같이 훌륭한 딸을 가진 부모가 되었는데 무슨 선물을 더 바라는 거야? 정작 고마워해야 할 사람은 내가 아니라 엄마 아빠라고. 내 딸로 태어나줘서 고맙다고 절을 해도 모자랄 판에."


또 나는 "아, 남이 나를 챙겨주기를 바라는 사람들이 대체로 결혼하고 자식 낳고 하는 거구먼." 했더니 엄마는 "니랑은 대화가 안된다. 어려운 말 하지 마라."라고 했다.


말이 나온 김에 나는 엄마에게 "엄마, 그런데 진짜 자식은 왜 낳는 거야?"라고 했더니 엄마는 "그걸 왜 나한테 묻노?" 그래서 나는 "그럼 그걸 나를 낳은 사람한테 묻지 누구한테 물어? 다른 애 엄마한테 물을 수도 없잖아." 했더니 엄마의 대답은 이랬다. "뭐 아기가 귀엽고 원래 결혼하고 자식을 낳아야 되는 건 줄 알고 낳았지."였다.


그럼 덕분에 아니고 때문에 네.


내가 바란 대답은 사는 게 너무 좋고, 이 세상에서 하루라도 사는 게 너무 축복이고 그래서 이 축복 같은 시간을 누리게 해주고 싶었다 였으나, 그럴 리가 없지. 엄마 아빠의 인생은 축복이라기 보단 그저 하나의 불행과 고통, 생존 전쟁일 따름이었다. 


요즘 아빠는 나만 보면 아빠가 어린 시절 얼마나 힘들고 가난하게 살았었는지를 얘기한다. 아마도 그건 너는 그런 고난을 겪지 않았으니 얼마나 좋으냐, 그러니 행복을 자각하고 긍정적으로 살아라 라는 속 뜻이겠으나, 그걸 듣는 내 마음에는 '저토록 불행한 삶을 살면서도 굳이 자식을 낳는 긍정은 어디서 나오는 걸까? 본능인가, 무지인가, 아무 생각이 없는 건가.' 하는 의문이 꼬리에 꼬리를 무는 것이다. 나는 아빠에게는 자식 왜 낳았는지 묻지 않는다. 아빠는 번식이 생의 목적인 사람이고, 그런 아빠는 나를 온전한 삶을 사는 사람으로 여기지 않는다. 반면 내 관점에서 아빠는 손에 휴대폰이 아니라 뗀석기를 쥐어주면 더 잘 어울릴 것 같은, 21세기가 아니라 70만 전의 시대에 더 잘 살 것 같은 그런 인류이다.  "자궁이 없는 남자가 생의 목적을 번식에 두는 것은 정말 가련한 일이다. 하긴 자궁이 없기에 그것을 간절히 바라는 수컷의 운명과 비애."라는 평가받은 후로는 아빠는 내 앞에서는 번식, 번식, 자식, 자식 운운하지도 않는다. 그래 봤자 자궁이 없으니 열등감에 저런다 하는 말이나 듣게 될 뿐이라서. 


태어난 시대마다 그 시대에 해당하는 고난은 분명 존재한다. 전후 세대의 고난이 생존이었다면 내 고난은 생존이 더이상 의미가 없어진 시대를 살아내야만 하는 고난이다. 엄마의 말을 빌리자면 "뼈 빠지게 일해서 쓸데없는 옷 사는데 돈 다쓴다." 는 것이다. 내 식대로 표현하면 권태를 견디는 것! 그래서 몇 번 입지도 않을 우영미 티를 단지 새로운 것을 입어보자는 이유로 구입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 권태가 희석되니까. 이미 명품들은 21fw 신상품을 업데이트했다. 예쁘고 작고 비싼 것들을 감상하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조금 좋아진다. 살까 말까 망설이는 것만으로도 지루함이 희석된다. 내가 좋아하는 소설가나 영화감독의 신작은 1년 2년이 지나도 출시되지 않지만 패션은 성실하게 신상을 만들어 낸다. 패션이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내가 태어나서 지금 여기 이렇게 살아서 죽어가고 있는 이유는 부모가 나를 낳았기 때문이다. 그러니 나는 내 부모 특히 자궁이 있는 엄마에게 물어보는 것이다. 왜 나를 낳았는지, 어떤 비전을 가지고 낳았는지, 자식을 낳을 때 이 아이가 살아가면서 느낄 기쁨과 슬픔, 행복과 불행을 덧셈 뺄셈 해보지는 않았는지 등이 궁금한 것이다. 나는 내 자식을 낳지 않는 것을 택했고 여전히 이 선택이 최선이고 내가 태어나서 잘한 일 중 하나는 자식을 낳지 않은 것인데, 그렇다면 내 부모 특히 엄마는 어떤 생각인지 그것을 엄마에게 물어보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어떻게 그걸 부모에게 묻냐고 하는데 그럼 그걸 누구에게 물어보나? 나는 이것도 물어 보았다. "그런데 엄마, 사람은 태어나면 죽잖아? 어차피 죽을건데 왜 낳아?" 난 정말 진심으로 이것도 궁금해서 물어본 것이다. 


친한 동생에게도 물어봤다. 태어나면 고생이고 어차피 사람은 죽는데 왜 낳는지를... 내가 어떤 생각으로 살아가는지 아는 동생은 "내가 갖고 싶어서. 내 욕심."이라고 말했다. 그게 정답일까? 


내 생각은 그렇다. 생명이 있는 어떤 다른 존재를 단지 내가 갖고 싶어서 낳거나 구해서(구입해서) 키운다는 것은 어딘지 모르게 잔인해 보인다는 것이다. 그게 사람이든 동물이든 물고기든 간에... 그래서 나는 인간을 배우는 고양이, 두 발로 서려고 하는 고양이를 보면 그렇게 슬플 수가 없다. 고양이를 배우는 고양이는 두 발로 서지 않음을 알기에... 누워서 자는 고양이나 개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인간을 배워서 인간처럼 자는 것일 뿐. 고양이를 배우는 고양이는 결코 그렇게 잠자지 않는다. 인간에게 선택당했다는 이유만으로 번식권을 박탈당하는 반려동물도 불쌍하긴 마찬가지다. 동물 중성화 수술이야 말로 가장 잔인한 짓임을 나는 의심치 않는다. 2000년대를 살아가는 인간들은 중성화 수술에 대해서 별 생각이 없지만 후대에는 그것이 무척이나 잔인한 짓이었음을 깨닫게 될 거라고 생각한다. 


부모가 갖고 싶어서 자식을 낳은 건데 그것이 감사해야 할 일인가? 

반려동물을 중성화시키는 것이 정당한 일인가? 그게 동물 애호인가? 

이 두가지는 항상 의문이다. 


나는 나와 같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철학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 

가장 근본적인 것.

자식을 낳아 키우는 동시에 키우는 반려동물을 중성화 시키는 것이 가장 이해가 되지 않는다.


부모 때문에 태어나서 호기롭게 버티며 사는 중이다. 하지만 이 삶을 다른 타인에게 권하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어서 나는 낳지 않고 있다. 자궁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돌보는(바빠서 부모에게 좀 부탁을 했다. 사료는 내가 살 테니 사료 좀 매일 챙겨달라고) 야생 고양이는 10마리가 넘는다. 그 중 2마리는 임신을 해서 며칠 전에 출산을 했다. 나는 그 고양이들을 중성화시킬 생각이 전혀 없다. 고양이는 고양이로 자유롭게 살다 죽을 권리가 있으므로 내가 그들의 번식권을 박탈할 권리도 이유도 없다고 생각한다. 그 고양이들 중에서 주인에게 버림받은 중성화 수술 당한 수컷이 있는데, 야생 고양이들은 그 고양이가 너무 이상하기에 친하게 지내지 않는다. 수컷도 아니고 암컷도 아니고, 그것을 받아들일 수 없는 천연 고양이들인 것이다. 나는 그 중성화 수술 당한 버림받은 고양이가 너무 불쌍하다. 그 고양이가 짓는 불쌍한 표정이 있다. 그 표정은 내가 돌보는 야생 고양이들에게서는 단 한번도 못 적이 없기에 더 슬펐다. 


동물이든 인간이든 번식과 생존에 관한 지난한 이야기들이 지겨워서 나는 토성의 고리의 일부가 되고 싶다. 얼음덩어리... 내게 선택권이 있었다면 나는 토성의 고리를 선택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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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5-09 16:2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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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5-11 05:3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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