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마다 하는 짧은 고민: 오늘 홈트 하지 말까?

하지만 늘 홈트를 하고 만다. 왜냐하면 홈트를 하지 않는 즐거움은 찰나지만 모닝홈트를 하지 않았다는 자괴감은 하루종일 이어지기 때문이다. 또한 아침에 몸을 풀지 않으면 하루 종일 몸이 좀 더 찌뿌드드한 것 같기 때문. 


오늘 아침, 홈트를 하면서 회사에서 틈이 날 때마다 읽으려고 구비해 둔 김중혁의 신간 영화 에세이 <영화 보고 오는 길에 글을 썼습니다>의 한 감상문을 곱씹었다. '맘에 들지 않아, 맘에 들지 않아, 정말 맘에 들지 않아.'라고 곱씹었다.

모든 사람이 다 극찬하는 영화지만 나는 정말 싫은 영화가 있는데 <플로리다 프로젝트>와 <애프터썬>이다. 싫은 이유는 명확하다. 이 두 영화 속에 등장하는 부모의 무능이 치가 떨리게 싫기 때문.


김중혁은 영화 <애프터썬>에 대해서 뭐라 했을까 궁금해서 읽었는데, 여느 관람자 여느 평론가와 다르지 않다. 


나이가 들면서 누군가의 삶을, 처지를 이해하게 되는 것 같다.

<애프터썬 / 영화 보고 오는 길에 글을 썼습니다 / 김중혁>


정말 이런가? 사람들은 정말 이런가? 나는 정반대인데.


나는 어렸을 때는 내가 어려서, 경험치가 부족해서 모르는 것이 많다고, 어른들의 사리를 모른다고 생각하여 무능한 어른들의 처지를 이해해 줬다. 하지만 내가 나이가 들어보니 그게 아니었다. 그들은 나이와 상관없이 그냥 무능한 것이었다. 영화 <한국이 싫어서>의 주인공 계나의 부모는 돈도 없으면서 18평이 아닌 24평 아파트를 분양받기 위해서 자식들에게도 아파트 구매 비용을 보태라고 한다. 그리고 계나는 "아빠 그냥 18평에서 살면 안 돼?"라고 하소연한다. 이러나저러나 계나는 한국이 싫어서 한국을 떠난다. 내가 말하는 무능은 24평 아파트를 분양받는 식의 무능인 것이다. 왜 능력도 안 되면서 자식에게 손 벌려서까지 24평을 구매하려고 할까? 왜 능력도 안 되면서 자식을 낳아서 자식까지 불행하게 할까? 왜 자식에게 위로받으려고 할까? 왜 자식이 부모의 처지를 이해해워야 하는 것이며, 부모의 처지를 이해하지 못한 자신에 대해서 자책해야 할까? 왜 (시발) <애프터썬>같은 영화가 만들어지는 것이며, 사람들은 왜 이 영화의 폴 메스칼(아빠 역)에게 심하게 감정이입해 버리는 걸까?

최근 뉴스에서 "대통령이 오죽하면 계엄을 했겠나!" 하는 개잡소리를 하는 사람들의 말을 듣고 영화 <애프터썬>이 떠올랐다. 이런 무능한 놈들에게까지 공감을 해줘야 하는 거냐. 


소피는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고 난 후 미안했을 것이다. 아빠의 슬픔이나 고통이나 좌절을 알지 못한 채 자신의 우울함에 대해서만 쫑알거렸던 순간이 부끄러웠을 것이다. '몸에 힘이 없고 그냥 다 지쳐서 가라앉는' 사람이 바로 아빠였는데, 소피를 그걸 눈치채지 못했다. 

<애프터썬 / 영화 보고 오는 길에 글을 썼습니다 / 김중혁>


어째서 이런 말을 할 수 있지? 왜 12살 소피가 30살 먹은 부모의 좌절이나 고통을 눈치채고 배려해야 하지? 소설가 김중혁을 굳이 분류하자면 내 취향은 아님, 좋아하지 않음 쪽이인데. 싫어함으로 분류하게 됨. 


p.s. 이 책은 두께에 비해서 지나치게 세로가 길고 가로가 짧은 직사각형이라서 읽기 매우 불편하다! 싫은 마음이 들고나니 책 만듦새까지도 짜증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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