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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 픽처
더글라스 케네디 지음, 조동섭 옮김 / 밝은세상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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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진정한  '나'는 누구인가. 

 월스트리트의 변호사 '벤'. 그는 사진가가 되고 싶었다. 그래서 자신의 삶에 만족할 수 없었다. 그런 그에게 친구 빌이 말한다.  

"인생은 지금 이대로가 전부야. 자네가 현재의 처지를 싫어하면, 결국 모든 걸 잃게 돼. 내가 장담하는데 자네가 지금 가진 걸 모두 잃게 된다면 아마도 필사적으로 되찾고 싶을 거야. 세상 일이란 게 늘 그러니까." p.119 

 곧이어 벤이 자기가 게리를 죽이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다면. 몇 시간 후에는 그가 알약들을 삼키지 않으면 버텨나갈 수 없을만큼 신물 나 했던 월스트리트의 삶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았다면. 그는 좀 더 신중하게 움직일 수 있었을까. 그러나 그는 미래를 알 수 있는 전지전능한 인물도 아니었고, 연이은 자기의 불행한 현실에 태연할 수 있을만큼 마음의 여유를 갖지도 못한 상태였다. 그는 충동대로 부딪쳤고. 그래서 잃어버렸다. 자신의 삶을.  

 "네가 알던 삶은 이제 다시는 돌아오지 않아." p.136 

 게리로서의 삶이 시작될 때. 한 삶이 마감되고 다른 삶이 시작될 때 그런 것처럼 진통은 꽤나 고통스러운 것이었다. 게리는 자신의 삶에 혼자서 조촐한 이별의 말을 읊조려야 했고, 사랑하는 아이들을 다시는 볼 수 없다는 괴로움에 몸부림쳐야 했다. 아내는 얼마 뒤 벌어질 남편의 죽음을 모른 채 그를 냉대했다. 그녀와의 마지막은 닫힌 문을 통해 이루어졌다. 게리의 사체를 수습하는 일은 변호사생활을 하면서 먹었던 알약들의 숫자 정도는 우스울 정도로 많은 알약들을 필요로 했다. 이제. 게리의 삶이 시작된다.  

 재능. 그 허무한 우연  

"딱 맞는 순간은 절대로 예쑬가 스스로 고를 수 없으며, 그저 우연히 다가올 뿐이다. 사진가는 손가락이 제때에 셔터를 누르도록 하느님께 기도할 수밖에 없다.' p.103-104

사진가에게 우연이 재능이라면 벤이 재능의 실체는 무엇이었을까. 사람들의 눈은 냉정해서, 사진작가가 인위적으로 만든 것인지 아닌지를 꼬집어낸다. 인위적이거나 기교가 들어 가 있을 때 사람들은 '잘 찍었다'고는 말하지만 '대단하다'고는 하지 않는다. 그러나 사진가가 팔리려면 '잘 찍는 것'으로는 안된다. '대단'하거나, '천재'여야 한다. 천재라는 말은 단순하지만 명쾌하다. 하늘에서 내려야하는 것이 아닌가.  

'벤'이 '게리'로서의 삶을 시작하면서 그의 거짓말은 어느 새 '게리'의 것으로 채워져 있었다. 과연 이제 그는 '벤'인가 '게리'인가. '게리'로서의 '벤'이 만나게 된 그 많은 우연들과, 그 때문에 시작된 '천재 작가'라는 명성은 과연 '벤'의 것인가, '게리'의 것인가. 진짜 '게리'가 그 자리에 있었다면 '벤'처럼 못 찍었을까. 아니 원래 그 우연은 '게리'에게 예정되어 있었던 것은 아닐까. 이제 '앤드류 타벨'이 된 '벤'이 그 우연을 만나지 못하고 다시 여러 잡지사에 일거리를 구하는 처지가 되었을 때 다시 이 의심이 고개를 든다. 과연 천재작가 그는 '벤'인가 '게리'인가. 

 도플갱어, 삶은 반복된다.  

"그 즉시 얼른 네 장을 더 인화했다. 모두 앞서의 유령이 나왔다. 이승 너머에 숨은 다른 삶이, 우리 모두의 눈에 보이지 않는 또 다른 자아가 있는 듯 헀다." p.104

애초에 그의 아내 베스가 별 볼 일 없는 사진작가 게리와 부적절한 관계가 된 데에는 그 두 사람의 처지가 비슷한 데에도 이유가 있었다. 그들은 서로 위로할 수 있었다. 아내는 자신이 작가가 되지 못하는 이유가 그녀의 재능에 있는 것이 아니라고 믿었을테고, 게리의 허풍은 그러한 그녀의 공허함을 채워주었을 것이다. 그녀가 남편인 벤에게 게리가 적어도 그 꿈을 포기하지 않고 살아가는 인물이라고 옹호했을 때 그녀 역시 그런 삶을 살고 있음을 내비친 것이다. 이제 앤드류가 된 벤은 한적한 곳에서 아들 잭을 키우며 도시로 일하러 가는 아내를 배웅한다. 사진가의 꿈은 놓치지 않고 있지만 아이를 키우며, 집안을 돌보며, 어디에서도 알아주지 않는 사진을 찍으며 살아가는 삶은 그의 전 아내 베스의 것과 같은 모양이다.

그가 원하지 않았던 월스트리트의 삶. 그가 가졌던 것이지만 다시 돌아오지 않을 삶의 자리는 이제 그의 전 아내 '베스'의 새 남편이 된 앨리엇의 차지가 되었다. 그와 벤의 다른 점이라면 그는 자신의 삶에 만족하고 있으며, 그 나름의 예술가적 취향을 위해 갤러리를 열 정도의 여유도 있다는 점이다. 게리는. 그가 죽음 이후에 꿈꾸었던 명성을 얻었다. 그가 다닐 때에는 그를 모르는 척 했던 대학이었지만, 그의 죽음 이후에 만들어 진 장학금을 이유로 대학에서는 그를 영원히 기억할 것이다.  

 누군가는 모두가 부러워하지만 스스로는 만족하지 못하는 삶을 산다. 또 누군가는 아무도 부러워하지 않지만 성취하지 못한 꿈이더라도 놓치지 않고 산다. 또 운이 좋은 누구가는 스스로 하고 싶은 일을 이루어 모두가 부러워하는 삶을 산다. 그리고 지금 여기. 그 모든 삶을 다 지나가 본 남자 '벤'이 서 있다. 그에게 물어보고 싶다. 당신은 어떤 삶으로 돌아가고 싶은가. 진정 당신이라고 여겨졌던 때는 과연 언제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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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선가 나를 찾는 전화벨이 울리고
신경숙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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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그.쪽.으.로.갈.까?(p.22)
 

날씨가 쌀쌀한 새벽이었으니까 아마 3월이나 4월의 어느 날쯤 되었을 것이다. 그 날 남자친구와 그의 친구들과 함께 어울려 있다가 전화를 받았다. 직장동료였다. 사람들에게 시달려 지쳐있었던 낮의 모습이 마음에 걸려서였는지 제법 늦은 시간이었는데도 나에게 전화를 걸어와 안부를 물었다. 집이 아니라고. 아직 밖에 있다고 했다. 버스도 끊긴 시간인데 어찌 집에 돌아가느냐고. 데려다 줄 사람이 있느냐고. 한쪽 구석에서 쓰러져 잠들어버린 남자친구를 떠올리며 나는 혼자 조심히 가면 된다고. 그때 그가 말했다. 내.가.그.쪽.으.로.갈.까.

가슴과 머리가 함께 울렸다. 남자친구에게 그 말을 들어본 게 언제였더라. 몇 년 간 그는 늘 지쳐있었고 피곤해했다. 내가 있는 쪽으로 그가 올 수 있는 시간도, 여유도 없었다. 그 동안 나는 그의 근처에서 그를 기다리는 일에 익숙해졌다. 그가 술에서 깨기를. 그가 잠에서 깨기를. 기다렸다. 그리고 기다리면 언젠가는. 이라고 생각하며 버텨왔다. 그런데 그 날. 내가 남자친구에게 들어야 할 말을 다른 이에게 듣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에게서 비겁하게 도망쳤다. 사실을 말했어야 했는데 거짓을 말했다. 그에게 삶이 버겁다고 했지만 사실은 그가 버거웠다. 그에게 마지막을 통보했던 그 날. 다급하게 전화한 그가 말했다. 내.가.그.쪽.으.로.갈.게.

소설 속에서 이 문장을 처음 만났을 때. 이미 7년이 지난. 그 날의 일이 마치 안개가 번져와 나를 움직이지 못하게 했다. 다음 장으로 넘어갈 때까지 시간이 걸린 것은 그렇게 그 문장이 나를 놓아주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오.늘.을.잊.지.말.자.(p.157)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 그들과 언제든 자유롭게 만나 하루를 지나갈 수 있다는 것 때문에 시간이 아까울 정도로 소중했던 때가 있었다. 그런 날들이 지나간 밤에는 생각했다. 이런 날이 또 올까. 내가 이 사람들과 늘 함께 할 수 있을까. 꽃이 아름다운 것은 지기 때문이라 했던가. 다시 이렇게 지낼 수 있는 그 날은 또 오지 않을 것이다. 함께 했던 이 사람들도 언젠가는 흩어질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며 마음속에 위안삼았던 말이었다. 대신. 잊.지.말.자.고.

안타깝게도 잊혀진다. 그 찬란했던 하루하루는. 기억은 빛바랜 사진보다도 부정확하다. 하지만 어떤 말들은. 사소하게 지나가버렸던 말이었음에도 마음을 기억하게 했다. 얼마나 행복했었는지. 그 시간들이 얼마나 소중했었는지. 내가 그를 얼마나 사랑했었는지. 

소설 속의 이 말들은 내 20대를 함께 몰아왔다. 어느 앨범에 어떤 사진이 끼워져 있는지 알지도 못한 채 무작정 꺼내 든 앨범에서. 왜 찍었는지 알 수도 없는 사진 한 장을 발견하고, 그 사진에 담긴 누군가의 마음을 한참이나 지난 그 때에야 눈치 챌 때처럼. 그래서 무심코 지나 온 사람들과의 시간이. 까맣게 잊혀졌던 약속들이 한꺼번에 내 주변을 가득 메우게 되는 그 때처럼.

윤과 단이. 명서와 미루가. 그들의 청춘이. 사랑이. 죽음이. 내 삶의 어느 부분인것만 같았다. 그리고 실제로 그들의 하루는 내 과거의 어느 하루를 닮아 있었다. 친구들과 어울려 서울 중심가를 이리저리 배회하던 날도. 남산 길을 오르다가 앞선 이의 등이 안쓰러워 따라가 손을 잡아주었던 날도. 낯 선 장소에서 익숙한 사람을 갑자기 만나게 되었던 날도. 신발을 잃어버리고 맨 발로 집으로 돌아가야 했던 날도. 가까웠던 이의 죽음에 책임감을 느끼고 괴로워했던 날도. 삶에의 우울감으로 나를 찾는 전화벨소리를 뒤로하고 낮부터 깜깜한 방 안에 홀로 누워 꿈을 헤매던 날도. 있었다.

신경숙이 가진 서사의 힘은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싶다. 읽다보면 나를 되돌아보게 되는. 소설을 ‘나’ 자신과 공유하게 하는 힘 말이다. 그래서 글을 읽고 난 후 이야기를 떠올려 볼 때면 자연스레 나도 함께 떠올리게 되는 힘. 반대로 나를 되돌아볼 때면 자연스레 소설 속 그들의 이야기를 떠올리게 하는 힘.

 

우.리.는.숨.을.쉰.다.(p.89)

윤교수는 청춘을 지나온 사람이다. 네 청춘들 못지 않게 우여곡절을 겪은 그는 강단을 떠나면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마지막 한 모금의 숨이 남아 있는 그 순간까지 이 세계 속에서 사랑하고 투쟁하고 분노하고 슬퍼하며 살아 있으라.(p.291)’고.

숨을 쉰다. 들이쉬기도 하고 내쉬기도 해야 숨이 쉬어진다. 살아있을 수 있다. 숨이 찰 때는들이 쉬는 일이 내쉬는 것보다 빨라서 내가 들이쉬기만 하는 것 같을 때도 있고, 한숨이 나올 때는 내가 숨을 들이쉬었는지도 모르게 푹푹 내쉬기만 하는 것 같을 때도 있다. 그러나 우리가 살아있다면 반드시 두 가지 일 모두를 하고 있었을 것이다.

윤교수는 이들에게 우.리.는.숨.을.쉰.다.는 강의노트를 주면서 수업을 시작했다. 그리고 마칠 때는 여전히 살아 있으라고 충고했다. 그의 이 마음은 작가가 이 글을 읽는 젊은이들이 비관보다 낙관에 손을 들어 주기를 바라는 마음과도 일치한다고 생각한다. 들이쉴 때가 있으면 내쉴 때가 오겠지. 지금은 헐떡이는 것 같지만 어느 때는 숨을 고르게 될 것이라는. 그리고 그 때가 될 때까지 숨쉬는 일을. 사랑하고 투쟁하고 분노하고 슬퍼하는 일을. 계속하라는. 그런 격려를 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청춘을 포기하지 말라는 격려 말이다.

 

이.세.상.의.단.하.나.의.별.빛.들.이.되.게.(p.354)

얼마 전 여행을 떠난 날 밤에 하늘을 올려다보며 시골인데도 별이 별로 없다고 무심코 말했는데 함께 간 이가 대답했다. 보이지 않을 뿐이지 별은 여전히 많다고. 별은 우리에게 보이지 않을 때도 보일 때도 여전히 존재한다. 에밀리 디킨슨의 시는 죽음 이후에서야 발표되었지만 네 젊은이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그리고 이미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었지만 이들의 청춘에 언제나 함께 등장했다. 우리는 누군가에게 어느 때든, 어떤 방식으로든 하나의 별빛이다. 그들이 기억해준다면 반짝이는 별빛일테지만 기억되지 않는다고 해도 별이 아닌 것은 아닐테니 언젠가 반짝이게 될 것이다. 그러니 인생 어디쯤 위치해있든지 내가 별이 되어줄 누군가를 위해 숨을 쉬며 살아가보는 것이 어떨까. 더 반짝이려고 노력하면서 그래서 내 별빛을 바라는 이들에게 기쁨이 되기를 기대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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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그네 (양장)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31
헤르타 뮐러 지음, 박경희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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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죽음마저 먹게 만드는 수용소

‘수용소는 실용적인 세계다 수치심과 두려움은 사치다.’ p.168

‘삶의 질’을 위해서는 필요한 것이 많다. 그러나 ‘삶’ 그 자체가 필요로 하는 것은 적다. 우리가 ‘삶’ 이하로 떨어지는 순간은 바로 이 최소한이 충족되지 않았을 때다. 수용소 생활은 바로 이 순간. 삶의 ‘질’을 추구하던 인간이 ‘삶’ 이하로 떨어지는 그 순간의 지속이다. 그들에게는 ‘삶’이 목적이자 수단이다. ‘삶’ 이외의 것은 없다. 그들은 모두 ‘죽음’가까이에 있지만 아무도 ‘죽음’이후를 생각하지는 않는다. 누군가의 죽음 이후에 벌어질 자신들의 ‘삶’의 지속을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죽은 시체를 보고 두려워하기 보다는 그에게서 가져와야 할 물건들을 생각한다. 이제 그에게는 필요 없어진 옷과 신발. 적으나마 가지고 있었던 소지품들. 혹시 저녁에 먹으려고 남겨 둔 빵의 소재. 그것들이 ‘죽음’을 정리하는 그들의 의식이다. 배고픔은 죽음마저 먹어버린다.

삶을 지속시키는 기억. 그리고 언어.

'내 모든 것이 나와 더불어 간다. 내가 가진 것은 모두 가지고 갔다.‘ p.9

수용소에 가기 위해 짐을 싸면서부터 시작된 물건들에 대한 사고는 수용소시절에도, 수용소 생활이 끝난 이후에도 계속된다. 아니 사소한 물건들을 생각하는 일은 수용소 시절에 오히려 더 심해진다. 이제는 물건이 아니라 단어로 존재하기 때문에 더더욱 의식 속에 짐을 꾸리며 한 때 그들이 ‘내 것’이었음을 확인한다. 언어는 사물의 기호일 뿐이지만 사물이 존재하지 않으면 사라진다. 하지만 때로는 존재하지 않는 사물이 언어로 남아있기도 한다. ‘용’이나 ‘봉황’처럼. 상상속의 무엇들도 분명 이름이 있다. 수용소의 레오에게는 이 물건들이 존재하지 않으나 이름만 남은 ‘용’이나 ‘봉황’같은 것이었다. 그것을 잡고 있어야했다. 그래야 ‘삶’을 기억해 낼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레오는 ‘호텔’이라는 단어를 아직 기억하고 있는 이발사에게 반발하면서도 역시 그런 명칭들을 기억해야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상상하는 것을 언어로 가지고 있을 수 있었기 때문에 레오는 살아남았는지도 모른다. 인간이 가장 최악의 상황에서 살아남기 위해 가져야 할 것이 희망이라면 희망도 일종의 상상일테니까. 그리고 그 상상을 지속시키는 힘은 언어로부터 비롯되었을 테니까. 이 작품이 시적이라면 그 또한 레오가 살아남기 위한 처절한 몸부림 중에 하나로 보아야 한다. 그는 언어를 통해 살아남았다. 어둠 속에서 빛을 말함으로써 살아남은 것이다. 그가 떠나던 날 할머니가 ‘너는 돌아올거야’라는 말을 그의 의식의 짐 속에 넣어주었듯이. 그는 매 순간 이 말을 부여잡았다. 언어로 재생할 수 있는 과거의 최대한을 기억해냈다. 그리고 ‘한 번은 나도 비단길 밟을 날이 오겠지’라고 자신을 위로하게 되었다.

결국 올라감과 내려감이 반복되는 ‘숨그네’

'작은 보물은 나 여기 있다라고 적힌 것들이야.
그것보다 조금 큰 보물은 아직 기억나니라고 적힌 것들이고.
그러나 무엇보다 큰 보물은 나 거기 있었다라고 적힌 것들이지.‘’ - p.308, 327

가죽 각반을 팔아 먹을 것을 무엇이든 장만하려고 장터에 나갔던 어느 날. 레오는 10루블을 손에 쥔다. 그것으로 먹고 싶은 것을 닥치는 대로 사먹는다. 돌아가면서 먹을 것까지 챙긴다. 배부르고 남는다. 문명에 가까운 그 기꺼움. 그러나 배고픔이 사라졌다고 생각한 그 때. 그 비싼 것들을 순식간에 토해버리고 난 다음 그는 ‘뭐하러 장터에 가야 하나, 나를 안전하게 가둬두는 수용소가 있는데.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되는 곳은 내가 속하지 않는 곳뿐이다.-p.161’ 라고 되뇌인다. 장터에 가서 기를 쓰고 음식을 먹어봤자, 배고픈 천사는 떠나지 않는다. 굶주림에 익숙한 위장은 주인의 욕망을 배신했다. 절대영도. 어느 것도 예외 없는 곳. 수용소를 그렇게 정의한 이유는 한 순간의 행운을. 단 한차례의 배부름을 허용하지 않는 자신의 위장을 향해 말한 것인지도 모른다. 오년의 세월을 함께 한 이 배고픈 천사는 그 이후에도 그를 떠나지 않는다. 배가 불러도, 따뜻한 이부자리를 얻어도, 소개받아 다니게 된 상자공장에서도. 그가 수용소에서 고향을 잊지 않았듯. 고향에서도 수용소는 잊히지 않았다. 수용소 생활은 머리가 아니라 몸이 기억했다. 수용소 생활이 끝났어도 비극은 끝나지 않는다. 레오는 ‘무엇보다 큰 보물’을 얻지 못했다. 거기 있었다고 해야 하는 데 아직 거기에 살고 있으며 여전히 기억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의 숨그네는 올라갔다 내려오는 일을 반복하면서 삶을 지속시키는 동시에 끊임없이 그를 올려놓았다가 또 끌어내렸다가 할 것이다.

‘숨그네가 공중을 한 바퀴 돌고, 나는 헉헉거린다.’ p.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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