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선가 나를 찾는 전화벨이 울리고
신경숙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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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그.쪽.으.로.갈.까?(p.22)
 

날씨가 쌀쌀한 새벽이었으니까 아마 3월이나 4월의 어느 날쯤 되었을 것이다. 그 날 남자친구와 그의 친구들과 함께 어울려 있다가 전화를 받았다. 직장동료였다. 사람들에게 시달려 지쳐있었던 낮의 모습이 마음에 걸려서였는지 제법 늦은 시간이었는데도 나에게 전화를 걸어와 안부를 물었다. 집이 아니라고. 아직 밖에 있다고 했다. 버스도 끊긴 시간인데 어찌 집에 돌아가느냐고. 데려다 줄 사람이 있느냐고. 한쪽 구석에서 쓰러져 잠들어버린 남자친구를 떠올리며 나는 혼자 조심히 가면 된다고. 그때 그가 말했다. 내.가.그.쪽.으.로.갈.까.

가슴과 머리가 함께 울렸다. 남자친구에게 그 말을 들어본 게 언제였더라. 몇 년 간 그는 늘 지쳐있었고 피곤해했다. 내가 있는 쪽으로 그가 올 수 있는 시간도, 여유도 없었다. 그 동안 나는 그의 근처에서 그를 기다리는 일에 익숙해졌다. 그가 술에서 깨기를. 그가 잠에서 깨기를. 기다렸다. 그리고 기다리면 언젠가는. 이라고 생각하며 버텨왔다. 그런데 그 날. 내가 남자친구에게 들어야 할 말을 다른 이에게 듣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에게서 비겁하게 도망쳤다. 사실을 말했어야 했는데 거짓을 말했다. 그에게 삶이 버겁다고 했지만 사실은 그가 버거웠다. 그에게 마지막을 통보했던 그 날. 다급하게 전화한 그가 말했다. 내.가.그.쪽.으.로.갈.게.

소설 속에서 이 문장을 처음 만났을 때. 이미 7년이 지난. 그 날의 일이 마치 안개가 번져와 나를 움직이지 못하게 했다. 다음 장으로 넘어갈 때까지 시간이 걸린 것은 그렇게 그 문장이 나를 놓아주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오.늘.을.잊.지.말.자.(p.157)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 그들과 언제든 자유롭게 만나 하루를 지나갈 수 있다는 것 때문에 시간이 아까울 정도로 소중했던 때가 있었다. 그런 날들이 지나간 밤에는 생각했다. 이런 날이 또 올까. 내가 이 사람들과 늘 함께 할 수 있을까. 꽃이 아름다운 것은 지기 때문이라 했던가. 다시 이렇게 지낼 수 있는 그 날은 또 오지 않을 것이다. 함께 했던 이 사람들도 언젠가는 흩어질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며 마음속에 위안삼았던 말이었다. 대신. 잊.지.말.자.고.

안타깝게도 잊혀진다. 그 찬란했던 하루하루는. 기억은 빛바랜 사진보다도 부정확하다. 하지만 어떤 말들은. 사소하게 지나가버렸던 말이었음에도 마음을 기억하게 했다. 얼마나 행복했었는지. 그 시간들이 얼마나 소중했었는지. 내가 그를 얼마나 사랑했었는지. 

소설 속의 이 말들은 내 20대를 함께 몰아왔다. 어느 앨범에 어떤 사진이 끼워져 있는지 알지도 못한 채 무작정 꺼내 든 앨범에서. 왜 찍었는지 알 수도 없는 사진 한 장을 발견하고, 그 사진에 담긴 누군가의 마음을 한참이나 지난 그 때에야 눈치 챌 때처럼. 그래서 무심코 지나 온 사람들과의 시간이. 까맣게 잊혀졌던 약속들이 한꺼번에 내 주변을 가득 메우게 되는 그 때처럼.

윤과 단이. 명서와 미루가. 그들의 청춘이. 사랑이. 죽음이. 내 삶의 어느 부분인것만 같았다. 그리고 실제로 그들의 하루는 내 과거의 어느 하루를 닮아 있었다. 친구들과 어울려 서울 중심가를 이리저리 배회하던 날도. 남산 길을 오르다가 앞선 이의 등이 안쓰러워 따라가 손을 잡아주었던 날도. 낯 선 장소에서 익숙한 사람을 갑자기 만나게 되었던 날도. 신발을 잃어버리고 맨 발로 집으로 돌아가야 했던 날도. 가까웠던 이의 죽음에 책임감을 느끼고 괴로워했던 날도. 삶에의 우울감으로 나를 찾는 전화벨소리를 뒤로하고 낮부터 깜깜한 방 안에 홀로 누워 꿈을 헤매던 날도. 있었다.

신경숙이 가진 서사의 힘은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싶다. 읽다보면 나를 되돌아보게 되는. 소설을 ‘나’ 자신과 공유하게 하는 힘 말이다. 그래서 글을 읽고 난 후 이야기를 떠올려 볼 때면 자연스레 나도 함께 떠올리게 되는 힘. 반대로 나를 되돌아볼 때면 자연스레 소설 속 그들의 이야기를 떠올리게 하는 힘.

 

우.리.는.숨.을.쉰.다.(p.89)

윤교수는 청춘을 지나온 사람이다. 네 청춘들 못지 않게 우여곡절을 겪은 그는 강단을 떠나면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마지막 한 모금의 숨이 남아 있는 그 순간까지 이 세계 속에서 사랑하고 투쟁하고 분노하고 슬퍼하며 살아 있으라.(p.291)’고.

숨을 쉰다. 들이쉬기도 하고 내쉬기도 해야 숨이 쉬어진다. 살아있을 수 있다. 숨이 찰 때는들이 쉬는 일이 내쉬는 것보다 빨라서 내가 들이쉬기만 하는 것 같을 때도 있고, 한숨이 나올 때는 내가 숨을 들이쉬었는지도 모르게 푹푹 내쉬기만 하는 것 같을 때도 있다. 그러나 우리가 살아있다면 반드시 두 가지 일 모두를 하고 있었을 것이다.

윤교수는 이들에게 우.리.는.숨.을.쉰.다.는 강의노트를 주면서 수업을 시작했다. 그리고 마칠 때는 여전히 살아 있으라고 충고했다. 그의 이 마음은 작가가 이 글을 읽는 젊은이들이 비관보다 낙관에 손을 들어 주기를 바라는 마음과도 일치한다고 생각한다. 들이쉴 때가 있으면 내쉴 때가 오겠지. 지금은 헐떡이는 것 같지만 어느 때는 숨을 고르게 될 것이라는. 그리고 그 때가 될 때까지 숨쉬는 일을. 사랑하고 투쟁하고 분노하고 슬퍼하는 일을. 계속하라는. 그런 격려를 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청춘을 포기하지 말라는 격려 말이다.

 

이.세.상.의.단.하.나.의.별.빛.들.이.되.게.(p.354)

얼마 전 여행을 떠난 날 밤에 하늘을 올려다보며 시골인데도 별이 별로 없다고 무심코 말했는데 함께 간 이가 대답했다. 보이지 않을 뿐이지 별은 여전히 많다고. 별은 우리에게 보이지 않을 때도 보일 때도 여전히 존재한다. 에밀리 디킨슨의 시는 죽음 이후에서야 발표되었지만 네 젊은이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그리고 이미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었지만 이들의 청춘에 언제나 함께 등장했다. 우리는 누군가에게 어느 때든, 어떤 방식으로든 하나의 별빛이다. 그들이 기억해준다면 반짝이는 별빛일테지만 기억되지 않는다고 해도 별이 아닌 것은 아닐테니 언젠가 반짝이게 될 것이다. 그러니 인생 어디쯤 위치해있든지 내가 별이 되어줄 누군가를 위해 숨을 쉬며 살아가보는 것이 어떨까. 더 반짝이려고 노력하면서 그래서 내 별빛을 바라는 이들에게 기쁨이 되기를 기대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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