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우여 나를 아는 모든 나여.
나를 모르는 모든 나여.
부탁이 있네. 나를, 지금 이 순간의 나를 영원히 잊지 말아주게.
그리고 바라네. 그대들 소중한 추억의 서재에 간직하여 주게.
뇌성번개가 이 작은 육신을 태우고 꺽어버린다 해도, 하늘이 나에게만
꺼져 내려온다 해도 그대 소중한 추억에 간직된 나는 조금도 두렵지 않을 걸세.
그대들이 아는 그대 영역의 일부인 나... 그대들이 아는 그대들의 전부의 일부인 나.
힘에 겨워 힘에 겨워 굴리다 못 굴린, 그리고 또다시 굴려야 할 덩이를
나의 나인 그대들에게 맡긴 채 잠시 다니러 간다네. 잠시 쉬러 간다네.
어쩌면 반지의 무게와 총칼의 질타에 구애되지 않을 지도 모르는, 않기를 바라는
이 순간 이후의 세계에서 내 생애 못다 굴린 덩이를, 덩이를 목적지까지
굴리려 하네. 이 순간 이후의 세계에서 또다시 추방당한다 하더라도,
굴리는데, 굴리는데 도울 수만 있다면, 이룰 수만 있다면..
<전태일[내 죽음을 헛되이 말라] 돌베게, 1988, 151-152>
....
나는 돌아가야 한다. 꼭 돌아가야 한다.
불쌍한 내 형제의 곁으로,내 마음의 고향으로, 내 이상의 전부인
평화시장의 어린 동심 곁으로. 생(生)을 두고 맹세한 내가, 그 많은 시간과 공상 속에서,
내가 돌보지 않으면 아니 될 나약한 생명체들.
나를 버리고, 나를 죽이고 가마. 조금만 참고 견디어라. 너희들의 곁을
떠나지 않기 위하여 나약한 나를 다 바치마. 너희들은 내 마음의 고향이로다.
오늘은 토요일, 8월 둘째 토요일. 내 마음에 결단을 내린 이 날. 무고한 생명체들이
시들고 있는 이 때에 한방울의 이슬이 되기 위하여 발버둥 치오니,
하느님, 긍휼과 자비를 베풀어 주시옵소서.
<전태일[내 죽음을 헛되이 말라] 돌베게, 172-173>
역사는 바로 오늘 현재 우리 앞에 놓여있는 과제가 무엇이며 나아갈 방향이 어디인지를 가늠하는 생생한 현실인식입니다. 오늘의 삶과 사회를 직시하고 내일의 변화와 대안을 찾기 위한 항해의 나침반이자 지도입니다. 역사는 기억을 뛰어넘는 성찰이며, 지난날을 오늘의 눈으로 다시 보는 동시에 오늘을 재인식하는 진리 탐구의 망원경입니다.
삶이 무엇인지, 우리사회는 어디로 가야 되는지, 전태일의 거울이 너무나 절실한 때입니다. 전태일의 투쟁에 앞선 전태일의 사랑과 평화가 더욱더 절실한 때입니다.
<녹색평론,2005 11-12월 4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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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란 말이 범람하는 시대에 왜 전태일이 말하는 그 사랑은 진부하지도, 신파적이지도 않고
오히려 새로우며 감동을 주는가?
그것은 그의 '사랑'이 '나의 나인 너'에게 끊임없는 연민과 자비를 일깨우며 묵묵히 실천했고
현실의 차디찬 벽을 넘어 함께 인간답게 살기를 바랬던 한 밑바닥 사내의 소박하지만 너무나도
거대한 꿈과 희망, 그리고 비젼이 숨겨진 말이기 때문일 것이다.
모두들 힘들다고 비명을 지른다.
이 순간, 뭔가에 홀려 하루의 쳇바퀴를 돌리고 있는 이 순간.
삶의 나침반을 잊어버리고 흘러가는 이 순간.
1970년에 죽은 밑바닥 사내의 형형한 눈빛이, "내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마라."라는 그의 외침이
다시금 우리가 살고 싶은 세상의 나침반이 되어주길,
잠들었던 내 자신을 깨우는 사자후가 되길
간절히 빌며...
(어리광은 이제 그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