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ritten by 고신의대 정신과 박시성 선생님.

언제나 5월은 신선하고 풋풋한 초록의 시간이다. 청춘이 그 속살을 드러내며 꾸어 오던 꿈을 실현하는 계절이기도 하다.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의 2003년 영화 <몽상가들>은 1968년 5월의 파리, 전복과 혁명을 꿈꾸는 청춘의 몽상을 그 시대의 향수어린 기억들과 함께 채우고 있다. 이미 추억이 되어버린 68세대의 기운을 되살리고 싶어 하는 것 같기도 하고, 좌파 감독 파졸리니를 시샘하며 만든 자신의 걸작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 이후 미국에 진출하여 만든 영화들이 크게 호평을 얻지 못한데 반하여 자신의 출발점을 되새기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반전과 반문화 운동으로 기존 체제와 관습에 도전하는 물결이 세계를 휩쓸던 당시의 무모한 국가 권력, 경제적인 모순, 억압적인 제도와 규범들로부터 벗어나 자유를 얻고자했던 젊은이들의 이야기인 영화 <몽상가들>은 육체의 욕망을 거침없이 묘사하는 동안 새로운 가치에 대해 발언하면서 영화를 통해 꿈꾸는 젊은이들의 위태로운 시절을 그려내고 있다.

<몽상가들>은 영화광들로선 잊지 못할 역사, 시네마테크 프랑세즈의 창설자인 앙리 랑글로와를 해임하고 시네마테크를 폐관하는데 항의하는 젊은이들 간의 만남으로 시작한다. 그곳에 모인 이들은 소위 영화광들이다. 그들은 영화를 청춘의 중심에 두고 영화를 통해 의사소통하며 서로의 감정을 나눈다. <몽상가들>에는 누벨바그를 주축으로 하는 영화사적 영화들이 때로는 청춘들의 입을 통해, 행위를 통해 보이고 들려진다. 프랑소와 트뤼포의 <400번의 구타>처럼 사운드트랙의 음악으로, 장 뤽 고다르의 <네멋대로 해라>처럼 상상과 함께 교차하는 화면으로, 또는 로베르 브레송과 하워드 혹스 영화의 이미지나 찰리 채플린과 버스터 키튼에 관한 논쟁을 통해 당대의 영화들은 짜릿하고 아련한 기억으로 테오와 이자벨, 매튜 세 젊은이를 감싼다. 누벨바그를 비롯하여 영화사에 굵직한 흔적을 남긴 영화들이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새로운 세계를 창제해 왔던 것처럼, 그들에게 영화는 새로운 가치의 모색이자 현실에 대한 저항이다. 곳곳에 배치된 마오쩌뚱의 포스터, 제니스 조플린의 노래, 지미 핸드릭스의 기타선율은 그들의 또 다른 몽상이다.

영화를 욕망하는 그들에게 영화의 소비는 욕망의 실현이다. 생동력 강한 청춘의 육체는 모든 관습을 벗고 성적 탐닉에 몰입한다. 이자벨은 영화 <푸른 천사>를 알아맞히지 못한 벌칙으로 테오에게 <푸른 천사>의 포스터 앞에서 자위행위를 하도록 요구하고, 테오는 <스카페이스>를 알아맞히지 못한 매튜에게 자신의 연인(?)인 이자벨과의 섹스를 요구한다. 그들은 벗은 몸으로 함께 목욕하고, 함께 잠들기도 하며, 쓰레기통을 뒤져서 찾은 바나나 하나를 세 갈래로 나누어 먹기도 한다. 그들의 억압되지 않은 자유혼은 거칠 것 없지만, 젊은 날의 미숙함 만큼 위태롭다.

적나라한 신체의 이미지는 싸구려 성적 호기심 많은 관객들에게는 눈요깃거리로만 다가갈 게 뻔하다. 하지만 영화예술을 표방하는 수많은 영화들의 신체 노출 수위를 감안하면 <몽상가들>의 노출 자체는 그다지 놀랄 만 한 것도 아니다. 더욱이 세 젊은이의 육체를 선정적인 시각으로만 다루지는 않는다. 육체는 관능적이지만 순수하고, 성숙한 동시에 청춘이 지닌 떨리는 불안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것이다. 카메라는 그들의 육체 앞에서 부끄러워하거나 비켜서지 않는다. 대신 그들의 육체를 리듬 있게 그리고 대담하게 포착한다. 육체의 은밀한 부분을 시점쇼트로 훑기도 하고, 마치 한 육체의 세 얼굴을 보듯 앵글을 잡기도 하며, 뒤엉킨 세 육체를 부감쇼트로 내려다보기도 하면서.

그들이 함께 지내는 아파트는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에서의 빈 아파트를 연상시킨다. 그곳은 성적 환상 또는 영화적 몽상이 실현되는 공간이다. 외부와는 분리된, 자유로운 내부의 세계이며, 어떤 억압적인 권력도, 허위적인 포장도 없는 (원작 소설의 제목처럼) ‘성스럽게 순수한’ 공간이다. 그들은 어떤 타자로부터도, 아파트의 주인인 부모로부터도 방해받지 않는다. 법과 규칙의 바깥이며, 관습의 지배로부터 벗어난 장소이다. 라깡을 빌면, 진정한 향락이 있는 곳이며, 그 향락의 주체로서 존재할 수 있는 공간이다.

매력적인 세 배우는 건강한 육체와 생동하는 젊음, 개성 가득한 눈빛과 몸짓으로 68세대를 표현하는데 성공하였다. 그들은 진정 68세대의 혼을 이어 받은 듯 연기에 혼을 듬뿍 담는다. 이들에게 담긴 인물들을 통해 감독인 베르톨루치는 자신의 세대를 아름다운 모습으로 바라보고 있다. 배우들의 연기는 감독의 관점에 동의하게 할 만 하다. 그러나 달리 보면 감독은 68세대를 위로하려거나 과장되게 칭송하는 것처럼 보인다. 영화에의 모방과 동화는 영화를 자신의 것으로 보이게 오인시키지만, 욕망이란 근본적으로 타자의 것인 만큼 영화를 욕망했던 이들에게 영화 역시 타자의 것에 불과하지 않는가. 그들의 흔들리는 주체성은 청춘의 당연한 과제이며, 성적인 실험은 무모한 저항에 다름 아닐 수도 있다. 영화라는 예술로 안위하며 그들의 일탈에 아슬아슬하게 혼을 부여하고 있긴 하지만.

그들이 아파트 안에서 성적 탐닉을 즐기는 동안 밖에서는 혁명의 기운이 무르익는다. 이제 ‘상상력에게 권력을’이라는 68혁명의 구호는 세 젊은이의 몽상적인 유희에 힘을 싣는다. 청춘이라는 존재적인 위태로움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죽어가는 상상력에 대한 은유였을까. 이자벨이 가스를 틀어 잠든 두 청년과 함께 자살을 시도할 즈음 밖에서 날아들어 유리창을 깨버린 돌은 그들에게 삶을 다시금 제공하는 원인이 된다. 죽음으로 향하던 몽상에서 깨어난 이자벨과 테오는 밖으로 뛰쳐나가 군중들의 대열에 합류하고, 이들을 따라 나선 매튜는 미국인다운 충고를 던진다. 이것도 폭력일 뿐이라고.

실패한 혁명의 한가운데서 자신을 던진 청춘들을 향해 베르톨루치는 위로 가득 담긴 시선을 던진다. 경찰의 진압 속에서도 자신의 위치를 굽히지 않는 테오와 이자벨. 그들을 배경으로 에디트 피아프의 노래 ‘난 후회하지 않아요’가 흐른다. 감독은 지금의 젊은이들에게 당시의 에너지를 전해주고 싶다고 밝혔다지만, 이제는 노장이 된 베르톨루치가 자신의 세대에게 건네는 순진한 자의식처럼 들린다. 상상력과 혁명적인 에너지야말로 가치를 변화시키는 수단이라고 말하는 유치함을 벗어 던진다면, 권력의 유혹이나 힘의 여부 또는 타자의 시선에 상관하지 않는 몽상이야말로 다시금 변화하는 가치를 창출할 잠재력이라는 사실을 인지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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