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 시를 읽고 긴 글을 쓰다 10-11 [류시화]  

10

바쇼가 썼다고 전해지는 '방랑 규칙'을 읽으면 이들 하이쿠 시인들의 삶이 어떠했나를 짐작할 수 있다. 그들의 사람은 시인의 그것을 뛰어넘어 있었다. 그들은 스스로 선택한 고독한 삶을 살았고, 끝없이 방랑했다.

같은 여인숙에서 두 번 잠을 자지 말고, 아직 덥혀지지 않은 이불을 청하라.

몸에 칼을 지니고 다니지 말라. 살아 있는 것을 죽이지 말라. 같은 하늘 아래 있는 어떤 것, 같은 땅 위를 걷는 어떤 것도 해치지 말라.

옷과 일용품은 꼭 필요한 것 외에는 소유하지 말라.

물고기든 새 종류든 동물이든 육식을 하지 말라. 특별한 음식이나 맛에 길들여지는 것은 저급한 행동이다. '먹는 것이 단순하면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다'는 말을 기억하라.

남이 청하지 않는데 스스로 시를 지어 보이지 말라. 그러나 요청을 받았을 때는 결코 거절하지 말라.

위험하거나 불편한 지역에 가더라도 여행하기를 두려워하지 말라. 꼭 필요하다면 도중에 돌아서라.

말이나 가마를 타지 말라. 자신의 지팡이를 또 하나의 다리로 삼으라.

술을 마시지 말라. 어쩔 수 없이 마시더라도 한 잔을 비우고는 중단하라. 온갖 떠들썩한 자리를 피하라.

다른 사람의 약점을 지적하고 자신의 장점을 말하지 말라. 남을 무시하고 자신을 치켜세우는 것은 가장 세속적인 것이다.

시를 제외하고는 온갖 잡다한 것에 대한 대화를 삼가라. 그런 잡담을 나눈 뒤에는 반드시 낮잠을 자서 자신을 새롭게 하라.

이성간의 하이쿠 시인과 친하지 말라. 하이쿠의 길은 집중에 있다. 항상 자신을 잘 들여다보라.

다른 사람의 것은 바늘 하나든 풀잎 하나든 취해서는 안 된다. 산과 강과 시내에게는 모두 하나의 주인이 있다. 이 점을 유의하라.

산과 강과 역사적인 장소들을 방문하라. 하지만 그 장소들에 새로운 이름을 붙여서는 안 된다.

글자 하나라도 그대를 가르친 사람에게 감사하라. 자신이 충분히 이해하지 못했다면 가르치지 말라. 자신의 완성을 이룬 다음에야 비로소 남을 가르칠 수 있다.

하룻밤 재워 주고 한 끼 밥을 준 사람에 대해선 절대 당연히 여기지 말라. 사람들에게 아첨하지도 말라. 그런짓을 하는 자는 천한 자이다. 하이쿠의 길을 걷는 자는 그 길을 걷는 사람들과 교류해야 한다.

저녁에 생각하고, 아침에 생각하라. 하루가 시작될 무렵과 끝날 무렵에는 여행을 중단하라. 다른 사람에게 수고를 끼치지 말라. 그렇게 하면 그들이 멀어진다는 것을 명심하라.

이들의 이렇한 철저한 방랑은 현대 시인 나나오 사카키에게도 이어졌다. 난오 사카키는 생의 무상함을 깨닫고 속세를 떠나 사이교, 바쇼, 료칸, 이뀨처럼 방랑 시인의 길을 걸었다. 제2차 세게 대전이 끝난 뒤 그는 유럽, 한국, 중국, 미국, 호주, 스리랑카 등지를 걸어서 여행하며 일본어와 영어로 시를 썼다.
굳이 하이진(하이쿠를 쓰는 시인)들이 일깨워 주지 않아도 인생은 근원적으로 외로운 것이며, 온갖 부조리한 넌센스로 가득 차 있다. <멕베드>에서 말하고 있듯이, 인생은 바보가 들려 주는 이야기와 같다. 시끄럽고 소란스럽지만, 의미는 별로 없다. 하이진들은 그러한 속물적인 삶을 멀리한다.

11

오늘날 하이쿠는 일본의 것만이 아니게 되었다. 미국과 유럽에서 이미 자기들의 언어로 하이쿠를 쓰는 작가들이 늘어나고 있고, 인터넷 서점에 올라 있는 하이쿠 관련 서적만 해도 수천 권이다.
하이쿠의 재발견에는 영국인 R.H.블라이스의 공로가 크다. 그는 인도와 한국에서 영어 교사를 하다가 일본에 건너가 천황의 아들에게 영어를 가르치던 중 하이쿠의 세계에 매혹되었다. 지금도 그의 하이쿠 번역서는 서양 시인들에게 필독서로 읽히고 있다.
하이쿠를 한 줄, 또는 두 줄, 세줄로 옮겨 적어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학자들 사이에 논란이 많다. 일본에서는 세로로 하이쿠를 쓸 때 보통 한 줄로 쓰지만, 손으로 적을 때는 그 운을 분명하게 나타내기 위해 삼행으로 쓰는 경우도 많다.
내가 여기 이 시들을 번역하는 데는 실로 여러 해가 걸렸다. 일본 고서점을 뒤지고, 이미 절판이 된 영어 번역본들을 구하느라 더 많은 시간이 걸렸다. 수천 편을 모으고, 그 중에서 내 마음에 드는 것 천 편 가량을 따로 골랐다. 그것을 다시 추려 이 시집을 엮었다.
짧은 시를 번역하기란 실로 어려운 작업이다. 사실 하이쿠는 외국어로는 번역이 불가능하다는 주장들이 있어 왔다. 일본어 특유의 정서와 운율을 옮기기 어렵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꼭 하이쿠만의 문제가 아닐 것이다. 시는 언어가 가진 독특한 울림과 함축적인 의미를 담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다른 나라의 언어로 옮겨 적으면 그 맛이 줄어들게 마련이다. 그래서 이 번역 작업을 하는 데 몇 년이 걸렸다. 나는 아침이면 커다란 느티나무가 있는 내 작업실로 걸어가 전에 번역해 놓은 몇 편의 하이쿠를 꺼내 읽었다. 겨울마나 떠나는 인도 여행중에도 아침이면 하이쿠 시를 옮겨 적었다. 히말라야에서 또는 갠지스 강에서 한 줄짜리 시를 입으로 중얼거리며 운이 맞지 않는 단어를 수정하곤 했다. 그런 점에서 나 역시 한 사람의 하이쿠 시인의 행로를 거친 셈이다.
나는 이 한 줄짜리 시들을 옮기면서 많은 시간 행복했다. 내 눈에서 약간의 비늘이 떨어져 사물과 인생의 실체를 조금더 분명하게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내가 내 사람의 어디까지 왔는가를 이 시들이 느끼게 해주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내 작업실 마당에서 꽃들이 피고있다. 어느새 새로운 계절의 시작이다.

봄에 피는 꽃들은
겨울 눈꽃의
답장

<원본 출처: http://www.haikulov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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