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 시를 읽고 긴 글을 쓰다 5-6 [류시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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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듯 하이쿠에는 계절이 있다. 그것이 하이쿠의 첫번째 규칙이다. 하이쿠에서 계절을 나타내는 단어를 기고라고 한다. 그 계절은 인간을 비롯한 모든 생명 가진 존재를 에워싸고 있는 숙명적인 환경이다.
가을 깊은데
옆방은 무엇 하는 사람인가
방랑 도중 어느 여인숙에서 바쇼가 쓴 이시는 가을이라는 숙명적 환경을 통해 벽 너머의 이웃에 관심을 갖는다. 은둔과 적막의 계절에 오히려 이웃에 대한 관심의 문이 열리는 것이다. 그 이웃은 단순히 옆방에 있는 미지의 인간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모든 타인에 대한 관심이다. 그것을 깊이가는 가을이 가능케 하고 있다. 바쇼로 하여금 '마음을 감추고 모습을 먼저 보이라'는 자기 자신의 충고를 위반하면서까지 '옆방에 있는 사람'에 대한 자신의 감정을 토로하게 만드는 것이 바로 이 '세계의 가을'인 것이다.
가을만이 아니다. 하이쿠는 모든 계절을 두루 다른 존재에 대한 관심의 문으로 이용한다.
여름 소나기
잉어 머리를 때리는
빗방울!
현대의 대표적인 하이쿠 시인으로 손꼽히는 시키가 소나기에 이마를 얻어맞고 있는 잉어를 바라보고 있을 때, 바쇼는 오월 장마비 속의 물새에 시선을 고정시킨다.
장마비 내리자
물가에 서 있는
물새의 다리가 짧아지네
남국에서는 오월이면 이미 장마가 시작된다. 장마비를 쉬지 않고 하염없이 내린다. 물이 차오르자, 물가에 서 있는 물새의 다리가 물 속에 점점 잠겨 간다.
이 장마비는 바쇼의 강에만 내리는 것이 아니다. 우리 모두의 강에 장마가 찾아와 하루종일 비가 내리고 있다. 물가에 서 있는 그 물새는 우리들 자신에 다름 아니다.
그런가 하면 이싸는 초여름 풀잎에 나타난 달팽이를 바라보며 놀라운 발견을 한다.
달팽이 얼굴을 자세히 보니
너도
부처를 닮았구나
깨어 있는 시인의 눈은 여름철 '절에 가니/파리들이 사람들을 따라/합장을'하는 것을 발견하고, 초겨울 아이들에게 '아이들아/벼룩을 죽이지 마라,/그 벼룩에게도 아이들이 있으니!'라고 말한다.
쉰두 살에 세상을 떠난 타다토모는 한겨울 차를 끓이기 위해 화로에 숯을 넣으며 다음과 같이 썼다.
이 숯도 한때는
흰 눈이 얹힌
나뭇가지였겠지
하이쿠는 계절의 시다. 계절만큼 인생의 별화, 시간의 한계, 살아 있는 것들의 유한한 속성을 일깨우는 것은 없다. 하아쿠가 계절을 시작의 첫번째 규칙으로 삼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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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쿠의 정의를 간단히 말하면, 그것은 5-7-5의 음절로 이루어진 한 줄짜리 정형시이다. 수백 년 전 일본에서 시작되어 오늘날 일본에만 하이쿠 시를 쓰는 작가가 백만 명 정도로 추산되고 있다. 대부분의 신문은 하이쿠 난을 마련해 독자 투고를 받거나 해설을 곁들인다. 열일곱 자에 불과한 한줄의 시에 담긴 의미를 설명하는 데 학자들은 몇 시간씩 열을 올리며 강의를 한다. 도시를 가든 시골을 가든 큰 돌에 하이쿠를 새겨 놓고, 과거에 이름난 시인이 방랑 도중에 그곳을 지나갔음을 알린다. 세계 어디를 가도 한 줄짜리 시가 이토록 큰 대접을 받는 나라는 없다.
대표적인 하이쿠 시인 바쇼와 이싸와 부손은 각기 다른 특징을 지녔다. 바쇼는 고행자이고 구도자적인 성격을 지녔으며, 부손은 화가와 같은 원근감과 시공간 배치에 능했다. 그리고 이싸는 인간주의자였다. 그들을 비롯한 후기 하이쿠 시인들의 시는 다른 시들에서 발견하기 어려운 독특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세상에 있는 사물들에 대한 이야기, 또 그 사물들을 바라보는 시선, 나아가 그것들을 표현하는 가장 분명하고 깨어 있는 언어가 그 특징을 이룬다.
벼룩, 너에게도 역시
밤은 길겠지
밤은 분명 외로울 거야
이것은 이싸의 작품이다. 외롭고 긴 밤, 홀로 돌아다니는 여행길 어느 곳에서 시인은 벼룩과 마주한다. 그 보잘 것 없는 벌레를 보며 중얼거린다. 너에게도 역시 밤은 길겠지. 밖에서는 발마이 낙엽을 몰아가고 있고, 아무리 작은 존재라 해도 너도 밤이면 분명히 외로울 거야.
이때 한 인간의 외로움은 세상과 화해한다. 왜냐하면 아무리 작은 미물일지라도 외로움을 공유하는 또다른 존재가 그의 곁에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역설적으로 시인으로 하여금 벼룩이라는 미물에 관심을 갖게 만든 것은 바로 그 자신의 '외로움'이다.
이싸는 슬픈 생을 산 사람이다. 어려서부터 계모 밑에서 학대받으며 자랐고, 그 불행한 관계는 중년에 이를 때까지 계속되었다. 몇 차례 결혼을 했지만 아내들은 일찍 세상을 떠났고, 늙어서 얻은 자식들까지 어린 나이에 차례로 땅에 묻혔다. 훗날 간신히 마련한 오두막은 화재로 전소했으며, 그 타고 남은 재 위에서 벼룩들만 뛰어다녔다. 되는 일이 아무것도 없는 인생이었다.
이런 환경 속에서 이싸는 주변의 작은 사물에 대한 탁월한 관찰 능력을 키웠다. 그 관찰력은 단순히 예민한 눈에 그치지 않고 생의 정서와 곧바로 연결되었다.
허수아비 뱃속에서
귀뚜라미가
울고 있네
우리 자신의 뱃속에서 찌륵찌륵 하고 귀뚜라미가 우는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이 시는 그의 뛰어난 작품들 중의 하나에 불과하다. 벌레들을 통해 다양한 생의 시각을 노래한 세계의 시인들 중에서도 이싸는 단연 탁월하다. 노년에 이르러 이싸는 젊은 여자와 결혼한다. 그 결혼이 어떠했을까는 상상할 수 없다. 생의 수많은 희노애락을 겪은 늙은 시인과 철모르는 젊은 아내......
뛰는 솜씨가 서투른
요 벼룩,
더욱 귀엽구나!
그러나 이싸의 위대성은 슬픈 생애와 연결시키지 않고서도 그의 시가 모두에게 공감을 불러일으킨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그는 인생의 노예가 아니었다. 오늘날에도 일본인들이 가장 많이 애송하고 있는 시가 바로 이싸의 시다. 아이들도 이싸의 시를 외운다.
현대 화가 조지아 오키프는 말했다.
"내가 처해 있는 환경은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내가 무엇을 그렸는가 하는 것이다."
그렇다. 이싸의 생애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이싸의 시가 중요한 것이다.! 이싸는 평생 동안 2만여 편의 하이쿠를 썼고, 그 가운데 수백 편의 시가 명시로 평가받는다. 그만큼 이 시집에서도 그의 시를 고르기가 어려웠다.
이싸는 일본 시나노 지방의 가시와바라 마을에서 태어나 걸핏하면 거지처럼 방랑하며 살았다. 어느 비 오는 날, 나는 가시와바라에 간 적이 있다. 이싸는 자신이 태어난 그곳에서 생을 마쳤는데, 그곳엘 가니 초라한 비석 아래 그가 가족과 함께 묻혀 있었다.
<원본 출처: http://www.haikulov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