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직후 좌익이다 우익이다. 싸움이 벌어져 드디어 정판사건이 터진 서울의 밤 일곱 시께.
일찌감치 통행금지가 내려진 골목길을 술취한 취객 하나가 걷고 있었다.
주위의 정적쯤은 아랑곳없이 기분 좋게 취한 그 사내는 비틀거리면서 언덕길을 오르고 있었다
『누구냐. 정지.』
돌연 거리를 차단하고 있던 치안대원이 지나가던 사내의 발걸음을 막아 세운다.
사내는 놀란 듯 우뚝 선다.
『누구냐.』
『 지나가던 취객이요.』
『 뭐라구. 지금이 무슨 시간인데 장난하려 들어. 누구야.』
『 취객이요. 술취한 취객이요.』
사내는 껄껄 웃어제낀다.
『웃지마라. 누구야.』
『나말이요.』
손전지 불 밑에 드러난 사내의 얼굴은 생각 보다는 곱게 생겼다.
악의없는 참하게 생긴 얼굴이라는 것이 한눈에 드러난다.
치안대원은 울컥 화가 치밀어 오른다.
『정지. 정지. 누구야.』
『나말요. 나. 천하의 나를 모르오.』
『이 대한민국에서 제일 가는 나를 모르오. 난 이인성(李仁星)이요. 천하의 천재 이인성이요.』
『뭐라구.』
치안대원은 어이가 없었지만 사내의 기세가 너무나 등등하여 혹시 고위층의 인물인가 행여 겁도 나서
일단은 치밀던 화를 자제하고 집으로 보내 준다.
그러나 그 치안대원은 좀체로 치밀던 화가 풀리지 아니한다. 그래서 경비소로 돌아온다.
『누구 저기 위에 사는 이인성이라는 사람알어.』
『알지.』
앉아서 사무근무를 하던 사내가 시큰둥하게 대답한다.
『그 사람 뭐하는 사람이야.』
『뭐하긴 뭐해. 환쟁이지.』
『환쟁이. 아니 그 자식이 환쟁이야.』
사내는 뛰쳐 나간다. 그리하여 씩씩거리며 좀전의 사내가 들어간 집 대문을 발길로 걷어찬다.
『누, 누구요.』
술취해 자리에 누워있던 이인성은 옷도 채 입기전에 문을 열고 나서려는 순간 사내의 입에서는 한마디의 욕설이 튀어나온다.
『더러운 쌕끼.』
가슴에 품었던 치안대원의 총이 잠결에 튀쳐나온 이인성의 이마를 향한다. 방아쇠를 잡아당긴다.
『타앙.』
한발의 총성이 정막을 찢는다. 이인성은 쓰러진다. .
.
이상은 우리나라가 낳은 천재화가 이인성이 죽는 순간을 나 나름대로 소설체로 표현해 본 것이다
이인성은 그렇게 죽었다.
해방된 조국에서 기쁨에 술취해 돌아오던 이인성은 같은 동포의 총에 맞아 죽었다.
이인성은 그렇게 죽었다.
그렇게 죽었다.
그 손끝이, 그 손끝에서 나온 그림이 일본인의 눈을 놀라게 했던 이인성의 마술적 재능이
총한방에 죽고 말았다.
자신을 서슴지않고 천재라고 표현하던 이인성이 통행금지에 걸려 죽었다.
환쟁이 이인성은 그렇게 죽었다.
하지만 이십년이 흘러간 지금 그의 그림은 남아서 우리에게 기쁨을 주고, 천재의 재능을 보이게 하고 있다.
여러가지로 따지지 말라.
예술가가 무슨 특권이 있다고 통행금지 이후에 다닐 수 있담 하고 따지지 말라.
자기가 뭐라고, 뭐 대단한 인물이라고 통행금지 이후 다닌담 하고 따지지 말라.
그렇게 말하는 너는, 나는 그리고 우리는 위대한 천재화가를 죽인 사람들이다.
우리는 십자가를 메고 가는 예수를 찬미하고 있다.
그리고 예수를 향해 돌을 던졌던 바리새인을 욕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 또한 그 시대에 살아있었다면 그시대의 이단자인 예수에게 침을 뱉고 돌을 던졌을는지 모른다.
이조백자는 지금에 와서는 위대한 예술품이다.
그러나 우리는 예전에 그들을 백정 취급하였다.
그들을 따로 살게 했고, 그들끼리 혼인케 하였으며,열병걸린 전염병환자 취급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빚었다.
그들의 한을 도자기로 빚었다.
수백년 지나서 그 이조자기는 그들을 멸시하였던
우리들의 유일한 자랑스런 유산으로 남아있다.
우리 문학의 고전도 마찬가지다.
춘향전도, 흥부전도, 심청전도 멸시받았던 하위계급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내려온 구화문학이다.
말하자면 하위문화들의 소산이다. 그것을 우리는 배운다. 배우고 있다.
자연스럽게 배우고 있다.
작가 최인호가 오래 전에 화가 이인성의 최후를 소설적으로 각색해 쓴<누가 천재를 죽였는가>의 한 부분이다.
한국의 고갱이요 세잔으로 불렸던 이인성은 1950년 늦가을 서른아홉 나이로 북아현동 집에서 이렇게 어처구니없이 최후를 마친다. 어떤 기록은 이미 집 근처 술집에서부터 경찰관과 시비가 있었다고도 전한다. 이인성의 최후는 예나 지금이나 한국에서 예술 한다는매김이
얼마나 천대받았는지를 소스라치게 떠올리게 하는 대목이다. 어쩌면 천하의 이인성이라고 했을 때 치안대원은 당시의 세도가 중 이기붕 일가쯤의 한 사람으로 지레 짐작했을지도 모른다.
당시는 이씨 천하였으니까. 그래서 어떤 기록에 보면 취한 이인성을 정중히 ‘모셔다 드렸다’고 나온다. 그러나 알고 보니 그는 세도가는 커녕 일개 ‘환쟁이’였던 것. 치안대원은 화가 머리끝까지 났을 것이다.
글쓴이는 묻는다. “누가 천재를 죽였는가.” 그리고 스스로 대답한다.
“우리 곁의 천재를 죽인 것은 너와 나 우리 모두”라고,
나는 그 시대에 살지 않았다. 총을 쏘지 않았다 말하지 말라”고.
허다한 우리 곁의 천재적 예술가를 멸시하고 심지어 죽음의 길로 까지 내몰고 나서 추모비, 기념비를 세운다 호들갑 떨지 말라고.
“너 커서 이인성 되겠구나.”
한때 대구에서는 그림 잘 그리는 아이에게 ‘화가 되겠구나’ 대신 그렇게 말했다 한다.
그는 1912년 대구 남성동에 있는 작은 음식점 주인의 아들로 태어났다.
근대 화가들이 대부분 지주나 자본가 혹은 관료가문 출신의 자제들이었던 데 반해 이인성은 가난한 집안의 아들로 태어나 부친의 반대를 무릅쓰고 미술가의 길을 갔다.
그가 쓴 어떤 글에 의하면 부친은 그의 뜻에 극구 반대하여 몽둥이를 들고 나올 지경이었다는 것이다. 세계아동작품전에 슬며시 출품하여 특선하였으나 정작 부모님은 화를 내시는지라 서럽기까지 했노라고 술회하였다. 그러나 그는 가난과 주변의 몰이해에 주저앉지 않았다.
그는 당시 구로다세이키가 빠리로부터 돌아와 일본 화단에 일으킨 외광파의 영향을 받은 일인 미술교사들에 의해 서양화에 눈을 뜨게 된다.
이후 한국 고미술 연구가로 이름 높던 시라카미 쥬요시의 주선으로 일본 유학을 떠나게 되어 태평양 미술학교에 적을 둔다. 그는 메이지(明治, 1868-1911) 말기로부터 다이쇼(大正, 1912-26) 초기에 걸쳐 이입된 후기 인상주의적 기법을 ‘조선의 향토색’으로 수용하여 토착화시킨다. 이를테면 평범한 주변의 일상적 사물을 대상으로 삼으면서도 자연스럽게 한국적 색체, 형태와 정서로 덧입혀갔던 것이다. 그에게 찬사와 비난을 동시에 가져다 준 <경주의 산곡에서>와 같은 작품은 천년 영화가 몇 개의 기왓장으로 나뒹구는 폐허가 된 고도 경주와
힘없는 어린 소년들을 대비시켜 문학적 상상력을 불러일으켰는데,헐벗은 아이들과 매미와 산하를 통해 당시의 민족상황을 표현하였다. 동시에 붉은 황토색을 통해 특유의 조선정서를 형상화시킨 것이다.
그는 도시에서 출생하여 도시에서 살다간 도시인이었지만 대부분의 모더니스트들과는 달리 토착에 탐익했다. 그러면서도 그 속에 세련된 근대적 감각을 불어 넣었다. 버터 냄새나는 서양 기름 물감을 토장국 맛 나는 카슬카슬한 조선 황토의 토착미감으로 바꾸어버린 이인성.
아니다. 인위적으로 바꾸었다기보다는 체질로 풀어내고 토해냈다는 편이 낫다. 조선의 붉은 토지와 맨드라미, 조선 여인의 흰 저고리와 검은 무명치마 같은 색채의 대비로써 그는 암묵적으로 민족적 미의식을 드러낸다. 투쟁적 모습을 보이거나 목청 높여 드러내놓고 민족주의를 부르짖지는 않았지만 확실히 그의 그림은 향토 정서 이상의 울림을 주고 있다.
그가 그린 <아리랑 고개>와 그 그림에 관한 고백은 그의 이런 생각의 뼈대를 가늠하게 한다.
“보리타작 시즌은 과연 아름다운 볼거리다. 모두 ‘예술적 콤포지션’의 하나이다.
다른 나라에 없는 조선의 보리타작이라서일까? 몸을 가볍게 들어서 ‘도리깨’를 번쩍 들어올리는 그 순간의 이즘(ism)은 얼마나 대륙적인가?
여기저기서 흘러오는 아리랑의 멜로디에 귀를 기울이며 또 걷기 시작한다.
황혼의 들길은 끊없이 아름답고 ‘감정적’이다.”
- 1935.6.19. 유족 소장의 신문자료-
그는 거의 독학으로 수채화와 유화를 공부해 열여덟 나이에 선전(鮮展)에 입선한 이래 연달아 입. 특선을 거듭하고 일본 유학에서 돌아와 약관 26세 나이로 추천작가가 되었던 식민지 화단의 별이었다.
경쾌한 붓터치와 동양화의 파묵법(破墨法, 거친 먹그림 기법의 하나)을 연상시키는 필세에
토속적 정감 넘치는 소재의 화면들. 그 위에 강한 명암 대비에 의한 미묘한 긴장과 울림,
넘치는 문학성 등으로 ‘이인성류’는 선전(鮮展)뿐 아니라 해방 후의 국전 작가들에게까지 영향을 미쳤다.
그의 선전(鮮展) 참여 이력이 때로 그를 평가하는 데에 걸림돌이 되기도 하지만, 그가 한국적 미의식을 명료히 드러낸 작가라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이인성의 아들 채원씨는 그 부분에 대해 보다 분명하게 이야기한다.
“아버님이 줄곧 선전(鮮展)에 참여하셔서 각광을 받았대서 그 부분을 약점으로 잡는 사람들이 있습니다만 독학으로 그림을 공부하신 분으로서 그런 제도적 관문을 거치지 않는다면 어떻게 화가로 입신할 수 있었겠습니까. 지금처럼 화랑이 많아 개인전을 통해 자신을 알릴 수도 없는 형편이었으니까요. 비록 선전(鮮展)에 참여는 했지만 아버님은 끊임없이 우리 그림을 그리려 애쓰신 분입니다. 아버님의 그림은 숫제 동양화입니다. 저희는 아버님께서 고이 간직해 오신 미발표 작품 백여 점을 지니고 있는데 그 중에는 종이에 그린 수묵화가 많습니다. 제 짧은 눈에도 아버님의 수묵화는 아버님의 개성과 기질을 유화 쪽에서 보다 휠씬 잘
발휘하신 것으로 보였습니다. 넥타이를 매고 양복을 입었대서 서양사람이라고 할 수 없는 것처럼, 수채와 유채를 주로 쓰긴 했지만 아버님의 그림은 한국화였습니다.”
그는 도시인이었으면서도 우리 산, 우리 물의 아름다움은 물론 심지어 공기의 흐름까지도 꿰뚫어보고 있었다. 때로는 일상의 풍경에서 암울하고 애잔한 식민지적 분위기를 드러내기도 하였다. 그러나 우리는 세잔의 <생 빅트와르 산>은 알아도 이인성의 <경주의 산곡>에는 무지하다. 고갱의 <타히티 여인>의 그 원시적 생명력은 예찬하지만 <어느 가을날>의 황막한 들판에 반나(半裸)로 선 조선여인에는 무심하다.
모네의 <수련>을 누가 모르랴. 그러나 이인성의 <해당화>는 낯설다. 우리는 거의 늘 그랬다.
모차르트를 바라보는 살리에리의 눈으로 허다한 일본인 화가들이 식민지 청년 이인성의 재능을 시샘했지만 나라 안에서 그 이인성은 정작 보잘 것 없는 ‘대구의 식당집 아들’이었을 뿐이다.
1936년 24세에 일본에서 디자인 공부를 하던 김옥순과 결혼한 그는 귀국 후 장인되는 김재명의 남산병원 3층에 현대식 화실을 꾸며 안정된 가운데 본격적으로 그림을 그렸다. 그러나 1940년 상처하고 실의에 잠기면서 슬럼프에 빠지게 된다. 1947년 김창경과 재혼하면서 이듬해 서울 동화화랑에서 재기전을 갖게 되고 다시 일어서기까지 그는 참으로 감내하기 힘든 시간들을 보내야 했다. 1950년 장남 채원군이 탄생하고 제2의 전성기가 열리는가 했지만 그 해 11월 4일 그만 어이없는 죽음을 당하고 말았던 것이다.
서양화로 조선의 ‘향토색’을 담으려 노력했던 이인성의 흔적은 대구에서 찾을 길이 없다. 이인성의 활동 반경을 짚어주는 것으로는 봉산 문화거리 입구에 사각의 표석이 하나 서 있을 뿐이다. 옛 정취와 연경되는 것은 그나마 약전 골목, 그리고 메마른 도시의 향기같은 한약 냄새가 끝나는 지점의 계산동 성당. 하늘에 닿을 듯한 뾰족 십자가에 남북으로 길게 익랑(翼廊)을 단 이 고딕식 성당을 이인성은 몇 차례나 화폭에 담았다.
서쪽 하늘을 물들인 이인성의 그림 속의 그 붉은 빛 구도 안에 서 있건만 천지간에 화가의 자취는 찾을 길이 없다.
김병종의 화첩기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