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맨스에 대한 편견 중에 가장 잘못된 것은 "로맨스..그것은 젊은 사람의 전유물이다."라는 것이다.
나또한 로맨스에 대해서 이런 편견을 가진 사람 중 하나였음을 먼저 고백한다. 사실 텔레비젼이나 영화속에서 보더라도 젊고 아름다운 여자 배우와 젊고 잘생긴 남자 배우들이 만들어내는 사랑이야기가 주종이다. 물론 어르신들의 사랑-정신적인 관계 뿐 아니라 육체적인 관계까지-을 이야기로 풀어내었던 영화 "죽어도 좋아"라는 영화가 있었다. 그러나, 나는 보지 못했다.(언젠가 꼭 보고 말꺼다.) 그리고, 나도 나름대로 젊은 나이에 속한다고 생각하고 있는지라(물론 나만의 생각이지만서두...쿨럭) 이런 젊은 사랑이야기가 주종인 드라마나 영화속에서 더 감정이입이 잘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우연찮게 이번 설 연휴에 시골에 갔다가 이모부 댁에 세배를 드리러 간 적이 있었다. 초등학교 교사를 역임하시다가 퇴임하시고 그 이후로는 별 하시는 일 없이 지내시는 이모부. 이모부의 특기이자 유일한 취미생활은 인터넷을 통해서 음악을 다운받고, 또는 음악을 소리바다에 올리고, 노래가사들을 베끼고, 좋아하시는 가수들의 목록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물론 이모부의 컴퓨터에 들어있는 음악은 대부분 뽕짝과 찬불가.... 그렇지만, 뽕짝의 경우는 최근에 대히트를 치고 있는 "어머나"까지 포함해서 항상 최신으로 업그레이드를 준비중이시다.
생뚱맞게 이모부를 소개하게 되었는데, 어쨋거나 세배 드리러 가서는 온갖 뽕짝은 다 듣고 온 것 같다. 물론 그 뽕짝을 부르는 가수들의 음색이 어떻느니, 언제부터 활동한 가수라느니..이런 이야기도 함께 양념처럼 곁들여 들었고.... '그 연배에, 그런 열정이라니... 이모부, 멋지다.'란 생각을 했었다.
이 이모부와 이야기를 하다가 '서각'에 대해 이야기가 나왔다. '서각'은 긴 나무판에다가 글자를 음각, 또는 양각으로 파고 나무결에 맞추어서 다시 배경 나무결을 파서 조정을 하고 그 위에다 색칠을 해서 만드는 작품인데, 최근에 울 엄니께서 심취해 계신 일이었다.
"어~ 나도 서각 작품 하나 있어. 너거 엄마가 판 것 중에 가장 처음 것을 달라고 해서 뺏어왔지..하하~"
나도 엄마의 가장 최초의 작품을 보고 싶어서 이모부에게 보여달라고 했다. 꼼꼼한 엄니는 처음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나무결위에다 꼼꼼하게도 글을 파놓았다. "청산은 나를 보고 티없이 살라하고..."로 시작되는 찬불가..그렇지만, 역시 처음이라서 그런가 글의 열이 점점 왼쪽으로 기울어져서 전체로 살펴보면 모두가 삐딱해보이는 그런 작품이었다.
왜 이모부는 가장 못난 작품을 달라고 했을까?? 그 이후에 파놓은 작품들은 더 좋은 것들이 많은데...
세배와 뽕짝과 이모부가 앓고 계신 혈전성 다리 통증에 대해 수술을 해야할 지 등등...의 이야기로 한 때를 보내고 난 후, 차에 오르면서 나는 살며시 엄니에게 물어보았다.
"이모부, 멋지다..그치?"
"멋지긴....고집불통이야..저 양반" 이라고 말하면서도 엄니의 눈은 화내는 것이 아니라 따뜻했다.
나는 젊은 시절의 엄마의 모습을 잘 모른다. 이번 설 세배를 하기전까지 이모부의 모습을 뵌 것이 5손가락 안에 꼽힐 정도니 그의 젊은 시절의 모습은 더욱 모르고...그렇지만, 이모부의 모습을 뵈면서 "그레이 로맨스"라는 단어가 떠올라 버렸다. 젊은 시절의 열정은 속으로, 속으로 들어가서 이젠 보일락 말락 하지만, 그래도 계속 지켜보고 있었다는 것을 일상 속의 흔한 선택 중에 섞어서 내보이는 은밀함.
엄니가 이 글을 보시면 "혼자 소설을 써라~소설을 써!"라고 말하시며 입을 앙 다무실지 모르겠지만, 내 코에 그렇게 느껴지는 걸 어떻해 하냐고... 혼자만의 상상이라고 하더라도 "그레이 로맨스"란 단어와 함께 떠올리게 되는 귀여운 이모부와 엄니의 모습은 불순한 냄새보다 달콤한 복숭아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