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ueen - The Platinum Collection (플래티넘 컬렉션) [3CD set] - Greatest Hits I, II & III
퀸 (Queen) 노래 / 이엠아이(EMI) / 200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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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 2때부터 테이프가 늘어질 정도로 듣기 시작한 퀸의 음악. 

시간이 꽤 흐른 지금도 들을 때 마다 새로움과 친근함이 동시에 느껴지는  

독특한 밴드다. 

퀸의 음악을 많이 알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이 앨범을 들으면서 또 모르고 있는 곡들이 많았다는 생각을 했다. 

요즘 다시 퀸의 음악을 가까이에서 들으면서, 

힘을 얻고 있는 중이다. 

 퀸의 팬들은 물론 일반 분들도 부담없이 퀸의 멋진 음악들을 종합선물처럼 한꺼번에 들을 수 있는 앨범이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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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 고흐, 영혼의 편지 (반양장) 반 고흐, 영혼의 편지 1
빈센트 반 고흐 지음, 신성림 옮김 / 예담 / 200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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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오에게

의욕적으로 일하려면 실수를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사람들은 흔히 잘못을 저지르지 않으면 훌륭하게 될 거라고 하지.
그건 착각이다. 너도 그런 생각은 착각이라고 말했잖니.
그들은 그런 식으로 자신의 침체와 평범함을 숨기려고 한다.

사람을 바보처럼 노려보는 텅 빈 캔버스를 마주할 때면,
그 위에 아무것이든 그려야 한다.
너는 텅 빈 캔버스가 사람을 얼마나 무력하게 만드는지 모를 것이다.




비어 있는 캔버스의 응시,
그것은 화가에게 "넌 아무 것도 할 수 없어" 라고 말하는 것 같다.
캔버스의 백치같은 마법에 홀린 화가들은 결국 바보가 되어 버리지.






많은 화가들은 텅 빈 캔버스 앞에 서면 두려움을 느낀다.

반면에 텅 빈 캔버스는 " 넌 할 수 없어"라는 마법을 깨부수는 열정적이고 진지한 화가를 두려워한다. 캔버스와 마찬가지로 우리의 삶도 무한하게 비어 있는 여백, 우리를 낙심케 하며 가슴을 찢어놓을 듯 텅 빈 여백을 우리 앞으로 돌려놓는다.
그것도 영원히!

텅 빈 캔버스 위에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삶이 우리 앞에 제시하는 여백에는 아무것도 나타나지 않는다. 삶이 아무리 공허하고 보잘것 없어 보이더라도, 아무리 무의미해 보이더라도, 확신과 힘과 열정을 가진 사람은 진리를 알고 있어서 쉽게 패배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는 난관에 맞서고, 일을 하고, 앞으로 나아간다.
간단히 말해,

그는 저항하면서 앞으로 나아간다.

1884. 10


고흐가 동생에게 보낸 편지글들 중 하나를 올린다.
자신을 '개'라고 규정하기도 했을 정도로, 엄격한 아버지 밑에서,
그리고 현실적인 삶이 보장되지 않는 화가라는 끝이 없는 삶의 과정에서 그는 고통스러워 했고, 불확실한 미래에 두려워 했었다.


하지만, 그가 동경했던 '해바라기처럼'
그리고 숱하게 남아있는 그의 자화상에서
그가 내렸던 결론은 그럼에도 자신의 삶을 이어가는 용기였고,
결국 그의 영혼도 그림에게 주었다.


평범함 속에 자신을 숨기려 든다는 말.
그리고 그것은 사람들의 착각이며,
결국 용기있는 사람은 저항하면서 앞으로 나아간다는 말은,
삶 속에서 무디어지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충고가 될 만하다.





고갱과의 다툼 속에 자신의 귀를 자르고,
또 숱하게 이어졌던 발작과 이에 대한 스스로의 두려움.

결국 자신에게 총을 겨누는 비극적 결과로 끝을 맺은 고흐지만,
사람들에게 사실 그대로를 보여주는 것이 아닌
강한 느낌을 전달하고, 이를 색채들 속에 투영하려했던 치열한 그의 고민은
분명 쓸쓸한 노력으로 끝나버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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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라마조프 씨네 형제들 - 상 - 도스또예프스끼 전집 17
도스또예프스끼 지음, 이대우 옮김 / 열린책들 / 200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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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작품은 까라마조프가의 아버지와 아들들을 중심으로, ‘부친살해’라는 모티프를 다루고 있는 장편 소설이다. 하지만,  이 작품은 단순히 한 가족의 단면을 보여주는 데 그치지 않고, 1870년대 과도기에 있던 러시아의 한 변두리 마을을 중심으로, 인간의 본성에 대한 묘사와, 그들 사이의 극적 갈등, 아울러 인간 존재 자체에 대한 근본적 물음까지 형상화하고 있는 거대한 세계 자체이다. 

 나아가 다양한 인물 군상들이 등장하고 있는 이 거대 세계는, 인간들이 이룩하고 꾸려가고 있는 세계의 모습으로써, 가난하고, 고통받고, 상대를 증오하고, 불신하며, 때로 울고 웃는 인간 세계의 장(場)이다. 그리고, 이런 인간 세계를 보여주면서, 작가가 자신의 글에서 가장 크게 던지고 있는 화두는 ‘인간에게 신은 존재하는가, 창조된 허구인가’라는 물음으로 귀결될 것이다.


 먼저, 무신론(無神論)을 갖고 있는 인물의 전형으로는 이반을 중심으로 라끼찐, 꼴랴, 스메르자코프가 등장하고 있다. 특히, 기독교적 사상을 중심으로 두는 작가의 입장에서 이들 인물들의 등장과 그들이 펼치고 있는 논리는, 신에 대한 단순한 부정을 넘어서서, 인간이라면, 누구나 마주하게 되는 질문들에 대해 나름 처절히 고민하고, 결론을 내리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음에 흥미롭다. 특히 이는 <대심문관>편에서 집약적으로 드러나고 있고, 결국, ‘인간에 대한 사랑은 신이 없이도 가능하며, 선행(善行)은 존재하지 않고 그럴 필요도 없으며 모든 것은 허용된다‘ 는 입장으로 정리되고 있다.

 하지만, 치열하게 신(神)의 존재를 고민하고, 이를 다양한 인물들을 통해 형상화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작가의 입장은 기독교적 세계관으로 귀결된다. 즉, 그는 이반과 같은 소위 배웠다는 ‘지식인’들은 고통 받는 민중들이나 세계에는 ‘침묵’할 뿐인 겁쟁이들이며, 꼴랴처럼 설익은 ‘못된 견해’에 사로잡혀 있는 존재들이라며 부인한다.

 결국, 작가는 온갖 부조리가 가득한 세계, 절망적이며 고통에 찬 세상을 이끌어 갈 이상적 인간으로 조시마 장로의 뒤를 잇는 알료샤를 내세우고 있다. 알료샤는 장로가 될 수 있음에도, 조시마 장로의 유언을 받아들여, 온갖 부정들이 가득한 인간들의 삶을 다시 선택하며, 그들 속에서 아버지 죽음을 중심으로 한 사건들을 경험, 진실된 눈으로 사람들에게 믿음을 주고, 그것은 민중들에게 구원으로 여겨지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신(神)은 존재하는가’를 묻지 않을 수 없다. 분명 인간들은 신(神)에 대한 믿음이 없이도, 인간들을 사랑하고, 용서하며, 이 세상을 꾸려갈 수 있을 것인가. 이에 대해 작가는 부친살해의 용의자인 드미뜨리가 아버지를 살해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법정에서 ‘살해자’로 판결 받게 된다는 결말을 통해, 인간이 인간 스스로를 판단하고, 그 세계를 공평무사하게 이끌어가는 것은 불가능함을 보여주고 있다. 즉 이는 ‘사람들은 그건 끔찍한 일이라고 말하면서도 마음 속으로는 정말 좋아하고 있으며(p1017)’, ‘우리들 자신이 상상하는 대로, 상상하고 싶은 대로, 모든 것을 가정하는 (p1282)' 존재들이라고 보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인간 존재 자체는 마치 소설가와 같아서, 진실을 올바르게 보려하지 않으며, 내지는 제대로 볼 수 없는, 불완전한 존재들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그는 다시 인간 긍정으로 나간다. 그것은 신(神)에 대한 믿음 속에서 인간들이 함께 현실에서의 문제들을 해결하고 서로 보듬으며 가야한다는 것으로, 이반처럼 무신론(無神論)을 중심으로 세상과 인간에 대한 회의나 책임회피가 아니라, -검사의 논변에 따르면 삼두마차를 피하는 것이 아니라- 정면으로 그 변화의 순간들을 맞이하고, 그 중심에는 민중들의 삶을 껴안으며, 진실되게 서로 사랑하며 살아가는 세상에 대한 작가의 바람이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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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의 연애
심윤경 지음 / 문학동네 / 200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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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년 전 <달의 제단>을 읽고, 나는 작가의 문체에 압도당했던 기억을 가지고 있다. 야들거리며, 감수성에 기댄 여타 여류작가들의 비슷비슷해 보이는 문체와 달리 <달의 제단>에서의 작가의 문체는 힘이 넘치고, 단단하게  나를 거침없이 이끌었다. 

그리고, 뒤늦게 그녀의 후속작 <이현의 연애>를 방금 전 갈무리했다.

우선, 전체적 느낌은, 지난 번 작품에 비해, 내가 예전에 느꼈던 놀라움에 다가가진 못 하고 있어 아쉽다는 것.

물론, 영혼을 기록하는 여자와 그녀를 사랑한 남자의 이야기, 중간중간에 그녀의 기록으로 묶인 단편들, 뒤의 생각 못한 반전 등은 여전히 독자로 하여금 글에서 손을 떼지 못 하게 하는 부분이다.

하지만 아쉬운 점

첫째, 나는 이 작품을 통해 작가가 독자와 온전히 소통하고 싶은 게 무엇인지 정확히 잡아낼 수 없다.

둘째, 나의 취향 탓이겠지만, 이진과 이현의 인물 설정이나 묘사는 비현실적인 느낌이 강했다. 그래서 감정이입하기 힘들었고, 과장된 인물묘사, 작위저이고 극단저인 설정에 오히려 중간중간 식상함을 느끼기도 했다.

대신 '빨치산, 민주투사' 하다 못 해 '사투리 능수능란하게 구사하게 지방에서 태어나지도 않은' 자신의 너무나 단순한 인생 이력을 약술하며, 소설가라는 직업과 자신 사이에서 고민하는  작가의 말이 더 좋았다면 무리일까.

오히려 이번 작품은 소설가로서, 기록을 해나가는 -이진역시 이현이 보기에는 그녀의 과장과 허구로 기록을 하고 있었으므로- 작가 자신의 삶의 방식 대한 고백으로, 알레고리를 사용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기록을 함은 때로 누군가를 치유하는 것이고, 또 누군가에게는 자신의 삶 자체일 수 있다. 작가는 너무나 단순한 자신의 삶에서 소설로 소재삼을 것이 없음을 한탄하면서도, 이진처럼 끊임없이 무언가를 쓰는 행위와 일상이 자기 자신이라고 고백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앞서 말한 두가지 아쉬움이 남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한 그녀의 필력과 기록에 대한 결연함은 독자로서 계속 지지하고 싶은 것이고 다음 작품을 기다리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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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반양장)
알랭 드 보통 지음, 정영목 옮김 / 청미래 / 200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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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하면서 붙여진 제목이 좀 그저그런 책으로 보이긴 하지만,

원래 영국에서는 라는 제목으로 출판된 소설이다.


알랭 드 보통의 처녀작으로 그가 스물다섯에 쓴 글인데,

한 남녀가 만나서 이별하는 순간까지

너무나 평범한 이야기 속에서도

소설이라는 형식을 넘어서는 여러 장치들과

철학적인 고민들이 두루 섞여 있는 멋진 책이다.


페이지를 넘기다 보면, 내 옆에 있는 사람 내지는 과거의 자신의 기억과 견주어 보며,

아!! 하고 깊은 공감을 하게 되는 부분도 적지 않다.

여기에 기억에 남는 몇구절을 옮겨본다.



-<이상화> 중

"사람들을 꿰뚫어보는 것은 아주 쉽다. 하지만 그래봐야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엘리아스 카네티의 말이다. ~~~ 우리가 가끔 사랑에 빠지는 것은 습관화되다시피 한

맥빠지는 냉소주의에서 벗어나고 싶기 때문이 아닐까?

모든 갑작스러운 사랑에는 사랑하는 사람의 장점을 의도적으로 과장하는 면이 있는 것이 아닐까?

그런 과장을 통하여 어떤 주어진 얼굴, 잠깐이나마 기적적으로 믿음을 가지게 된 얼굴에

우리의 에너지를 집중함으로써 환멸로부터 벗어나려는 것이 아닐까?


- <친밀성> 중

우리는 침묵의 시간을 가지는 모험도 할 수 있었다.

우리는 이제 편집증적인 수다쟁이들, 고요가 배신을 낳을까봐

대화를 중단하기를 꺼리는 수다쟁이들이 아니었다.

우리는 상대의 마음 속에 존재하는 자기 자신에 대해서 믿음을 가지게 되었으며,

(그런 믿음이 없을 때 생기는 두려움에서 발생하는)

지속적인 유혹은 이제 낡은 것이 되었다.


- <수축> 중

"내가 저 여자처럼 얼굴에 커다란 점이 있었어도 나를 사랑했을 것 같아?"

그 질문에는 "그렇다" 는 대답에 대한 갈망이 숨어 있다.

몸이라는 세속적인 표현,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비참하게도

어떻게 바꾸어볼 수 없는 표면보다 높은 곳에 사랑을 놓아달라는 요구이다.

내가 너를 사랑하는 것은 너의 재치나 재능이나 아름다움 때문이 아니라,

아무런 조건없이 너이기 때문이다.~~~~

나는 당신이 내 얼굴보다는 머리를 칭찬해주기 바란다.

그러나 꼭 얼굴을 칭찬해야겠다면, (정적이고 피부조직에 기초를 둔) 코 보다는,

(운동신경과 근육이 통제하는) 미소에 대해서 무슨 말을 해주기 바란다.~~~

내가 너한테 약해 보여도 될 만큼 나를 사랑하니?

모두가 힘을 사랑한다.

하지만 너는 내 약한 것 때문에 나를 사랑하니?

이것이 진짜 시험이다.

너는 내가 잃어버릴 수도 있는 모든 것을 벗어버린 나를 사랑하는가?

내가 영원히 가지고 있을 것들 때문에 나를 사랑하는가?

- <선악을 넘어서> 중


사랑의 거부가 종종 도덕적 언어, 옳고 그름의 언어, 선과 악의 언어의 틀 안으로 들어온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마치 거부하거나 거부하지 않는 것, 사랑하거나 사랑하지 않는 것이 당연히 윤리의 한 지류에 속하는 것처럼.

거부를 하는 사람에게는 악하다는 딱지가 붙고, 거부를 당한 사람은 선의 화신이 된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사랑의 거부가 아무리 불행한 일이라고 하더라도, 사랑을 이타성과 동일시하고
거부를 잔인함과 동일시할 수 있을까?

내가 클로이를 사랑하는 것은 도덕적이고, 그녀가 나를 거부하는 것은 비도덕적일까?

그녀가 나를 거부하면서 죄책감을 느낀 것은 사랑을 내가 이타적으로 그녀에게 준 것으로 보기 때문에 생긴 일이었다.

나의 선물에 이기적인 동기가 있었다면, 클로이도 똑같이 이기적인 동기에서 관계를 끝내는 것을 정당화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 관점에서 본다면, 사랑의 종말은 이타주의와 이기주의,

도덕성과 비도덕성 사이의 충돌이라기보다는 근본적으로 이기적인 두 충동 사이의 충돌로 나타난다.

그림) 뭉크 <키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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