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까라마조프 씨네 형제들 - 상 - 도스또예프스끼 전집 17
도스또예프스끼 지음, 이대우 옮김 / 열린책들 / 2007년 2월
평점 :
품절
본 작품은 까라마조프가의 아버지와 아들들을 중심으로, ‘부친살해’라는 모티프를 다루고 있는 장편 소설이다. 하지만, 이 작품은 단순히 한 가족의 단면을 보여주는 데 그치지 않고, 1870년대 과도기에 있던 러시아의 한 변두리 마을을 중심으로, 인간의 본성에 대한 묘사와, 그들 사이의 극적 갈등, 아울러 인간 존재 자체에 대한 근본적 물음까지 형상화하고 있는 거대한 세계 자체이다.
나아가 다양한 인물 군상들이 등장하고 있는 이 거대 세계는, 인간들이 이룩하고 꾸려가고 있는 세계의 모습으로써, 가난하고, 고통받고, 상대를 증오하고, 불신하며, 때로 울고 웃는 인간 세계의 장(場)이다. 그리고, 이런 인간 세계를 보여주면서, 작가가 자신의 글에서 가장 크게 던지고 있는 화두는 ‘인간에게 신은 존재하는가, 창조된 허구인가’라는 물음으로 귀결될 것이다.
먼저, 무신론(無神論)을 갖고 있는 인물의 전형으로는 이반을 중심으로 라끼찐, 꼴랴, 스메르자코프가 등장하고 있다. 특히, 기독교적 사상을 중심으로 두는 작가의 입장에서 이들 인물들의 등장과 그들이 펼치고 있는 논리는, 신에 대한 단순한 부정을 넘어서서, 인간이라면, 누구나 마주하게 되는 질문들에 대해 나름 처절히 고민하고, 결론을 내리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음에 흥미롭다. 특히 이는 <대심문관>편에서 집약적으로 드러나고 있고, 결국, ‘인간에 대한 사랑은 신이 없이도 가능하며, 선행(善行)은 존재하지 않고 그럴 필요도 없으며 모든 것은 허용된다‘ 는 입장으로 정리되고 있다.
하지만, 치열하게 신(神)의 존재를 고민하고, 이를 다양한 인물들을 통해 형상화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작가의 입장은 기독교적 세계관으로 귀결된다. 즉, 그는 이반과 같은 소위 배웠다는 ‘지식인’들은 고통 받는 민중들이나 세계에는 ‘침묵’할 뿐인 겁쟁이들이며, 꼴랴처럼 설익은 ‘못된 견해’에 사로잡혀 있는 존재들이라며 부인한다.
결국, 작가는 온갖 부조리가 가득한 세계, 절망적이며 고통에 찬 세상을 이끌어 갈 이상적 인간으로 조시마 장로의 뒤를 잇는 알료샤를 내세우고 있다. 알료샤는 장로가 될 수 있음에도, 조시마 장로의 유언을 받아들여, 온갖 부정들이 가득한 인간들의 삶을 다시 선택하며, 그들 속에서 아버지 죽음을 중심으로 한 사건들을 경험, 진실된 눈으로 사람들에게 믿음을 주고, 그것은 민중들에게 구원으로 여겨지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신(神)은 존재하는가’를 묻지 않을 수 없다. 분명 인간들은 신(神)에 대한 믿음이 없이도, 인간들을 사랑하고, 용서하며, 이 세상을 꾸려갈 수 있을 것인가. 이에 대해 작가는 부친살해의 용의자인 드미뜨리가 아버지를 살해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법정에서 ‘살해자’로 판결 받게 된다는 결말을 통해, 인간이 인간 스스로를 판단하고, 그 세계를 공평무사하게 이끌어가는 것은 불가능함을 보여주고 있다. 즉 이는 ‘사람들은 그건 끔찍한 일이라고 말하면서도 마음 속으로는 정말 좋아하고 있으며(p1017)’, ‘우리들 자신이 상상하는 대로, 상상하고 싶은 대로, 모든 것을 가정하는 (p1282)' 존재들이라고 보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인간 존재 자체는 마치 소설가와 같아서, 진실을 올바르게 보려하지 않으며, 내지는 제대로 볼 수 없는, 불완전한 존재들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그는 다시 인간 긍정으로 나간다. 그것은 신(神)에 대한 믿음 속에서 인간들이 함께 현실에서의 문제들을 해결하고 서로 보듬으며 가야한다는 것으로, 이반처럼 무신론(無神論)을 중심으로 세상과 인간에 대한 회의나 책임회피가 아니라, -검사의 논변에 따르면 삼두마차를 피하는 것이 아니라- 정면으로 그 변화의 순간들을 맞이하고, 그 중심에는 민중들의 삶을 껴안으며, 진실되게 서로 사랑하며 살아가는 세상에 대한 작가의 바람이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