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저작자·출판 관련 13개 단체 도서정가제 개정 촉구 성명서
-한국서점조합연합회
(서울=뉴스와이어)2005.06.20
'출판및인쇄진흥법 개정안이 열린우리당 우상호 의원의 대표발의로 국회에 상정되어 있는 가운데 책읽는사회만들기국민운동, 어린이도서연구회 등 시민·저작자·출판 관련 13개 단체는 도서정가제 개정을 촉구하는 공동 성명서를 20일 발표했다.
이들 단체는 ‘도서정가제는 국민 모두를 위해 꼭 필요한 공공 문화주권입니다’라는 제목의 성명서에서 “말뿐인 도서정가제로 인해 할인경쟁만 심해지면서 시장질서의 혼탁과 독자의 혼란이 가중되고 있으므로 이를 바로잡아야 한다”고 밝혔다.
성명서에서는 “책은 일반 소비재 상품이 아니라 함께 공유하고 후손에게 물려줄 지식 공공재이고, 도서정가제는 대부분의 문화 선진국이 시행중”이라면서 “오프라인 유통체계에 역차별(인터넷서점만 신간 10% 할인 인정)을 가하는 등 모순 투성이인 현행 법제를 개선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성명서에서는 또 “도서정가제는 ‘가격 선택권’을 제한해 당장은 불이익인 것처럼 보여질 수 있지만 최악의 가격경쟁이 출판시장에 도입되어 독자의 호기심만 자극하는 상업화된 책이 소수의 대형 출판사에 의해 거품가격으로 발행되고 특정 유통경로를 통해서만 책을 구입할 수밖에 없는 상황보다는, 모든 이해 당사자들이 조금씩 양보해 국민 대부분이 이익을 함께 나눌 수 있는 차선책이 도서정가제라고 본다”고 밝혔다.
특히 “현재 우리의 도서정가제 논란을 보면 국가의 공공정책은 부실한 채 매장형 서점과 인터넷서점이 독자를 볼모로 밥그릇 싸움을 하는 듯한 인상을 주는 것은 잘못”이라면서 “책의 위기는 출판산업의 존폐만이 아니라 지식문화 전체의 위기요, 개인과 국가 경쟁력의 위기라는 측면에서 우리 모두가 진지하게 성찰해야 할 시대적 화두”라고 강조했다.
이어 “지식정보사회를 맞아 그 가치가 더 중요해진 책의 유통 및 가격질서를 도서정가제로 확고히 하는 한편, 관련 업계의 마케팅 여지를 남기고 독자의 이익과 구매습관을 고려한다는 측면에서 최소한의 할인율을 법제로 규정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면서 “책 가격 논란을 승화시켜 국민 누구나가 손쉽게 책을 접할 수 있도록 공공도서관의 대폭 증설과 장서 확충에 국가 예산을 투입하도록 요구해야 한다”고 밝혔다.
이에 앞서 사단법인 어린이도서연구회(이사장 부길만)는 지난달 23일 완전 도서정가제 시행을 촉구하는 자체 성명서를 내고 ‘도서정가제 찬성 서명운동’을 전개하고 있다. 어린이도서연구회는 성명서에서 △공정하지 못한 직·간접 할인을 허용하지 말 것 △예외도서 규정을 최소화 할 것 △5년 한시 규정 삭제를 기본으로 하는 완전한 도서정가제 실시를 촉구했다.
공동 성명서에는 책읽는사회만들기국민운동, 어린이도서연구회, 학교도서관네트워크, 사랑의책나누기운동본부(이상 시민단체), 한국문인협회, 민족문학작가회의, 한국문예학술저작권협회(이상 저작자 단체), 한국도서관협회, 대한출판문화협회, 한국출판인회의, 한국대학출판부협회, 한국출판협동조합, 한국서점조합연합회(이상 출판 관련단체)가 참여했다.
공동 성명서
도서정가제는 국민 모두를 위해 꼭 필요한 공공 문화주권입니다
도서정가제란, 동일한 책을 언제 어디서나 전국 균일가로 구매할 수 있는 가격제도입니다. 현재 도서정가제의 확고한 정착을 위한 출판및인쇄진흥법(이하 ‘출판진흥법’) 개정안이 열린우리당 우상호 의원의 대표발의로 국회에 상정되어 있습니다. 말뿐인 도서정가제로 인해 할인경쟁만 심해지면서 시장질서의 혼탁과 독자의 혼란이 가중되고 있기에, 이를 바로잡자는 취지입니다.
그런데 인터넷서점과 할인판매에 익숙해진 네티즌들이 크게 반발하고 있습니다. “싸게 팔고 싸게 살 수 있는 권리를 규제하려는 시대 착오적인 법 개정을 중지하라”는 것이 그 분들의 의견입니다. 심지어는 출판서점계가 자기 밥그릇을 챙기기 위해 자본주의 질서에 역행하는 법 개정을 추진한다는 주장조차 나오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와 같은 피상적인 경제논리는 우리나라의 지식문화 발전과 독자들의 보다 더 큰 권익을 손상시킨다는 점을 우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따라서 저작자, 출판사 및 서점, 소비자 및 문화·독서와 관련된 단체들은 도서정가제가 왜 필요한지, 출판진흥법 개정안이 왜 통과되어야 하는지를 밝혀 책을 사랑하는 국민 여러분의 이해와 협력을 구하고자 합니다.
■ 책은 일반 소비재 상품이 아니라, 함께 공유하고 후손에게 물려줄 지식 공공재입니다
책을 일반적인 소비재나 공산품으로 여긴다면 자본주의 시장경쟁 논리로 보아 도서정가제는 백번 부당할 것입니다. 그러나 책은 개인의 사유물이기에 앞서 우리 사회가 공유하고 나아가 후손들에게 소중히 물려줘야 할 공공의 지식문화 재산입니다. 책이 왜 공공재인지, 우리가 잘 아는 몇 가지 사실을 들어보겠습니다.
첫째, 공공도서관은 국민이 낸 세금으로 운영됩니다. 도서관에서 책을 무료로 보게 하는 것은 기본적으로 일반 상품의 시장기능과는 상반됩니다. 하지만 국민들은 공공도서관의 열람과 대출을 시장의 영역이 아니라 국가가 해야 할 공공의 문화적 의무로 보고 있으며, 도서관은 국민 모두에게 지식문화 접근권을 보장하고 있습니다. 특히 우리나라 국립중앙도서관에서는 도서상품 전체를 국가 지식재산으로 간주하여 정부예산으로 빠짐없이 2부씩 구입·보관하여(납본제도) 후대에 전승하며, 전국의 공공도서관에서는 무료 열람과 대출을 의무적으로 시행합니다. 이러한 반시장적 공공제도를 통해 보급되는 상품은 책밖에 없습니다.
둘째, 신문·방송을 비롯한 각종 대중매체의 서평이나 공공기관·단체 및 대학에서 추천도서를 발표하고 있는데, 이러한 책 소개나 추천도서는 시장논리로만 보면 엄연히 사적인 상품에 대한 마케팅 행위라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누구도 이에 대해 형평성 논란이나 이의를 제기하지 않습니다. 책은 가격이 붙은 문화상품이지만, 그에 앞서 국민 모두에게 꼭 필요한 공공의 지식정보라는 인식에 공감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언론매체는 어느 나라보다도 독서정보 제공과 좋은 책을 소개하는 데 열성적입니다.
셋째,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유일하게 종이책부터 전자책(e-book)에 이르기까지 책의 형태를 불문하고 부가가치세를 면제하고 있습니다. 모든 상품에는 소비자가 지불해야 할 부가가치세 10%가 붙지만, 책은 부가세가 없어 소비자에게 이미 10%의 할인 효과를 주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책이 교육, 학술, 문화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하는 공공재가 아니라면, 이런 특혜를 줄 수가 없을 것입니다.
이와 같이 책은 여러 측면에서 일반 소비재나 공산품과 다른 공공재라는 사회적 합의가 이미 충분히 형성되어 있습니다. 책 이외의 어떤 상품도 그와 같은 공공재로서의 지위를 누리고 있지 않습니다. 책이 공공재라면, 그에 걸맞게 일반 상품과 같은 할인경쟁의 시장질서가 아니라 공공적 가격정책에 의한 콘텐츠 품질경쟁이 추구되는 것이 당연합니다.
또한 책은 저마다 내용과 특성이 달라 비슷한 다른 책과 바꿔서 보기 어려운 비대체성(非代替性), 동일한 상품을 반복적으로 구매하지 않는 소비의 비반복성, 최다 상품수(국내 연간 신간도서 3만 5천여 종) 및 낮은 수요에 기인한 최소 제작(학술도서의 경우 500부~1000부도 부지기수임)에서 알 수 있는 높은 시장실패 가능성 등 다른 상품과 동일하게 비교되기 어려운 여러 가지 특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 도서정가제는 대부분의 문화 선진국들이 시행하는 기초적 문화주권입니다
도서정가제를 우리나라에서만 시행하는 것으로 오해하시는 분들이 계십니다. 하지만 도서정가제는 선진국 클럽이라는 OECD 30개 회원국 중 16개국에서 특별법(9개국)이나 공정거래법(7개국)에 기초해 시행하고 있습니다. 영어권과 출판 미발달국을 제외한 대부분의 민족언어 기반의 출판 선진국들에서 정부와 독자가 옹호하는 제도가 바로 도서정가제입니다. 프랑스, 독일, 스페인, 이탈리아, 네덜란드 등 대부분의 유럽 국가에서 이 제도를 채택하고 있으며, 가까운 일본에서는 도서·잡지는 물론 신문과 음반에도 정가제를 적용하여 지식 및 창작산업 보호에 만전을 기하고 있습니다.
도서정가제를 시행하는 이들 나라 역시 일반 상품에는 강력한 시장경제와 가격경쟁, 소비자 권익단체가 발전해 있습니다. 인터넷서점 역시 뒤쳐졌다는 이야기를 듣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문화적 다양성과 ‘독서 평등’, 그리고 지식유통 질서가 가격경쟁으로 인해 훼손되지 않도록 매우 예외적으로 도서정가제를 특별법으로까지 제정하며 합리적인 출판유통 질서로 인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도서정가제 시행국들은 비시행국들에 비해 GDP 대비 출판산업 비중, 신간 발행종수, 서점 수 비율 등이 한결같이 매우 높아 객관적으로도 제도 시행의 순기능이 평가되고 있습니다. 현재 도서정가제가 없는 미국·영국 등 영어권은 세계 공용어로서의 영향력을 바탕으로 전세계 출판시장에서 ‘규모의 경제’를 추구하고 있지만, 대내적으로는 대량생산-대량광고-대량판매를 통해 극소수 출판사와 서점이 대부분의 출판시장을 장악함으로써 극심한 상업화와 문화 다양성의 위기가 초래되고 있습니다.
강자만 살고 약자는 도태되어도 된다는 경쟁논리, 할인을 통해 성장하는 곳들은 살고 할인경쟁이 어려운 힘없는 동네서점은 사라져도 좋다는 시장논리가 다양성을 생명으로 하는 문화를 살찌울 수 있겠습니까? 가격경쟁으로 공공의 문화복리를 증진시킬 수 있습니까? 그렇다면 문화 공공성을 중시하는 유럽과 일본의 자본주의 논리는 후진적이라는 말입니까? 일반 공산품의 경우 몇몇 대기업이 생산하는 제품만으로도 생활에 큰 불편이 없지만 책은 다릅니다. 모든 저자, 사업자, 독자들이 공정하게 출판문화와 시장에 접근할 수 있는 문화주권과 평등권이 보장되어야 수준 높은 문화 창달도 가능합니다. 선진국 정부나 소비자들은 가격경쟁의 장단점조차 구별하지 못하는 바보들이 아닙니다. 다수 문화 선진국들이 지식경쟁에 앞서가기 위해 채택한 도서정가제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도서정가제는 국민을 위한 기초적 문화주권이자 소비자의 당연한 권리라는 사실입니다.
■ 모순 투성이인 현행 법제를 개선해야 합니다
우리나라의 도서정가제는 문란한 출판유통 질서를 바로잡자는 취지로 출판서점계가 1977년에 본격 도입한 협약제 방식의 정가판매 제도입니다. 가격경쟁이 없는 이 제도 덕분에 마을마다 서점이 생기고, 전국 균일가로 판매됨으로써 모든 독자들이 문화복지와 경제적 혜택을 보았습니다. 80년대 초반에 공정거래법이 제정되면서 도서정가제는 동법이 금지하는 재판매가격유지행위(생산자의 판매가격 지정)의 예외로까지 인정받았습니다.
그러나 90년대 중반부터 대형 할인마트가 책을 가격파괴 상품으로 취급하고 90년대 후반에는 할인형 인터넷서점이 급성장하면서 위기에 직면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협약 방식의 도서정가제에서는 할인판매에 대한 규제가 없어 출판서점계는 수년간의 입법청원 끝에 출판진흥법 제정(2002.8)을 기해 정가제를 의무화시켰던 것입니다.
하지만 법 시행 이후에도 할인판매 열풍이 멈추지 않았고, 할인경쟁이 어려운 중소서점의 폐업은 급증한 반면 인터넷서점 등 할인업체는 급성장하는 결과가 나타났습니다. 실제로 지난 1997년에 5천 개가 넘던 서점 숫자는 절반 이하인 2천 개로 줄었습니다. 이는 현행법이 할인업종에 일방적으로 유리하게 만들어진 말뿐인 정가제법이었기 때문입니다. 즉 정가제 적용 시한은 도서 발행 후 1년간인데, 인터넷서점에만 10% 할인을 인정하고 일반 서점은 할인을 못하도록 규정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정가제 자체를 2007년까지만 시행하고, 이조차 연차적으로 그 범위를 도서분야에 따라 축소한다는 내용입니다. 특히 마일리지 판매(판매 누진 할인제)에 대한 금지조항이 없다보니 정가의 30% 할인은 예사가 되었고, 50% 할인까지도 비일비재한 실정입니다. 여기에 맞서 영업을 할 수 있는 매장형 서점은 대형 서점밖에 없으므로, 중소서점의 도태를 오히려 법적으로 조장하는 결과가 초래된 셈입니다. 중소서점만이 아니라 가격경쟁 및 경품경쟁이 어려운 대다수 소형 출판사의 출판활동 의욕이 꺾이고, 인지도가 낮은 대다수 저자들의 창작의욕이 저하됨으로써, 결과적으로는 독자에게 손해가 되는 구조입니다.
불공평하게 다수의 희생을 볼모로 극소수 할인업체만 성장한다면, 이는 가격 파괴가 아닌 유통질서 파괴라 하겠습니다. 교통질서는 통행자의 안전을 보장하고 모든 차량의 흐름을 공평하게 원활히 하려는 것이 목적입니다. 일시적으로 정체된 고속도로에서 나만 빨리 가려고 교통신호를 무시하고 갓길로 고속 주행을 하는 차량이 늘어나면 교통질서는 엉망이 될 것입니다. 이렇게 정가제와 할인제를 모순되게 혼합시킨 ‘비빔밥 가격제도’로 오프라인 유통체계에 역차별을 가하는 도서 가격제도는 우리나라밖에 없습니다.
■ 도서정가제가 시행되어도 인터넷서점은 성장합니다
인터넷업계에서는 도서정가제가 철저히 시행되면 할인판매를 특성으로 하는 인터넷서점이나 전자상거래 전반에 큰 타격이 있을 것으로 우려합니다. 그런 염려를 하시는 분들을 위해 자료 한 가지를 소개합니다.
문화관광부가 한국출판연구소에 의뢰해 지난해 말에 발행한 <2004년 국민 독서실태 조사>에 따르면, 우리 국민 중 인터넷서점을 이용하는 성인(대학생 포함)은 22.4%인데, 20~40대의 고학력자가 주요 이용자입니다. 이용하는 이유를 우선순위로 알아보니 “서점에 가는 시간과 비용 절약”이 40.2%, “다양한 도서 정보와 편리한 검색”이 26.5%였으며, 이에 비해 “가격 할인(마일리지 포함)”은 31.0%였습니다. 즉 인터넷서점을 이용하는 독자들은 다양한 정보 검색과 편하게 책을 받아볼 수 있다는 장점(약 70%)을 가격 할인(약 30%)보다 훨씬 중시한다는 점입니다. 우리 국민들이 오로지 가격 할인 때문에 인터넷서점을 이용하는 것이 아니므로, 도서정가제가 철저히 시행된다고 해서 이용률이 대폭 줄고 독자들의 이용이 어려워질 것이라고는 보기 어렵다는 사실을 잘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이 조사의 다른 문항에서는 인터넷서점과 대형 할인점, 그리고 일반 서점 등 다양한 출판유통 형태별로 이용하는 이유를 국민들에게 물었습니다. 그 결과 “가격 할인을 해주어서”라는 응답은 전체적으로 6.1%에 불과했습니다. 물론 인터넷서점과 대형 할인점의 이용 이유 가운데 “가격 할인”이 24.8%와 13.3%로 평균치보다 높게 나타났지만, 할인이 제한된다고 해서 영업 자체가 어려워지거나 독자들이 큰 불편을 겪을 것으로는 해석되지 않습니다.
세계 각국에 진출해 있는 다국적 인터넷서점인 아마존닷컴은 본국인 미국과 영국에서는 할인판매를 하지만, 프랑스·독일·일본 등 정가제를 철저히 지키는 나라에서는 도서정가제로 영업을 합니다. 그럼에도 선진적인 독자 서비스로 큰 호응을 받으며 높은 수익률을 올리고 있어 우리나라 인터넷서점들에게 타산지석이 되고 있습니다.
■ 상생의 길이야말로 최선의 해법입니다
이제 각자가 처한 입장만을 따지는 부분적 이해관계에 의해서가 아니라 책을 둘러싼 생태계와 유통질서 전반을 고려하여 도서정가제 문제를 논의하는 상생의 철학이 필요한 때입니다. 함께 잘 살아야 진짜 잘 사는 것입니다. 평범한 일반 국민의 입장에서 이 문제를 객관화시켜 보겠습니다. 저자-출판사-온·오프라인서점-독자 모두가 최대 공약수로 바라는 것은 무엇일까요. 다양하고 개성적인 양질의 출판물이 보다 저렴하게 여러 유통경로를 통해 대다수 국민들에게 원활히 공급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자는 것 아닐까요. 독자들에게는 온·오프라인 유통체계와 크고 작은 종합서점과 전문서점이 모두 필요합니다.
그렇다면 도서정가제와 자유가격제(할인제)를 놓고 다음과 같은 질문들을 해보아야 할 것입니다. 신인 저자들에게 진입장벽이 낮고 출판 기회가 보다 큰 제도는 무엇인가? 상업적 성격이 약하고 소수의 독자들이 읽지만 학술·교육·문화 발전에 기여하는 좋은 책들이 보다 더 많이 출판될 수 있으며 문화적 다양성을 보장할 수 있는 가격제도는 어떤 것인가? 일부 대형 출판사와 대형 서점뿐만이 아니라 다수의 중소형 출판사와 서점, 그리고 인터넷서점 등 다양한 유통경로의 공존 가능성이 높아 각기 다른 수요를 가진 대다수 소비자의 선택권을 보다 더 충족시킬 수 있는 가격제도는 무엇일까? 거품가격을 방지하며 저렴한 가격을 찾기 위한 소비자의 수고를 해소해주고, 콘텐츠 품질경쟁으로 보다 큰 이익을 소비자에게 돌려주는 독자 친화적인 가격제도는 무엇일까? 등등의 질문을 통해 우리는 할인가격제보다는 도서정가제가 보다 더 큰 수익을 독자들에게 제공할 수 있다고 확신합니다.
물론 도서정가제는 ‘가격 선택권’을 제한해 당장은 불이익인 것처럼 보여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최악의 가격경쟁이 출판시장에 도입되어 독자의 호기심만 자극하는 상업화된 책이 소수의 대형 출판사에 의해 거품가격으로 발행되고 특정 유통경로를 통해서만 책을 구입할 수밖에 없는 상황보다는, 모든 이해 당사자들이 조금씩 양보해 국민 대부분이 이익을 함께 나눌 수 있는 차선책이 도서정가제라고 봅니다.
만약 현행법이 개정되지 못한 채 도서정가제가 완전히 사라지고 할인경쟁이 출판시장을 지배하게 되면 소수의 인터넷서점과 대형 서점만 남게 될 것은 불을 보듯 뻔합니다. 그러면 일반 소비재처럼 할인을 전제로 한 거품가격이 형성되고, 직접 내용을 확인하고 사야 하는 책의 특성이나 독자의 중대한 권리가 무시되며, 사회적 약자(노약자, 어린이, 인구밀집도가 낮은 지방 거주자)들의 도서 구매가 불편해지는 등 전국 균일가에 의한 서점의 존립과 문화복지 증대효과는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이뿐 아니라 채산성 높은 상업적 도서는 살아남아도 소수의 독자들만 찾고 가격 경쟁력이 약한 학술·교양·전문도서는 극심한 시장논리에 의해 설자리를 점점 잃게 될 것입니다. 그 동안에는 일반 서점들이 정가제를 기본으로 판매했기 때문에 인터넷서점의 할인효과가 존재할 수 있었지만, 완전히 정가제가 사라지는 상황에서는 기준(정가)이 없어 할인은 곧 거품가격으로 변질될 것입니다. 어느 시대에나 손해보고 장사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기준이나 척도가 없어지면 시장 혼란은 더더욱 심해질 것입니다. 할인제가 독자에게 이익이라는 주장은 책의 특성이나 시장질서를 도외시한 할인업계의 강변이며, 책을 일반 공산품과 동일한 경제논리로만 파악함으로써 독자를 현혹시키는 이기주의입니다. 한국어권이라는 좁은 내수시장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지식산업의 생태계를 근저에서부터 파괴하는 것입니다.
도서정가제를 하면 책값이 비싸질 것이라는 오해도 그릇된 것입니다. 국내에서 연간 3만 5천 종의 새 책(신간)이 발행되고 있는데, 이는 어떤 상품보다도 신상품의 종류가 많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할인경쟁의 위기 속에서 면면히 이어져온 도서정가제 덕분에 책은 지난 30년 가까이 다른 어떤 상품보다도 물가 상승률이 낮았습니다. 또한 책은 싸기 때문에 사서 읽고 비싸면 읽지 않는 소비재 상품이 아닙니다. 적정한 책값을 통해 지식문화의 보루인 출판산업이 발전해야 국민 모두에게 ‘이익의 순환’이 실현될 수 있습니다. 꼭 필요한 사람에게 좋은 내용의 책이 편리하게 공급될 수 있는 유연한 유통구조를 만들어야 합니다.
■ 공공도서관 증설 및 장서 확보가 선결 과제
우리 국민들이 느끼기에 책값은 여전히 비쌉니다. 도서 구입비가 부담스러운 가계가 다수인데다, 먹고 즐기는 데 드는 쓰는 비용에 대한 가치 부여보다는 책에 대한 가치 부여가 상당히 낮기 때문입니다. 영화 한 편은 큰 부담 없이 보면서, 거의 비슷한 값의 책은 비싸게 느낍니다.
정부나 출판서점계 역시 문화적 공공지수가 낮은 것을 먼저 자성해야 합니다. 선진국들의 경우 대규모 공공도서관이나 마을도서관 같은 ‘생활권 도서관’이 근처에 있어서 웬만한 책은 손쉽게 무료로 빌려 읽을 수 있고, 값싼 소형 문고책이나 경장본 도서가 대량 발행되며, 독자들이 읽고 난 도서를 사고 파는 중고도서 유통이 발달되어 있어 경제적 약자들이 비교적 저렴하게 책을 입수해 볼 수 있습니다. 그런 환경에서는 도서가격제도가 어떻게 바뀌든 소비자들의 큰 관심사가 못 됩니다.
현재 우리의 도서정가제 논란을 보면 국가의 공공정책은 부실한 채 사업자들은 서로 잇속을 차리려 하고, 소비자인 독자들만 이리 차이고 저리 차이는 서글픈 현실임을 솔직히 자인합니다. 매장형 서점과 인터넷서점이 독자를 볼모로 밥그릇 싸움을 하는 듯한 인상을 주는 것도 잘못입니다. 영상매체나 인터넷의 무료정보를 선호하는 독자층이 늘어날수록 책이 죽어가는 현실을 직시해야 합니다. 이러한 책의 위기는 출판산업의 존폐만이 아니라 지식문화 전체의 위기요, 개인과 국가 경쟁력의 위기라는 측면에서 우리 모두가 진지하게 성찰해야 할 시대적 화두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지식정보사회를 맞아 그 가치가 더 중요해진 책의 유통 및 가격질서를 도서정가제로 확고히 하는 한편, 관련 업계의 마케팅 여지를 남기고 독자의 이익과 구매습관을 고려한다는 측면에서 최소한의 할인율(예를 들어 정가 대비 5% 내외)을 법제로 규정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판단됩니다. 그리고 이러한 책 가격 논란을 승화시켜 국민 누구나가 손쉽게 책을 접할 수 있도록 공공도서관의 대폭 증설과 장서 확충에 국가 예산을 투입하도록 요구해야 할 것입니다. 대한민국을 지식강국으로 만들고, 지역간·계층간 지식정보 격차를 해소하며, 여가시간이 늘고 고령화되는 사회에서 삶의 질을 제고하기 위해서는 ‘문화 사랑방’인 도서관 중심의 독서환경 구축이 선결 과제인 것입니다. 책은 무조건 사서 보는 것이 아니라, 선진국들처럼 웬만한 책은 공공도서관에서 빌려보고 꼭 소장할 필요가 있는 책은 편한 곳에서 사서 볼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야 하겠습니다.
책과 문화를 소중히 여기는 국민 여러분의 따뜻한 성원이 위기에 빠진 도서정가제를 살리고 우리와 후손의 미래를 밝게 만들 것입니다.
책읽는사회만들기국민운동, 어린이도서연구회, 학교도서관네트워크, 사랑의책나누기운동본부(이상 시민단체), 한국문인협회, 민족문학작가회의, 한국문예학술저작권협회(이상 저작자 단체), 한국도서관협회, 대한출판문화협회, 한국출판인회의, 한국대학출판부협회, 한국출판협동조합, 한국서점조합연합회(이상 출판 관련단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