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를 데리고 다니는 부인 Mr. Know 세계문학 45
안톤 파블로비치 체홉 지음, 오종우 옮김 / 열린책들 / 2007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주제도 모르고 나는 '인생을 농담하듯이 살고싶다'라고 말하고 다닌 적이 있다.

그런 정도의 내공이 쌓이지도 않았을 뿐더러, 진정한 [농담]의 맛을 알지도 못하고 할 수 있다고 착각했던 것이다, 그때는.

지금은 내가 그럴 수준이 못된다는 정도는 아니, 그나마 좀 다행이라고 자위하곤 한다만,

아, 이런 소설 한권 읽고 나면 한번 그렇게 살아보고싶다는 생각에 살짝 미련이 남고만다.

 

인간 사회의 부조리함이나 위선에 예리한 메스를 대고, 사회정의나 인간성의 구현 같은 것에 또박또박 자기 의견을 내는 것, 이것이 정답이다 저것은 오류다 라는 식의 해설을 해보는 것, 세련되게 문장을 구사하는 건,

글재주가 있고 한 분야에 천착해서 공부하다보면 어느 정도 도달할 수도 있는 경지이겠지만,

체홉같은 글을 쓰는건,

그건 천재적인 재능에 따스한 마음이 더해지지 않으면 불가능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는 누구보다도 아픈 가슴과 고단한 일상을 지난하게 일궈가고 있는 우리들의 삶을 공감하며 알아봐준다.

그렇지만 섣불리 아는 척 하지 않고, 섣불리 평가하지는 더더욱 아니하며, 대신에 소박한 '농담'을 건네준다.

길지 않은 글로써, 잠깐씩이나마 나와 내 주변을 돌아보게 하고 미소짓거나 눈물 짓게 해준다.

 

이 리뷰를 적고 있는 지금, 어쩐지 찰리 채플린의 복장을 한 체홉이 추운 겨울에 페치까로 나를 데리고 가서 손을 높이 치들었다가 내리며 살짝 웃어주는 것 같은 느낌이 들고,

얼었던 내 마음과 곱았던 손이 풀어지면서 페치까 앞에서 한없이 평안해질 것만 같다.

그리고 나와 같은 모든 , 조금은 불행하고 조금은 행복한 시간들을 지내는 주변의 사람들에게 이전보다 성숙하고 따뜻한 시선 하나 쯤은 여유롭게 갖고 살아갈 수 있는 희망도 갖게 될 것만 같다.

고맙습니다, 안톤 체홉님.

그리고 한편 미안한 말이지만, 44세 나이로 일찍 돌아가셔서 더욱 고맙습니다.

왠지, 당신이 나이가 들면서 변하는건 보고 싶지 않았을거 같아요. 딱 이정도가 저에겐 더할 나위 없이 좋았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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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무비 2006-08-26 17: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54세 정도는 괜찮지 않아요?=3=3

'천재적인 재능에 따스한 마음이 더해지지 않으면 불가능하다는 생각'에
동감입니다.^^

치니 2006-08-26 17: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로드무비님, 글을 수정하고 있었는데 벌써 댓글을. ^-^;;;
항상 마무리가 되기도 전에 등록을 눌러버려서, 수정만 대여섯번 눌러야 한답니다.

54세도, 그러고보니, 괜찮아요. 헤헤.

로드무비 2006-08-26 17: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컴이 하도 다운이 잘되어 저도 무조건 눌러놓고 본답니다.
수정은 눈에 띄는 대로 하나씩.ㅎㅎ
가끔 보이는 '누다 만 똥' 같은 페이퍼나 리뷰는 전부 그 때문입니다.( '')

치니 2006-08-26 17: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누다 만 똥, 와하하 역시 로드무비님의 표현력은 촌철살인의 수준.

mooni 2006-08-27 03: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빨리 죽어서 고맙다니....그거야말로, 촌철로 살인하는, 저주성의 칭찬(?)으로....ㅋㅋ 맞습니다. 오래오래, 그리고 떼를 지어서 많이 사는 것은 정말 그저 보통의, 따스함도 주지 않고, 인색하기 짝없는 농담 못하는 각박한 사람들로. 천재는 홀로 고독하게 빨리 죽어야...ㅎㅎ (그런 의미에서 저는 장수할 것같아욤. ㅋ)

그나저나, 맞아요. 체홉도 멋쟁이죠. ^-^

치니 2006-08-27 13: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하연님, 으흐흐 사실 저렇게 써놓고 철딱서니 없다고 혀를 차는 소리가 어디서 들리는거 같았는데... 저도 이렇게 지지고 볶으면서, 멋없게, 오래 살거 같아요.

sudan 2006-08-27 22: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톤 체홉의 단편 몇개는 정말 좋은데(저 책 중에도 읽으면서 펑 펑 울었던 소설이 하나 있어요.), 진짜로 안톤 체홉이 좋은 줄은 모르겠어요. 전 아직 체홉을 이해할 주제가 못 되나봐요.. -_-

치니 2006-08-28 08: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수단님, 안그래도 이 책 읽으면서 수단님이 예전에 체홉에 대해 썼던 게 기억 나드라구요. 저도 다 이해가 된건 아니었지만...경외감이 들어서요.
펑펑 울었던 소설, 음, 뭘까 궁금해요. <애수>일까?
 
아담이 눈뜰 때 장정일 문학선집 5
장정일 지음 / 김영사 / 2005년 10월
평점 :
절판


얼마전 해외 바이어가 온 김에 갖게 된 접대 및 회식 자리에서의 일화.

우리끼리 회식을 한다면, 소주나 맥주 정도겠지만, 바이어가 있는 자리인지라, 그나마 바 한구석에서 위스키를 과감히 시켜, 소위 키핑이라는 걸 해가며 마시는데,

A는 B에게 (근 일년만 쯤일까) 한 잔 위스키를 온더락으로 따라 주며 이렇게 말한다.

"자 이거 좋은 술이다. 한번 마셔봐. 넌 체질과는 달리, 또 이런 귀족적인 맛을 좋아하는데가 있잖아"라고.

그리고나서, 반농담처럼, 위스키 맛을 우리나라 사람이 어떻게 알 수 있는가, 과연 그 '귀족적'인 체질이란, 문화적 사대주의랑은 다른 어떤것인가, 취향의 귀족성이란 어디서 나타나는가, 그걸 알아볼만한 수준이란 무엇인가, 그런 우습기도 슬프기도 한 단발성 생각에 따른 비아냥스러운 대화가 잠시 오고갔다.

B가 외모나 말투, 행동 등에서 평소 소위 귀족스러움 (유복한 가정에서 고민 없이 자란 정도의 인상 이나마) 을 풍겨주었더라면, A는 그런 말을 내뱉지 않았을게고 (물론, 칭찬도 비웃음도 독려도 아닌 저런 말을 하는 A의 대화방식이 우선 별로다만), 그렇다면, 천민의 생활이 몸에 밴 사람은 어디서 어떻게든 티가 난단 소리다. 그럴만한 주제도 아니고 배경도 없으면서, 귀족적인 취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죄는 아니지만 우스워보인단 소리기도 하겠고,좀 더 티가 안나도록 노력해야 한단 소리기도 하겠다.

자 이제 장정일을 보자.

소년원 경력에 수위를 넘는다고 판단되는 작품의 '저질' 표현 때문에 투옥되기도 하는 등, 소위 세속에서의 이미지가 꽤나 신산하고 강렬한 이 사람.

12살에 아버지가 죽었을 때 "이젠 해방이다!"라고 호기롭게 외쳐버리고 말아서 온 친척의 기함을 들었으며, 19세에는 소년원에 수감되어 소위 볼 꼴 못 볼 꼴 다 보았고 , 군대를 가지 않기 위해 가난을 짊어지고 건물 화장실 청소를 하는 어머니가 믿던 여호와증인을 믿는 척을 한 뒤, 학교를 불신하여 퇴학을 당하고, 엄청난 양의 독서와 습작으로 작가가 된 이 사람.

천민의 생활이라는게 있다면, 이 사람이 그것을 대체로 겪어보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인데,

타고나길 그랬는지 자라면서 어떤 영향을 받았는지

아무튼 이사람의 정신은 , 그런 피폐하기 짝이 없는 배경에도 불구, 충분히 귀족적이고 비범해보인다.

클래식 음악을 너무 좋아해서 돈이 없는데도 매일매일 좋은 음향기기를 판매하는 샵 앞을 기웃거리며,

마이클 잭슨의 빌리지 같이 '혼'이 없는 음악은 쓰레기라서 들어줄 수가 없고,

작품 속 주인공 '나'의 첫번째 여자친구이자 어린 나이에 시인으로 데뷔한 은선이 그러했듯이, 일류 대학에 들어갔지만 개념도 없이 운동권의 시를 따라 쓰기나 하고, 그것으로 정치적인 섞임을 시도하고 무력한 군중이 되기를 자처하는 , 다른 사람들이 흔히 갖고 있는 유치한 싸구려 감성에 대해서 더할 수 없이 객관적이고, 냉정하다.

그래서 그에게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교류라는 것은 통념적이지 않은 섹스를 통해서나 방출이 되고,

음악과 독서 같은 일인으로 충분하고 어쩌면 일인이어야만 하는 고립된 문화 향유만이 돌파구인 생활이 오래도록 이어진다.

소설로서는 데뷔작인 듯한 <아담이 눈 뜰 때>는 나름대로 치열했던 그만의 청년시절과 버무려져서 90년대식 향수에 젖게 만들기도하고, 최근의 장정일 소설과 비교하자면 너무 유치해서 어이가 없게 만들기도 하는 기우뚱한 불균형의 대표작이다.

나로 말하자면, 이러한 향수가 마뜩치는 않아서 별 재미가 없지만, 최근과 비교해보게 되는 순간, 이 작가가 얼마나 많은 노력을 부단히 기울여가며 자신의 글에 매질을 해왔는지, 느끼는 것만으로도 읽을만한 가치를 주는 작품이다.

최초의 작품에 비해 점점 성의 없고 열등해져가는 , 그야말로 날로 먹는 작가 짓을 뻔뻔히 해가는 사람도 얼마나 많은 시국이더냐.

아무튼 요즘 마포도서관 맛들린 상태에서 발견한 장정일의 삼국지 총 10권, 다음 대출 예상 리스트.

으흑 다 읽을 근력이 되려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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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륜의동화 2006-08-23 21: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은 근력으로 읽는다'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sudan 2006-08-24 03: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정한 치니님. 별로라고 말씀하시면서도 읽을만한 가치를 따로 찾아내신다니깐요.

치니 2006-08-24 09: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불륜의 동화님 / 와 , 누추한 제 방에도 들러주시고, 영광입니다. 여름비도 이제 한두차례면 끝인 거 같네요 , 가을 준비, 잘 하구 계시죠? ^-^
수단님 / 에헤...다정하게 봐주시는 수단님이 더 다정한거 같아요. 안 짚어도 되는 부분을 괜히 짚어냈다가 주변에서 쿠사리 먹는 적이 꽤 많은걸요.

로드무비 2006-08-26 08: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바이어' 어쩌고 하시니 너무 유능해 보이시잖아요.ㅎㅎ
전문직에 약합니다.
제목이 참 재밌네요.
글도 그렇고요.
아무래도 장정일은 시가 더 좋은 듯.^^

치니 2006-08-26 13: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드무비님 / 유능이라뇨, 으하. 바이어건 누구건, 제발 오지 좀 말길 맨날 기도하며 사는 우울한 직딩일 뿐입니다. 글이야 로드무비님처럼 재미나게 쓰시는 분이 또 몇 있을라구요 ^-^
 
우리들의 작문교실 생각의나무 우리소설 8
조민희 지음 / 생각의나무 / 2005년 7월
평점 :
절판


상당히 신선했다고 기억되는 어느 어느 상을 받은 <우리들의 작문교실>이라는 단편이 포함된 조민희 작가의 첫번째 단편집이다.

그야말로 밑줄 긋고 싶은 신선하고 야무진 표현들이 있었고, 단순하게 감각적인 문장 수사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인물의 마음 바닥에서부터 길어올린 것 같은 울림이 있었다고 느꼈었던,

그 <우리들의 작문교실>.

책을 펼쳐 첫번째 두번째 단편을 읽어갈 때 까지만 해도, 예의 상 탄 작품을 능가할만한 수작을 기대하는 마음을 저버리지 않았건만,

끝내 그 이상이라고 박수를 쳐줄만한 작품은, 내겐 없었다.

아무래도 현재로서는 이 작가에게는 경험한 것 만큼만, 잘 알고 있는 것 만큼만을 밀도있게 조정하여 풀어내는 능력을 초월하는 상상력 펼치기의 작문교실이 여전히 필요한 것 같다.

*

가끔 나도,

가슴이 답답하고 알 수 없는 우울이나 근심에 시달리면 무언가를 마구 적고 싶어진다.

<우리들의 작문교실>에 나오는 위니와 펄처럼, 말도 안되는 제목이라도 하달 받으면 그에 맞건 아니건 말로는 어쩐지 잘 안되던 것들을 줄줄 흘려버리고 싶은 마음이 든다.

그런데 이제 너무 커버린 나는 작문교실을 쉽게 노크하지 못하고, 안이하게 돌아다니며 수많은 블로그와 서재를 들락거리면서, 이러쿵 저러쿵 토나 다는 것이 일상이 되어버렸다.

뭐든 열심히 하는 걸 못하는 천성 탓에 이 모양이긴 하지만, 어릴 적에 제대로 작문 수업을 받는 노력을 기울였다면, 작가는 못되었더라도 글 쓰는 직업은 가질 수 있지 않았으려나 아쉬운 마음이 들기도 한다.

아쉬움은 이제 그만.

무조건 읽어대는 습관도 이제 좀 자중하고.

뭐든지, 하려면 좀 제대로 해야겠다. 애꿎은 작가들 질타하기 이전에 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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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dan 2006-08-21 01: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전엔 세련된 문장을 쓰는 분들이 그렇게 부러웠는데, 요즘 드는 생각이 글 쓰기가 문제가 아니라 관점이 문제인 것 같아요. 음, 그러니까 주변을 바라보는 따듯한 시선같은거요. 멋부리지 않고 소박하게 진정성을 드러내는 글이 좋더라구요. 하지만 그런 건 어디 가서 배울 수도 없는 거라. (그런데, 치니 님은 욕심도 많으세요. 글을 얼마나 잘 쓰시려고 그러세요.)

치니 2006-08-21 08: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 저도 그래요, 아무리 세련되고 잘 썼어도 멋 좀 냈다는 티가 나면 외면하게 되요. 그런데 쓰는 사람의 입장에서야, 소박하면서도 말하고 싶은 것을 잘 표현한다는게 그리 쉽지만은 않으리라 이해가 가기도 하죠.
욕심은요 뭘. 그래도 그런 이해를 하는 독자로서, 너무 잘쓴다 못쓴다 타박이 많은 거 같아서, 반성 좀 한거죠.^-^;;

로드무비 2006-08-21 15: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리들의 작문교실'은 저도 생각나요.
읽으며 참신하다고 생각했는데.....
자기 스스로 먼저 도취한 글이나 문장은 저도 싫어요.
전 너무 도취가 안되어 문제입니다만.ㅎㅎ

수단님 뵈니 너무 반갑네요.^^

2006-08-21 15: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치니 2006-08-21 16: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드무비님, 맞아요 스스로 먼저 도취한 글이나 문장, 그런 가짜(라고까지 하면 너무 한건가)는 티가 팍 나죠.
저도 도취가 안되어서 이렇게 냉정한가봅니다만. ^_^

속삭이신 님 / 이야 , 기뻐요. 기다리는 마음.

mooni 2006-08-21 23: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고등학교때 작문시간이 거의 쥐약이나 진배없었어요. 얼마나 지겨웠던지. 교실에서 배워야 하는 작문이란 건 뭔가 끔찍해요...그러나 그런 얘기는 아닌 것같고. 다른건 몰라도 치니님 추천의 작문교실,은 읽어보고 싶어지네요. ^^ (치니님도 참 구석구석 읽으셔요. 전 치니님 보시는 책들 중에 먼저 본게 거의 없어요. 이 책도 첨 봐요. -_- )

치니 2006-08-22 08: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하연님 , 뭐든지 학교에서 하면 왜 그리 재미가 없는지들. 클클 문제가 학교 쪽인가 내 쪽인가, 아무래도 학교 쪽이 더 하겠죠?
에헷 제가 구석구석 읽어서라기보담, 마하연님은 모르는 분야 잘 찾아보시는 편이고, 저는 그냥 원래 알던거만 죽 또 찾아보는 편이라 길이 다른거 아닌가 싶어요.
이 작가의 글을 읽으려면, 이 단편집보다는 전에 상을 탔던 - 아 어느 상인지 기억이 잘 안나욤 - 그 문학상 수상집을 사는 편이 나을 듯 합니다만... ^-^;;
 
나는 고양이로소이다 문학사상 세계문학 14
나쓰메 소세키 지음, 유유정 옮김 / 문학사상사 / 199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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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내게 어떻게 하면 잘 살까와 비슷한 빈도수로 떠오르는 주제는,

어떻게 하면 잘 죽을까.

1. 얼마전 뉴스에서 본 보랏빛 스카프로 손목 꼭 매고 동반 자살한 할머니 할아버지 같은 죽음,

- 이건 중풍이나 치매에 걸렸을 때 써먹겠고,

2. 얼마전 [커피와 담배]에서 짐 자무쉬가 그려낸 커피 마시고 담배 피다가, 어디선가 꿈결처럼 들려오는 말러의 아리아를 듣고,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음악이야... 읊조리다가, 낮잠 자는 죽음,

- 이건 정말 운이 좋아야 하니 기대를 말아야겠고,

3. 엊그제 겨우 책장을 덮은 이 책에 나오는 고양이처럼 맥주 두 잔 마시고 취해서 독에 빠진 지 모르고 그냥 미끄러지듯 안녕 하는 죽음.

- 이건 어째 좀 낭패감은 들겠다만 특이해서 일단 기억해두기로.

 

짐 자무쉬가 커피와 담배 따위로 족히 열 몇가지 되어보이는 이야기를,

재미없어 하품 나 소리도 못하게 꼼짝 붙들어매놓고 보여주어도 볼멘 소리 한마디 못하겠는 것처럼,

우리 쏘쎄키 선생님이 이 길게 길게 늘어진 뫼비우스의 띠 같은 이야기를 시도 때도  없이 삼천포로 빠져가며 , 자조와 냉소와 비난과 반성 속에서 허우적대는 걸 보기가 지겨울지라도,

불평 한마디 못하고 고개를 숙이게 되는 건,

세상에는 역시,

잘난 이야기꾼들이 많지만, 존경하게 하는 이야기꾼이 턱없이 부족해보이기 때문일 것.

 

독서의 재미란,

여전히 팔랑팔랑 넘어가는 것보다는,

조금은 엄숙한 데서 찾아지는 건지도.

족히 한달 가까이 걸려 완독한 이 책이, 미욱하기보다는 애장품같은 표표한 빛을 발휘하는 걸 보면 말이다.

 

* 하하하 , 그러고보니 그렇게 욕해놓고 또 문학사상사의 출판본을 골랐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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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oni 2006-08-11 00: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이. 나는 쥐잡지 않는 고양이다로 시작해서 죽어야 평안이 온다 나무아미타불로 끝났었죠...맞아요. 팔랑팔랑 안넘어가는 책이었는데, 대뜸 기억이 나는군요. ^^

치니 2006-08-11 08: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하연님, 바꾼 서재 이미지 색깔이 고와요. ^-^

Fox in the snow 2006-08-11 11: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이런 우연이..저 지난주에 이거 도서관에서 빌려왔어요. 같이 빌려온 다른 녀석이 진도가 안나가서 못읽고 있는데...
전 늙어죽는 로망이...살아 있다는게 가끔 아슬아슬 하거든요.

치니 2006-08-11 12: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Fox in the snow님, 아리랑도서관에도 이 책이 있었군요. ^-^
살아있다는건, 정말 가끔 기적 같기도 하죠...

2006-08-16 15: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치니 2006-08-16 17: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속삭이신 님, 너무 감사합니다.
그쪽으로 가서 주소 올리겠나이다...
 
에세이스트의 책상
배수아 지음 / 문학동네 / 200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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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하고 싶기는 커녕 구역질이 나려는 것을 억지로 참으며 견뎌내야만 하는 '인파'로 표현되는 거대한 세상의 무리.

작가가 줄곧, 의도적이든 아니든 어떻게든 피해보려는 제스추어를 보여주면서도,

어떻게든 소통하려는 것도 결국 이 무리일진대...

 

정작 비애는, 바로 거기에 있다.

차라리 아무것에도 속하지 않고 아무것에도 바라지 않으며 아무하고도 나누지 않고 살아가겠다 라고 다짐하고 싶지만,

책 속의 나 혹은 배수아는, 미치도록 원하는 소통의 본질이, 그 무리에는 있지 않다고 믿는 듯 하다.

그 무리에는 없되 얄궂게도 포기 할 수 없는 것이,

그렇다고 아주 없는 것도 아니어서 소설 속의 M처럼 '나'의 나르시즘을 완전히 커버해주는 식으로, 어렵사리 관계 맺기나마 시작이 되는 것이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어떻게 이 남루한 세상과 그 속의 사람들과 화해를 해야 할 지,

알 수 없어서 방황하는,

그러나 그 방황은 이전의 작품 속에 비춰지던 것보다 훨씬 성숙한 것이 그나마 진일보.

 

독자들이라고, 그런 화해 방법을 알 리 없다.

그런 방법이나 쉽게 알자고 책을 읽는 것도 (물론) 아니겠지만, 또, 누구나 깊이 자기자신을 들여다보면 생각하게 되는 것을 재확인하자고 읽는 것도 아니니,

배수아에 대해 이런저런 불퉁한 소리나, 조심스럽긴 하나 매서운 충고가 잇따르는 것도 당연하지 싶다.

그래도 별 4개는 뚜렷하려고 끊임없이 노력하며, 섣부른 멋내기가 아니라 지난하고 진지한 성찰에서 나오는 몇몇 특별 공감 밑줄용 문장들에 대한 보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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뷰리풀말미잘 2006-07-28 13: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배수아는 도대체 어떤 작가인가요? 지금 제 책상에 며칠전부터 배수아의 '독학자'가 놓여있는데 이걸 봐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는 중입니다. ^^

sudan 2006-07-28 13: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특별 공감 문장들에 대한 보답으로 별 넷. 좋은데요? 치니님만이 매길 수 있는 다정한 별점 같아요.

치니 2006-07-28 16: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뷰티풀말미잘 / 음, 도대체 어떤 작가인가, 질문을 보고 저도 잠깐 또 생각해봤는데, 한번쯤 어떤지 읽어본다고 손해날 것은 없다 싶습니다. 물론 시간에 대한 자신만의 사용방법에 따라 손해냐 아니냐 판단도 달라질 지 모르지만... 그냥 제 경우에는 읽어볼만 한거 같아요.

Sudan / 제가 다정하다기보다는 변덕이 좀...헤헤. 예전엔 욕 바가지로 했었는데, 이젠 서서히 맘이 풀려서 이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