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절이 하수상하다.
그런데 가만 생각해보면, 시절이 하수상하지 않았던 날들이 어디 하루라도 있었던가 싶다.
우리는 왜 요 모양 요 꼴로 살고 있나, 싶어서 무기력한 마음에 가만 되돌아 보면,
허, 참, 어이없게도 더 기만적이고 더 무섭고 더 끔찍한 시절을 거쳐 왔다.
그러나 단순 비교로 마음이 가벼워지지는 않는다.
인간은 언제나 지금 이 순간보다 나은 순간을 염원하고,
인간은 언제나 가장 이기적인 순간에도 남을 생각하기에,
모자라고 못마땅한 것들이 끊임없이 나타난다.
그래서 가만 있지를 못하고, 또 책을 읽는다.
어째서 이렇게 되었나 궁금해서 역사를 더듬어 확인하고 싶고, 어떻게 이 상황을 벗어날까 싶어서 다른 이들이 제시하는 다른 삶을 들여다 본다.
자발적으로 고른 책이 아니라 둘 다 누군가에게서 받은 책이지만, 아래 두 가지 책을 읽으면서, '우선 알고 좀 바꾸고 싶은' 내 마음을 발견했던 것이다.
이 책은 예의 '지금 이 꼴이 어떻게 해서 만들어졌나' 에 대한 궁금증 해소 측면에서 약간의 해답을 주는 책이다. 제목 그대로, 우리가 익히 그러려니 하는 시간과 공간이란 것의 개념을 역사적으로 되짚고 철학적, 사회학적으로 더듬어 볼 뿐만아니라, 음악과 미술, 수학과 과학, 심리학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분석 도구를 활용하고 있다. 그래서 무식한 나로서는 - 특히, 수학! ㅠㅠ 학교 다닐 때 함수와 기하학의 개념이라도 제대로 배워 뒀더라면, 이렇게 깜깜하진 않았을 텐데 - 반절은 그 설명을 이해하지 못한 채 독서를 끝내야 하는 아쉬움이 남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책을 쓰고 읽는다는 것은 유의미하다는 생각이 든다. 시간과 공간을 지배하려는 욕망이 근대에서 어떻게 구현되었나를 전반적으로 이해하기만 해도, 그 '만들어진' 시간과 공간의 제약 속에서 누릴 수 있는 자유와 깨버려야 하는 구속이 어디까지일까에 대한 생각은 조금쯤 정리가 되는 것 같아서.
사람이란, 특히 근대의 사람이란, 모두들 양가적 심정을 지니고 살아가는 것 같다. 불편부당한, 내가 사는 이 자리에 굳건히 발을 디디면서 주변 환경을 어떻게든 바꾸고 싶은 마음과 (실상은 그 어디에도 없을) 유토피아에 가까운 휴식처를 기대하는 마음. 매양 툴툴거려 봐야, 대도시에서 자라고 대도시에서 편리한 생활에 익숙해진 우리들이 어느날 문득 '아, 단 한 달이라도 좋으니 아무 생각없이 자연 속에서 쉬고 싶다'고 한들, 프로방스로, 아니, 프로방스로 대변되는 조용하고 하루종일 할 일이라곤 먹고 산책하고 책 읽는 정도 밖에 없는 시골이라 치자, 그런 곳으로 갈 마음을 먹기 쉬울까.
여기 정수복 박사님처럼 자유롭지만 약간의 돈은 있는 직업이 우선적으로 전제되어야 가능한 건 아닐까.
책 속에서 '그렇지만은 않습니다!'라고 강하게 말해주는 구절을 찾고 싶은 마음에 서둘러 책장을 넘겼지만 아쉽게도 없었다.
환경운동가로도 활동하셨다는 저자의 이력 치고는 너무나 반들반들하고 색색 칼라로 장식된 페이지의 면면들이 거슬리기도 했다.
이런 구절을 읽으니, 진짜 얄미워지기까지 한다.
"낮잠, 그건 게으름의 표현이 아니라 자연의 리듬에 순응하는 겸손함의 표현이다. 낮잠 시간의 정적은 쫓기는 마음에 여유를 되찾아주며 고단한 삶에 짧으나마 망각의 순간을 부여한다. 여름날의 낮잠이야말로 삶의 질을 높여주는 필수 요소다. 그러기에 프로방스의 낮잠이여 영원하라!"
그래, 삶의 질을 높여야지, 높이고 싶다. 그런데 당장, 그럴 만한 시간과 돈이 없다는 게 우리들의 진심어린 핑계이다. 가만 있자, 그런데 정말 그럴까. 아까 근대적인 시공간에 대한 책을 읽었던 기억을 되살려 보니, 돈은 그렇다 쳐도 시간 만큼은 만들면 있는 거라는 생각이 든다. 어쩌면, 손에 쥔 게 너무나도 많은 나머지 그 중 몇 가지만 놓아도 충분히 만들 수 있는 시간을 송두리째 잊고 있는 건 아닐까. 그 시간을 낮잠 자는데 쓴다고 해도 당장 굶지는 않을 수도 있지 않을까. 낮잠은커녕 밤잠 좀 남들처럼 자게 해달라는 유성기업의 노동자들이 있는데도 내가 내 낮잠을 챙겨서, 캥기지 않을 수 있을까. 내가 내 낮잠을 온전하게 즐기는 것이, 그런 나 같은 사람이 많아지는 것이, 길게 봐서 밤잠도 못 자는 노동자의 실태에 도움이 되는 걸까, 그 반대일까. 혼란스럽다.
낮잠 타령은 여기까지 하고, 신념대로 산다는 게 어떤 건지, 차라리 그 생각을 해보자.
프로방스의 휴식을 에찬하기만 하는 줄로 알았던 책이, 어느새 카뮈와 고흐의 생애로 옮겨 가면서 지식인의 책무에 대한 내용으로 꽤 많이 옮겨가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좀 묘하다. 여행 관련 서적을 둘로 나눈다면, 여행 그 자체 장소 그 자체에 의미를 두고 쓴 책이 있고, 그 떠돌아 다니는 정서와 각 장소에서 자신만이 느끼는 사유에 의미를 두고 쓴 책이 있는데, 이 책은 둘 중 어디에도 온전히 속하지 못한다. 그래서 때때로 산만하고 때때로 의미심장하며 때때로 재미있고 때때로 재미가 없다. 옳다고도 아니라고도, 좋다고도 싫다고도, 하기 힘든 책. 좀 희한하다)
"카뮈는 '빛과 존재의 행복감과 자유로운 삶'을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사르트르가 프란츠 파농의 '대지의 저주받은 자들'의 서문을 통해 불의의 폭력은 거부해야 하지만 정당한 폭력은 인정해야 한다는 주장을 펼 때 카뮈는 침묵을 택했다. 그는 자기 어머니가 탄 버스에 알제리 독립을 위해 던져진 폭탄 사고로 어머니가 죽는 상황을 그리면서 그렇게 얻어진 독립보다는 어머니를 선택하겠다고 말했다. (중략) 그는 의심과 회의가 없는 완제품의 이념, 도덕, 신념과 언제나 일정한 거리를 유지했다. 회의없는 이념과 신앙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가를 그는 십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모든 도그마는 폭력 사태를 불러오고 기계적 평등은 자유를 압살할 수 있음을 간과했던 것이다."
이렇게 썼던 저자는 뒤 어딘가에서는 또, 지식인이라면 사회의 불의에 맞서야 마땅하기 때문에 부당함과 불의가 있는 한 언제나 핍박 받는 대상이 될 수 밖에 없다고도 쓰고 있다.
그렇다면 정수복 선생이 말하는 '분류가 불가능한 독자적 지식인' (으로 살아갈 것이라고 책 속에서 천명하고 있다)이란, 아마도 카뮈처럼 자유로운 삶을 결코 포기하지 않되, 불의에는 맞서며, 모든 종류의 폭력에는 적극 반대하고 그 체험을 예술적으로 승화해서 나누고자 하는 지식인이라는 뜻이겠다.
그런데 나로서는, 어떻게 해야 그런 경지가 가능한지 잘 가늠이 되지 않는다. 카뮈가 어머니를 택하는 지점은 이해가 가지만 정수복 선생은 아직 잘 이해가 가지 않는다. 기회가 된다면, 이 분의 생각이 좀 더 자세히 설명된 다른 책을 읽어 봐야 할 모양이다.
정리되지 않는 생각을 글로 주절주절 풀고 있자니, 문득 어제 본 트위터 글이 생각난다.
'노동자에 대한 부당대우에 분노하는 사람도 당장 식당에 가서 종업원을 종 부리듯 하거나, 조금만 느리거나 불친절해도 벌컥 화를 내는 경우를 종종 본다. 아무리 '대의'를 알아도 결국 일상을 바꾸지 못하면 아무 것도 안 된다' (@hye_si)'
대의, 아직 잘 모르겠다. 내가 아는 것은, 그렇다, 이 글을 리트윗한 김진숙 씨가 '인간에 대한 예의'라고 쓴 것처럼, 최소한 내가 받고 싶은 대접을 남에게 하는 일상이라도 꾸려야겠다는 것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