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일러 있어요)
어릴 때 가끔은 고아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사람이 나 뿐일까, 혹시 내 부모가 서로 사이가 안 좋아서 그런 생각을 한 걸까 아니면 모두 한번쯤은 그러는 걸까 궁금했던 적이 있다.
아이를 낳고 나서는 이 아이도 언젠가는 엄마의 존재를 귀찮게 여길 날이 오겠지, 이토록 밀착된 관계가 벌어지는 날이 오고야 말겠지, 나처럼 차라리 고아였으면 하는 생각도 할까, 궁금을 넘어서 약간의 조바심을 가지고 아이를 불안하게 살핀 적도 여러 번 있다.
그래서 영화 <케빈에 대하여>를 볼까 말까 망설였다.
가장 치부에 가깝다고 생각하는 부분을 건드리면 어쩌나, 조금 무서웠다.
그러나 영화는 예상보다 무섭지 않았다. 내가 그 사이 조금쯤은 어른스러워진 건지, 지레 겁을 먹어서 또 지레 의연을 떨었던 건지 모르지만, 견딜 만했다.
영화 제목 그대로 주제는 '우리는 케빈에 대해서 이야기할 필요가 있다'는 것일 게다.
그래, 케빈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싶다, 그것도 아주 많이.
그런데 케빈에 대해서 이야기하려면 그 부모에 대해서 우선 얘기해야 한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자명한 사실 - 부모 없는 아이란 사실상 존재하지 않으니까. 심리학자들이 주창하듯, 아이의 성격이 유전적인 것 외에도 환경적인 영향으로 인해 형성된다는 점에 대해서 얘기해보려면, 더더욱 부모를 빼놓을 수 없는 것이다.
케빈의 부모는 자유로운 영혼을 지닌 사람들이었다, 아니 본인들은 그런 줄 아는 사람들이었다.
둘 중에서도 엄마는 유독 그랬다. 모험심이 가득해서 온 벽지에 지도를 붙일 정도로 세상 어디로든 떠날 준비가 된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이, 하룻밤 낭만에 못 이겨 정사를 나누고 무책임하게(!!!) 아기를 갖고 낳는다. (이 대목에서 영화는 자꾸만 오늘밤 해도 괜찮은 상황이냐고 묻는 남자의 대사를 넣는다. 그래, 나도 못마땅했다. 왜 자꾸 묻는가, 걱정되면 마땅한 준비를 할 것이지, 낳는 사람이 어미라 해서 어미만이 그 책임을 질 수 없다는 것을 모르는가, 어쩌면 재앙은 이 때부터란 말이다)
영화는 출산 이후 케빈의 탄생을 기뻐할 수만은 없는, 육체적으로 온통 구속되고 정신적으로 삭막해지기만 하는 엄마를 보여준다. 그리고 그런 엄마를 절대 이해하지 못하는 남편도. 우리는 여기서 케빈이 걱정되지만, 그건 영화기 때문. 실제 상황에서는 하루라도 잠 좀 제대로 자는 날이 그리울 따름이란 걸, 적어도 부모 되는 과정을 지켜보거나 해본 사람이라면 모를 리 없다. 그래, 바로 이 지점이다. 사람은 완벽하지 않다. 물론 엄마도 아빠도 그러하다. 그러나 이 세상에 나와 단 두 사람만의 케어에 온 몸과 마음을 의지해야 하는 아기라는 존재는 그걸 모른다. 이 지점이 바로, 부모 자식간이 어긋나기 시작하는 지점. 한껏 주의해야 하지만, 우리의 케빈 어머니는 그걸 알 수 없다. 똑똑하고 아름답고 전도유망하고 자유로운 영혼이기에! 더더욱 모른다, 지독한 헌신에 대해서는 눈꼽만큼도 떠올릴 새 없이 자란 세대이기도 하고, 사회는 그녀의 고통을 분담하는 장치를 많이 해두지 않았다.(기껏해야 어떻게 하면 애를 숨풍숨풍 잘 낳나 하는 효율성을 위해, 다들 모여서 배를 죽 내밀고 호흡법이나 배우게 하는 정도)
케빈은 갈수록 화가 난다. 갈수록 애정을 갈구한다, '제대로' 그리고 오로지 '자신에게만' 쏟아져야 마땅하다고 생각하는 애정을. 케빈에게 필요한 모성은 아버지나 동생과 나눌 수 있는 모성이 아니다. 극도의 이기주의를 휘두르게 하는 결핍이 그에게는 뿌리박혀있다. 이건 그의 잘못이 아니지만, 그는 이미 총알이 나가버린 총처럼 그 결핍 앞에 무력하다. 이렇게까지 분노에 휩싸인 아이가 할 수 있는 일이 뭐가 있을까.
세상을 버리는 것 외에는 없지 싶다. 그 방법에는 두 가지가 있다. 분노의 대상을 없애버리는 것과 자신을 없애버리는 것. 케빈은 약하디 약해서, 자신을 없애지 못하고 세상을 버렸다. 케빈에게는 세상이라는 파도에 맞서 의연하게 헤쳐나갈 노를 쥐어줄 부모가 부재했다. 낳고 기르고 커서까지 똥을 싸는 케빈을 걱정하는 부모는 있었으나, 그의 심연에 쌓인 분노를 지워줄 사랑을 주는, 그리하여 그 사랑으로 자신의 연약함을 이겨내라고 북돋아주는 부모가 없었다. 그는 사실상 고아다.
두려움은 이 세상에 얼마나 많은 그 '사실상 고아들'이 살아가고 있는가를 되짚어 볼 때 뭉게뭉게 커진다. 우리는 그래서 늦더라도 자꾸만 케빈에 대해서 이야기해야 한다. 하다가 말고 포기해서는 안 된다. 계속, 어떻게든, 이야기하고, 또, 결국에는 서로 사랑해야 한다. 그 방법 외에는 할 수 있는 게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