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 모든 문제의 근원은 우리 자신에 대한 정보 과잉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난날 사람들은 자기 자신에 대해 모를 수 있었습니다. 스스로에 대한 환상을 품을 수 있었지요. 하지만 오늘날에는 미디어와 라디오, 특히 텔레비전 덕에 세상을 지나치게 환히 들여다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현대의 가장 큰 혁명이라면, 갑작스럽게 세상을 지나치게 환하게 볼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우리는 지난 수천 년 동안 우리 자신에 대해 알아온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최근 삼십 년 동안 알게 되었고, 그게 정신적 외상을 일으키는 겁니다. 그건 내가 한 짓이 아니야, 나치가 한 짓이야, 캄보디아의 크메르루주가 한 짓이야, 그건......나로선 알 수 없는 일이야, 하고 중얼거리는 건 어떻게든 그만둘 수 있지만, 그것이 '바로 우리가 문제'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거죠. (중략)
제가 걱정하는 것은 우리가 무감각해지는 것입니다. 반복 단련되어 결국 감수성을 잃게 되거나, 붉은 여단처럼 일부러 과도함을 동원해 감수성을 죽이는 거죠. 파시즘은 언제나 무감각화의 산물이었어요." 24-25p.

"세상에 나오는 순간 아기가 무엇을 할 것 같소? 울기 시작한다오. 울고 또 울지. 이제 기성복 같은 삶이 시작되기 때문이라오......기성의 고통, 즐거움, 두려움, 근심이 시작되는 거요. 고뇌는 차치하고도......삶, 그리고......요컨대 그 전체가 기성복과도 같소. 위로, 희망, 사람들이 책에서 배우는 것들, 이른바 다양한 철학들도......역시 기성복이라오. 어떤 게 넘 낡고 진부해지면, 시대의 취향에 맞추어 새로 기성복을 만들어내는 거라오....." 28-29p.

"그렇소. 모두 유명한 사람들을 추억한다오. 이름 없는 사람들에게 관심 있는 사람은 없소. 하지만 그들 역시 이 세상에 태어나 사랑하고 희망하고 고통스러워했소. 태어나면서부터 고통이라는 기성복을 겸허히 받아들이고 종점에 이를 때까지 그 기성복을 겸허히 입고 있었다오. 따라서 '이름 없는 사람들'이라는 표현은 그 자체로 거칠고 불쾌하고 참기 힘든 거요. 내 보잘것없는 능력으로는 그걸 받아들일 수 없다오." 35p.

"만약 내가 무엇을 찾고 있는지 안다면, 그것은 이미 찾은 것과 다름없는 것이다." 45p.

"누군가를 깡그리 잊었다면, 그 사람에 대해서 이러쿵저러쿵하지 말고 입을 닥치고 있어야 한다." 74p.

"언제나 상상의 여지가 있는 게 좋다. 너무 높이 올라가다 보면 언젠가는 떨어져서 체면을 구기는 법. 현실에서는 아직 완전히 가동되지 않는 무언가가 중요하다는 것을 종종 목격하지 않았던가."77p.

"제가 보기엔 그때가 오히려 좋은 시절이었던 것 같습니다. 진짜 걱정거리가 많았다면 그런 가사를 쓰지는 않았을 테니까요." 79p.

"마음을 어리석지 않게 먹을 수도 있는지,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마음이 어리석지 않다는 건 마음이란 게 아예 없다는 뜻이니까요." 80p.



독서란 얼마나 게으른 취미인가! 그저 위대한 작가가 마치 내 마음을 훤히 들여다보는 것처럼 명문장을 써 놓은 걸 곱씹기만 해도 된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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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nicare 2013-09-12 16: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거 읽은지 20년은 족히 넘었겠군요. 로맹 가리( 에밀 아자르)의 찰지게 재밌던 소설.
노인으로서는 드물게 아주 멋진 '최신'의 옷을 입고 있었다는 묘사로 시작했던 듯.

미하엘 엔데의 모모와 '자기 앞의 생'의 모모.처음엔 차경아씨 변역의 모모를 먼저 읽고 유행가 모모와 너무 다르다 싶었는데 나중에 '자기 앞의 생'을 읽고 나서야 '날아가는 니스의 새들을 꿈꾸는' 모모가 이 모모였구나 알게 되었던.

치니 2012-10-08 12:23   좋아요 0 | URL
오, 20년 전에 나왔던 거였군요! 전 최근에 번역된 책인 줄로만 알았어요.
네, 맞아요, 노인 솔로몬 씨의 멋진 외모가 처음에 묘사되는데, 구미가 확 당기더라고요.

'자기 앞의 생'의 모모가 커서 이 책의 화자인 자노가 된 듯하다는 해설이 달려 있지만, 아직 다 읽지 않아서 그렇게까지는 모르겠어요. 아무튼 에밀아자르 혹은 로맹가리, 이 사람은 완전 제 타입이에요. ㅎ

LAYLA 2012-10-08 22: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책을 알게 되었네요. 감사합니다 :)

치니 2012-10-09 13:46   좋아요 0 | URL
라일라 님도 읽어 보시고 감상 알려주세요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