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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희의 영화 - Oki`s Movie
영화
평점 :
상영종료
늙은 남자와 젊은 남자를 차례로 사귄 옥희는 (아마도) 영화과에 다니면서 두 남자와 같은 장소, 다른 시기에 일어난 일을 영화로 만들어 보여준다. 이미 이 영화를 만든 감독이 이전에 <오 수정>에서 보여준 바 있듯이 같은 장소와 다른 시간에 일어난 '객관적인 사실'은,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다. 옥희는 나름 객관적인 시선으로 자신이 주인공으로 들어가 있는 씬들을 나열한답시고 차분함을 가장하고 있지만 내게는 아무래도 수정이처럼 허영기가 다 빠지지 않은 그녀의 속마음이 보이는 것만 같다. (이런 추측은 그녀가 친구와 방에서 술을 마시며 했던 대사, "학교에 나만 좋아하는 바이러스 같은 게 도나봐, 다들 내가 좋다고 난리야. 왜 이러지?" 가 깔아놓은 밑밥에 나 혼자 걸려든 걸 수도 있고)
홍상수의 영화를 보면서 웃지 않고 불편해 하는 대다수의 관객들이 그가 언제 어디선가 분명 내가 했을 민망하고 찌질하고 멍청한 짓을 태연하게 스크린을 통해서 비춰주기 때문에 그런다고 가정할 때, 나는 주로 웃기만 했으니 최소한의 자기반성조차 하지 않는 뻔순이일 가능성이 높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당당한 것은, 나와 같은 뻔순이 뻔돌이 덕에 이 세상에서, 더구나 이 대한민국에서, 홍상수 식 영화가 자리잡을 수 있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 어차피 예술은 놀이를 좋아하는 인간이 만들어 낸 것이라고 가정할 때, 나는 비양심적인 인간들이 유희를 즐겨 볼 수 있는 발판을 만든 데 일조한 것이다.
진실을 말하자면(하하하), 나는 위에 언급한 '불편해 하는' 관객들이 나보다 꽤나 양심적일 거라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그들도 내가 웃는 연기를 하듯 불편해 하는 연기를 하는 걸 수도 있고, 그냥 몇 마디 대사가 왜 뜬굼없이 그 장면에서 나오는지 이해되지 않는 것에 대한 불만 토로의 다른 얼굴이거나 다이내믹한 액숀 씬이 전무한 영화에 갑갑함을 느끼는 것에 불과할 지도 모른다.
아무튼 이리하여 소위 '홍상수 식'이라는 하나의 쟝르에 가까운 신화(?)를 일구어낸 참에 괜히 내가 기분이 좋아져서 챙겨 본 이번 영화인데, 아뿔사, 그동안 해왔던 이야기를 반복 변주 하는 줄로만 알았더니 이 양반, 그게 아니라 기운이 쏙 빠진 것 같아서 약발이 벌써 다 된 건가, 좀 안쓰럽고 무안하다. 그렇다고 뭐 내 주제에 행간을 예리하게 파헤칠 재주가 있다는 건 아니고, 그냥 느낌을 말하는 것 뿐인데, 뭐랄까 벌써 노인네 같다. 뱃속에서 꾸룩꾸룩 올라오는, 도저히 참을 길 없는 킬킬 웃음의 코드를 연이어 내뱉던 그 재기는 어디로 갔는가. 너무 철학적이다. 철학은 감독이 직접 영화 속에서 하지 않고 감독은 그냥 이야기를 보여주면 관객이 할 수 있게 되는 게 바람직한 거 아닌가. 괜히 억하심정이 들었다.
누군가에게 억하심정 든 원망을 돌려보자면, 이선균이다. 코맹맹이 목소리로도 모자라서 발음이 너무 샌다. 나레이션이 많은 영화이고, 옥희 역의 정유미가 무서울 정도로 나레이션을 똑 부러지게 해낸 걸 보면 이선균이 과연 제대로 기를 모아 영화를 했을까, 막 의심이 간다. 볼펜이라도 물고 연습했어야지! 홍상수 식(!!!) 영화라고 어물쩡 그런 것도 자연스럽기만 하면 된다는 건가, 말이다. 아무튼 나로서는 그의 새는 발음 때문에 귀를 쫑긋 해야 하는게 여간 불편한 게 아니었고, 이 때문에 영화에 대한 몰입도가 떨어져서 위와 같은 억하심정까지 이어진 거 같고 보고나서도 물에 물 탄 듯 맹맹한 기운만 남은 거 같은데, 이게 이선균씨에게 공정한 건진 모르겠다. 에라, 관객이라는 사람들이 언제는 뭐 공정하더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