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니까, 지난 금요일 경이었다.

감기 같은 건 몇만년이 지나도 나에겐 안 온다고, 왔다가도 어머 무셔 여기 아니네 하면서 도망간다고, 큰소리 뻥뻥 치며 한 다섯해를 보냈건만, 그날부터 지금까지 꼼짝 못하고 겔겔이다.

어째 이번 봄이야말로, 왠지 받아주기가 그토록 싫고, 안개 낄 때마다, 황사 올 때마다, 지레 겁이 나더라니. 감기 뿐 아니라 뭐든지 누울 자리를 보고 뻗는게지. 암것도 하기 싫고 그저 방에 눠 있고만 싶더니, 에라 여기있다 하고 드디어 아플 자리 찾았는데, 정작 회사일은 빼먹어도 될 일이 하나 없고 오히려 빡빡하기 이를 데 없는 상황.

사실, 아주 웃기고 창피한 꿈이 하나 있어 왔는데, 그건 '모두가 보는 앞에서 픽 하고 쓰러지기'다. 뭐 대단한 병이 아니어도, 그냥 너무 피로하고 과로해서, 그런데 꾹꾹 참아서, 쓰러지는데, 그것도 모두가 보는 앞에서. 그래서 너 진짜 힘들었구나 이런 위로 듣고 막 그런거. 이 꿈이 정말 십년도 더 되게 남몰래 커왔는데, 쓰러지진 않고 목 아파 담배 피기 힘들고, 코 찔찔 우아함이랑 거리가 먼 그런 잡 감기에나 걸렸다.

아으, 이 와중에 어제 티비 본 게 잘못이라면 잘못이다.

케이블에서 해 준 <청춘의 덫>. 요즘 다시 보고 있는 중이었는데 어제 마침! 우리의 심은하 양이 내 꿈을 그대로 실현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으흐흐흑.

모두가 보는 앞에서는 아니었지만, 욕실에 혼연히 쓰러진 심양을 남친인 전광렬씨가 광속으로 냅다 찾아와 냅다 들쳐 업고 그대로 입원까지. 내가 그리던 꿈은 티비에서 고대로 실현되고 있는데, 이불 속에서 겔겔 하며 보던 나는 왠지 모를 서러움을 씹으며... 이제 그만 꿈을 접어야겠다 싶었다.

쓰러진 심은하의 땀에 젖은 얼굴은 아픈데도 어찌 그리 섹시하며, 입원하여 힘 없이 긴 머리채를 쓸어올리는 창백한 모습은 그야말로 왕 보호해주고 싶은 본능을 마구 유발하고, 살짝 웃음을 지을 때는 또 어쩌믄 그리 귀엽냐 말이다.

똑같이 쓰러져도 저런 포스가 안 나오는게 뻔한 내 주제가 너무 쓰라리게 각성되었던 것이다. 연약하게 픽 쓰러지는 건 역시 내 몫이 아닌 것이다.

그저 민폐일 뿐인 것이다. 으흐흑.

그래서 주사 맞고 약 먹고 으쌰 으쌰 , 아프면 내 손해지 , 하고 푹푹 잤더니 오늘 아침은 살만하다. 주제에 맞게 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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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ainer 2008-03-13 10: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크크큭.. 미안하게도 왜 이렇게 재밌답니까아~

치니 2008-03-13 10:37   좋아요 0 | URL
미안하시긴요, ㅋㅋ 그래도 재미있다니 다행입니다아.

웽스북스 2008-03-13 10: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쓰러져본 적도 입원해본 적도 없어서 한번 사람 많은데서 픽 쓰러져보고 싶은 마음은 있는데요, 그럼 누군가 절 업어야 하잖아요- 흠, 제가 좀 무거워서 아무도 안업으려고 할까봐 ;;; ㅋㅋㅋㅋㅋ

치니 2008-03-13 10:47   좋아요 0 | URL
그르니까요, 쓰러지면 또 축 늘어지니까 더 무겁고. 흑, 접은 이유 중 하나입니다.

토니 2008-03-13 17: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전 교생 실습나갔을 때 쓰러진 것도 아니고 넘어진 건데 학생들이 가능하면 다른 반에서 넘어지라고 하던데요. 일으켜 세우는 것도 부담스럽다고.. ㅋㅋ 여자 키 171 몸무게 65면 장정들도 부담스럽죠. 퓨쉬업을 몇번 하고 들어야 하는. 요즘 입양인들 친부모 찾아주느라 바빠서 자주 못들어와요. 좋아하는 책도 많이 못 읽고요. 아쉬워요..

치니 2008-03-15 21:27   좋아요 0 | URL
넘어진 토니, ㅋㅋㅋ 상상 되니 웃음이...
키가 크니 무게가 좀 나가는건 당연하죠 뭐.
바빠도 건강 잘 챙기시구요, 아프니까 정말 모든게 손해에요.

라로 2008-03-13 23: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와 같은 꿈을 꾸고 계셨군요~.갑자기 위안이 된다는~~~.^^;;;

치니 2008-03-15 21:28   좋아요 0 | URL
으흐, 은근히 비슷한 생각들 많이 하시는구나, 저야말로 위안 됩니다.
nabi님은 뵌 적 없지만, 쓰러지는 거 잘 어울리실 거 같은데...ㅎㅎ

이게다예요 2008-03-14 07: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그것보다 약간 소박한, 사람들 앞에서 코피 쏟아 보는 거, 그래서 사람들 보는 앞에서 코 막고 화장실로 뛰쳐가거나, 아님 주위에 누군가가 머리를 막 뒤로 젖혀주며 호들갑 떨어주면, 아무렇지도 않게 괜찮아 별일 아니야, 내가 막 이러는 거.
코 파다가도 안 나오더라고요, 피는. 야박하게시리.
우리는 주제에 맞게, 아프지도 맙시다, 그려. ㅋㅋ

치니 2008-03-15 21:30   좋아요 0 | URL
코피, 이것도 꽤 호소력이 있죠.
일단 피를 보면 놀라게 되게 마련이니까요.
하지만 아래 꽃양배추님 말씀대로 기절이 깔끔해요 치울것도 없구. (아 뭐래 아직도 정신 못차림 ㅋㅋ)
다예요님은 현재 상황에서 손가락 끝 하나라도 다치면 안되죠, 암암 꿈도 꾸지 마세요.

이게다예요 2008-03-18 16:20   좋아요 0 | URL
근데, 왠만해선 기절은 어렵잖아요.
가장 청순하고 깔끔하지만, 기절은 진짜 아무나 하는 거 아니더라고요.
친구 중에 몸집도 꽤 있는 아인데, 기절을 잘 해요. 그러면 사람들은 걱정보다 의아하게 여겨요. 이건 또 뭡니까. ㅋㅋ

nada 2008-03-14 18: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뭐예요. 다들 그런 꿈을 꾸고 있었던 거예요?ㅋㅋ
전 좀 더럽긴 하지만 구토 때문에 뭇 사람들의 호들갑 세례를 받아본 적이 있어요.
죽을 거 같이 아픈 와중에도 관심의 중심이 되는 게 어찌나 달달하던지.
기절이 제일 깔끔하긴 깔끔해요. -.-

치니 2008-03-15 21:31   좋아요 0 | URL
주목받고 싶은 마음이 누구에게나 조금씩 있으니까요. ㅋㅋ
하지만 구토는 흑, 힘들었겠어요.
그나저나 꽃양배추님은 감기 다 나으셨어요?
저 거기 가서 빨리 나아 글 쓰라고 협박해놓고, 바로 따라 걸렸잖아요.
이번에 아주 쎈넘입디다. 기운 잘 차리셨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