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임당의 붉은 비단보
권지예 지음 / 자음과모음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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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임당 표지.jpg


 

 

신화속에 박제된 여자, 누구나 알지만 아무도 모르는 그 여자

 

우리는 그녀를 사임당신씨 또는 신사임당 이라 부른다.
남아 있는 이름이 인선이라고 하지만 확실하지는 않다고 한다.

작가 권지예는 그 불확실성에서 '사랑'이란 마법을 더해 사임당을 살렸다.
<사임당의 붉은 비단보>는 소설이다.
기록으로 남아 있는 작은 뼈대에 상상이라는 살을 붙여 여인의 생명을 불어 넣었다.

사임당의 붉은 비단보에는 사임당의 사랑이 담겨있다.
죽는 순간까지 간직했던 말할 수 없던 사랑이라는 비밀...

꽁꽁묶은 붉은 비단보는 내 한 점 붉은 마음,
비밀스런 그 마음을 내 어찌 풀까나
하지만 활활 풀고 가고 싶구나.
꽃이 피어야 한다면... 피어야 한다.
내가 지더라도 언젠가 꽃으로 피어나리...

조선이라는 시대에서 여인으로 태어난 인선.
사임당 평전에서 사임당을 관통하는 대들보는 '孝'지만
소설속의 사임당은 '愛'다.

어린시절 우연히 마주치고, 나도 모르는 사이에 마음에 자리잡은 사내,
마음조차 알지 못하던 어린 나이에 불연듯 찾아온 사내.
가슴으로만 담아야 했던 사내.
죽는 순간 까지 꽁꽁묶어둔 사랑.

사랑조차 마음껏 할 수 없던 그 여인의 찢긴 가슴은 무엇으로 여밀 수 있을까...

함부로 애틋하게. 부조화 스런 이 말이 가슴깊이 스며든다.

권지예작가는 소설속에서 사임당을 여인으로 만들었다.
우리에게 익숙한 율곡이이의 어머니, 현모양처라는 말의 상징으로 남아 있는 그녀 또한
여인이라는 사실을... 그동안 애써 외면했던 모습을 바라봐 주길 바랬다.

사랑에 행복해 하고, 사랑에 가슴아파하는 그런 여인.
지금 시대에도 흔한 평범한 그런 여인.
사임당은 '여인'임을 이제서야 바라본다.
 

사임당 뒷 표지.jpg

가을이다.
잊을 수 없는 사랑을 노래하는 계절.
소설속 사임당의 아픈 마음... 요즘 듣는 노랫말 속에 담겨 있어 대신한다.
 
 
함부로 애틋하게 OST Part 10 아티스트 환희 발매일 2016.08.05.
나는 사랑에 아프고 사랑에 다쳐도
다시 또 사랑하고
사랑이란게 너무 아프다
 
 

달의 연인 - 보보경심 려 OST Part 4 아티스트 다비치 발매일 2016.09.06.

그댈 사랑하는 건 참 아픈일이야
비우지 못할 마음이란건 참 슬픈일이야
 
2016년 가을
드라마로 사임당을 만날 수 있다고 한다.
드라마 역시 예술과 사랑에 집중했다. 어머니, 며느리, 아내의 사임당이 아닌 '여인'사임당.
21세기에 불러오는 그녀의 이야기들이 기대 된다.
 
※리뷰어스 클럽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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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임당 평전 - 스스로 빛났던 예술가
유정은 지음 / 리베르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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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사임당, 사임당신씨. 그녀는 어떤 사람일까?
분명한건 우리가 알고 있는 율곡이이의 어머니란 것과, 현모양처의 상징이 전부가 아니란 것.
<사임당 평전>을 만난건 행운이다.
잘 알거라 생각했던 사임당에 대해서 전혀 몰랐었다는 사실과 예술가의 모습을 만날 수 있었다.

500여년 전의 인물을 이 시대에 다시 살려내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사람을 알기 위해서는 많은 정보가 필요하다.
사람은 홀로는 살아 갈 수 없는 존재. 개성이란 환경에도 많은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지금에서 짐작해 보는 사임당의 모습은 어떨까?

 

 사임당 초상 (5만원권 화폐 도안) - 한국은행 화폐박물관


5만원 지폐속의 모습조차 친일화가의 작품속 얼굴을 본떴다고 하니 본 모습조차 짐작하기 어렵다.

16세기 인물이지만 초상화속 모습은 현대적이다.

일제시대에 만들어진 "현모양처"라는 말과 현대로 넘어오면서 단아함이란 틀속에 비춰져서 일지도 모르겠다.

16세기 조선 사임당이 살던 시대는 '혼란'이였다.
생활에 있어서는 조선이 들어서기전 약 500여년동안 굳어져버린 고려의 생활 모습과 풍습들이 더 많았을 것이다. 거기다 조정은 '사화'로 인해 시끄러웠고 그로 인한 양반가?들역시 조심스러 웠을 것이다.


아직 자리잡지 못한 조선초, 그 시대에 사임당의 위치는 어디쯤 이였을까?
평전에선 고려의 풍습과 가풍이 남아 있어 여성이 친정에서 지내는게 자연스러 웠을 거라 짐작한다.
그 덕분에 시집살이를 늦게 시작했고, 자유롭게 예술활동을 할 수 있던 환경이였을 거라한다.

<사임당 평전>에선 많은 부분을 시대적 상황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현모양처"라는 말의 쓰임이 사임당을 어떻게 가둬 뒀는지
그녀가 살았던 시대는 어떤 시대였고, 가족은 어땠는지, 그녀의 살아온 환경부터 이해해야
그녀의 모습에 한 발짝 다가 갈 수 있다.

후반부는 사임당의 예술에 대해서 집중 조명 했다.
지금까지 남아 있어 우리가 볼 수 있는 그녀의 작품.
그 작품을 읽어 냄으로 작품에 담긴 그녀를 그려 본다.

사임당이 남긴 작품 대부분은 그림이다. 조선의 3대 예술이라고 해야 할까?
시, 서, 화 중에서 '화'가 가장 많이 남아 있고 서와, 시는 찾아 보기 힘들다.

그녀의 그림은 초충도가 많고, 그 그림들에 담긴건 대부분이 효다.
글씨도 잘써 초서체와 전서체가 남아 있다고 한다.

평전에선 그녀의 작품들을 하나 하나 설명하며 작품에 담긴 예술가의 사임당을 살려 낸다.

그래서 예술가로 끝일까?
책을 다 읽고나서 든 생각이다.

조선은 유교가 지배한 나라다. 유교에서 여성은 주체가 아닌 객체로 남아 있던 경우가 더 많다.
거기에 계급 사회이기도 했다. 계급이라는 위계 속에서도 여성은 언제나 하위에 머물렀었다.

그런 조선시대에서 여성의 이름이 남아 500여년이란 시간을 뛰어 넘기란 얼마나 어려운 일일까?
생각해 보면 조선의 예술가란 이름으로 지금까지 남아있는 것은 김홍도의 작품과 신윤복의 작품이 있다.
이 둘은 조선의 공식 화가였다. 도화서라는 관청의 화원. 국가공무원으로써 예술가의 삶을 살아온 사람들이다. 그랬기에 단원과 혜원은 예술가로 남았지만 사임당은 상황이 다르다.

유교에서 최고의 가치는 '군자'다.
조선 선비들은 군자가 되기 위한 수행의 수단으로 시,서,화를 삼았다고 한다면,
사임당은 예술가가 아니라 '군자'가 되어야 하는 거 아닐까?

조선의 예술은 예술이 아니라 선비의 수행이였다는 것.
말하기에 따라 다르겠지만 우리가 놓치고 있는 것은 또하나의 틀인
"예술가"라는 말로 가둬 두는 것은 아닐까?

사임당 사후 그녀가 남긴 시, 서, 화에 선비들의 발문이 많이 있다고 한다.
지금으로 따지만 추천사나 품평이 되는 발문. 조선의 예술엔 생각이 담기고,
오롯이 담긴 생각은 품격을 드러낸다면. 사임당 이전에도 없던, 이후에도 없던 그녀의 작품속에 남아있는 것은 섬세한 여성 예술가뿐 아닌, 그 시대 상황 속에서도 이름을 남긴 '군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
그것이 내가 생각해본 사임당의 모습이다.

한없이 부드러우면서, 사실적이고, 올곧은. 사임당은 그런 '군자' 아니였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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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의 운동화
김숨 지음 / 민음사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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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물 아홉, 나와 같은 나이를 가진 운동화가 있다.
온전한 짝을 이루지 못하고 단 한쪽만 남은 운동화. L의 운동화...

29년전의 역사를 알지 못했다.
그 보다 앞선 광주의 역사를 조금 알고 있었을 뿐이였다.

1987년 6월 9일.
연세대학교에 재학중이던 21살의 청년 이한열,
시위중 경찰이 쏜 최루탄에 맞아 피를 흘렸다.

병원으로 옮겨 졌으나.. 그는 끝내... 깨어나지 못했다.

그리고 29년이란 시간이 지난 후...
김겸 박사님은 시간의 힘에 바스라진 운동화를 복원한다.
김숨 작가는 시간을 복원한다.

<L의 운동화>
나는 알지 못했던 한 짝의 운동화.

 

(사진 출처 : 김겸미술품보존연구소 / 경향신문자료 캡쳐)

대량 생산된 기성품.
운동화...
각자 다른 발 모양에 맞춰 운동화 모양이 변해간다.
발볼이 넓은 사람은 넓게, 좁은 사람은 좁게, 걸음걸이, 자주 걷는 길, 습관, 다리의 모양.
같은 수 없는 그 모습들을 운동하는 고스란히 담아 내어 단 한명의 운동화가 된다.

 L의 운동화는...
역사의 선택을 받았다.

책을 읽고나서 어디에 집중 해야 되는지 모르겠다.
민주항쟁하면 5.18 광주의 사건만 알고 있던 나에겐 여러모로 충격이다.
6월 항쟁에 대해서 이렇게 모르고 있었구나.
이한열이란 청년이 있었구나.
그의 사건으로 인해서 대한민국이 들고 일어났다는 것을...
연세대학교 정문에서 일어난 사건이 도화선이 되어.
명동성당뿐만 아닌 전국적으로 퍼진 6월의 민주 항쟁.

그 사건으로 인해서 지금 우리가 우리손으로 직접 대통령을 뽑을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을...
29년이란 시간이 흐르는 동안 나 뿐아니라, 대부분이 잊고 있던 것은 아닐까...

 

(사진 출처 : 김겸미술품보존연구소 / 경향신문자료 캡쳐)


복원이란 것은 단순히 모습을 찾는 것이 아니다.
어떤 사물에 담긴 의미...
시간이 흐름 속에서 서서히 잊혀져 가던 의미를 다시 살려내는 것...
영원히 잊지 않겠다는 약속이야 말로 복원은 아닐까...

무더운 여름...
너무 어려운 책을 접했다.
답이 없는 질문들은 여전히 머릿속에 맴돌아 괴롭힌다.

책을 읽고나서 자료를 찾아 보다 보게된 최근의 영상하나...
손석희 앵커의 말은 남긴다.

"나는 꼭 오래오래 살아서 오래오래 아들을 기억하겠다"고 말하는 어머니
청춘을 빼앗기고, 용서를 강요받고, 시간마저 재촉당하고 있는 소녀들
그리고 끝까지 꿈을 놓지 않았던 19살의 그 청년...
- 손석희 (JTBC 뉴스룸 앵커브리핑 중2016.6.22.)

L의 운동화는 여전히 복원 중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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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흘간의 낯선 바람 자음과모음 청소년문학 56
김선영 지음 / 자음과모음 /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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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이맘 때 쯤이였던 걸로 기억한다.
김선영 작가의 청소년 성장 소설 <시간을 파는 상점>을 만나것은.
시간과 삶에 대한 깊은 철학을 어렵지 않게 이야기 속에 담아내서 감탄 했었던 기억이 난다.

그녀의 2016년 신간 소설 <열흘간의 낯선 바람>은 "나"를 찾아가는 성장 소설이다.
소설속 주인공은 고1이지만... 이 소설은 SNS에 푹 빠진 대한민국 전체에게 보내는 우려와 처방이다.

트위터로부터 시작되어 페이스북을 거처 이젠 인스타그램의 시대.
짧은 단문의 세상에서 어느덧 사진의 세상으로 옮겨왔다.

사진 한장만으로 '나'를 표현하는 시대.
문제는 선택에 있는 것 아닐까?

"볼살이 빠진다면? 이마의 잔 머리칼을 조금 밀어낸다면?
그때부터 나는 포샵질을 멈출 수 없었다.
볼살을 조금씩 깎고 눈꺼풀을 조금, 아주 조금 들어 올리고
이마도 볼록하게 미간도 도도록하게 돋우었다.
분위기가 완전 달라졌다.

볼살과 이마의 잔 머리칼만 손질해도 아우라가 달랐다.
이마와 광대 위에 돋기 시작한 여드름만 쓱쓱 없애버려도 피부미인이 되었다
얼굴이 조금씩 달라질 때마다 묘한 쾌감이 일었다.

처음엔 장난 수준의 상상이었는데 사람들이 어떻게 반응할지 궁굼했다.
뭔가 달라지거나 변화가 생기면 남들에게 보여주고 싶은 욕구가
일어나기 마련이다.

지금의 내 얼굴로는 평생 맛볼 수 없는 반응일 거라는 생각에 그 유혹은
더욱 강렬했다."

사람의 기본 욕구? 욕망? 중 하나는 인정받고 싶어하는 마음이 있다.
굳이 어려운 사회학저, 인지심리학적 이론을 이용하지 않더라도.
어릴때나 지금을 생각하보더라도 쉽게 발견하게 되는 인정받고 싶은 욕구.

가까운 사람들의 칭찬에 기분이 좋아지고,
능력을 인정해 주는 것에 뿌듯하고, 더 열심히 하게 되는
살아가게 하는 또 하나의 힘.

" 나는 혼자 있어도 혼자가 아닌거다.
누군가와 연결되어 있어 나는 그 라인 속에서 숨을 쉬며 살고 있다."

소설속 주인공인 고1의 소녀 '송이든'
소녀가 SNS에 빠지게 된 이유도 인정받고 싶은 마음에서 비롯 된다.
현실에 비해서 쉽게 인정받을 수 있는 SNS.

 현실보다 더 생동감 있게 살아 있었다.
현실은 그에 비하면 칙칙한 흑백의 평면 세계이다.
재미도 변화도 관심도 끌 수 없는.
'비물질화의 물질화'
인스타그램 속의 내가 딱 그랬다.

어느날 수정한 사진을 올렸고, 예상치 못한 반응을 얻게되고,
그로 인해 푹 빠져버렸다. 밥먹는 시간도 아까울 정도로. 수십장의 사진을 찍고, 그중 한장을 골라 재창조라 불려도 될 만큼 수정을 해서 SNS에 올리고, 수많은 팔로워와, 좋아요에 중독된다.

 SNS속 사람들은 완전 다른 인류였다.
그들과 매 순간. 버릇처럼 좋아요 숫자를 카운터하고
사진아래 댓글에 따라 웃거나 울거나 우울해지기도 했다.

그런 SNS세상속의 소녀가 어느 날 충격을 받는다.
스스로는 알고 있다. SNS속의 '나'는 '내'가 아니라는 것을.
그럼에도 기대를 품는다. SNS를 통해 다시 연결된 첫사랑, 짝사랑.
먼저 만나자는 연락에 기대를 하고, 고민을 하다 결국 만나기로 약속을 한다.

 저기, 혹시 ...

과연 그는 나를 알아 볼 수 있을까?
SNS속 여신 '초록마녀', 현실에선 '송이든'

 근데 누구 기다리니?
네?

기대가 무참히 깨지는 순간
그 짧은 시간 무수한 마음을, 감정의 파편을 담아낸 김선영작가가 대단하다.

 오늘의 만남이 있기까지 그렇게 다독거리고 설득하며 왔건만.
현실은 생각보다 모질고 냉정하다.

현실은 그렇다.
모질고, 냉정한 곳.
SNS는 그런면에서 현실은 아니다.
악플은 차단하면 그만, 마음에 들지 않으면 연결을 끊어버리면 그만,
아픔이 없다. 큰 고민도 없다.

그래서 일까?
해롭다는 걸 알지만, 자극적인 유혹에 결국 빠져들 수 밖에 없는 인스턴트 음식처럼.
감정이 변한다.

 여행은 늘 그랬다.
떠나기 전까지는 귀찮고 막막한데
막상 가보면
그 이상이 있었다.

그런 그녀를 위한 엄마의 처방은 여행이다.
여행지는 아무 것도 없는 몽골의 고비 사막.

고비사막 출처 http://blog.naver.com/dodi_2910/50099247254

 어디로 가는지, 무엇이 될지
어느 만큼 왔는지, 앞으로는 어떻게 될지
아무것도 모르지만
우리가 쓴 '시간의 축적'만큼은
내가 무엇을 했는지 증명해줄 것이다.

사막에서 마주하게 되는 지구.
대자연 속에서 온전하게 '나'를 느낄 수 있는 시간.
<열흘간의 낯선 바람>은 여행을 통해 SNS속에서 받은 상처를 치유 한다.

 현재의 내 모습은
그간 쓴 시간의 내용에 따라 결정된다.

아무것도 없는 곳,
그리고 "나"
사람이 살아가는데 있어 필요한 것은 그리 많지 않다.

21세기의 대한민국은 24시간 끊임없이 연결되어 있다.
그 연결이 우리를 병들게 하는 것 같다.

사람은 결코 혼자서는 살아갈 수 없는 사회적 동물이지만.
동시에 모든걸 동일시하여 연결된 세상에서 살아갈 수 없는 동물이기도 하다.

혼자있는 시간의 힘.
"나"를 찾을 수 있는 시간이 필요하다.

'고독'을 견딜 수 있는 법을 배워야 하고,
타인과의 관계는 결코 쉬운것이 아님을 배워야 한다.
사람과 인정은 살수 없는 것임을...
우리가 서서히 잊고 살아가는 것들을...

<열흘간의 낯선 여행>을 통해 찾아 보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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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곤의 문제
J.A.홉슨 지음, 김정우 옮김 / 레디셋고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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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을 인터파크북피니언 레디셋고출판사에서 진행한 서평단 이벤트에 당첨되어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 입니다.

만약 빈곤의 뜻이 갖고 싶은 것과 가질 수 있는 것 사이의 괴리라면

역사상 빈곤이 가장 심각한 때는 지금이다.

페이지 :

<빈곤의 문제> - 존 애트킨슨 홉슨

책은 홉슨의 1906년작 <Problems of Poverty : An Inquiry into the Industrial Condition of the Poor>을 완역한 책이다.

존 애트킨슨 홉슨

그가 살았던 시대는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접어든 영국이였다.

빅토리아 번영의 시대가 막을 내려가는 그 시기 영국, 현대 산업사회의 모습을 갖춰가고 있는 영국에선 어떤 일이 있었을까?

홉슨의 진단은 간단하다. 빈곤의 문제는 산업사회의 구조적인 문제. 즉 '고한제도'의 산물임을 밝힌다.

'고한제도' 책을 읽으면서 처음 접한 단어다.

영문으로는 Sweating System

한자로 苦汗制度 (쓸 고, 땀 한, 지을 제, 법 도)자를 쓴 말

홉슨은 책에서 용어의 정의를 명확하게 할 수 없다고 했다. 너무나 다양한 의미가 담겨 있기에 한 문장으로 정의 할 수 없다는 뜻

최근에는 어떻게 정의 하고 있을까?

네이버 한자사전에서는 "근로자(勤勞者)가 심(甚)히 착취(搾取)를 당(當)하게 되어 있는 조직(組織)" 이라고 정의하고,

경제학사전에서는 "자본주의의 발전에 따른 노동자 혹사의 참상을 통칭하는 표현이다." 라고 범위를 넓게 잡고 있다.

빈곤의 문제는 왜 생기는 걸까?

그 원인과 속성은 무엇일까?

빈곤의 문제는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

홉슨의 진단은 간단 했다. 산업사회에선 생산이 중요했다.

생산에는 토지, 자본, 노동이 필요하며, 빈곤의 원인은 노동 수요의 감소와 노동 공급의 초과에 있다.

문제는 "노동"에 있다는 것.

효율높은 기계나 로봇이 도입되면서 산업에서의 노동 수요는 감소한다.

노동 수요 감소로 실직한 노동자들은 어쩔수 없이 저임금으로도 노동을 제공하려 할 것이고.

이에 따라 기계나 로봇을 도입하지 못하는 소규모 자본에 노동공급이 초과하게 된다.

그리고 시작되는 악순환!

홉슨의 대표 이론은 저소비이론과 제국주의이론이라고 한다.

제국주의이론이 탄생한 배경에는 홉슨이 내린 빈곤의 진단이 "노동"에 있다는 것에서 시작된다.

문제가 노동에 있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처방 역시 '노동'으로 내렸다.

초과된 노동을 강제로 줄이는 것. 또는 노동 수요를 늘리는 것.

홉슨은 19세기 말을 살아온 사람이며, 빈곤문제의 진단을 영국을 통해서 내렸다.

그래서 내릴 수 있었던 처방.

영국내에서 노동수요를 창출하지 못하거나, 노동공급을 줄일 수 없다면. 식민지를 만들어서라도 해결 하자는 것이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영국내의 빈곤퇴치다. 물론 무작정 식민지를 늘려 해결하는 것이 아닌, 영국내에서 해결하지 못할 경우라는 단서가 있지만, 지금의 시대에서 생각해보면 독일의 나치나, 일본의 군국주의 처럼 무서운 또 하나의 사상은 아닌가 생각해본다.

홉슨의 진단이 있었기에? 사회주의법이라 불리는 법들이 탄생 했을까?

어쩌면 그 시대에 빈곤문제가 심각하게 대두 되었고 그에 따른 학계의 다양한 의견들 속에서 최소한의 합의를 본 것은 아닐까?

19세기 말 영국에서 처음으로 빈곤문제가 심각하게 받아들여지기 시작했고, 그 원인이 개인의 윤리에 있다는 것이 아니라, 산업구조에 있다는 진다은 놀라운 발전이였다.

그렇기에 최저임금법이나 근로시간을 제한하는 법들이 탄생할 수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1세기에서 2세기에 가까운 시간이 흐르는 동안 빈곤은 해결되지 못했고,

우리는 여전히 빈곤의 문제에 시달리고 있다.

아니 어쩌면 시간이 흐를 수록 빈부의 격차는 점점더 벌어지고, 그로 인해 빈곤의 문제는 더 심각해졌다.

우리는 21세기에 살고 있고, 지금은 산업시대가 아닌 금융시대, 정보화시대, IT시대라고 한다.

아니 제4차 산업혁명이 일어나는 중이라고 한다.

무려 19세기부터 빈곤의 문제를 인식했고 빈곤으 해결하려 노력해 왔는데.

우리는 왜 점점더 빈곤의 문제가 심각해 지는 걸까?

홉슨은 책의 마지막에서 빈곤의 딜레마를 풀 열쇠를 찾는 사람이 빈곤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빈곤의 문제를 진단했지만 자신또한 그 열쇠를 찾지 못했다는 시인이기도 하다.

그 또한 끊임없이 연구하고 고민하고 열쇠를 찾기 위해 노력 했을 것이고, 그 결과로 나온게 제국주의론일 수 있겠다. 싶다.

정말 빈곤의 문제는 해답이 없을까?

빈곤은 단순히 산업구조의 문제일까?

최근 피계티는 자본소득이 노동소득을 앞질렀기에 노동으로는 도저히 따라 잡을 수 없는 격차가 생겨나고,

이는 시간이 흐를 수록 점점더 심해질 것이라는 진단을 내렸다. 빈익빈 부익부의 급증,

장 지글러는 빈곤의 문제를 정치로 봤다.

'빈곤'이라는 것. 이것은 단순 하게 진단 할 수 없는 문제다.

아니 단순화 시킨다면 결국은 사람의 문제가 된다.

토지와 자본은 사람이 아니다. 노동은 사람과 떼어놓을 수 없다.

어쩌면... 훗날 인력이 아닌 로봇으로 모든 노동을 대체할 수 있다면 빈곤문제는 해결 될 수 있을까?

노동은 사람과 정말 뗄 수 없는 것일까?

노동은 사람과 뗄 수 없어서 "윤리"라는 것이 걸려 있고,

토지와 자본에는 "윤리"를 넣을 순 없을까?

최근 자본론을 공부하기 시작하면서 느낀 것은.

어쩌면 모든 문제는 자본과 토지에서 "도덕", "양심"같은 지극히 '인간'적인 가치가 사라졌기에 일어난 일은 아닌가 싶다.

애덤스미스가 중요시 했던 것은 "보이지않는 손"이 아니라 "도덕"이였다.

홉슨의 진단과 처방은 노동에 있었지만. 우리는 여전히 '빈곤'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다.

경제위기를 극복했다는 케인즈 역시 임시 처방으로 끝났음이 증명되었다.

정말 문제를 해결할 방법은 없을까?

이번 독서는 해결하지 못한 찜찜한 질문 하나 만을 남겨 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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