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학년 은규는 유난히 옛이야기를 좋아한다. 나와 만날 때면 꼭 한두 권씩 옛이야기 그림책을 읽어달라고 하고, 듣는 동안은 아예 양말도 벗고 배를 깔고 누워서 그 시간을 만끽한다. 옛이야기 모음집『살려 줄까 말까?』는 몇 번을 읽었는지 셀 수도 없다. 우리나라의 ‘선녀와 나무꾼’과 비슷한 일본 옛이야기 『두루미 아내』를 읽을 때면 저도 모르게 자세를 고쳐 앉는다. 고요하고 슬픈 그림에 압도당하는 모양이다. 그림책에 빠진 은규 표정은 대여섯 살 아이 같다. 남다른 느낌이 있어서 은규 엄마에게 말씀 드렸다가 뜻밖의 얘기를 들었다.


“은규가 영어유치원을 다녔어요. 딴 건 몰라도 영어는 꼭 필요하고 일찍 시작하면 아무래도 좋을 테니까요. 그런데 거기서 우리나라 옛이야기 책을 읽어주진 않아서 그런 그림책을 좋아하는가 봐요.”

영어유치원에 이어 해외 캠프까지, 영어 조기교육을 열심히 하는 효과가 있어서 은규는 능숙하게 영어를 구사한다. 그러나 얻는 것이 있으면 놓치는 것도 있게 마련, 영어로 생각하고 말하는 법을 배우는 동안 무의식을 건드리는 옛이야기의 매력을 느낄 사이는 없었던 것이다. 역시 아이들은 자라는 단계에 맞게 채워야 할 것이 있는 모양이다.


진우 엄마는 스포츠 조기교육에 관심이 많다. 진우가 운동신경이 좋은 편이니 일찍부터 재능을 발견해서 선수로 키우겠다는 생각이다. “몸으로 하는 건 일찍 시작할수록 좋다”면서 수영, 야구, 스케이팅 등을 가르치는데 이렇다 할 성과가 없는지 1년을 넘기는 종목이 없다. 그만둘 때마다 엄마는 “이제부터 이건 취미로 하면 된다”고 하지만, 진우는 관심이 뚝 끊긴다. “그거 재밌어 보이잖아요. 근데 엄청 힘들어요.” 운동에 대해 얘기할 때 진우가 제일 많이 하는 말이다.


그런데 진우를 따라 얼떨결에 스피드 스케이팅을 시작한 예준이는 3년째 전문 코칭을 받고 있다. 재미삼아 시작했는데 아이가 좋아하니 우선 좀 더 해보겠다는 게 엄마 생각이다. 예준이는 엄마가 “애가 파이팅이 없어요.” 하고 농담할 정도로 승부에는 관심이 없다. 그런데도 엄마에게 “나갈 수 있는 경기는 다 나가고 싶다”고 하더란다.








예준이와 『피아노를 쳐 줄게』를 읽은 날이었다. 피아노 모양 음악상자를 좋아하는 캐시에게 엄마는 진짜 피아노를 사주고 음악 선생님을 모셔 온다. 음악 선생님은 캐시에게 재능이 있다면서 연주회 참가를 권하는데, 연습을 반복할수록 캐시는 점점 재미를 못 느낀다. 연주회 무대로 나아가는 캐시는 사막의 모래를 걷는 기분이다. 결국 연주회를 망치고 피아노를 멀리하던 캐시는 우는 동생을 달래기 위해 다시 피아노 뚜껑을 열고 정말로 아름다운 연주를 시작한다. ‘좋아서 하는 일’의 소중한 가치를 생각하게 하는 그림책이다.


“연주회 때 캐시 기분은 어땠을 것 같아?”

“진짜 무섭고요, 하기 싫었을 것 같아요. 엄마가 시켜서 하는 거잖아요.”

“엄마는 캐시를 위해서 그런 건데.”

“캐시한테 물어보지도 않았잖아요.”

물어보지도 않고! 어른으로서 나까지 뜨끔해졌다.


“근데 저도 아이들 앞에서 리코더 불고 그러는 거는 너무 떨려요.”

“그럼 스케이트 대회는 어떻게 나가? 그때는 안 떨려?”

“안 떨려요. 다른 아이들은 얼마나 잘하는지, 제 실력은 어느 정도인지 궁금해요.”

그 자세를 칭찬하면서 예준이는 나중에 스케이트 선수가 되어도 좋겠다고 했더니 대답이 신선하다.

“저는 나중에 뭐가 될지 아직 안 정했어요. 오래 살아야 되니까 뭐가 될지는 잘 생각해봐야 될 것 같아요.”


예준이 엄마도 아이의 진로는 아직 모르겠다고 한다. 다만 “운동을 하면서 자연스럽게 알게 되는 것이 많은 것 같다”고. 예준이는 스케이트를 배운 덕분에 “열심히 연습하면 메달을 딸 수 있다는 것, 무조건 빨리 가면 넘어지고 균형을 잘 잡아야 된다는 것”을 알게 됐단다. “허벅지가 딴딴해져서” 오래 걸을 수도 있게 됐다고 한다. 예준이는 쉬는 시간에 얼음으로 장난치는 것, 운동 끝나고 컵라면 먹는 게 좋단다. 그래도 제일 좋은 시간은 훈련 시간이다.

“달리면 시원하고 기분이 뻥 뚫려요.”

정말 좋은 조기교육은 그것을 좋아하는 마음을 길러주는 것 아닐까.



* 비룡소 북클럽 부모님 소식지 <비버맘> 2학년 / 2015년 가을에 쓴 것

* 물론 가명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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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onnight 2016-02-02 16: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물어보지도 않고! 정말 뜨끔하네요ㅠㅠ 공감합니다. 그것을 좋아하는 마음을 길러주는 것^^

네꼬 2016-02-10 12:29   좋아요 0 | URL
그렇지 않은 경우가 너무 많아요. 물어본다고 하더라도 답 정해놓고 너 이거 좋아하니까 해봐, 하고 밀어붙이는 경우도 많고요. 어쩌면 저도 그렇게 책 권하는지도 몰라요. ㅜㅜ

Mephistopheles 2016-02-03 10: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일예로 강남8학군에서 초중고를 나오고

명분대를 졸업 후 미국 아이피리그에서 박사까지 딴

30대 중반의 한국 남자 중년이 박사학위를 딴 후 이런 말을 했다더군요.

˝ 엄마. 나 이제 뭐해? ˝

네꼬 2016-02-10 12:31   좋아요 0 | URL
하하... 네, 웃기지만 어쩌면 당연한(?) 결말이네요. 부모도 불행, 아들도 불행... 알면 알수록 어려운 문제인 것 같아요. 저로선;;

뽈따구 2016-02-11 16: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그것을 좋아하는 마음을 길러주기!
정말이지 이게 중요하죠. 저도 그런 엄마가 되고 싶어요. 노력할래요.

네꼬 2016-02-18 12:33   좋아요 0 | URL
저는 잘 모르지만, 옆에서 보니까 그게 쉽지 않은 것 같더라고요. 양육자의 마음이 앞서는 경우가 많지요. 뽈따구님은 잘하실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