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얏 꽃이 흐드러지게 핀 봄밤, 기생집 도리원 후원에서 이야기 연회가 열렸다. 양반, 기생, 장사꾼, 부엌데기 들이 모두 한자리에 모여 재미난 소설을 듣는다. ‘한문으로 된 어려운 소설이라면 그리 재미지게 읽을 수 없는’ 흥부전이다. 전기수의 입담에 마음을 빼앗긴 사람들은 신분과 처지를 잊고 꿈같은 시간을 보내고 있을 것이다. ‘이야기’를 타고서 새로운 시대가 오고 있다. 그것을 알리려는 듯 곳곳에 매달린 제등이 달빛보다 환하게 후원 구석구석을 비춘다. 삽화를 따라 읽는다면 이 장면이 작품의 클라이맥스다.


『책과 노니는 집』의 그림은 사실적이면서도 화려한 것이 마치 옛날 흑백사진에 색을 입힌 것 같다. 세부묘사에 충실하면서도 현대적인 채색으로 세련된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덕분에 이 역사동화가 드러내고 있는 시대의 공기가 잘 살아났다. 왈패 허궁제비의 불량한 자세나 야무지게 제 몫을 챙기는 기생집 낙심이의 당돌한 표정에서 백성들의 삶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장서가이자 애서가이며 남몰래 서학에 관심을 갖는 홍 교리의 방은 책으로 가득해 소박하면서도 기품이 넘친다. 동양화의 수묵 느낌을 바탕으로 서양화의 극적인 효과를 살리는 것은 김동성 화가의 특장점이다. 특히 조명을 쓴 것처럼 빛과 그림자를 만들어 서정적인 장면에도 생동감이 넘치게 한다. 그런 화가가 “조선에서는 천지개벽할 소리”인 서학이 들어오던 시절을 그렸다니, 내용과 형식의 조화라는 게 이런 걸까.


장이 아버지는 천주학 책을 베꼈다는 이유로 모진 매질을 당하고 죽었다. 장이는 그런 아버지의 뒤를 이어 ‘필사쟁이’가 되기로 했다. 사정을 아는 홍 교리가 장이에게 일을 맡길 참으로 종이와 붓을 건넨다. 솜씨를 보자는 것이다. 홍 교리는 인자한 얼굴이지만 장이는 긴장한 기색이 뚜렷하다. 지금은 아버지에게 배운 대로 한문으로 이백의 시를 쓰지만, 앞으로 장이는 많은 언문을 필사할 것이다. 장이가 살아갈 세상은 아버지나 홍 교리의 세상과 아주 다를 것이다. 그림 속 장이 앞에 놓인 화선지가 아직 비어 있는 것이 그저 우연은 아닌 것 같다.




* 계간 『창비어린이』 2015년 가을호에 쓴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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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onnight 2016-01-31 08: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치 영화를 보는듯 느껴지는 리뷰예요♡ 저도 조카랑 읽어보고 싶어요^^

네꼬 2016-01-31 15:16   좋아요 0 | URL
책 속의 그림이 영화 같아요. 어쩌면 조카님은 그림책으로 만난 적 있는 화가일 수도 있겠네요. (나이팅게일, 엄마 마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