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그다드의 오디세우스
에릭 엠마뉴엘 슈미트 지음 / 밝은세상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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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돌아갈 곳이 없는 지구촌 이방인, 사드.


불법체류란, 일반적으로 체류국의 출입국관계법령을 위반하면서, 자국 이외의 외국에서 체류하고 있는 상태를 말한다. <대한민국 법무부 출입국 외국인 정책본부>가 발표한 통계자료에 의하면, 2007년 12월 31일 기준으로 대한민국 내 불법체류자는 모두 223,464명이며, 총 외국인 체류자의 무려 21%를 차지하고 있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만 불법체류자로 살아가는 외국인이 이렇게 많다니 놀랍니다. 

<바그다드의 오디세우스>를 읽으며, 관심을 가지고 보니 불법체류자들로 인해 파생되는 각종 사회적인 문제가 생각보다 심각하다. 그러나 국제사회에서 불법체류자의 문제는 그리 간단히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닐 것이다. 책을 읽으며 이런 상상을 해보았다. "만일 하루아침에 살 집을 잃고 어려움에 처한 이웃이 우리집에 들어와 살게 해달라고 간절히 요청을 한다면 어떨까? 그것도 하루 이틀이 아니라 그들이 자립을 할 수 있을 때까지 한 집에서 같이 살며 도와주어야 한다면?" 어쩌면 거리를 걸으며 나도 모르는 사이 불법체류자들과 스치는 일도 많았을지 모른다. 그러나 나의 일상적인 삶과는 너무나 먼 거리에 존재하는 불법체류자의 문제에 대해서는 얼마든지 동정심과 박애정신을 가질 수 있지만, 직접적이고 실질적으로 다가와 어떤 희생과 구체적인 실행을 요구한다면 지금 생각하는 것만큼 동정적이고 박애적일 자신은 없다.

<바그다드의 오디세우스>는 이라크를 탈출하여 불법체류자로 살아가는 ’사드 사드’의 이야기이다. 그의 이야기는 우리와 동시대를 살아가는 이라크인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후세인의 독재 이후 미국과의 전쟁으로 사랑하는 가족과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그곳에서는 더이상 희망을 꿈꿀 수 없었던 ’사드’는 목숨을 걸고 자신이 태어난 나라에서 탈출을 한다.

자신의 나라가 아닌 곳에서 이주민에서 부랑자로, 범법자로, 불법이민자로, 무자격자로, 실업자로 차츰 차츰 전락해가는 사드의 삶을 설명할 수 있는 단어는 단 한 단어이다. ’불법체류자!’ 발 딛는 곳 어디에서도 환영받을 수 없다면, 어디로 가야 한다는 말인가. 우리와 같은 이 시대를 살아가면서 ’이방인’일수밖에 없는 그의 고통에 대한 책임을 우리는 누구에게 물어야 할까. 

이상향을 찾아 모험을 나섰지만, 돌아갈 곳도 정착할 곳도 없는 떠돌이가 되어버린 ’사드’. ’희망’을 꿈꿀 수 없는 곳에서 탈출하여 ’희망’을 찾아 모험을 계속하는 사드의 모습을 보면서, 어쩌면 ’사드’가 우리에게도 다음과 같은 사회에서 탈출해야 한다고 권하고 있다는 생각에 사로잡힌다.

"아무리 힘들어도 제 나라보다 나으니까 머물러 있는 것 아니냐며 간단하게들 치부하죠. 당신들이 안 보이는 데서 주은 듯 조용히 사니까 존재 자체를 깡그리 잊어버리는 거예요. 일종의 집단적 무관심인데, 인간에게 무관심보다 심한 모욕은 없잖아요. (...) 타인을 나와 동일한 인간으로 보지 않는 순간, 나보다 열등한 인간으로 취급하는 순간, 인간을 그 자체로 보지 않고 우열을 나눈 순간, 인간을 인간 이하로 취급하는 순간, 미개한 사회가 되는 거라고 봐요."(p. 271)

<바그다드의 오디세우스>는 신랄하게 현실을 고발하는 소설이면서도 상당히 문학적으로 읽힌다. 지구촌 어느 곳에서 당장 만날 수 있을 것 같은 사드의 삶이 아름답게 느껴질 만큼 문학적 상징성이 뛰어나다. 불법체류자의 현실적인 문제를 직접 느끼면서도, 그보다 근본적으로 인간 사회 안에서 이방인으로 살아가는 존재의 고통을 통해 우리의 무관심과 오만함 속에 무심히 짓밟힐 수 있는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깊이 있는 성찰을 인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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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운 나쁜 해의 일기
존 쿳시 지음, 왕은철 옮김 / 민음사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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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책을 읽는 방식을 독자가 선택해야만 하는 독특한 구성의 대위법적 소설!


쉬는 날이면 <세바퀴>라는 예능 프로그램의 재방송을 즐겨 본다. 중년 여성들의 힘을 모여주는 신개념 토크쇼라는 의미에서 주목을 받고 있지만, 나에게는 '세대의 어우러짐'이 독특하게 다가온다. 요즘 음악 프로나 기타 예능 프로그램을 보면 출연진들이 '그들만의 무대'라고 할 만큼 세대의 단절이 두드러져 보인다. 그러나 <세바퀴>는 웬만해서는 한 자리에 모이기 힘든 노련한 선배들과 풋풋한 신인들이 어우려져 서로에게 호응을 보내며 만들어내는 세대 공감이 재미를 준다. 요즘은 문화의 차이보다 세대의 차이를 더 극복하기 어렵다고 생각하는 나의 시각에서는 그야말로 신선하고 훈훈한 신개념 토크쇼로 보인다.

<어느 운 나쁜 해의 일기>는 좀처럼 공감하기 어려운 세대 차이를 지닌 두 남녀가 주인공이다. 독일의 일흔두 살 노작가인 세뇨르 C와 스물 아홉의 매력적인 필리핀 여성 안야가 주인공이다. 소통과 공감 지대를 찾아보기 어려울 만큼 먼 거리의 삶에 자리에서 살아가던 두 사람이 어느 날, 아파트의 세탁실에서 우연하게 만나면서부터 이야기가 시작된다. 일흔두 살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젊은 여성의 매력에 한 눈에 빠져버린 노작가는 그녀를 설득해 자신의 타이피스트로 고용한다. 덕분에 안냐는 세료르 C가 집필하는 에세이의 첫 독자가 되면서, (의도하지 않은) 서로의 소통이 시작된다.

서로 달라도 너무 다른 이 두 남녀는 그렇게 소통하며 서로에게 영향을 미치는데, 나의 눈에 가장 놀라운 변화는 바로 노작가 세료르 C의 변화이다. 책에 등장하는 에세이는 노작가 세료르 C의 변화를 보여주는 장치의 역할을 하기도 하는데, 그의 '강력한 의견들'이 점차 '부드러워지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세료르 C가 집필하는 에세이는 작가의 철학을 잘 반영하고 있다. 그런데 그 철학에 변화가 생기는 것이다. 가끔 친구들이 부모님과 갈등을 빚을 때면, 나는 오래도록 그런 방식으로 살아오신 부모님의 생각을 바꾸는 것은 불가능이라고 말해주곤 했다. 그러니 차라리 우리가 맞춰드리는 것이 더 편하다고. 그런데 일흔두 살의 노작가에 나타나는 변화가 흥미롭다. 삶의 가치와 기준이 되는 개인의 철학은 쉽게 바뀌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더구나 이 노인은 '작가'가 아닌가. 작가가 가진 자신만의 색깔과 사상은 어떤 '고집'과도 같은데, 한참 어린 젊은 여성의 충고로 인해 그의 글에 눈에 띄는 변화가 나타나는 것이다.

세료르 C가 보여주는 안냐에 대한 '존중'과 안냐가 노작가에게 보내는 '존경'과 '연민'은 서로에 대한 피상적인 판단을 넘어 서로를 한 인격체로 받아들이는 '사랑'으로 다가간다. 마치 <레옹>이라는 영화에서 보여준 킬러 레옹과 어린 소녀 마틸다의 사랑을 보는 기분이라고 할까.

그러나 한 가지 이 책은 읽기가 쉽지 않은 책이다! 어떤 방식으로 읽을 것인지 독자가 선택을 해야만 한다. 책에 등장하는 세료르 C를 대하듯, 이 책의 작가와 소통하는 방식을 우리가 찾아야 한다. '바흐의 음악처럼 읽히는 노벨 문학상 수상 작가 쿳시의 대위법적 소설'이라는 설명이 말해주듯이, 이 책은 3개의 서로 다른 멜로디가 동시에 연주된다. (대위법이란 독립성이 강한 둘 이상의 멜로디를 동시에 결합하는 작곡기법이라고 한다.) 그러나 음악은 서로 다른 멜로디를 동시에 들으며 '하모니'를 감상할 수 있겠지만, 서로 다른 목소리가 동시에 울리는 책을 읽는 것은 상당히 곤혹스러웠다. 작가의 에세이와 세료느 C, 안냐의 목소리가 페이지마다 삼단으로 구성된 책을 소화하기 위해서는 우선 3개의 목소리를 구분해서 이해하고 난 후에, 다시 그 조합을 생각해야 했다. 상당한 수준의 독서 내공을 지닌 독자라면, 해박한 지식과 강력한 의견을 가진 노벨 문학상 수상 작가의 실험적인 소설에서 '하모니'를 감상할 수 있는 수준에 도전해보라고 권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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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속의 그림책 - 부모에게 상처받은 아이들의 호소문 에듀세이 2
이희경 지음 / 미래인(미래M&B,미래엠앤비)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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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에게 성처받은 아이들의 호소문


얼마 전, 기르던 강아지가 새끼를 낳고 이 세상을 떠났다. 새끼를 낳는 중에 문제가 생겨 수술을 받았는데, 그때 홍역에 감염되어 버렸다. 목도 제대로 가누지 못하고 온몸을 덜덜 떨다 나중에는 마비 증세까지 왔다. 그런데 강아지가 그렇게 아파하는 모습을 지켜 보는 것보다 더 나의 가슴을 아프게 한 것이 있었다. 목조차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강아지가 배고파 끙얼거리는 제 새끼에게 젖을 물리러 가려고 온 몸을 부들부들 떨면서도 자꾸만 일어서려고 정말 죽을 힘을 다하는 것이었다. 지금도 그 모습을 생각하면 가슴이 아파 눈물이 난다. 

우리는 한낱 짐승이라고 하지만, 짐승들도 제 몫숨보다 새끼를 더 아끼고 돌본다. 우리는 이것이 부모님의 숭고한 사랑이요, 갚을 길 없는 은혜라고 배웠다. 무조건적이고, 절대적인 사랑을 우리에게 주는 존재, ’부모’란 모든 생명체에게 그런 존재가 아니던가.

그런데 심리학이라는 학문의 영향 때문인지, 언제부터인가 우리 사회에는 부모에게 받은 상처를 호소하는 소리가 높다. 전에는 부모에게 상처를 받아도 그것을 모른 채 살았던 것인지, 아니면 유독 현대의 부모들에게 문제가 있는 것인지, 갈수록 부모의 은혜를 노래하기보다 부모에게 받은 상처를 치료하느라 분주한 분위기이다. 각종 치유 프로그램이 성행하는 것을 볼 때마다, 인간의 내면이 점점 더 허약해지고 병들어가고 있는 듯한 의혹을 떨쳐버릴 수가 없다.

<마음속의 그림책>은 심리치료 전문가인 이희경 선생님이 현장에서 직접 경험한 그림치료 사례를 바탕으로 집필한 책이다. 부모에게 받은 상처가 그대로 투영된 아이들의 그림은 아이들이 겪고 있는 고통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자녀에게 가해지는 부모의 학대와 폭력, 일방적인 사랑, 가족 간의 불화 속에 신음하며, 그 영향으로 왜곡되고 뒤틀린 채 성장하는 상처난 아이들의 고통 소리가 애처롭다. 이들의 성난 목소리, 고통에 울부짖는 소리가 더욱 절망적으로 들리는 것은 그 상처의 대상이 바로 (사랑하는) ’부모’이기 때문이다.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곳이며, 세상에서 가장 따뜻한 곳인 부모의 품! 그 품을 잃어버렸다면, 아니 그 품에서 오히려 더 지독한 고통을 당하고 있다면 그 아이는 어디로 피해야 한다는 말인가.

"잘 기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사람, 최소한의 양육도 못할 사람은 부모가 되지 말라"(189)는 아이의 외침이 이 땅의 모든 부모된 자들에게 어떻게 들려질지 궁금하다. 부모가 될 자격이 있는 사람만이 부모가 된다고 한다면 몇이나 부모가 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부모에게 받은 상처와 그 아픔이 자녀의 평생을 괴롭히는 파괴력을 지닌 것을 생각하면 ’부모 됨’에 대해 부모 스스로 자기 반성적인 성찰이 반드시 있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부모는 자녀의 숨소리만 들어도 자녀의 상태를 알 수 있다고 하지 않던가. 부모가 부모이기를 거부하는 것보다 더 심각한 인류의 타락은 없다고 생각한다. 부모의 사랑, 그것은 인간 사회를 지탱하는 마지막 보루일 것이다. <마음속의 그림책>에 담겨 있는 자녀의 신음소리에 모든 부모가 진심으로 귀 기울여 주기를 소망하는 마음 간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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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 인정받는 사역자 - 오스왈드 챔버스의 도전 오스왈드 챔버스 시리즈 6
오스왈드 챔버스 지음, 스데반 황 옮김 / 토기장이(토기장이주니어)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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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하나님의 것이다!


나는 사역자이다. 사역자의 위치에서 <하나님께 인정받는 사역자>를 읽었다. 이 책은 그야말로 내게 '도전'이다! 내가 쓰는 이 글이 사역자에게만 공개되는 서평이었으면 좋겠다. 책을 읽으며 완전히 벌거벗은 모습으로 하나님 앞에 서 있었던 순간을 솔직하게 공개하기가 망설여진다. 사역자로서 내 자신의 부족한 모습이 부끄럽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쉽게 비판할 수 있는 제3자의 입장이 아니라 나와 같이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소통하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책을 읽다가 기억하고 싶은 문장이나, 새로운 교훈을 얻으면, 그 문장에 밑줄을 긋고 책의 모서리를 접어 놓는다. 언제든 그 페이지를 쉽게 찾아 읽기 위해서이다. 그러나 <하나님께 인정받는 사역자>를 읽으면서는 모서리 접는 일을 그만 두었다. 그렇게 모서리를 접어가다가는 책의 전부를 접어야 할 판이었기 때문이다. 어느 한 가르침도 쉽게 지나칠 수 없었다.

오스왈드 챔버스 목사님은 사역자에게 기본적이고 원론적인 가르침을 준다. 하나님께 인정받는 온전한 사역자가 되기 위해, 사역자가 해야만 하는 일과 하지 말아야 하는 일,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 얽매여야 할 것과 얽매이지 말아야 할 것이 무엇인지 분명한 선포를 한다. 언제나 그렇듯 논쟁이나 타협은 없다.

<하나님께 인정받는 사역자>는 어찌 보면, 어느 시대에나 적용가능한 일반적이고 기본적이고 원론적인 사역자 상을 그려주는데, 밝은 조명이 나에게 집중되는 것처럼 나의 구석구석이 환한 빛 가운데 드러나는 강렬한 느낌에 사로잡혔다. 예수님의 증인으로 살고자 결단하며 분토와 같이 내어버린 세상 것들을 주섬주섬 다시 주워 챙기고 있는 나의 모습. 사람의 칭찬에 귀 기울이고, 하나님이 아닌 '사역'에 모든 관심이 집중되고, 나를 위한 자기계발을 목표로 삼고, 성경을 좀 더 잘 가르치기 위해 지적 훈련에 열중하고 있는 나의 모습이 보였다.

이 책을 읽으며 내가 가장 많이 회개한 부분은 '공평하신 하나님'을 부르짖으며 하나님께 억울함을 호소했던 일이다. 하나님 앞에 서러워 울던 날도 많았는데, 오스왈드 챔버스 목사님의 칼날 같은 말씀 앞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하나님의 공평을 구하는 호소가 당연하다고 생각했는데, 그것이 전적으로 '나를 위한' 간구였다는 것을 깨닫고 나는 하나님께 다시 꿇어 엎드렸다.

"그럼에도 우리는 불평을 하며 자신을 위한 공평을 구한다. 억울하고 불공평하다는 것이다. 당신이 복음의 사역자로서 자신과 관련한 공평을 구한다면 당신은 곧 자기연민이나 낙심에 빠져 가방을 싸고 주님의 제자도의 길을 포기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절대로 자신을 위해 공평을 구하지 말라. 억울한 일이 발생하면 당하라"(p. 122).

오스왈드 챔버스 목사님의 영적 통찰력에는 영적 생명력이 충만하고, 미묘한 간극을 날카롭게 파헤치는 예리함이 있다. 열심이 열심이 아니며, 잘못이 잘못인줄도 모르고 행할 수 있는 중요하고도 결정적인 지점을 정확하게 짚어주실 때마다 놀랍고도 시원하다.  

<하나님께 인정받는 사역자>는 특별히 '설교(학)'를 위한 가르침을 얻기 위해 읽어도 좋을 책이다. 오늘날 설교자들이 자칫 범하기 쉬운, 또는 이미 범하고 있는 오류와 잘못이 무엇인지 진단할 수 있으며, 사역자가 반드시 마음에 새기며 놓쳐서는 안 될 설교에 대한 중요한 메시지가 들어있기 때문이다.

"웅변가는 청중의 마음에 새로운 관심을 불러일으켜 어떤 일을 하게 한다. 그러나 복음의 설교자는 청중이 끝까지 안 하려고 버티는 것을 하게 할 수 있어야 한다. 바로 자신들에 대한 권리를 포기하게 하는 것이다. 설교자의 사명은 죄를 드러냄과 동시에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드러내는 것이다"(p. 44).

<하나님께 인정받는 사역자>를 읽으면서 다시 한 번 확인하게 되는 것은 오스왈드 챔버스 목사님의 가르침은 성경적 영감으로 가득 차 있으면서도 명문장가라는 사실이다. 일부러 멋을 낸 흔적도 없는데, 그 힘 있는 가르침과 선포가 읽는 자의 마음에 하나님의 불꽃을 일으킨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깨뜨리시고 잘라내시고 다듬으시는 이유는 오직 단 한 가지 목적, "이 사람이 바로 내 사람이다"라고 말할 수 있기를 원하신다는 말씀이 내게 말할 수 없이 큰 위로를 준다. "나는 하나님의 것이다!" "너는 내 종이니라"(사 44:21) 하시며 나를 부르신 그날의 주님 음성이 다시 나를 가득 채운다. 오직 나를 부르신 하나님께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으로 인정되기를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간절히 소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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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노스케 이야기 오늘의 일본문학 7
요시다 슈이치 지음, 이영미 옮김 / 은행나무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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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춘의 찬란한 빛은 그것을 지나온 사람의 눈에만 보이는가 보다.
그렇게 찬란한 청춘을 살았던 요노스케 이야기, 나의 이야기, 그리고 우리의 이야기!



어렸을 때, 어른들은 내게 "넌 아직 어려서 잘 모르지만 어른이 되면 저절로 알게 될 거야"라고 말씀하셨다. 그렇지만 난 그럴 때마다 억울한 마음으로 ’나도 이미 다 안다고요!’라고 항변했다. 그러나 어른이 된 지금, 내가 그때 정말 몰랐었다는 것을 인정해야겠다. 다 안다고 자신했던 내가 얼마나 어렸었는지 이제야 알 것 같다.

초등학교에 입학하고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나는 주어진 길을 그저 걸었다. 똑같은 목표와 똑같은 목적을 가지고 똑같은 생활을 했던 또래 친구들과 함께 그렇게 한 방향을 향해 걸었다. 그 길만이 바른 길이라 믿었다. 그래서 우리는 같은 길을 걷지 않는 친구들의 삶을 ’탈선’이라 이름 붙였던 것 같다. 

그래서였을까. 대학교에 입학했던 그 봄날을 기억한다. 그것은 일종의 ’단절’이었다. 늘 똑같은 모양이었던 고등학생과 급격히 단절되면서, 내던져지듯 시작된 대학 생활. 틀에 꽉 짜인 생활에서 놓여나 한꺼번에 모든 강제가 풀려버리자 나는 넘쳐나는 자유 시간을 주체하지 못했었다. 헐렁해진 생활 사이사이로 문득문득 엄습해오는 불안감! 그 불안감은 우리의 청춘을 더욱 열에 들뜨게 만들었지만, 결국 그렇게 열에 들뜬 채로 흘러가버리고 말았다. 열에 들뜬 채 했던 사랑, 열에 들뜬 채 떠들어 댔던 모든 말들, 열에 들뜬 채 빠져들었던 모든 것, 그 어설펐던 시절을 거쳐 나는 지금 여기에 있다.

열여덟 청춘 <요노스케 이야기>는 내일에 대한 불안함 속에, 그것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도 모른 채 무심코 흘려버린 대학 시절을 돌아보게 해준다. 특별히 똑똑하지도 않고, 특별히 착하지도 않고, 특별한 고민도 없는 다소 어수룩한 ’요노스케’가 주인공이다. 하루하루는 성실하지만 특별한 목적 없이 흘러가는 그의 일상이 지나온 나의 일상과 많이 닮아있다. 그렇게 흘러가는 시간 어디쯤에서 우연하게 만난 사람들과 크고 작은 우연한 사건을 계기로 조금씩 요노스케의 인생이 채워지면서 방향을 바꿔간다. 우연한 계기로 물줄기를 바꾸며 흘러가는 <요노스케 이야기>는 모든 것은 우연에서 시작되며, 우연은 곧 필연이 된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듯하다.

<요노스케 이야기>는 자극적이지 않고 강렬하지 않아 더 짠- 하면서 슬프다. 어느 한 시절, 요노스케와 함께 청춘을 보내며 성장한 주변 인물들이 20년의 세월을 지나 각자의 삶의 자리에서 다시 요노스케를 회상하는 장면은 따뜻하면서도 쓸쓸하다. 청춘의 찬란한 빛은 그것을 지나온 사람의 눈에만 보이는 빛인가 보다. 

정말 아무것도 몰랐던 시절을 지나 조금씩 세상에 눈뜨며 성장하는 <요노스케 이야기>. 특별한 주인공의 특별한 영웅담이 아니어서 내 친구처럼 느껴지는 요노스케이다. 그러나 그를 기억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인생의 가장 큰 행복을 선물해준 평범한 요네스케야 말로 어쩌면 가장 특별한 영웅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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