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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왼쪽에서 가장 아래쪽까지 - B급 좌파 김규항이 말하는 진보와 영성
김규항.지승호 지음 / 알마 / 2010년 3월
평점 :
품절
’좌파 김규항’이 제시하는 사회와 삶의 좌표!
많은 책을 빠르게 읽기 위해 속독를 연마하고 있는 중인데, 오랫만에 꼼꼼하게 읽은 책이다. 고등학교를 다닐 때는 하루가 멀다 하고 데모를 하는 서울대 옆에서 체류탄 가스도 많이 먹었고, 전교조에 가입한 선생님이 학교에서 쫓겨나는 것도 지켜봤고, 선생님과 함께 데모를 하던 선배 언니들과 임신 중이었던 선생님의 사모님이 머리채를 잡힌 채 전경들에게 끌려갔다는 소식을 전해듣기도 했었고, 대학에 입학한 뒤로 운동권에서 활동한 많은 친구도 두었다. 나에게도 저항심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으나 당시 삶 자체에 대해 회의적이었던 나는 지독한 무력감에 빠져 있었다. 친구들의 좌파적 성향이 시들해질 즈음, 정치적 변절자들이 생겨날 즈음, 믿었던 사회적 인사들에게 거듭 실망할 즈음, "그 놈이 그 놈이고, 그 놈이 그 놈이다"라는 식의 체념이 깊은 상처와 좌절을 남기면서 사회적 문제에 대해 더욱 무관심해졌다는 변명을 하고 싶다.
<가장 왼쪽에서 가장 아래쪽까지>를 읽으며 내가 느낀 가장 깊은 좌절은 도대체 나에게도 생각이라는 것이 있는가 하는 자괴감이었다. 극좌파, 극우파, 좌파, 우파, 급진파, 진보파, 개혁파, 아무리 잘게 나누어보아도 나는 소속을 모르겠다. 김규항 씨의 표현을 조금 빌리자면, 재난이 닥쳤는데 그것이 재난인 줄도 모르는 우매한 대중이라고나 할까. 개인의 문제에 매몰된 삶이라는 자가진단이 나온다. 나름 배울만큼 배우고, 책도 꽤나 읽었다고 생각하는데, 어째서 제대로 된 문제의식 하나 없이, 사회적 입장 하나 없이, 자신의 분명한 목소리 하나 가지지 못했는가.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고, 말하지 못하는 내 자신이 이 사회보다 더 큰 문제라는 자책이 나를 괴롭히고 있다.
이 책이 나에게 이토록 자극이 되는 이유는 내가 ’기독교인’이라는 정체성을 가지고 살아가는 종교인이라는 데에 있다. "내 밖의 적과 싸우는 일을 혁명이라 하고, 내 안의 적과 싸우는 일을 영성"이라 말하면서, "하루에 30분도 기도하지 않는 혁명가가 만들 세상은 위험하며, 혁명을 도외시하는 영성가가 얻을 수 있는 건 심리적 평온뿐"이라는 그의 질책이 아프다. 예수님의 삶을 본받아, 예수님의 기르침대로 살고 있는가라는 질문 앞에 스스로 생각해도 떳떳할 수 없는 내적 갈등이 긴장을 만들었다.
이 책을 통해 내가 얻은 가장 큰 교훈은 "신자유주의"가 가진 문제점과, 우리가 무엇과 싸워야 하는지를 알게 된 것이다. "자유로운 경쟁은 누구에게나 공정한 것 같지만 실은 이미 가진 격차를 공식화하고 더 심각하게 만드는 사악한 수단으로 작동할 수도 있습니다. (...) 자본도 무한정한 자유를 얻게 되었어요. 민주화의 기쁨에 취한 채 군사독재에서 벗어났는데, 이제는 자본의 독재에서 살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이젠 아이가 태어나는 순간부터 자기계발을 하고 경쟁에 몰두해야 하는 세상이 되어버렸어요. (...) 자유를 얻기 위해 그토록 오랫동안 싸웠는데 이젠 그 자유에 의해서 목이 졸리는 세상을 만나게 된 겁니다"(54).
군사독재보다 자본의 독재가 더 무서운 것은, 문제의 본질이 감추어져 있고, 착취 당하고 차별 받으면서도 우리 스스로 그 독재를 강화한다는 데에 있지 않을까. 좌파 김규항은 지역문제보다 더 깊은 핵심은 ’계급’이라고 단언한다(147). 얼마 전, 아는 동생이 어렵게 공부해서 서울대학교에 입한 후, 심각한 열등감에 시달리게 되었다는 고백을 한 적이 있다. 그만 그만한 생활 형편의 친구들과 어울렸던 고등학교 때와는 달리, 서울대학교에 들어가고 보니 그들과 어울릴 수 없는 자신의 계급이 보이더라는 것이다.
"가짜 경쟁 체제에 대한 비판과 저항이 필요하다"(279)고 말하는 김규항의 대안은 ’자발적 가난’이라는 가치관의 전환에 있다. "세상이 바뀐다는 건 노동자가 자본가가 되는 게 아니라 가치관이 바뀌는 거죠. 자본가의 가치관이 지배하는 세상을 노동자의 가치관이 지배하는 세상으로 바꾸는 겁니다. 자본가의 가치관은 남보다 많이 갖고 싶어 하고 남들과 격차가 벌어질수록 행복해지는 가치관입니다"(290).
김규항은 "책하고 이론 속에서만 사는 사람들을 가장 한심하다"(119)고 말한다. 오해와 공격을 받더라도 본질을 이야기하는 게 지식인의 도리라고 말한다(147). 요즘 ’지행합일’이라는 가르침을 새롭게 되새기고 있는 중입니다. 말과 행동이 일치하고, 아는 것과 행동이 일치하는 삶, 언제부터인가 우리가 되외시 하고 있는 가르침이다. 이 책을 읽으며 스스로가 많이 부끄러웠다. 사회와 체제에 대한 시덥지 않은 분노와 비판으로 오히려 시끄러운 소음만 일으킬 뿐, 사회성도, 공동체성도 잃어버리고 그저 개인적인 안일을 위해 살아온 시간들을 반성한다. 부디 내가 깨닫고 알게 되는 진실이 삶으로 이어지기를, 나의 앎과 행동이 일치하기를 기도하고 또 기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