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핼리혜성과 신라의 왕위쟁탈전
서영교 지음 / 글항아리 / 2010년 4월
평점 :
하늘의 힘을 정치적으로 이용한 신라의 궁중 암투 사건을 파헤치다!
나는 왜 이 책이 소설인 줄 알았을까? <핼리혜성과 신라의 왕위쟁탈전>이라는 제목만으로 당연히 이 책이 소설일 것이라고 지레 짐작을 한 것이다. <핼리혜성과 신라의 왕위쟁탈전>이라는 다소 무협지 느낌의 제목을 가진 이 책은 놀랍게도 ’논문’이다. 핼리혜성을 독립변수로 하고, 혜성이 나타날 때마다 신라왕이 피살되었다는 것이 종속변수라고 할 수 있겠다.
이 책은 얼마전 종영한 <선덕여왕>의 한 장면을 떠오르게 한다. 드라마에서 주인공 덕만이가 ’공주’로서의 신분을 되찾고자 할 때, ’일식’이라는 자연 현상을 이용하는 것으로 그려졌다. 그리고 자신이 정권을 잡기 위해서는 "하늘의 힘이 조금 필요하다"는 미실의 한마디가 당시의 신라 분위기와 이 책의 주제를 오버랩시킨다.
<핼리혜성과 신라의 왕위쟁탈전>은 신라후기 4년에 걸쳐 벌어진 왕위쟁탈전이라는 반역의 역사 배후에 ’혜성’이라는 자연현상이 주요한 영향을 미쳤음을 논증한다. 정치적 반역을 꾀하는 자들이 ’혜성’이라는 자연현상을 정치적으로 이용한 데에는 고대인들이 자연을 바라보는 방식에 그 이유가 있다. 우리나라가 매년 극심한 홍수 피해를 입었을 때, 우리 할머니는 나라의 임금이 분노한 하늘에 잘못을 빌어야 한다고 하셨다. 기상이변을 하늘의 심판으로 생각하셨던 것이다. 이와 비슷한 맥락에서, 신라인들 뿐만 아니라 고대인들에게 ’혜성’과 같은 기상 이변은 그 자체로 ’공포’의 대상이었고, 특히 왕권이 불안정할 때 정치인들은 그러한 대중의 공포를 이용해 권력 찬탈의 도구로 사용한 것이다. 신라 격변기 등장한 혜성은 본능적으로 "거대한 혜성이 떠서 왕의 잘못을 경고하고 있다. 만일 왕을 죽이지 않으면 혜성이 지상에 떨어지고 우리 모두가 죽고 만다"(9)는 공포를 심어주었다. 정치적으로 혜성의 등장은 "그 나라 최고의 정치지도자 중 누구 하나가 죽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고, "피 흘림"의 역사를 예고했던 것이다.
이 책의 서문(들어가는 말)은 이러한 주제의 논문이 학계에서 어떠한 반응을 불러일으켰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저자는 이 책의 토대가 되는 다섯 편의 논문을 발표하기도 했는데, 학술잡지에 게재되기까지 모두 두세 차례 탈락을 경험했다고 밝힌다. 문제는 우리나라에 문헌자료가 부족하다는 것과, 자연현상과 정치를 직접 연결하여 고대사를 조명하는 이러한 이해가 생소하는 것이 학계의 배타적인 저항을 불러일으켰을 것이다.
이 책은 많은 부분 중국의 역사기록에 의존하고 있다. 지난 1500년 동안 338회의 혜성이 출현했는데, "중국인들은 혜성에 관한 한 세계에서 가장 상세한 기록을 남겼다"고 한다(8). 고대 사서에 나타난 혜성 기록을 토대로, 신라 후기에 벌어진 왕들의 연이은 죽음과 반란을 ’혜성’이라는 자연현상과 연결시킨 저자의 상상력이 신라 후기의 역사를 전혀 다른 시각에서 이해하도록 자극한다. 이 책은 혜성이라는 하늘의 힘을 정치적으로 이용한 궁중 암투 사건 이외에도, 그것이 ’도솔가’ 등과 같은 문학으로까지 연장되고 있음을 밝힌다. ’혜성’이라는 자연현상을 고대사를 연구하는 중요한 역사적 변수로 확실히 자리매김시키고 있는 것이다.
학술적 진지함과 시대를 통찰하는 상상력이 빚어낸 새롭고 재밌는 논문이다. 논문의 새바람이라고나 할까. <핼리혜성과 신라의 왕위쟁탈전>이라는 제목처럼, 틀에 박힌 학계에 새로운 자극이 되어줄 저자의 학술적 상상력이 어쩐지 유쾌하게 느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