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적 원자 - 세상만사를 명쾌하게 해명하는 사회 물리학의 세계
마크 뷰캐넌 지음, 김희봉 옮김 / 사이언스북스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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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단 수준에서 나타나는 패턴을 이해하는 연구!

 
이 책은 사회 과학의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터닝 포인트로 기억되지 않을까 싶다. 사회 과학의 판도를 뒤바꿔놓을 크나큰 소용돌이가 예상된다. 물리학의 방법으로 사회 과학을 연구할 수 있다면, 사회 과학의 혁명이라 할 만하다. 이 책은 "물리학에서나 나타나는 정도의 수학적 규칙성을 인간 세상에서도 찾아내려는 진지한 시도들"(8)과 그 낙관적인 가능성을 알리고 있다. 

"겉보기에 복잡한 사회 현상이 실은 아주 단순한 이유에서 시작될 수 있으며, 사람들은 물리 법칙에 버금가는 법칙들의 지배를 받는다. 인간들이 어떻게 이러한 법칙들에 휘둘리는지 살펴보면 복잡한 사회 속에서 단순한 패턴이 드러난다. 이 책은 이러한 생각에 대한 탐구이고, 인간을 다루는 과학의 심대한 변화에 대한 책이다"(8).

인간 사회를 '설명'하기 원하는 사회 과학자들의 궁극적인 꿈은, 인간 사회에 작동하는 '법칙'을 발견해내는 일이라 생각한다. 만일 자연과학과 마찬가지로 인간 사회에 작동하는 '법칙'을 발견해낸다면, 아인슈타인이나 뉴턴에 버금가는 '대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사회 과학계의 기존의 사고 방식에 따르면, 사회가 복잡한 것은 인간이 복잡하기 때문이며, 따라서 경험적 지식을 기반으로 하는 사회 과학을 통해서는 인간 세상을 물리학이나 화학처럼 정밀하게 이해할 수는 없다는 견해가 지배적이었다. 그런데 <사회적 원자>는 이 오래되고 견고한 믿음에 도전한다. "인간 세계에 적용되는 엄밀한 '법칙'을 찾는 일은 아직 멀었는지 모르지만, 과학자들은 인간 세상에서도 법칙에 가까운 규칙성들을 발견해가고 있다"는 것을 알리며 말이다.

"우리가 자연의 나머지 부분에서 하듯이 인간 세계에서 패턴을 찾는 법을 배우고, 그것들을 인간들의 평범한 행동이 자연스럽게 모여서 이루어진 결과로 설명하려고 노력하면, 분명히 그렇게 될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오늘날의 사회 과학자들은 물리학이 몇 세기 동안 하고 있는 것과 본질적으로 동일한 연구에 뛰어들고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것은 바로 집단 수준에서 나타나는 패턴을 이해하는 연구이다"(60).

<사회적 원자>는 사람이 원자나 분자처럼 단순한 법칙을 따른다고 생각하고, 그 법칙에서 나오는 결과가 어떤 패턴을 보이는지 알아보자는 것이다. 이 책에서는 사회적 원자가 서로 얽혀서 유행과 사회 계급, 대중 운동, 협력과 인간의 언어를 포함한 심오한 사회 현상들을 어떻게 만드는지 체계적으로 살펴본다. 이러한 연구가 가능하게 된 것은 무엇보다 '컴퓨터'의 도움이 크다고 할 수 있겠다. 컴퓨터를 이용한 '가상' 사회 실험으로 가장 근본적인 사회 현상을 탐사하는 일이 가능해졌기 때문이다.

<사회적 원자>의 키워드는 '자기조직화'와 (집단 행동의) '패턴'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책의 중심 아이디어는 갑작스러운 민족주의의 폭발, 산아 제한과 여성 교육 사이의 이상한 관계, 지속되는 인종 분리, 그밖의 수많은 중요한 사건들이나 평범하고 흥미로운 사회 현상들(금융 시장, 정치, 패션 등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이해하려면 사람이 아니라 패턴을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20). 인간은 자유로운 개인으로서 각자 자기 뜻대로 행동할 수 있는데도 그 행동의 총합은 예측 가능하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사회적 원자가 행동하고 반응하는 방식을 통해 집합적인 조직과 그 변화의 법칙을 이해하고자 하는 것이다.

<사회적 원자>는 집단적 수준에서 나타나는 패턴을 이해하고 연구함으로써, 경험적 지식으로는 자연과학처럼 정교한 '법칙'을 알아낼 수 없다는 사회 과학의 회의론을 극복해내고 있다. 사회학 특장으로 처음 <복잡계> 이론을 수강하고, 첫 시간에 2002 월드컵 때 뜨거운 응원 열기를 보여주었던 '붉은 악마' 현상을 예로 하여 '창발'에 관한 개념을 배웠을 때까지만 해도, 복잡한 사회 현상 속에 의외로 심플한 '패턴'이 숨어 있다는 사실이 사회 과학적으로 이렇게 큰 '의미'를 가진 발견일 것이라고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우리나라에서는 '복잡계 네트워크'라는 단체가 이 분야의 연구를 주도적으로 이끌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올해 '복잡계 네트워크'가 교육과학기술부 산하의 '사단법인'이 되었다고 들었다. <사회적 원자>는 차분하고 체계적인 설명으로 사회 물리학의 기본 전제와 학문적 체계를 비교적 쉽게 설명해주고 있다.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따르게 되는 '집단적인 행동 패턴'을 탐구한다는 점에서 전공자가 아니어도 흥미롭게 읽어볼 만한 책이다. 사회 과학도라면 그 학문적 전제와 방법론적인 측면에서 큰 관심을 가지고 읽어볼 만한 책이라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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닉 부이치치의 허그(HUG) - 한계를 껴안다
닉 부이치치 지음, 최종훈 옮김 / 두란노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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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연약함을 사랑하며,
왜 살아야 하는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배우다!


허그의 힘이 얼마나 대단한지 허그의 위력을 보여주는 동영상을 본 적이 있다. 쌍둥이로 태어난 한 아기가 병약해 인큐베이터 안에 들어가 있었다. 그러나 가엾게도 그 아기의 생명은 꺼져가는 중이었다. 이를 안타깝게 지켜보던 간호사 한 분이 다른 쌍둥이 아기를 인큐베이터 안에 넣어주었다. 그런데 정말 신기하게도 한 아기의 팔이 아픈 아이를 허그하는 듯한 자세를 취했고, 그러자 잠시 후 생명의 불꽃이 꺼져가던 아기의 심장이 다시 뛰어 건강해졌다는 놀라운 이야기였다. 한 아기의 허그가 죽어가던 생명을 살린 것이다. 내게 <닉 부이치치의 허그>는 마치 그 아기의 허그처럼, 꺼져가던 열정의 불꽃을 다시 일으켜주었고, 생명력을 잃어가던 심장을 다시 뛰게 해주었다. <닉 부이치치의 허그>로 인해 다시 살아야겠다는 삶의 열정으로 내 심장이 뛰었다.

그의 동영상이 꽤 유명했기 때문에 한국에서도 '닉 부이치치'를 알고 있는 사람이 꽤 많을 것이다. 팔, 다리가 없는 '외계인' 같은 모습이지만, 열정과 환희로 빛나는 그의 얼굴을 보았다면 모두 나처럼 동작을 멈추었을 것이다. 그런 그가 쓰러진 채 안간힘을 쓰며 팔, 다리 없이 다시 일어서는 모습을 지켜보았다면 모도 나처럼 뜨거운 눈물을 흘렸으리라 짐작된다. 그런 닉 부이치치를 다시 책으로 만났을 때, 처음에 나는 그에게 없는 팔, 다리가 나에게 있음을 감사했다. 그러나 점점 그에게는 있으나 내게는 없는 많은 것들을 알게 되었다. 삶의 장애를 가진 사람은 닉 부이치치가 아니라 바로 나였던 것이다.

현재 사업가이기도 하면서 세계적인 강사로 주목 받고 있는 닉 부이치치는 수영을 하고, 스케이트보드를 타고, 드럼을 연주할 뿐만 아니라, 서핑을 즐기며, 컴퓨터로 세계인과 소통하고 있다. 그는 스스로 그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던 인생을 즐기고 있다고 자신있게 외친다.

한 쪽 팔이나 한 쪽 다리도 아닌, 양팔, 양다리 모두 없이 태어난 사람이 어떻게 이처럼 행복하고, 활기차고, 세상에 기여하는 사람이 될 수 있었을까? 닉 부이치치는 "장애를 신체적 한계에서 축복을 가져다주는 통로로 인식하면서부터 내 삶은 극적이리만치 긍정적으로 변했다"(231)고 고백한다. 물론, 그도, 또 신실한 믿음의 가정을 이루었던 그의 가족들도 "짐스럽기만 한 장애가 축복이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17). 그 또한 한 없이 절망했던 때가 있었다. 실제로 그는 낙심의 소용돌이 속에서, 서너 번 소망을 놓아버렸던 때가 있었음을 고백한다. 8살 이후 세 번이나 자살을 시도했던 것이다. 이랬던 그가 지금처럼 극적인 인생 역전을 이룰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을 신앙하는 믿음 안에서 그의 존재 목적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닉 부이치치의 허그>를 읽으면, 그의 인생은 하나님의 작품이라고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모두가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라고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그가 발견한 인생의 목적은 비록 장애를 안고 태어났지만, 자신의 장애가 어쩌면 세상에 기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놀라운 희망이었다. 하나님은 때로 우리의 연약함을 통해서 당신의 권능을 보여주신다. 우리는 약하지만 그분은 강하시는 사실을 붙들 때, 놀라운 대반전의 역사가 펼쳐지는 것이다. 닉 부이치치는 온 몸으로, "인생을 통틀어 가장 참담한 사건이라도 선한 일을 하는 기회가 될 수 있다"(155)는 사실을 가르쳐준다.

<닉 부이치치의 허그>를 읽기 전에는 장점으로 사는 인생이 지혜롭다 생각했다. 그래서 은사에만 주목하고, 남보다 내가 더 가진 것이 무엇인가만을 찾아 헤맸다. 그러나 <닉 부이치치의 허그>를 읽으면서, 나의 약점이, 나의 부족함이, 나의 고통의 경험이 다른 사람을 위로하고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증거하는 훌륭한 도구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깊이 깨달았다. 지금 나는 감사한 마음으로 나의 연약함이 무엇인지 다시 돌아보는 중이다. 나의 연약함을 통해서도 하나님께서 주시는 사명과 삶의 목적을 발견할 수 있다는 사실이 나의 심장을 다시 뛰게 한다.

온 마음과 온 마음과 온 영혼으로 지치고, 낙심하고, 상처난 우리의 영혼을 안아주는 닉 부이치치는 이렇게 속삭인다. "누구에게나 세상에 보탬이 될 만한 구석이 있는 법이라"고 말이다. 그렇다! 어떠한 약함이라도 하나님의 권능에 붙들리기만 하면, 하나님의 뜻 아래 있기만 하다면, 선한 일을 하는 기회가 될 수 있다! 닉 부이치치가 주는 감동이 바로 이것이다. 그가 우리에게 주는 위로는 그와 같은 사람도 저렇게 기쁘게 살아가는데, '정상적'으로 태어난 우리는 그보다 훨씬 기쁘게 살아갈 수 있다는 값싼 위안이 아니다. 세상에 불가능은 없다는 무한 긍정의 힘도 아니다. 그가 온 몸과 온 삶을 통틀어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메시지는 바로 이것이라고 생각한다. "남들을 섬기지 않는 한, 진정한 성취감을 맛보기란 불가능함을 기억하라"(60). 그의 위대함이 여기에 있다. 남보다 더 잘 살아보겠다고, 남보다 더 가져보겠다고, 남보다 더 누려보겠다고, 서로 상처를 내고, 헐뜯고, 짓밟으며 사는 우리가 들어야 할 메시지는, 삶의 진정한 행복과 성취는 바로 '남을 섬기는 삶'에 있다는 것을 말이다. 그의 행복한 미소의 근원은 장애를 극복하고 홀로 설 수 있다는 사실에 있지 않고, 한계를 껴안고 세상을 위로하는 그의 진심어리고 따뜻한 '허그'에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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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타
멜라니아 마추코 지음, 이현경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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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린 우리가 온 곳보다는 우리가 가야 할 곳에 더 애정을 느끼지"(330).

우리 인생은 과거에서 이어져 미래로 나아가는 화살표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과거에서 왔지만 우리의 관심은 화살표가 가리키고 있는 방향, 즉 미래 쪽으로 시선이 기울어져 있는 것이다. 국경을 초월하여 다인종, 다문화 사회를 향해 가고 있는 시점에 자신의 고유한 뿌리를 탐구하는 일이 얼마나 의미가 있고, 가치가 있는 일일까 의구심도 들지만, 이것은 "우리는 어디에서 와서, 왜 살며, 어디로 가는가?"라는 인생의 보다 본질적이고 근본적인 물음과 맞닿아 있기도 하다.

한 소년과 소녀의 인생과 사랑 이야기를 다룬 <비타>는 개인사이면서 가족사이고, 민족사이면서 세계사이기도 하다. 시간적으로는 현재에서 과거를 추적하는 자손 세대의 시점과 그들이 추적하는 과거의 '오늘'이 교차하고, 공간적으로는 뉴욕과 '투포'라는 이탈리아 남부의 작은 마을이 교차하면서 씨줄과 날줄로 '마추코 집안'의 내력을 엮어간다.

 <비타>의 작가 멜라니아 마추코는 개인의 가족사를 배경으로, 그러니까 실화를 바탕으로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며 미국으로 이주해 간 가난한 이탈리아인들의 이민사"라는 대서사시를 완성해냈다. 할아버지 세대의 삶(뿌리)에 대해 들려줄 증언자들이 이 땅에 얼마 남지 않은 시점에서, 그녀는 뿌리에 관한 전설에 대한 절박함, 기억에 대한 갈망을 다음과 같이 간접적으로 시사한다. "역사가 없는 한 집안의 이야기는 전설이다. 세대에서 세대로 전해지며 세세한 내용과 이름과 에피소드가 풍부해지는 전설이다. 주의가 산만하고 무심하던 어린 시절에 전해 들은 전설은 너무 늦게 재발견되었다. 이제 아주 단순하고 꼭 필요하며 늘 따라다니는 영원한 질문, 즉 '너는 누구이며 어디에서 왔으며 어떤 운명의 마지막 고리인가?'라는 질문에 대답해 줄 사람이 아무도 없다"(547).

<비타>는 열한 살 디아만테와 아홉 살 비타가 이탈리아를 떠나 1903년 뉴욕 엘리스 섬에 내리면서 시작된다. "책 제목인 '비타'는 이탈리아어로 '삶, 인생'을 가리키는 단어이다. 이름이 암시하듯 이 소설은 비타의 인생, 그리고 비타를 사랑한 소년, 디아만테의 인생 이야기다"(572). 이 같은 역자의 힌트를 염두에 두고 있는다면 이 책이 보여주고자 하는 큰 그림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1903년을 기점으로 <비타>가 추적한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며 미국으로 이주해 간 가난한 이탈리아인들의 이민사"는 이 한 문단 안에서 모두 요약이 된다. "19세기 말에 태어난 젊은이들은 미국으로 왔다. 열네 살, 열여섯 살, 열여덟 살(...)에 더 크고 싶고 살아남고 싶고 다시 일어서고 싶었던 젊은이들은 무리를 지어서 사촌들과 형제들과 친구들과 대서양을 횡단해야만(죽어야만) 했다. 더 크고 싶고 살아남고 싶고 다시 일어서고 싶다면 말이다. 그들은 (...) 미국과 맞서야만 했다. 그들은 버려지고 길을 잃고 죽은 사람 취급을 받아야만 했다. 고향으로 되돌아가야만 했다. 극히 일부분만이 실제로 그렇게 했다. 도전적인 수많은 이야기의 주인공은 여행을 계속하면서 사람들에게 알려진 세상의 경계 너머까지 밀고 나가서 마침내 자신이 떠나왔던 곳보다 훨씬 더 마음에 드는 왕국을 찾는다. 그리고 그곳에 머물기 위해 새로운 삶을 시작한다"(200). 그 잔혹했던 역사의 한 귀퉁이, 생의 한 자락, 누구도 거부할 수 없었던 비극적 운명의 수레바퀴를 작가는 이처럼 간단하게, 극명하게, 비참하게, 눈부시게, 지독하게, 충만하게 그려내고 있다.

성경에 나오는 메뚜기 떼처럼 미국에 날아온 4500명 사이에 끼어 있었던, 열한 살 디아만테의 인생 이야기는 다음과 같은 첫 문장으로 시작된다. "미국에서 사람들이 그에게 제일 먼저 시킨 일은 바지를 벗는 것이었다"(24). / 지금은 세계적인 패션의 거리로, 세계의 유행을 결정하고, 어떤 것이 유행에 뒤떨어진 것인지 판정하는, 성공한 사람들을 위한 지역이 된 소호(65). 그중에서도 프린스 스트리트는 이 지역에서 가장 유행에 앞선 거리였다. 그 거리의 이름이 낯익은 '나'는 건성으로 이렇게 내뱉는다. "우리 친 할아버지가 프린스 스트리트에 사셨대"(66). / 이렇게 시작되고, 교차되는 이야기 속에서 우리는 지금의 모습과는 전혀 다른 삶의 공간이었던 뉴욕의 한 모퉁이를 들여다볼 수 있다. 그리하여 우리는 뉴욕타임즈 빌딩이 세워질 때, 그곳에 흘려졌던 이탈리아인들의 눈물과 애환을 다시 기억하게 된다. 누구도 알지 못했고, 아무도 기억하지 않았던 그들의, 또 우리의 역사를 말이다.

20세기 초, 가난한 노동자로 살아야 했던 이민자들의 애환은 이 한마디로 정리할 수 있을 듯 하다. 시간과 건강과 감정과 존엄과 영혼을 도둑 맞은 삶이었다고. "로코는 누군가의 것을 훔쳐야만 부자가 될 수 있는 거라고 설명했다. 꼭 돈을 훔칠 필요는 없었다. 부자들은 많은 것을 훔칠 수 있었다. 다른 사람의 시간, 건강, 젊음, 감정, 존엄, 영혼을 훔칠 수 있었다. 이것은 그들의 재산이 전부 도둑질한 것이라는 것을 증명했다. 노동은 도둑들이 삶을 열기 위해 사용하는, 자물쇠를 여는 도구다"(84).

최소한의 존엄마저 지킬 수 없는 잔혹하고 비참한 삶,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다시 살게 하는 것, 견디게 하는 것, 현실의 고통을 잊게 해주는 것, 그것은 무엇일까?

시간과 공간뿐 아니라, 여러 사람의 사랑도 교차되는 <비타>의 다양한 인생 이야기가, 소년과 소녀의 가혹한 세상살이와 뒤섞인 그들의 꿈과 사랑과 좌절과 운명과 도전이 내게 던져준 질문이다. <비타>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장면이 하나 있다. 도망 중인 디아만테와 비타가 춤을 추며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다.

"디아만테, 누구 죽였지, 그래서 달아난 거지?"
비타가 이렇게 말을 시작하자 디아만테가 그 말을 가로막았다.
"쉿, 우리 영어로 말하자."
"왜,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미국인인 척하자, 비타."
디아만테가 모자 귀퉁이를 만지작거리면서 소곤거렸다.
"다른 사람들하고 똑같이. 오늘 밤은 즐기자. 아이 필 소 해피."
그가 말을 시작했다.
비타는 알아듣지 못한 표정으로 그를 보았다.
"네가 가르쳐 줬잖아, 기억 안 나? 난 행복해."
"나도 행복해."
"해피."
디아만테가 계속 말했다.
"디아만테, 뭐라고 하든, 해피"(254-255).


두 사람은 함께 춤을 추며 잠시 현실의 고통에서 벗어난다. "다른 사람의 발길질도, 튀김 냄새도, 그렇게 여러 달을 신었는데도 아직도 죽은 사람의 냄새가 알게 모르게 흘러나오는 체사레의 신발도, 그들에게 들켜서 잡혀 배를 찔릴 것이라는 두려움도 사라져버렸다"(254). 매일의 삶이 전투처럼 치열할지라도, 죽는 것보다 못하다 여겨지는 비루한 삶일지라도, 최소한의 존엄마저 지킬 수 없는 잔혹하고 비참한 삶,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다시 살게 하는 것, 견디게 하는 것, 현실의 고통을 잊게 해주는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행복하다고 느껴지는 순간, 함께할 수 있는 누군가, 행복할 것이라고 믿는 내일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 '해피'라는 그 파랑새말이다. 어제도 오늘도 그리고 내일도 우리는 이 '해피'라는 파랑새를 좇으며 살고, 좌절하고, 다시 살아갈 것이다.

씨줄, 날줄이 촘촘하게 엮어진 <비타>는 참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며, 참 많은 생각을 하게 해준다. 거대한 우주의, 지구의 한 귀퉁이, 무한한 시간의 한 지점에 존재했던, 존재하고 있는 우리들을 통해 지금도 도도한 생의 물결이 흐른다. 몇 년을 살다 죽었건, 어떠한 삶을 살았건, 무엇을 누렸고 무엇을 박탈당했건, 세대와 세대로 이어지며 흐르는 인생은 그 자체로 빛나는 환희라는, 믿음과 감사가 차오른다. 이 땅에 살았고, 살고 있고, 또 살게 될 모든 인생에게 경의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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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학이 어린 시절을 말하다 - 유년의 상처를 끌어안는 치유의 심리학
우르술라 누버 지음, 김하락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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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은 두 부분으로 이루어진 책과도 같다. "그중 하나는 낯선 저자, 이를 테면 부모나 형제자매 또는 친척이 쓴 것이다. 당신은 이 첫 부분에 전혀 영향을 미치지 못했고, 지금도 그렇다. 당신은 이 첫 부분의 문체를 받아들여야 하고, 심지어 그 내용까지 받아들여야 한다. 이제는 그것을 편집하거나 정정할 수도 없고, 보완할 수도 없다. 그러나 당신 삶 중 두 번째 부분은 상황이 완전히 다르다. 여기서도 낯선 저자들이 책을 쓰게 할지, 직접 쓸지는 당신이 결정해야 한다"(51-52).

 

심리치료 분야의 책 중에 가장 추천할 만한 책을 만났다. 내가 찾던 책이다. (공신력은 없겠지만) 독자의 입장에서 아낌 없이 별 다섯을 주고 싶은 책이다. 처음 심리학 이론을 배우고, 심리상담 프로그램에 참여했을 때, 그것은 마치 마법처럼 보였다. 남편과의 문제로 프로그램에 참여한 한 분이 어린 아이가 되어 엄마를 원망하며 엉엉 울던 모습에서 카타르시스를 느끼기도 했다. 문제의 원인이 어린 시절에 받은 상처에 있다는 것을 알았을 때, 오래도록 풀 수 없었던 수수께끼가 풀리는 기분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더 깊이 알아갈수록 마음이 언잖아지기 시작했다. 심리상담 프로그램에 중독 현상을 보이는 이들도 있었고, 모든 것을 어린 시절의 상처, 양육자의 책임으로 돌리는 태도를 보며 뭔가 문제가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끊임없이 '상처'를 들쑤시며, 온통 상처 받았다고 아우성 치는 소리에 지쳐갔다. 심리학과 가장 사이가 좋지 않다(?)는 사회학을 전공했기 때문인지, 모든 문제가 '개인적 차원'에서만 다뤄지는 것에도 괜히 이의를 제기하고 싶은 심통도 났다.

문제는 오늘의 '불행' 원인을 규명하기 위해, 우리가 받은 '상처'에만 초점을 맞추는 태도라고 생각한다. <심리학이 어린 시절을 말하다>는 심리요법가 파울 바츠라비크의 말을 인용하여, 그러한 태도가 어떤 잘못을 불러올 수 있는지 정확하게 지적해준다. 파울 바츠라비크는 말하기를, "왜 불행한지 해명하려는 것은 누구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라고 한다. "해명에 대한 욕구는 경우에 따라서는 평생 우리를 희생자로 느끼게 만들고 과거에 매달리게 만들고 과거의 일을 현재 문제의 원인으로 돌리게 만들 수 있다"(200-201)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이 때문에 현재와 미래를 개선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칠 수 있음"을 경고한다.

<심리학이 어린 시절을 말하다>는 어떤 책보다 '어린 시절'의 중요성을 잘 보여준다. 어린 시절의 경험이 남긴 '생물학적 흉터'가 오늘 우리의 삶을 어떻게 지배할 수 있는지 그 막강한 영향력을 사실적으로 보여준다. 메릴린 먼로, 로미 슈나이더, 마이클 잭슨, 캐럴 대처가 어떤 대가를 치루었는지 확인하는 것만으로도 경각심을 심어주기에 충분하다. 그러나 이 책은 "당신의 불행은 어린 시절의 이러한 경험 때문이다"에서 멈추지 않는다. 저자 우르슬라 누버는 독일 최고의 심리상담사이지 부부치료 전문가라고 한다. 그는 <심리학이 어린 시절을 말하다>를 통해 현재까지 진행되어 온 심리학 이론을 집대성하여, 어린 시절을 바라보는 '균형잡힌 시각'을 제공한다. 교류분석 이론을 비롯하여 요즘 한창 연구되고 있는 '회복력'까지 그의 통찰 안에 녹아지고 있다.

"어린 시절은 발달과 인격 형성의 토대라 할 수 있다. 정신적 지향점이 되는 소중한 사람을 어린 시절에 어떻게 만나는지, 이들이 얼마만큼 관심과 애정을 보였는지, 우리가 그것을 얼마만큼 느꼈는지 등이 우리의 생물적 특성과 함께 작용해 현재의 우리를 만든다"(48). 과거를 되돌아보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우리가 반드시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과거를 돌아보는 목적이 무엇이냐 하는 것이다. <심리학이 어린 시절을 말하다>는 그것을 이렇게 말한다. "이것은 "나의 어린 시절은 불우했다. 그래서 지금 요 모양 요 꼴이다"라고 인식하는 데 그치지 않고 어린 시절이 운명이 아니라는 것을 인식할 때 비로소 의미와 가치를 가진다"(48).

<심리학이 어린 시절을 말하다>가 보여주려 하는 것이 바로 이것이라고 생각한다. 어린 시절이 불행했다 하더라도 얼마든지 성공할 수 있다는 것 말이다! "어린 시절의 '저주'를 결코 피할 수 없는 것처럼 여기고, 어린 시절이 불행하면 평생 그 대가를 치러야 하는 것처럼 여기는"(247) 관점과 태도를 수정하도록 돕는다. 우리는 어린 시절의 경험이 현재의 삶에 미치는 영향을 스스로 조절할 수 있다(51).

심리학 관련 서적을 읽을 때마다 나는 어린 시절에 받은 상처에'만' 주목했다. 오늘 내가 안고 있는 문제의 원인을 알기 위해 끊임없이 나쁜 기억을 찾아 헤맸다. 그런데 <심리학이 어린 시절을 말하다>는 반대로 상처보다 좋은 기억을 더 많이 떠오르게 해주었다. 그동안은 항상 '둘째로 자란 서러움'만 가득했는데, 이 책은 '둘째로 자라면서 갖게 된 장점', 선생님이 해주셨던 칭찬 한 마디, 스스로 자랑스러웠던 순간, 내가 이룬 성취들의 기억을 찾아주었다.

정신분석학자 제임스 힐만은 "어린 시절 자체가 인생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어린 시절을 보는 눈이 인생을 결정한다"라고 말한다. 또 "트라우마 자체가 우리에게 입힌 상처보다 어린 시절을 자기 의사와는 상관없이 불필요한 재앙(이 때문에 비뚤어진 사람이 되었다)이라고 보는 사고방식이 입힌 상처가 더 크다"(329)라고 강조한다. 또 하나, 우리가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은, "기억은 영향을 받기도 하고 끼워 맞춰지기도 하고 왜곡되기도 한다"(229)는 사실이다.

우리는 누구나 어린 시절을 가지고 있다. 어떤 이들은 그때 받았던 깊은 상처 때문에 여전히 힘든 오늘을 살아가기도 한다. 심리학 이론은 우리 안에 숨어 있는 '어린 아이'의 존재를 찾아주었다. 우리가 내 안의 '어린 아이' 물론, 상대 안에 숨어 있는 '어린 아이'를 볼 수 있는 능력이 있다면, 그래서 그 '어린 아이'를 달래줄 공감 능력을 발휘할 수 있다면, 우리는 불필요한 갈등과 사소한 오해를 없애고 한층 더 친말한 관계를 유지하며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나부터 어린 시절을 이해하는 관점을 바꿀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심리학이 어린 시절을 말하다>에서 처럼, 불행의 원인을 아는 것에서 멈추지 말고, 바꿀 수 없는 어린 시절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바라보는 관점을 바꾸는 작업말이다.

<심리학이 어린 시절을 말하다>를 읽는다면, 더 이상 오늘의 불행을 누군가의 탓으로 돌릴 수 없을 것이다. 어린 시절은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어린 시절 때문에 얼마나 고통받느냐는 것은 우리 자신에 달려 있다. 선택은 우리 몫이다.

"도대체 어린 시절 어디에 이런 힘이 있을까? 어떻게 그것이 다 큰 우리를 지금도 지배할까? 명답이 하나 있다. 우리가 그것을 허용하기 때문이다"(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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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2-20 13:4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12-25 17: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마크로비오틱 홈베이킹 - 자연을 통째로 구운
이와사키 유카 지음 / 비타북스 / 2010년 12월
평점 :
품절


  

버터, 달걀, 설탕 없이 만드는 빵! 상식을 뛰어넘는 홈베이킹!
 


절대 배고플 때 보지 마세요! 고문이 따로 없습니다. 후각 마케팅이라고 해서 백화점마다 제과점을 매장 입구에 배치한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향긋한 냄새로 식욕을 자극하며 소비자를 유혹하는 것이지요. 실제로 백화점 안에 있는 제과점의 경우, 보통 오전 11시 30분, 오후 4시에 갓 구운 빵을 꺼내 놓아 허기진 고객들의 욕구를 자극하는 전략을 사용한다고 합니다. 요즘 빵과 케이크는 향긋한 냄새 뿐만 아니라, 맛과 재료도 다양하고 모양도 예뻐서 이제는 단순한 간식거리를 넘어 삶의 질을 풍성하게 해주는 기호식품으로 자리매김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그것이 우리 몸에 좋지 않다는 것이고, 심지어는 그것을 알면서도 그 맛과 향에 자꾸 끌린다는 것입니다! 한 번 길들여진 맛의 유혹이 얼마나 강력한지 자제력이라는 말이 무색할 지경입니다. 실제로 저는 밀가루 음식을 먹으면 소화가 잘 되지 않는 것을 몸으로 느끼면서도, 번번이 맛의 유혹 앞에 무너지고 맙니다. 게다가 쉽고 빠르게 사먹을 수 있다는 편리성 때문에, 엄청난 양의 버터와 설탕, 셀 수도 없이 많은 첨가물의 공포를 간단히 무시해버리고 맙니다.

그런데 버터, 달걀, 설탕 없이 빵을 직접 만들어 먹는 놀라운 요리법을 만났습니다! 버터, 우유, 치즈 등의 유제품과 달걀은 물론, 초콜릿, 꿀, 설탕을 사용하지 않는, 우리의 상식을 거뜬히 뛰어넘는 홈베이킹입니다. 이름에서부터 산뜻한 건강이 느껴지는 '자연을 통째로 구운' <마크로비오틱 홈베이킹>입니다. 세계적인 건강요리 트렌드로 각광받고 있는 'Macrobiotic'(마크로비오틱)은 '위대한 생명의 기술'이라 해석되는 건강장수법, 자연건강법이라고 합니다. 정통파 마크로비오틱 요리 강사라고 하는 저자 이와사키 유카는 마크로비오틱만의 차별성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마크로비오틱이 전세계의 주목을 받게 된 것은 바로 요리 철학에 있습니다. 비타민이나 미네랄, 칼로리의 관점에 치중한 기존의 건강 식사법과 달리, 자연 에너지의 관점에서 사람의 건강과 삶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자연과의 공생을 추구하고자 하는 철학을 담고 있습니다."

<마크로비오틱 홈베이킹>은 버터, 달걀, 설탕 없이, 두부, 콩, 채소, 견과류와 건과일, 쌀가루 등을 재료로 케이크, 도넛, 파르페, 아이스크림, 푸딩, 쿠키, 찜빵, 경단, 튀김, 양갱, 파이, 타르트, 머핀, 크레페, 젤리, 빵, 와플, 맛탕, 떡 등 다양한 요리법을 전수해줍니다. <마크로비오틱 홈베이킹>이 또 한 가지 놀라운 것은 레시피가 의외로 간단하다는 것입니다! 저자도 "마크로비오틱을 시도해본다면 의외의 간단함과 맛에 놀랄 거예요"라고 자신 있게 말합니다. 직접 만들어본 적은 없지만, 갖가지 요리책을 사모으고 레시피를 봐에 의하면, 확실히 간단하고, 적어도 다른 '홈베이킹 레시피'에 비해 더 복잡하지는 않습니다.

<마크로비오틱 홈베이킹>은 건강과 맛, 간단한 요리방법 외에도 특별한 장점이 숨겨져 있습니다. "동물성식품이 들어가지 않기 때문에 느끼하지 않고 뒷맛이 깔끔하며 칼로리가 낮다"는 것과, "특히 마크로비오틱 홈베이킹은 밀가루를 체로 내려 사용할 필요도 없고, 달걀이나 생크림을 팔 아프게 섞거나, 버터의 기름기 때문에 세제를 듬뿍 묻혀 설거지할 일도 없고" 따라서 "설거지도 쉽고 그에 따른 환경오염도 적다"는 장점까지 가지고 있습니다! 참 여러 모로 기특하고 현명한 요리 방법입니다.

<마크로비오틱 홈베이킹>을 보며, 이제 몸에 좋은 음식은 집에서 직접 만들어 먹는 신개념 자급자족(?)의 시대가 오는 것인가 하는 엉뚱한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자유경쟁시장에 유해한 먹거리가 판을 치니, 그것에 대항하는 음식과 요리법도 속속 등장하고 있습니다. 이제 문제는 그것을 얼마나 저렴한 가격으로 손쉽게 보급할 것인가 하는 일일 것입니다. 소위 웰빙음식으로 분류되는 것들이 고가 식품으로 자리매김하면서 소득격차에 따라 먹거리 차별이 생겨나는 것은 참으로 슬픈 사회의 자화상입니다. 건강도 챙기면서 맛도 좋고, 환경도 보호할 수 있는 먹거리가 등장한다는 것은 참으로 희망차고 감사한 일입니다. 그런데 사진으로만 봐도 손이 절로 가는 <마크로비오틱 홈베이킹>의 맛난 음식들은 직접 만들어 먹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 또다른 고문으로 느껴지기도 합니다. 욕심같지만, <마크로비오틱 홈베이킹>에 등장하는 건강한 음식들을 파는 제과점의 등장도 꿈꿔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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써니람다 2010-12-24 15: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성어린 서평 잘 읽었습니다.

신의딸 2010-12-25 17:45   좋아요 0 | URL
써니람다님! 일일이 덧글까지! 감사드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