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네와 모네 그들이 만난 순간 - 인상파 화가들의진솔한 한 기록
수 로우 지음, 신윤하 옮김 / 마로니에북스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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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가 박수근이 새로운 화법을 시도했을 때, 당시의 주류는 그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 박수근의 그림은 최고의 경매가라는 경이적인 기록을 세우고 있다. 지금은 천재화가라고 일컬어지는 화가 김점선의 그림이 처음 세상에 나왔을 때, 근본 없는 그림이라는 혹평도 받았다고 한다. 새로운 시도와 주류의 저항이라는 도식은 그렇게 돌고 돈다. 어떤 분야든 기득권의 안정을 위협하는 새로운 시도는 주류에게 반항으로 받아들여기 마련이니까.

서양미술사에서 '인상주의'만큼 잘 알려지고 대중들에게 사랑을 받는 화풍이 있을까. 동시에 인상주의만큼 주류의 저항과 조롱과 비난이 거셌던 화풍이 또 있을까 싶다. '인상주의'는 당시 주류에서 벗어나 새로운 시도를 했던 화가들을 가리키는 집단적인 명칭이며 동시에 그들을 경멸하려는 의도로 붙어진 이름이다. 지금 우리에게는 코메디 같은 일이지만, 당시의 인상주의는 모진 저항과 조롱과 혹평을 이겨낸 은근과 끈기의 그룹이다. "그 기간 내내 이들은 화가로서의 명성을 얻고자 고군분투했지만, 이들의 작품은 살롱의 편견 가득하고 속물적이며 퇴행적인 삼시위원들의 기준을 통과하지 못했다. 대부분의 시간 동안 인상주의 화가들은 거의 가족을 부양하기도 어려운 처지였다"(8).

<마네와 모네 그들이 만난 순간>은 인상주의의 이러한 은근과 끈기를 보여주는 책이라고 할 수 있다. 다른 예술가들보다 더 '극적'이었던 화가들의 삶과 역사, 그 뒷 이야기! "이 책은 인상주의 화가들이 처음 만난 때로부터 뒤랑 뤼엘이 뉴욕에 작품을 소개한 절정기에 이르기까지의 26년 동안에 초점을 맞추어, 이들 화가들이 어떻게 모이게 되었는가, 그들의 삶과 사랑, 성격, 작품의 주제가 어떠했으며 또 그것이 어떻게 발전했는가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준다"(9). 제목에 등장하는 모네와 마네는 물론 피사로, 르누아르, 드가, 세잔, 고갱, 고흐 등 대표적인 인상주의 화가들의 삶과 (그 대가들의) 교류를 읽어볼 수 있다.

"저 흉측한 바보들 좀 봐! 대체 어디서 저런 모델들을 구해온 거지?",
"도대체 왜 저 화가들은 세탁부나 오페라 극장의 무용 연습생, 또는 경작해놓은 밭을 쳐다보는 데 비싼 돈을 쓰게 만들었는가?"
당시 "살롱에서 높게 평가하는 작품은 도덕적인 교훈을 고취시키는 역사적, 신화적, 또는 종교적 주제의 작품과 프랑스의 영광을 찬양하는 작품들"이었다. 또 아카데미의 가치관은 회화 기법을 결정하기도 했는데, "작품은 아주 미세한 부분까지 정확해야 했고, 적절한 '완성도'를 갖추어야 하며 형식적으로도 틀이 잡혀 있어야 했다. 또한 적절한 원근법과 익숙한 모든 예술적 관습을 준수해야 했다." 이러한 전통적인 회화 기법을 거부한 마네의 그림은 '쓸데 없는 손장이나 치는 인간'이라는 평가를 받았고, 세탁부, 오페라 극장의 무용 연습생, 경작해놓은 밭을 그린 인상주의 화가들의 전시회를 본 관객들은 환불을 요구했다. "관람객들은 르누아르의 작품을 비웃었다면 드가와 세잔의 작품을 보고는 실제로 화를 냈다. 작품의 이상한 구도와 기괴한 원근감이 매우 터무니없어 보였기 때문이다"(172). 인상주의 화가들은 이러한 혹평에도 불구하고 고전주의의 귄위와 감상적인 낭만주의에 대한 '반항'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렇게 그들은 '고상한' 미술계와 (중산층의) 사회를 뒤흔들었다.

<마네와 모네 그들이 만난 순간>을 읽다보니, 인상주의 화가들이 억수같이 쏟아지는 혹평과 조롱을 견딜 수 있었던 힘은 어쩌면 '마네'와 '모네'가 만났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다시 말해, 서로를 알아주는, 그리고 뜻을 같이 하는 친구가 있었기에 비난을 견디며 저항의 물살을 헤쳐나갈 수 있지 않았을까. 

 
"무엇보다 '인상주의'라는 명칭이 화가들을 난처하게 했다. 이 용어는 이들 화가들에 대한 대중들의 반감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거신데다, 이들을 경박하고 세련되지 못하며 조잡한, 체제에 타협하지 않는 반동분자들로 간주하는 대중들의 견해에 일조하는 셈이었던 만큼 화가들의 처지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세잔은 깊은 수치심을 느꼈다"(178).
'잘난' 사람들은 모욕하려는 의도로 그들을 '인상주의'라고 불렀지만, '인상주의'는 인류의 미술사에서 최고로 명예로운 이름이 되었다. 관람객들(대중들)은 인상주의를 비웃었지만, 지금은 우리가 그 관람객들을 비웃고 있다. 살롱과 아카테미의 전문가들은 인상주의에게 화를 냈지만, 그들이야 말로 인류 최고의 '얼간이'로 남게 되었다. 꿈이 있고, 뜻이 있고, 믿음이 있다면, (당장) 세상의 인정쯤 못 받는다 할지라도 좌절하지 말자! 어떤 모욕과 조롱이 뒤따른다 할지라도 이겨낼 만한 가치가 있다! 이것이 역사가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교훈이 아닐까. 

격분에 찬 르누아르의 한마디가 가슴에 남는다.
"우리가 이 멍청한 글쟁이들과 뭘 하고 있는 거지? 이 사람들은 그림이 기술이라는 것을 절대로 이해하지 못할 텐데 말이야. 그림은 도구로 그리는 것이지 관념으로 그리는 게 아니라고! 그런 관념은 작품이 완성된 뒤에야 생겨나는 것이지"(1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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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익은 타인들의 도시
최인호 지음 / 여백(여백미디어)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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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뫼비우스의 띠를 기어가는 개미다. 내가 가는 이 현상의 띠는 안과 밖이 없고, 시작도 끝도 없다"(292).

"옛날 옛적에 아버지와 아들이 살고 있었다. 어느 날 아들이 아버지에게 옛날이야기를 해달라고 졸랐지. 그래서 아버지가 아들에게 옛날이야기를 해주었어. 이렇게 말이야. 옛날 옛적에 아버지와 아들이 살고 있었다.......", "인생이란 이 우스꽝스러운 옛날이야기처럼 돌고 도는 거야"(337).

오래도록 선명하게 기억에 남아있는 영화의 한 장면이 있다. 영화의 제목은 '미드나잇 익스프레스', 기억에 남아있는 한 장면은 '감옥에 갇힌 사람들의 하루 일과. 감옥에서 벗어날 희망이 전혀 없는 수감자들이 정신이 반쯤 나간 상태에서 방 한 가운데 있는 기둥을 중심으로 하루 종일 한 방향으로 무리지어 계속 돌고 또 도는' 장면이다. 어렸을 때 본 영화이기 때문에 기억이 과장되었을 수도 있지만, 이 장면이 그토록 강렬했던 이유는, 주인공의 변화 때문이었다. '무리 속에 끼어 계속 한 방향으로 돌기만 하던 주인공이, 어느 날 그곳에서 나갈 수 있다는 희망을 품게 된다. 그러자 놓았던 정신줄이 차츰 제자리를 찾기 시작하면서 주인공은 갑자기 무리와 반대 방향으로 돌기 시작한다.' 하루 종일 돌고 또 돌기만 하는 사람들의 모습과, 갑자기 사람들과 반대 방향으로 돌기 시작하는 주인공의 모습이 대비를 이룰 때, 꽃봉우리 터지듯 내 안의 무엇인가가 팍- 터지는 기분이었다.

<낯익은 타인들의 도시>에서 주인공 K가 자신을, 그리고 인생을 "뫼비우스의 띠를 기어가는 개미"에 비유했을 때, 또다시 이 장면이 불쑥 튀어나왔다. 그것이 옳다고 믿으며 한 방향으로 계속 돌고 있는 수감자들과 뫼비우스의 띠 위를 기어가는 개미들, 그리고 탈출하고 싶은 일상에 갇힌 내 모습이 겹쳐졌기 때문이다. 인생은 아무리 열심히 기어가도 결국 제자리 걸음일 뿐이라는 걸, 그걸 다시 확인해야 하는 마음에 서늘한 바람이 지난다. "뫼비우스의 띠 위를 기어가는 그림 속 개미는 영원히 종착지에 도착할 수 없다. 왜냐하면 가도가도 제자리로 돌아올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291).
 

"너무나 익숙한 일상에서 길을 잃은 한 남자의 영원한 사흘"

<낯익은 타인들의 도시>는 어느 날, 자신도 모르게 저 뫼비우스의 띠 위에서 탈선한 한 개미의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느닷없는 소음 때문에 강제로 잠을 깬 K는 잠과 현실의 모호한 경계에서 차츰 의식을 회복하며 기억을 재구성한다. 기억의 재구성은 곧 K가 누구인가를 말해준다. 잠을 깨운 소음은 자명종 소리, 잠을 깬 시각은 7시, 7시라면 출근을 위해 일어나야 할 시간, 오늘은 토요일, 출근할 필요가 없는 토요일은 늦잠을 자며 게으름을 피울 수 있는 날, 어젯밤 퇴근 후 H와 밤늦도록 술을 마셨다. 그렇다면 오늘은 분명히 토요일이다...

그런데 K는 무엇인가 낯익은 일상에 작은 균열을 느낀다. 분명 낯익은 일상인데, 무엇인가 자꾸 뒤틀린다.
자명종은 낯이 익지만 어제까지의 자명종이 아니다.
아내 역시 낯이 익지만 어제까지의 아내가 아니다.
딸아이도 낯이 익지만 어제까지의 딸아이가 아니다.
강아지도 낯이 익지만 어제까지의 강아지가 아니다(54-55).

이 돌연변이의 기이한 현상은 도대체 어디에서부터 기인된 것일까(55). 주인공 K는 갑자기 찾아든 이 일상의 뒤틀림을 좇는다. 기억의 꼬리를 재구성하며 열심히 균열의 단서를 찾아나선다. <낯익은 타인들의 도시>는 K가 토요일 아침, 잠에서 깨어나면서부터 일요일을 거쳐 월요일 아침, 출근하는 시간까지 이어진다. 소설가 김연수는 "환락의 금요일 밤을 거쳐 토요일부터 시작된 소설이 성스러운 주일인 일요일을 거쳐 다시 일상이 시작되는 월요일에 끝나는 건 흥미롭다"(391)고, 3일의 행적에 의미를 부여한다.


"월요일 아침이었다. 대부분 직장인인 승객들은 출근 시간에 맞추려고 바쁘게 지하도를 걷고 있었다. 지하도는 거대한 개미굴처럼 이리저리 뚫려 있었다. 그 미로를 바쁘게 걸어가는 사람들은 쉴새 없이 먹이를 실어 나르는 일개미들이었다"(368).

프로그래밍된 기계처럼, 토요일엔 늦잠을 즐기고, 일요일엔 미사를 드리고, 월요일엔 7시에 일어나 출근을 했던 K. 그런 K의 일상에 균열을 가져오고, 궤도를 이탈하고, 길을 잃게 만든 것은 무엇일까. 

 
"이 모든 가상현실에서 바뀐 사람은 다름 아닌 K다"(296).

이 모든 불가사의한 현상 중심에는 K가 있다. 처음 본 타인들은 낯이 익고, 오히려 낯선 것은 자기 자신이다. 낯익은 타인들의 거리에서 발견하는 낯선 자아. K는 기억을 잃어버린 "금요일 밤의 미스터리한 한 시간 반에 걸친 의식의 공백"(296) 이후, 자신에게 어떤 변화가 일어났음을 느낀다. 

소설은 소설로 읽어야 한다는 것을 알지만, 나는 어쩔 수 없이 K에게 일어난 일상의 균열과 최인호 선생님의 암투병을 연결하여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낯익은 모든 풍경이 한 순간 갑자기 자기에게 반기를 들고 역모를 꾸미는 듯한 불길한 예감", "평화와 태평을 위장하고 있지만 일치 단결해 K를 속이고 K의 허점"(54)을 노리고 있는 듯한 느낌은 선생님의 삶에 불쑥 끼어든 '암'의 존재를 의식하게 했다. 암의 침입, 그것이 모든 것이 예전 그대로이지만, 모든 것이 예전 그대로가 아닌 일상을 만들어놓지 않았을까. 

 
<낯익은 타인들의 도시>는 끝까지 미스터리로 읽히기도 하고, 판타지로 읽히기도 한다. 책의 메시지를 이해하는 데, 소설가 김연수의 '발문'에서 많은 힌트를 얻었고, 큰 도움을 받았다. 몇 가지를 인용하면, <낯선 타인들의 도시>는 K라는 남자의, "사흘에 걸친 이별 이야기"라는 것. "익히 아는 현실", "익숙한 일상"과의 이별. 그리고 "모든 것과 작별한 뒤에야 우리는 본래의 자신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것."

주인공 K는 기억을 잃어버린 '금요일 밤의 한 시간 반 동안의 행적' 이후, 일상의 뒤틀림을 경험했다. 나에게는 이 책 <낯익은 타인들의 도시>가 그런 일상의 뒤틀림을 가져온다. 낯익은, 너무나 익숙해서 아무런 의문도 갖지 않았던 모든 것에 의문을 던져준다. <낯익은 타인들의 도시>는 미스터리의 해답이 아니라, 뫼비우스의 띠 위에서 탈선한 한 개미가 길을 잃고 헤매는 과정, 길을 찾아가는 과정 속으로 우리를 끌어들인다. "미로를 바쁘게 걸어가며 쉴새 없이 먹이를 실어 나르는 일개미", 그게 바로 우리의 모습이라는 것을 알려주기라도 하려는 듯이.

<낯익은 타인들의 도시>는 잘 읽힌다. 선명하게 정돈된 문장은 대가의 필력을 확인하게 했고, 심각하게 책을 읽는 중, 너무도 진지하게 세일러문의 노래 가사가 인용된 것을 보고는 풋- 웃음을 터트렸다. 최인호 선생님이 귀여운 데가 있다 생각했다. 선생님이 '아름다운 죄의 꽃다발'이라 표현한, 그리 순결하지 않은 우리의 일상이, 인생의 숨겨진 이면이 드러날 때는 누군가의 치부에 눈길이 잘못 닿은 것처럼 낯을 들고 대하기에 부끄러운 데가 있었지만, 그 적나라함이 역겹지는 않았다. 누군가의 죄라고 생각했다면 구토가 나왔겠지만, 그것이 인생의 실체라는 생각이 드니 소리없는 비명이 나왔다.

K는 사흘에 걸친 이별을 통해 온전한 '나'가 되었지만, 바로 그 순간 나는 K를 놓쳐버리고 말았다. K의 뒤를 좇으면서도 나는 아직 K처럼 온전한 '나'가 되지 못했지만, 뫼비우스의 띠 위를 걷고 있는 '나'를 발견하기는 했다. 어디에서 와서, 왜 살며, 어디로 가는지는 모른다고 해도, 적어도 오늘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는지를 발견하지 않았는가! <낯익은 타인들의 도시>가 만들어준 일상의 작은 뒤틀림과 의문이 나를 어디로 데려갈지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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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험한 관계
더글라스 케네디 지음, 공경희 옮김 / 밝은세상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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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너무나 잘 아는 사람 그러면서도 전혀 모르는 사람"(556).


패션계에서 일하는 친구가 있다. 친구는 항상 패션은 도박이라고 말한다. 새로운 상품을 매장에 내놓을 때마다 꼭 도박하는 심정이라고. <위험한 관계>를 읽으며 내내 들었던 생각은 '결혼'이라는 선택도 일종의 '도박'이라는, 치명적인 '위험부담'이었다. 우리는 '결혼과 함께 돌변한 배우자' 이야기를 많이 알고 있지 않은가. "은밀하게 변심한 남편은 낯선 남자보다 더 위험하다!"는 문구가 머리카락을 쭈뼛 서게 하는 한여름밤의 공포영화처럼 섬뜩하다. 이 세상에서 가장 친밀한 관계이며, 최후의 순간까지 유일한 내편이 되어줄 것이라고 믿고 있는 사람이 사실은 내가 아는 그런 사람이 아니라면? 게다가 은밀한 속내를 감춘 연극으로 나를 속이고 있는 중이라면? 그것은 출구가 없는 미로에 갇힌 절망이 아닐까.

함께 읽은 최인호 선생님의 신작 <낯익은 타인들의 도시>에서 선생님은 "100미터를 달리는 스프린터들은 0.01초를 단축하기 위해서, 무호흡으로 질주한다", "나 또한 단편소설을 쓸 때의 단거리 주법을 되찾고 싶어 다시는 역사소설이나 대하소설을 쓰지 않겠다고 공언까지 했었다"고 고백했다. 그런데 <위험한 관계>는 한 남자를 만나고 그 남자와 완전히 끝장나는 결승선(?)까지 전력으로 질주한다. 장거리를 단거리 주법으로 달리고 있는 것이다. 글의 호흡이 얼마나 긴박한지 손에서 책을 내려놓을 수 없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제대로 실감하는 중이다.

이 소설의 주인공은 '샐리 굿차일드'라는 이름의 외신기자이다. 36살의 성공한 외신기자인 샐리는 소말리아의 대홍수를 취재하기 위해 올랐던 헬기 안에서 '토니 홉스'라는 매력적이지만 냉소적인 기자와 만났고, 여태껏 만난 다른 특파원들과 달리 그에게 빠져 든다. "헬기에서 그는 처음 본 순간에 이미 그와 자게 될지도 모른다고 예상했다. 게임은 늘 그런 식으로 펼쳐지니까. 내가 현장에서 주로 맞닥뜨리는 기자들은 하룻밤은 고사하고 단 10분도 함께 눕고 싶지 않은 남자들이었다. 하지만 토니와 잠이 깼을 때 나는 그와 정말 통한다는 느낌이 들었다. 다시 만나고 싶었다. 사실은 오늘밤 당장 또 만나고 싶었다"(24).

많은 여성이 첫 눈에 눈이 멀고, 첫 눈에 심장이 멎는 사랑을 꿈꾸지만, 언제나 첫 눈에 반하는 사랑이 문제이다! 게다가 샐리처럼 스스로 매우 이성적이며 똑부러지는 성격이라고 자부하는 여성일수록 첫 눈에 반하는 사랑은 위험하다. 예전엔 결코 경험해보지 못했기에(!) 그 낯설지만 달콤한 유혹에 걷잡을 수 없이 빠져드는 것이다. "사실 내가 사랑에 빠졌다는 게 놀라웠다. 내가 만나고 싶어 했던 스타일의 남자를 만나 사랑받게 됐다는 사실도 놀라웠다. 만나길 바랐지만 그런 남자가 실제로 존재하는지도 몰랐다"(38).

이미 토니에게 빠져든 샐리의 귀에는 토니 친구들의 증언도 들려오지 않는다. 토니의 지인들은 토니를 이렇게 묘사했다. "대책 없이 무모할 뿐만 아니라 상사의 비위를 맞추지 못하는 것으로 유명하죠",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 "감정적으로 얽히면 토니는 항상 뭐랄까, 분별력 있게 표현하자면 성난 황소 같다고 해야겠지요", "토니 홉스에 대한 가장 큰 소문은 어떤 여자가 그의 가슴을 무너뜨렸다는 것이지요." 샐리는 이 모든 이야기들이 못마땅했을 뿐이다.

단거리 주법으로 전력 질주하는 <위험한 관계>는 쾌속으로 연애를 하고, 쾌속으로 임신을 하고, 쾌속으로 결혼을 한 샐리와 토니를 따라 독자를 '런던'에 덜컥 데려다놓는다. 샐리의 런던 생활은 갑자기 '현실'이 된다. 낯선 런던에서 살림집을 구하고, 임신 중독증을 앓고, 그 때문에 직장까지 그만 두게 되면서 그녀가 맞닥뜨려야 했던 '현실'은 '두려움'이라는 낯선 감정이었다. 무엇보다 그녀를 두려움에 빠지게 만든 건 그 매력적인 남자 토니의 쌀쌀맞은 태도였다. "토니는 그 말을 남기고 다른 방으로 가버렸다. 하지만 그날 새벽 5시, 나는 잠에서 깨어났고, 모든 게 괜찮지 않다는 걸 알아차렸다. 뭔가 아주 잘못 됐다고 깨달은 그 당황스런 순간, 나는 아주 오랫동안 경험하지 않은 낯선 감정과 맞닥뜨렸다. 그건 바로 두려움이었다"(89).

빠른 호흡과 더불어 <위험한 관계>가 보여주는 또다른 장기는 삼킬 듯이 휘몰아치는 여성의 심리 묘사이다. 출산을 하고 심각한 산후우울증을 겪는 샐리의 감정 기복이 너무 리얼해서 이 작가가 정말 남성인지 표지에 있는 작가의 사진을 몇 번이나 다시 확인했을 정도이다.

 
"우리는 짧은 생의 많은 시간을 타인과의 불화에 써버린다"(286).

첫 눈에 사랑을 예감하고, 사랑을 하고, 결혼을 하고, 출산에 이르지만, 이 책은 결혼과 동시에 갑자기 모든 것이 '대결 구도'로 바뀐다. '런던'이라는 낯선 환경에 던져진 샐리에게는 모든 것이 전쟁이 된다. 적응을 위한 싸움. 설상가상으로 남편 토니가 자신의 산후우울증을 악용해 무엇인가 꾸미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순간, 장미의 전쟁, 진짜 전쟁이 시작된다! 그런데 영국 남자인 남편, 영국인 친구들, 영국의 의료 제도, 영국의 법 제도 등 그녀가 해쳐나가야 할 모든 길목에 '영국의'가 장벽처럼 버티고 서 있다. <위험한 관계>를 읽는 또다른 즐거움은 우리에게는 모두 '서양 사람'으로 보이는 영국인(영국 사회)과 미국인(미국 사회)의 '극명한' 차이를 체감할 수 있다는 것이다. "영국인들은 미국인들이 너무나 진지하고, 곧이곧대로 처신한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미국인의 진지한 태도를 깃털처럼 가벼운 자세로 자극했고, 그러고 나서는 정작 자신들의 말은 그리 중요할 게 없다는 듯한 태도를 취했다. 사실은 대화중에 그들이 한 말들이 모두 중요했는데 나는 그걸 몰랐던 것이다"(41). "미국인들은 인생을 심각하지만 가망 없진 않다고 믿는다. 그 반면 영국인들은 인생을 가망 없지만 심각하진 않다고 믿는다"(47).

한바탕 사랑을 했고, 한바탕 전쟁을 치른 후, 드러난 진실은 샐리가 사랑했던 토니가 사실은 아주 '나쁜 놈'이었다는 사실이다. 그렇게 매력적이었던 남자가 어떻게 이렇게 비열하고, 비겁하고, 비굴할 수 있는지, 그 사람의 드러난 정체보다 더 싫은 것은, 저주하고 싶을 만큼 진저리가 처지는 것은, 아마도 그런 사람을 사랑했던 나 자신이 아닐까.

아예 작정한 사기결혼도 있고, 거래가 오가는 계약결혼도 있지만, 결혼이라는 것은 기본적으로 상대에 대한 '신뢰'로 시작되는 것이 아니던가. 그런데 그 상대가 정말 믿을 만한 사람인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누가, 무엇이, 어떻게 '보장'해줄 수 있을까?

한 방송 프로그램에서 세계적인 부흥강사인 빌리 그레이엄 목사님 부부를 인터뷰했다. 인터뷰 중 사회자가 사모님에게 "남편인 빌리 목사님과 이혼을 생각해본 적이 있느냐"고 물었다. 사모님은 즉시, 그리고 단호하게 "없다"고 대답하셨다. 그런데 이런 말을 덧붙이셨다. "살인은 몇 번 생각해봤습니다."

멀쩡한(?) 사람들도 '결혼'을 해서 살다보면 '살의'를 느낄 만큼 서로가 미워질 때가 있는 것이 결혼생활인가 보다(아직 경험치가 없으므로). 샐리는 점차 기대가 허물어지는 결혼생활을 겪으며 '웃으며 견디기'가 바로 결혼생활 아니던가"(182)라고 자조했다. 그런데 이 '위험한 남자'는 그 '웃으며 견디기'조차 허락하지 않는 나쁜 놈이었다. 그래도 끝까지 정신줄을 놓지 않고, 책을 덮는 순간까지 비장할 정도로 씩씩한 샐리에게 박수를! 샐리 같은 늪에 빠졌다가 탈출에 성공한 여성이라면 다시 앞만 보며 씩씩하게 나아가기를, (결혼이든, 연애이든) 아직 그 늪 속에서 허우적대고 있는 여성이라면 미련을 갖지 말고 샐리에게 배우기를 바라본다. 

한 여성에게 불어닥친 사랑과 결혼, 출산, 그리고 배신이라는 휘오리바람이 남의 일 같이 느껴지지 않을 만큼 공감하며 읽었다. 같은 경험의 선상에 있는 여성들은 샐리를 통해 스스로를 객관화시켜 볼 수 있는 계기가 될 것같다. 문학적인(?) 측면에서 뭔가 1%의 아쉬움이 느껴지지만, 빠른 속도로 재밌게 읽을 수 있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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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지의 구름 - 하나님과 하나되는 기도
무명의 형제 지음, 유재덕 옮김 / 강같은평화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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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교회에서 '관상기도'에 대해 아느냐는 물음을 많이 받았는데, 이 책을 통해 처음으로 관상기도에 대해 읽고, 배웠다. '무명의 형제'에 의해 쓰여졌다고 알려진 <무지의 구름>은 "영국을 대표하는 기독교 산문의 걸작 가운데 하나로 손꼽힌다"(4)고 한다. <무지의 구름>은 직접적으로 관상기도를 배우고 실천해볼 수 있는 교본 같은 책이다. 

관상기도가 무엇인지 한마디로 정의하기가 무척 어려운데, 역자는 이렇게 정의내린다. "관상을 간단히 정의하면, 이 세상에서 하나님과 영혼이 하나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는 활동이라고 할 수 있다"(7). 솔직히 책을 한 번만 읽어서는 관상기도가 무엇이고, 구체적으로 어떻게 실천하고, 또 어떻게 경험되는지 명확하게 알기가 어렵다고 단언한다. 왜냐하면 관상기도는 '신비'의 영역에 속한 일이기 때문이다. <무지의 구름>이 집필된 시기적 배경을 보면, "신비주의가 한창 꽃을 피우던 14세기 후반 영국에서 집필된 작품"(4-5)이라고 소개된다. <무지의 구름>, 그러니까 관상기도는 신비주의의 영향을 받은 작품(기도)이며, 또 신비주의를 이끌었던 작품(기도)이라고 할 수 있겠다.

책을 읽으며 내가 파악한 관상기도란, 하나님'만'을 사랑하기 위한 훈련이요, 하나님과 하나되는 것을 경험하는 마음 상태인 듯하다. "관상의 핵심은 하나님을 지향하는 순수한 의도 그 자체"(100)이며, 관상은 "하나님보다 못한 모든 것을 완변하게 망각하도록 만드는"(102)데, "올바른 관상자는 자신의 고통이나 행복에 무관심하며, 오로지 자신이 사랑하는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101) 바란다고 한다. "관상을 실천하는 데는 평정심, 영혼과 육체의 건강과 순수한 마음이 필요"(147)하며,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내려놓고"(43), "간절한 사랑이라는 예리한 화살로 두터운 무지의 구름을 맞추"(44)어야 한다. 그런데 아무리 개념을 정리해보려 해도 관상기도가 무엇인지 선명한 그림이 그려지지가 않는다.

신비의 영역에 속하는 일들을 사람의 언어로 설명하고 이해하는 일이 쉬울 리가 있겠는가. 솔직히 아무리 곱씹어도 감이 잘 안 왔는데, 그나마 마르다와 마리아 이야기를 통한 설명이 조금 도움이 되었다. 음식을 준비하느라 분주했던 마르다와는 달리 마리아는 예수님의 발치에 앉아 말씀을 듣고 있었다(눅 10:38-39). <무지의 구름>은 이를 두고, "마리아는 주님에 대한 사랑을 잠시도 멈추고 싶지 않았"(88) "예수님은 마리아가 영으로 자신의 신성을 간절히 사랑하고 있음을 알고 계셨습니다"(88-89)고 설명한다. 또한 분주했던 마르다를 전혀 의식하지 못했던 마리아의 '상태'에 대한 설명으로 볼 때, 관상기도는 일종의 '황홀경'의 상태 또는 '황홀경'의 경험으로 이해된다(231).

<무지의 구름>을 통해 알게된 '관상기도'에 대한 나의 결론은 한마디로 '위험하다'는 것이다. 신비주의의 영역에 속한 것이 늘 그렇듯이 '분별'의 문제가 따르고, 성숙한 신앙의 자세가 요구되기 때문이다. 신적 영역에 속한 신비적인 경험은 그 경험을 만들어내는 주체가 인간(나)이 아니기 때문에 함부로 판단할 수 없고, 또 함부로 판단해서도 안 될 것이다. 그러나 <무지의 구름>에서도 계속 경고하고 있듯이 우리는 '거짓 경험'의 함정에 빠질 수 있고, 하나님이 아니라 경험 자체를 사랑하고 신봉하는 유혹에 걸려들 수도 있다. 모든 것은 사라지고 오직 하나님만으로 채워지며, 하나님과 하나됨을 맛볼 수 있다면 정말이지 그것처럼 황홀한 경험은 또 없을 것이다. 그러나 <무지의 구름>에서도 경고하듯이, 신뢰할 만한 영적 조언자 없이 관상기도를 시도하는 것은 위험하며, 신중하고 조심하지 않으면 쉽게 오류를 범할 수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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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바이, 블랙버드
이사카 고타로 지음, 민경욱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11년 6월
평점 :
절판


 

다섯 명의 여자와 동시에 사귀고 있는, 이 남자를 결국 좋아하게 될까?


바람둥이보다 더 나쁜 놈이 양다리 걸치는 놈 아닌가. 그런데 동시에 다섯 명의 여자와 사귀는 남자가 있다. 그것도 완전 순진무구한 얼굴로, 누구든 하나를 선택할 생각은 없다고 말한다. 함께 있으면 즐거운 사람과 계속 관계가 이어지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다섯 여자와 동시에 사귀는 일에 일말의 죄책감아나 사소한 갈등조차 느끼지 않는 남자이다(104).  

 

 


"나는 앞으로 2주일 뒤면 '그 버스'를 타야 한다. '그 버스'가 어디로 가는지, 어떤 목적을 갖고 있는지, 왜 사람을 태우는지 아무것도 가르쳐주지 않았지만 마유미와 마유미 동료들의 이야기를 들은 바로는 평화로운 환경하고는 거리가 먼 곳으로 가는 게 분명했다"(100).
(자세한 사연은 알 수 없지만) 2주 후면 끌려가 '그 버스'에 타야할 처지에 놓은 이 남자는 인생 최대의 이 절체절명의 순간에, 생뚱맞게도 자신이 사귀던 다섯 명의 여자와 이별을 할 기회를 달라고 "필사적으로, 한심할 정도로 애절하게"(24) 매달린다. 
 

"나는 오지 않는 사람을 계속 기다리는 쓸쓸함이 뭔지 잘 알아"(25).
남자가 이렇게 다섯 명의 여자와 이별을 하기 위해 필사적인 것은 자신의 트라우마 때문이다. 남자는 어린 시절, '자반을 사올게' 하고 나간 엄마가 도무지 돌아오지 않아 어머니 걱정을 하며 문을 열었다 닫았다 안절부절 하지 못했던 기억을 떠올린다. 한 남자가 다섯 여자를 동시에 사귄다는 것에 대해서는 별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던 이 남자가, 다시 돌아오지 못할 자신을 기다리는 여자들을 걱정한다.
 

"사람한테 상처를 주는 것보다 더 즐거운 일이 있으면 말해봐"(99).
다섯 명의 여자와 이별식을 하려는 이 남자(호시노 가즈히코)와 동행하는 여자가 있다. '그 버스'에 남자를 태우기 위해 감시를 하고 있는 그녀는 키 180센티미터, 몸무게 180킬로의 거구 '마유미'이다. 외모 때문에 두려움의 대상이 되거나, 경멸을 받거나, 소외를 받아왔던(18), 마유미가 호시노 가즈히코의 다섯 번의 이별식을 허락한 이유는 단 한 가지이다. 그녀는 "그저 단순히 다른 사람에게 굴욕을 느끼게 하거나, 절망을 갖게 하는, 혹은 무력감에 시달려 고통스럽게 하는 일을 좋아할 뿐이다"(218).

그리하여 다섯 여자를 동시에 사귀었지만 그녀들의 불안과 걱정(?)을 덜어주려 이별을 고하러 가는 남자와 단순히 그 여자들이 상처받는 모습을 즐기고 싶은 한 여자의 기묘한 동행이 시작된다. 잘 생겼다고는 할 수 없지만 개성있는 한 남자와, 한 번 움직일 때마다 온 땅이 출렁거리는 듯한 기분에 젖게 만드는 괴물 같은 여자가 다섯 명의 연인을 차례로 방문한다. 남자는 다정하게, 여자는 그 다정함에 소금을 팍팍 뿌려대며 '바이바이'를 한다. 
 

 



"블랙버드라는 말은 불길하다거나 불행을 뜻하는 것 같습니다. 바이바이, 블랙버드. 너와 헤어져 이제부터 행복해진다, 그런 얘기입니다"(325).

저자는 이 책의 의도를 이렇게 밝힌다. "불합리한 이별이지만, 억지로 웃고 바이바이,라고 말해버리는, 그러한 이야기를 쓰고 싶었습니다"(앞 날개 中에서). 그러나 작가의 의도는 정확하게 빗나갔다. 도저히 다섯 명의 여자를 동시에 사귈만큼 치밀해(?) 보이지 않는 이 남자, 어수룩하게만 봤는데, 아니다! 치명적이다! 이 남자는 여자를 감동시키는 법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다. 덕으로 사람을 다스려야 한다고 생각한 유비가 덕이 몸에 배여 자신에게 바로 그 덕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던 것처럼, 이 남자는 자신에게 여자를 감동시키는 능력이 있다는 것조차 모르고 있는, 그래서 더 치명적인 남자였던 것이다! 여자는 이런 남자와 억지로 '바이바이'를 해도, 결코 잊지는 못할 것이다. 

"그것도 거짓말이었어?"
"그것도 거짓말이었네."
"그것도 거짓말이었네!"
"설마 그것도 거짓말이었던 건 아니지?"
"그것도 거짓말이었네."

다섯 명의 여자는 마치 서로 짠 듯이 이렇게 말했다. 어느 날, 갑자기 괴물 같은 거구의 여성과 함께 나타난 남자는 바로 그 여자와 결혼을 하기 위해 이제 '바이바이'를 해야만 한다고 고한다. 함께 온 거구의 여성은 이 남자가 그 동안 다섯 명의 여자와 동시에 사귀고 있었다고 까발린다. 

이 예기치 못했던 이별 앞에서 다섯 명의 여성들은 각기 다른 반응을 나타내지만, 아이러니 하게도 남자는 그 마지막 이별의 순간에 다섯 여자에게 모두 '감동'을 선물하고 떠난다. 믿지 못할 남자가 '바이바이'를 하며 남겨놓은 감동, 여자들은 이것을 어떻게 받아들일까.

내 경험으로 비추어봤을 때, 그 남자와 보낸 지난 날들은 '아름다운' 추억으로, 두고 두고 '아쉬운' 기억으로 남을 것이다. (우여곡절은 생략하고) 강의실에 앉아 "눈부시다"라고 혼잣말을 했는데, 한 남자가 조용히 일어나 창가로 가서 블라인드를 내리며 내 눈에 햇살이 비치는지 확인을 했다. 그 남자는 나에게 '더 이상 널 좋아하지 않을 거야'라고 바이바이를 고한 상태였고, 후에 내 친구와 사귀기 시작했다. 그런데도 난 그날의 기억이 떠오를 때마다 가슴이 '뭉클'하다. 날 위해 햇살을 가려준 자상한 그 동작 하나가 과장되어 좋지 않은 다른 기억을 덮어버렸다.

이별을 하면, 그 '사람'이 아니라 '그 사람 때문에 행복했던 나'를 기억한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이 다섯 명의 여자들은 다섯 여자와 동시에 사귀며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나 다른 여자와 결혼을 한다며 '바이바이'를 고한 남자가 아니라, 그 남자 때문에 행복했던 자신을 기억하게 될 것이다. 마지막 순간에 그 뭉클했던 행복감을 말이다. 

어수룩해 보이지만 그래서 더 치명적인 이 '호시노 가즈히코', 괴물처럼 보일 만큼 거구의 '마유미'는 아이러니 해서 더 매력적인 '레옹'을 닮았다. 무자비한 킬러이지만 우유를 마시며 화초를 키우는 천진난만한 레옹처럼, 무심해보이는 이 남자는 사실 달콤할 정도로 자상하고, 그녀의 사전에 '배려'라는 단어조차 없는 거침없는 이 여자는 알고보면 연한 순처럼 푸릇한 여린 속내를 지녔다.

요즘 드라마들도 너무 종잡을 수 없는'열린 결말'로 끝냈다가는 악플 세례를 받기 마련인데, <바이바이, 블랙버드>의 '열린 결말'도 도대체 종잡을 수가 없다. 이야기의 '끝'을 알 수 없어, "그 남자와 그 여자는 도대체 어떻게 되었을까?", "'그 버스'는 도대체 어디로 가는 걸까?", "절대 바이바이를 하지 않겠다고 했던 여배우와의 관계는 어떻게 되는 건가?" 하는 궁금증이 아마도 두고두고 긴 여운을 남길 듯하다. 

 <바이바이, 블랙버드>는 일본 문학의 거장 다자이 오사무의 작품인 <굿바이>의 오마주 격이라고 하는데, 다자이 오사무도 <굿바이>라는 작품도 잘 모르는 일단 패스. 골치 아픈 이야기는 사절하고, 소설은 무조건 재밌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독자라면 이 책이 딱이다. 말장난 같지만 산뜻(!)한 농담이, 그러나 불쾌하지 않게, 절대 가볍지 않게, 이야기를 유쾌하게 끌어나간다. 상황도, 캐릭터도 아이러니 해서 더 웃기고 재밌으며, 가볍게 읽히면서도 뭔가 잃어버린 '순수'를 찾아주는 듯한 청정해역에 몸과 마음을 푹 담궜다 나온 느낌이다. 여자를 동시에 다섯 명이나 사귄 남자의 별난 이별식에서 잃어버린 순수를 느끼다니! 이사카 고타로, 명성을 얻을 만하다. '꾼'은 '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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