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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익은 타인들의 도시
최인호 지음 / 여백(여백미디어) / 2011년 5월
평점 :
절판

"나는 뫼비우스의 띠를 기어가는 개미다. 내가 가는 이 현상의 띠는 안과 밖이 없고, 시작도 끝도 없다"(292).
"옛날 옛적에 아버지와 아들이 살고 있었다. 어느 날 아들이 아버지에게 옛날이야기를 해달라고 졸랐지. 그래서 아버지가 아들에게 옛날이야기를 해주었어. 이렇게 말이야. 옛날 옛적에 아버지와 아들이 살고 있었다.......", "인생이란 이 우스꽝스러운 옛날이야기처럼 돌고 도는 거야"(337).
오래도록 선명하게 기억에 남아있는 영화의 한 장면이 있다. 영화의 제목은 '미드나잇 익스프레스', 기억에 남아있는 한 장면은 '감옥에 갇힌 사람들의 하루 일과. 감옥에서 벗어날 희망이 전혀 없는 수감자들이 정신이 반쯤 나간 상태에서 방 한 가운데 있는 기둥을 중심으로 하루 종일 한 방향으로 무리지어 계속 돌고 또 도는' 장면이다. 어렸을 때 본 영화이기 때문에 기억이 과장되었을 수도 있지만, 이 장면이 그토록 강렬했던 이유는, 주인공의 변화 때문이었다. '무리 속에 끼어 계속 한 방향으로 돌기만 하던 주인공이, 어느 날 그곳에서 나갈 수 있다는 희망을 품게 된다. 그러자 놓았던 정신줄이 차츰 제자리를 찾기 시작하면서 주인공은 갑자기 무리와 반대 방향으로 돌기 시작한다.' 하루 종일 돌고 또 돌기만 하는 사람들의 모습과, 갑자기 사람들과 반대 방향으로 돌기 시작하는 주인공의 모습이 대비를 이룰 때, 꽃봉우리 터지듯 내 안의 무엇인가가 팍- 터지는 기분이었다.
<낯익은 타인들의 도시>에서 주인공 K가 자신을, 그리고 인생을 "뫼비우스의 띠를 기어가는 개미"에 비유했을 때, 또다시 이 장면이 불쑥 튀어나왔다. 그것이 옳다고 믿으며 한 방향으로 계속 돌고 있는 수감자들과 뫼비우스의 띠 위를 기어가는 개미들, 그리고 탈출하고 싶은 일상에 갇힌 내 모습이 겹쳐졌기 때문이다. 인생은 아무리 열심히 기어가도 결국 제자리 걸음일 뿐이라는 걸, 그걸 다시 확인해야 하는 마음에 서늘한 바람이 지난다. "뫼비우스의 띠 위를 기어가는 그림 속 개미는 영원히 종착지에 도착할 수 없다. 왜냐하면 가도가도 제자리로 돌아올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291).
"너무나 익숙한 일상에서 길을 잃은 한 남자의 영원한 사흘"
<낯익은 타인들의 도시>는 어느 날, 자신도 모르게 저 뫼비우스의 띠 위에서 탈선한 한 개미의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느닷없는 소음 때문에 강제로 잠을 깬 K는 잠과 현실의 모호한 경계에서 차츰 의식을 회복하며 기억을 재구성한다. 기억의 재구성은 곧 K가 누구인가를 말해준다. 잠을 깨운 소음은 자명종 소리, 잠을 깬 시각은 7시, 7시라면 출근을 위해 일어나야 할 시간, 오늘은 토요일, 출근할 필요가 없는 토요일은 늦잠을 자며 게으름을 피울 수 있는 날, 어젯밤 퇴근 후 H와 밤늦도록 술을 마셨다. 그렇다면 오늘은 분명히 토요일이다...
그런데 K는 무엇인가 낯익은 일상에 작은 균열을 느낀다. 분명 낯익은 일상인데, 무엇인가 자꾸 뒤틀린다.
자명종은 낯이 익지만 어제까지의 자명종이 아니다.
아내 역시 낯이 익지만 어제까지의 아내가 아니다.
딸아이도 낯이 익지만 어제까지의 딸아이가 아니다.
강아지도 낯이 익지만 어제까지의 강아지가 아니다(54-55).
이 돌연변이의 기이한 현상은 도대체 어디에서부터 기인된 것일까(55). 주인공 K는 갑자기 찾아든 이 일상의 뒤틀림을 좇는다. 기억의 꼬리를 재구성하며 열심히 균열의 단서를 찾아나선다. <낯익은 타인들의 도시>는 K가 토요일 아침, 잠에서 깨어나면서부터 일요일을 거쳐 월요일 아침, 출근하는 시간까지 이어진다. 소설가 김연수는 "환락의 금요일 밤을 거쳐 토요일부터 시작된 소설이 성스러운 주일인 일요일을 거쳐 다시 일상이 시작되는 월요일에 끝나는 건 흥미롭다"(391)고, 3일의 행적에 의미를 부여한다.
"월요일 아침이었다. 대부분 직장인인 승객들은 출근 시간에 맞추려고 바쁘게 지하도를 걷고 있었다. 지하도는 거대한 개미굴처럼 이리저리 뚫려 있었다. 그 미로를 바쁘게 걸어가는 사람들은 쉴새 없이 먹이를 실어 나르는 일개미들이었다"(368).
프로그래밍된 기계처럼, 토요일엔 늦잠을 즐기고, 일요일엔 미사를 드리고, 월요일엔 7시에 일어나 출근을 했던 K. 그런 K의 일상에 균열을 가져오고, 궤도를 이탈하고, 길을 잃게 만든 것은 무엇일까.
"이 모든 가상현실에서 바뀐 사람은 다름 아닌 K다"(296).
이 모든 불가사의한 현상 중심에는 K가 있다. 처음 본 타인들은 낯이 익고, 오히려 낯선 것은 자기 자신이다. 낯익은 타인들의 거리에서 발견하는 낯선 자아. K는 기억을 잃어버린 "금요일 밤의 미스터리한 한 시간 반에 걸친 의식의 공백"(296) 이후, 자신에게 어떤 변화가 일어났음을 느낀다.
소설은 소설로 읽어야 한다는 것을 알지만, 나는 어쩔 수 없이 K에게 일어난 일상의 균열과 최인호 선생님의 암투병을 연결하여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낯익은 모든 풍경이 한 순간 갑자기 자기에게 반기를 들고 역모를 꾸미는 듯한 불길한 예감", "평화와 태평을 위장하고 있지만 일치 단결해 K를 속이고 K의 허점"(54)을 노리고 있는 듯한 느낌은 선생님의 삶에 불쑥 끼어든 '암'의 존재를 의식하게 했다. 암의 침입, 그것이 모든 것이 예전 그대로이지만, 모든 것이 예전 그대로가 아닌 일상을 만들어놓지 않았을까.
<낯익은 타인들의 도시>는 끝까지 미스터리로 읽히기도 하고, 판타지로 읽히기도 한다. 책의 메시지를 이해하는 데, 소설가 김연수의 '발문'에서 많은 힌트를 얻었고, 큰 도움을 받았다. 몇 가지를 인용하면, <낯선 타인들의 도시>는 K라는 남자의, "사흘에 걸친 이별 이야기"라는 것. "익히 아는 현실", "익숙한 일상"과의 이별. 그리고 "모든 것과 작별한 뒤에야 우리는 본래의 자신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것."
주인공 K는 기억을 잃어버린 '금요일 밤의 한 시간 반 동안의 행적' 이후, 일상의 뒤틀림을 경험했다. 나에게는 이 책 <낯익은 타인들의 도시>가 그런 일상의 뒤틀림을 가져온다. 낯익은, 너무나 익숙해서 아무런 의문도 갖지 않았던 모든 것에 의문을 던져준다. <낯익은 타인들의 도시>는 미스터리의 해답이 아니라, 뫼비우스의 띠 위에서 탈선한 한 개미가 길을 잃고 헤매는 과정, 길을 찾아가는 과정 속으로 우리를 끌어들인다. "미로를 바쁘게 걸어가며 쉴새 없이 먹이를 실어 나르는 일개미", 그게 바로 우리의 모습이라는 것을 알려주기라도 하려는 듯이.
<낯익은 타인들의 도시>는 잘 읽힌다. 선명하게 정돈된 문장은 대가의 필력을 확인하게 했고, 심각하게 책을 읽는 중, 너무도 진지하게 세일러문의 노래 가사가 인용된 것을 보고는 풋- 웃음을 터트렸다. 최인호 선생님이 귀여운 데가 있다 생각했다. 선생님이 '아름다운 죄의 꽃다발'이라 표현한, 그리 순결하지 않은 우리의 일상이, 인생의 숨겨진 이면이 드러날 때는 누군가의 치부에 눈길이 잘못 닿은 것처럼 낯을 들고 대하기에 부끄러운 데가 있었지만, 그 적나라함이 역겹지는 않았다. 누군가의 죄라고 생각했다면 구토가 나왔겠지만, 그것이 인생의 실체라는 생각이 드니 소리없는 비명이 나왔다.
K는 사흘에 걸친 이별을 통해 온전한 '나'가 되었지만, 바로 그 순간 나는 K를 놓쳐버리고 말았다. K의 뒤를 좇으면서도 나는 아직 K처럼 온전한 '나'가 되지 못했지만, 뫼비우스의 띠 위를 걷고 있는 '나'를 발견하기는 했다. 어디에서 와서, 왜 살며, 어디로 가는지는 모른다고 해도, 적어도 오늘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는지를 발견하지 않았는가! <낯익은 타인들의 도시>가 만들어준 일상의 작은 뒤틀림과 의문이 나를 어디로 데려갈지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