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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험한 관계
더글라스 케네디 지음, 공경희 옮김 / 밝은세상 / 2011년 5월
평점 :
품절
"내가 너무나 잘 아는 사람 그러면서도 전혀 모르는 사람"(556).
패션계에서 일하는 친구가 있다. 친구는 항상 패션은 도박이라고 말한다. 새로운 상품을 매장에 내놓을 때마다 꼭 도박하는 심정이라고. <위험한 관계>를 읽으며 내내 들었던 생각은 '결혼'이라는 선택도 일종의 '도박'이라는, 치명적인 '위험부담'이었다. 우리는 '결혼과 함께 돌변한 배우자' 이야기를 많이 알고 있지 않은가. "은밀하게 변심한 남편은 낯선 남자보다 더 위험하다!"는 문구가 머리카락을 쭈뼛 서게 하는 한여름밤의 공포영화처럼 섬뜩하다. 이 세상에서 가장 친밀한 관계이며, 최후의 순간까지 유일한 내편이 되어줄 것이라고 믿고 있는 사람이 사실은 내가 아는 그런 사람이 아니라면? 게다가 은밀한 속내를 감춘 연극으로 나를 속이고 있는 중이라면? 그것은 출구가 없는 미로에 갇힌 절망이 아닐까.
함께 읽은 최인호 선생님의 신작 <낯익은 타인들의 도시>에서 선생님은 "100미터를 달리는 스프린터들은 0.01초를 단축하기 위해서, 무호흡으로 질주한다", "나 또한 단편소설을 쓸 때의 단거리 주법을 되찾고 싶어 다시는 역사소설이나 대하소설을 쓰지 않겠다고 공언까지 했었다"고 고백했다. 그런데 <위험한 관계>는 한 남자를 만나고 그 남자와 완전히 끝장나는 결승선(?)까지 전력으로 질주한다. 장거리를 단거리 주법으로 달리고 있는 것이다. 글의 호흡이 얼마나 긴박한지 손에서 책을 내려놓을 수 없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제대로 실감하는 중이다.
이 소설의 주인공은 '샐리 굿차일드'라는 이름의 외신기자이다. 36살의 성공한 외신기자인 샐리는 소말리아의 대홍수를 취재하기 위해 올랐던 헬기 안에서 '토니 홉스'라는 매력적이지만 냉소적인 기자와 만났고, 여태껏 만난 다른 특파원들과 달리 그에게 빠져 든다. "헬기에서 그는 처음 본 순간에 이미 그와 자게 될지도 모른다고 예상했다. 게임은 늘 그런 식으로 펼쳐지니까. 내가 현장에서 주로 맞닥뜨리는 기자들은 하룻밤은 고사하고 단 10분도 함께 눕고 싶지 않은 남자들이었다. 하지만 토니와 잠이 깼을 때 나는 그와 정말 통한다는 느낌이 들었다. 다시 만나고 싶었다. 사실은 오늘밤 당장 또 만나고 싶었다"(24).
많은 여성이 첫 눈에 눈이 멀고, 첫 눈에 심장이 멎는 사랑을 꿈꾸지만, 언제나 첫 눈에 반하는 사랑이 문제이다! 게다가 샐리처럼 스스로 매우 이성적이며 똑부러지는 성격이라고 자부하는 여성일수록 첫 눈에 반하는 사랑은 위험하다. 예전엔 결코 경험해보지 못했기에(!) 그 낯설지만 달콤한 유혹에 걷잡을 수 없이 빠져드는 것이다. "사실 내가 사랑에 빠졌다는 게 놀라웠다. 내가 만나고 싶어 했던 스타일의 남자를 만나 사랑받게 됐다는 사실도 놀라웠다. 만나길 바랐지만 그런 남자가 실제로 존재하는지도 몰랐다"(38).
이미 토니에게 빠져든 샐리의 귀에는 토니 친구들의 증언도 들려오지 않는다. 토니의 지인들은 토니를 이렇게 묘사했다. "대책 없이 무모할 뿐만 아니라 상사의 비위를 맞추지 못하는 것으로 유명하죠",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 "감정적으로 얽히면 토니는 항상 뭐랄까, 분별력 있게 표현하자면 성난 황소 같다고 해야겠지요", "토니 홉스에 대한 가장 큰 소문은 어떤 여자가 그의 가슴을 무너뜨렸다는 것이지요." 샐리는 이 모든 이야기들이 못마땅했을 뿐이다.
단거리 주법으로 전력 질주하는 <위험한 관계>는 쾌속으로 연애를 하고, 쾌속으로 임신을 하고, 쾌속으로 결혼을 한 샐리와 토니를 따라 독자를 '런던'에 덜컥 데려다놓는다. 샐리의 런던 생활은 갑자기 '현실'이 된다. 낯선 런던에서 살림집을 구하고, 임신 중독증을 앓고, 그 때문에 직장까지 그만 두게 되면서 그녀가 맞닥뜨려야 했던 '현실'은 '두려움'이라는 낯선 감정이었다. 무엇보다 그녀를 두려움에 빠지게 만든 건 그 매력적인 남자 토니의 쌀쌀맞은 태도였다. "토니는 그 말을 남기고 다른 방으로 가버렸다. 하지만 그날 새벽 5시, 나는 잠에서 깨어났고, 모든 게 괜찮지 않다는 걸 알아차렸다. 뭔가 아주 잘못 됐다고 깨달은 그 당황스런 순간, 나는 아주 오랫동안 경험하지 않은 낯선 감정과 맞닥뜨렸다. 그건 바로 두려움이었다"(89).
빠른 호흡과 더불어 <위험한 관계>가 보여주는 또다른 장기는 삼킬 듯이 휘몰아치는 여성의 심리 묘사이다. 출산을 하고 심각한 산후우울증을 겪는 샐리의 감정 기복이 너무 리얼해서 이 작가가 정말 남성인지 표지에 있는 작가의 사진을 몇 번이나 다시 확인했을 정도이다.
"우리는 짧은 생의 많은 시간을 타인과의 불화에 써버린다"(286).
첫 눈에 사랑을 예감하고, 사랑을 하고, 결혼을 하고, 출산에 이르지만, 이 책은 결혼과 동시에 갑자기 모든 것이 '대결 구도'로 바뀐다. '런던'이라는 낯선 환경에 던져진 샐리에게는 모든 것이 전쟁이 된다. 적응을 위한 싸움. 설상가상으로 남편 토니가 자신의 산후우울증을 악용해 무엇인가 꾸미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순간, 장미의 전쟁, 진짜 전쟁이 시작된다! 그런데 영국 남자인 남편, 영국인 친구들, 영국의 의료 제도, 영국의 법 제도 등 그녀가 해쳐나가야 할 모든 길목에 '영국의'가 장벽처럼 버티고 서 있다. <위험한 관계>를 읽는 또다른 즐거움은 우리에게는 모두 '서양 사람'으로 보이는 영국인(영국 사회)과 미국인(미국 사회)의 '극명한' 차이를 체감할 수 있다는 것이다. "영국인들은 미국인들이 너무나 진지하고, 곧이곧대로 처신한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미국인의 진지한 태도를 깃털처럼 가벼운 자세로 자극했고, 그러고 나서는 정작 자신들의 말은 그리 중요할 게 없다는 듯한 태도를 취했다. 사실은 대화중에 그들이 한 말들이 모두 중요했는데 나는 그걸 몰랐던 것이다"(41). "미국인들은 인생을 심각하지만 가망 없진 않다고 믿는다. 그 반면 영국인들은 인생을 가망 없지만 심각하진 않다고 믿는다"(47).
한바탕 사랑을 했고, 한바탕 전쟁을 치른 후, 드러난 진실은 샐리가 사랑했던 토니가 사실은 아주 '나쁜 놈'이었다는 사실이다. 그렇게 매력적이었던 남자가 어떻게 이렇게 비열하고, 비겁하고, 비굴할 수 있는지, 그 사람의 드러난 정체보다 더 싫은 것은, 저주하고 싶을 만큼 진저리가 처지는 것은, 아마도 그런 사람을 사랑했던 나 자신이 아닐까.
아예 작정한 사기결혼도 있고, 거래가 오가는 계약결혼도 있지만, 결혼이라는 것은 기본적으로 상대에 대한 '신뢰'로 시작되는 것이 아니던가. 그런데 그 상대가 정말 믿을 만한 사람인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누가, 무엇이, 어떻게 '보장'해줄 수 있을까?
한 방송 프로그램에서 세계적인 부흥강사인 빌리 그레이엄 목사님 부부를 인터뷰했다. 인터뷰 중 사회자가 사모님에게 "남편인 빌리 목사님과 이혼을 생각해본 적이 있느냐"고 물었다. 사모님은 즉시, 그리고 단호하게 "없다"고 대답하셨다. 그런데 이런 말을 덧붙이셨다. "살인은 몇 번 생각해봤습니다."
멀쩡한(?) 사람들도 '결혼'을 해서 살다보면 '살의'를 느낄 만큼 서로가 미워질 때가 있는 것이 결혼생활인가 보다(아직 경험치가 없으므로). 샐리는 점차 기대가 허물어지는 결혼생활을 겪으며 '웃으며 견디기'가 바로 결혼생활 아니던가"(182)라고 자조했다. 그런데 이 '위험한 남자'는 그 '웃으며 견디기'조차 허락하지 않는 나쁜 놈이었다. 그래도 끝까지 정신줄을 놓지 않고, 책을 덮는 순간까지 비장할 정도로 씩씩한 샐리에게 박수를! 샐리 같은 늪에 빠졌다가 탈출에 성공한 여성이라면 다시 앞만 보며 씩씩하게 나아가기를, (결혼이든, 연애이든) 아직 그 늪 속에서 허우적대고 있는 여성이라면 미련을 갖지 말고 샐리에게 배우기를 바라본다.
한 여성에게 불어닥친 사랑과 결혼, 출산, 그리고 배신이라는 휘오리바람이 남의 일 같이 느껴지지 않을 만큼 공감하며 읽었다. 같은 경험의 선상에 있는 여성들은 샐리를 통해 스스로를 객관화시켜 볼 수 있는 계기가 될 것같다. 문학적인(?) 측면에서 뭔가 1%의 아쉬움이 느껴지지만, 빠른 속도로 재밌게 읽을 수 있는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