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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바이, 블랙버드
이사카 고타로 지음, 민경욱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11년 6월
평점 :
절판
다섯 명의 여자와 동시에 사귀고 있는, 이 남자를 결국 좋아하게 될까?
바람둥이보다 더 나쁜 놈이 양다리 걸치는 놈 아닌가. 그런데 동시에 다섯 명의 여자와 사귀는 남자가 있다. 그것도 완전 순진무구한 얼굴로, 누구든 하나를 선택할 생각은 없다고 말한다. 함께 있으면 즐거운 사람과 계속 관계가 이어지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다섯 여자와 동시에 사귀는 일에 일말의 죄책감아나 사소한 갈등조차 느끼지 않는 남자이다(104).

"나는 앞으로 2주일 뒤면 '그 버스'를 타야 한다. '그 버스'가 어디로 가는지, 어떤 목적을 갖고 있는지, 왜 사람을 태우는지 아무것도 가르쳐주지 않았지만 마유미와 마유미 동료들의 이야기를 들은 바로는 평화로운 환경하고는 거리가 먼 곳으로 가는 게 분명했다"(100).
(자세한 사연은 알 수 없지만) 2주 후면 끌려가 '그 버스'에 타야할 처지에 놓은 이 남자는 인생 최대의 이 절체절명의 순간에, 생뚱맞게도 자신이 사귀던 다섯 명의 여자와 이별을 할 기회를 달라고 "필사적으로, 한심할 정도로 애절하게"(24) 매달린다.
"나는 오지 않는 사람을 계속 기다리는 쓸쓸함이 뭔지 잘 알아"(25).
남자가 이렇게 다섯 명의 여자와 이별을 하기 위해 필사적인 것은 자신의 트라우마 때문이다. 남자는 어린 시절, '자반을 사올게' 하고 나간 엄마가 도무지 돌아오지 않아 어머니 걱정을 하며 문을 열었다 닫았다 안절부절 하지 못했던 기억을 떠올린다. 한 남자가 다섯 여자를 동시에 사귄다는 것에 대해서는 별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던 이 남자가, 다시 돌아오지 못할 자신을 기다리는 여자들을 걱정한다.
"사람한테 상처를 주는 것보다 더 즐거운 일이 있으면 말해봐"(99).
다섯 명의 여자와 이별식을 하려는 이 남자(호시노 가즈히코)와 동행하는 여자가 있다. '그 버스'에 남자를 태우기 위해 감시를 하고 있는 그녀는 키 180센티미터, 몸무게 180킬로의 거구 '마유미'이다. 외모 때문에 두려움의 대상이 되거나, 경멸을 받거나, 소외를 받아왔던(18), 마유미가 호시노 가즈히코의 다섯 번의 이별식을 허락한 이유는 단 한 가지이다. 그녀는 "그저 단순히 다른 사람에게 굴욕을 느끼게 하거나, 절망을 갖게 하는, 혹은 무력감에 시달려 고통스럽게 하는 일을 좋아할 뿐이다"(218).
그리하여 다섯 여자를 동시에 사귀었지만 그녀들의 불안과 걱정(?)을 덜어주려 이별을 고하러 가는 남자와 단순히 그 여자들이 상처받는 모습을 즐기고 싶은 한 여자의 기묘한 동행이 시작된다. 잘 생겼다고는 할 수 없지만 개성있는 한 남자와, 한 번 움직일 때마다 온 땅이 출렁거리는 듯한 기분에 젖게 만드는 괴물 같은 여자가 다섯 명의 연인을 차례로 방문한다. 남자는 다정하게, 여자는 그 다정함에 소금을 팍팍 뿌려대며 '바이바이'를 한다.

"블랙버드라는 말은 불길하다거나 불행을 뜻하는 것 같습니다. 바이바이, 블랙버드. 너와 헤어져 이제부터 행복해진다, 그런 얘기입니다"(325).
저자는 이 책의 의도를 이렇게 밝힌다. "불합리한 이별이지만, 억지로 웃고 바이바이,라고 말해버리는, 그러한 이야기를 쓰고 싶었습니다"(앞 날개 中에서). 그러나 작가의 의도는 정확하게 빗나갔다. 도저히 다섯 명의 여자를 동시에 사귈만큼 치밀해(?) 보이지 않는 이 남자, 어수룩하게만 봤는데, 아니다! 치명적이다! 이 남자는 여자를 감동시키는 법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다. 덕으로 사람을 다스려야 한다고 생각한 유비가 덕이 몸에 배여 자신에게 바로 그 덕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던 것처럼, 이 남자는 자신에게 여자를 감동시키는 능력이 있다는 것조차 모르고 있는, 그래서 더 치명적인 남자였던 것이다! 여자는 이런 남자와 억지로 '바이바이'를 해도, 결코 잊지는 못할 것이다.
"그것도 거짓말이었어?"
"그것도 거짓말이었네."
"그것도 거짓말이었네!"
"설마 그것도 거짓말이었던 건 아니지?"
"그것도 거짓말이었네."
다섯 명의 여자는 마치 서로 짠 듯이 이렇게 말했다. 어느 날, 갑자기 괴물 같은 거구의 여성과 함께 나타난 남자는 바로 그 여자와 결혼을 하기 위해 이제 '바이바이'를 해야만 한다고 고한다. 함께 온 거구의 여성은 이 남자가 그 동안 다섯 명의 여자와 동시에 사귀고 있었다고 까발린다.
이 예기치 못했던 이별 앞에서 다섯 명의 여성들은 각기 다른 반응을 나타내지만, 아이러니 하게도 남자는 그 마지막 이별의 순간에 다섯 여자에게 모두 '감동'을 선물하고 떠난다. 믿지 못할 남자가 '바이바이'를 하며 남겨놓은 감동, 여자들은 이것을 어떻게 받아들일까.
내 경험으로 비추어봤을 때, 그 남자와 보낸 지난 날들은 '아름다운' 추억으로, 두고 두고 '아쉬운' 기억으로 남을 것이다. (우여곡절은 생략하고) 강의실에 앉아 "눈부시다"라고 혼잣말을 했는데, 한 남자가 조용히 일어나 창가로 가서 블라인드를 내리며 내 눈에 햇살이 비치는지 확인을 했다. 그 남자는 나에게 '더 이상 널 좋아하지 않을 거야'라고 바이바이를 고한 상태였고, 후에 내 친구와 사귀기 시작했다. 그런데도 난 그날의 기억이 떠오를 때마다 가슴이 '뭉클'하다. 날 위해 햇살을 가려준 자상한 그 동작 하나가 과장되어 좋지 않은 다른 기억을 덮어버렸다.
이별을 하면, 그 '사람'이 아니라 '그 사람 때문에 행복했던 나'를 기억한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이 다섯 명의 여자들은 다섯 여자와 동시에 사귀며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나 다른 여자와 결혼을 한다며 '바이바이'를 고한 남자가 아니라, 그 남자 때문에 행복했던 자신을 기억하게 될 것이다. 마지막 순간에 그 뭉클했던 행복감을 말이다.
어수룩해 보이지만 그래서 더 치명적인 이 '호시노 가즈히코', 괴물처럼 보일 만큼 거구의 '마유미'는 아이러니 해서 더 매력적인 '레옹'을 닮았다. 무자비한 킬러이지만 우유를 마시며 화초를 키우는 천진난만한 레옹처럼, 무심해보이는 이 남자는 사실 달콤할 정도로 자상하고, 그녀의 사전에 '배려'라는 단어조차 없는 거침없는 이 여자는 알고보면 연한 순처럼 푸릇한 여린 속내를 지녔다.
요즘 드라마들도 너무 종잡을 수 없는'열린 결말'로 끝냈다가는 악플 세례를 받기 마련인데, <바이바이, 블랙버드>의 '열린 결말'도 도대체 종잡을 수가 없다. 이야기의 '끝'을 알 수 없어, "그 남자와 그 여자는 도대체 어떻게 되었을까?", "'그 버스'는 도대체 어디로 가는 걸까?", "절대 바이바이를 하지 않겠다고 했던 여배우와의 관계는 어떻게 되는 건가?" 하는 궁금증이 아마도 두고두고 긴 여운을 남길 듯하다.
<바이바이, 블랙버드>는 일본 문학의 거장 다자이 오사무의 작품인 <굿바이>의 오마주 격이라고 하는데, 다자이 오사무도 <굿바이>라는 작품도 잘 모르는 일단 패스. 골치 아픈 이야기는 사절하고, 소설은 무조건 재밌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독자라면 이 책이 딱이다. 말장난 같지만 산뜻(!)한 농담이, 그러나 불쾌하지 않게, 절대 가볍지 않게, 이야기를 유쾌하게 끌어나간다. 상황도, 캐릭터도 아이러니 해서 더 웃기고 재밌으며, 가볍게 읽히면서도 뭔가 잃어버린 '순수'를 찾아주는 듯한 청정해역에 몸과 마음을 푹 담궜다 나온 느낌이다. 여자를 동시에 다섯 명이나 사귄 남자의 별난 이별식에서 잃어버린 순수를 느끼다니! 이사카 고타로, 명성을 얻을 만하다. '꾼'은 '꾼'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