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학 본능 - 일상 너머를 투시하는 사회학적 통찰의 힘
랜들 콜린스 지음, 김승욱 옮김 / 알마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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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사회학적 아이러니"
 
 
율리히 벡과 엘리자베트 벡 게른샤임의 <사랑은 지독한 (그러나 너무나 정상적인) 혼란> 이후, 사회학 관련 책을 이처럼 재밌게 읽기는 처음입니다. 띠지에 "처음으로 사회학적 사고를 흥미진진하게 만든 책"이라는 한 줄 서평이 있는데, 허언이 아니었습니다. 신학을 전공하고 사회학을 공부해보고 싶어 대학원에 다시 진학했을 때, 당황스러운 일이 많았습니다. 일반적으로 사회학과 심리학이 사이가 나쁜 줄 알았는데, 사회학이 신학도 그렇게 경멸하는 줄 몰랐습니다. 특히 여성학을 전공한 친구들은 신학(교회)에 대놓고 적대감을 드러내기도 했습니다. 가부장제를 부치기고 견고히 하는 원흉이라나 뭐라나. 역사가 짧은 학문이라는 것도 오히려 그 친구들에게는 자랑거리였습니다. 학문을 발전단계로 본다면 가장 상위의 학문이라나 뭐라나. 교수님들과 학도들 포함 사회학자들의 학문적 자부심이 참 대단하구나 느꼈던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당황스러웠던 것은 "사회학적 사고"를 연습하는 일이었습니다. 현대 사회학으로 올수록 권위자의 이론들은 이해하기 어려웠고, 다양한 논문들은 연구 과정만 복잡할 뿐 도출된 결론은 뻔한 말들이 많습니다. 자연법칙처럼 절대적인 사회법칙을 찾아내는 일이 가능할까 하는 회의도 들었습니다. 통제해야 할 변수가 너무 많았고, 잘 설계된 논문도 조작적 정의의 범주를 벗어나면 무의미해지는 결과들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이주 여성(국제결혼)을 중심으로 다문화 가족 내 권력관계가 가족의 종교생활에 미치는 영향을 주제로 학위논문을 준비하다 사회학적으로 사고하는 일이 한참 부족하다는 것을 깨닫고 손을 놓은 상태로 몇 년을 보내고 있는 중에 이 책을 만났습니다.
 
 
"사회학의 가장 핵심적인 발견 중 하나는, 합리성이 제한되어 있으며 특정한 조건 아래에서만 모습을 드러낸다는 것이다. 그뿐이 아니다. 사회 자체도 궁극적으로 이성적인 추론이나 합리적인 합의가 아니라 비합리적인 기초 위에 서 있다"(18).
 
<사회학 본능>을 읽고 사회학이 다루는 큰 주제가 무엇이며 그것에서 어떻게 다양한 주제들이 파생되어 나오는가 하는 사회학의 큰그림을 처음으로 확실하게, 그리고 통합적으로 그려볼 수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합리성에 대한 우리의 상식적 믿음을 뒤엎는 사회의 비합적인 메커니즘에 대한 설명이 탁월했습니다. 한 번쯤 관료제에 분통을 터뜨려본 적이 있다면, "최대 효율을 위해 설계된 관료제가 오히려 비효율로 악명이 높"(19)을 수밖에 없는지 이 강의를 들어보라고 권하고 싶습니다.
 
"합리적이지 못한 과정들에 대한 연구가 바로 사회학의 장기"(22)라는 한 줄 설명은 사회학을 연구하는 방법에 대한 힌트를 던져주기도 했습니다. <사회학 본능>은 사회학적 사고의 큰 틀을 중심으로 사회학적 연구가 어떻게 다양한 주제로 파생되어 가는지 보여줍니다. 사회학의 기본적인 질문 중 하나는 '사회는 과연 존재하는가?'입니다. 이에 대한 논의들을 보면서 '신 존재 증명'이라는 철학과 참 흡사하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책의 저자 랜들 콜린스는 사회가 곧 신이라고 말합니다. "사람들이 신에게 부여한 성격을 모두 갖고 있는 존재가 현실 속에 하나 있다. 자연이나 형이상학이 아니라 '사회 자체'가 바로 그런 존재다"(66).
 
<사회학 본능>은 에밀 뒤르켐의 사회학 이론을 큰 줄기로 사회의 비합적 기초, 신의 사회학(종교), 권력의 역설, 범죄의 정상성, 사랑(가족)과 소유권, 인공지능에 사회학이 기여할 수 있는 것 등을 풀어갑니다. 저자가 근거로 삼고 있는 뒤르켐의 핵심적 주장은 이것입니다. "사회와 합리성 그 자체가 비합리적 기초 위에 서 있음을 증명해주는 그의 주장과, 사회적 의례가 바로 집단의 유대를 만들어내는 메커니즘이라는 그의 이론이 바로 그것이다"(23).
 
<사회학 본능>은 종교가 사회에 의해 창조된다는 것(87), 개인주의는 현저히 현대적인 특징을 지닌 종교의 새로운 형태라는 것(94), 전문가의 능력이 뛰어날수록 전문가의 권력은 줄어들 가능성이 크다는 것(135), 범죄를 바라보는 급진적인 시각에서는 "범죄를 야기하는 것은 개인이나 사회환경이 아니라 법을 집행하는 장치라는 것"(173), 나아가 "사회가 살아남으려면 범죄가 필요하다"(179) 하다는 것, 개인화된 현대인들에게 "사랑은 일종의 개인적인 미니 종교이며 그 안에서 커플은 각자 상대방에게 숭배의 대상이 된다"(227)는 것, 진정한 인공지능을 만들기 위해서는 왜 반드시 사회학자들이 중요한 역할을 맡아야 하는지(244) 등등 흥미로운 사회학적 통찰을 이해하기 쉽게 설명합니다. 사회학적 시각이 아니면 알아채기 불가능한 통찰이 아닐까 싶습니다.
 
일반적인 상식과 믿음을 뒤트는 <사회학 본능>을 읽으며 사회학적 시각을 가져야 할 필요성과 놀라운 통찰을 보여주는 인간 사고의 능력에 경외심이 생기기도 했지만, 반대로 우리(이성)가 가진 한계가 여실히 느껴지도 했습니다. <사회학 본능>을 통해 깨닫게 된 사회학적 사고가 없을 때, 우리가 얼마나 무서운 편견과 어리석은 판단과 합리적 사고의 오류 속에 빠질 수 있는지 보았기 때문입니다.
 
사회학은 익숙한 나 자신으로부터 한발짝 떨어져 나를 관찰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그런 점에서 사회학을 공부하는 일은 심리학을 공부하는 일만큼이나 나와 직접으로 맞닿아 있으며 나와 세상을 이해하는 중요한 작업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 책이 처음 출간된 것은 1982년이고, 개정판이 나온 것은 1992년이며, 이 책은 1992년에 나온 개정판을 번역한 것이라고 하는데, 시간의 간극이 느껴지지 않습니다. 사회학을 처음 접하는 독자들도 흥미롭게 읽을 수 있는 주제가 가득합니다. 개인적으로는 일단 '뒤르켐'의 이론을 다시 공부해보고 싶다는 학문적 호기심이 생겼습니다. 어쩌면 손을 놓은 채 사실상 포기하고 있었던 논문을 다시 시작하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책을 다시 읽어봐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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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도여행법 - 경전선을 타고 느리게, 더 느리게
김종길 지음 / 생각을담는집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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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걸음은 옛 시간의 흐름에 맞추느라 자연히 느려졌다"(223).
 
 
책상 속에 사표가 들어 있습니다. 이 자리에 앉아 일한지도 20년이 다 되어갑니다. 그렇게 훌쩍 흘러가버린 청춘입니다. 돌아보니 바쁘다는 말을 늘 입에 달고 살았습니다. 같은 일이 반복되다 보니 일상은 미친 속도로 돌아가는데 인생은 오래 전에 일시정지되어 버린 느낌입니다.
 
이대로 살다가는 더 깊은 후회가 남을 것 같아 인생의 하프 타임을 가질 결심을 했습니다. 무엇을 할까 고민하다, 친구들에게 산티에고로 순례를 가보자고 제안했는데 아무래도 선뜻 나서기가 어려운지 관심을 보이는 친구가 많지 않았습니다. 이런 저런 이유가 있겠지만 가장 큰 이유는 두려움일 듯합니다.
 
그런데 우연치 않게 <남도여행법>을 보았는데, 먼 산티에고까지 갈 필요 없이 남도로 순례길을 떠나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저절로 발걸음이 느려지는, 관광지를 전투적으로 돌아다니지 않아도 되는 느린 여행이라는 것이 저에게는 가장 매혹적이었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느린 경전선"
 
 
<남도여행법>은 경전선을 타고 남도를 순례하듯이 떠나는 여행법입니다. "경상남도 밀양 삼랑진역에서 출발하여 남도의 구석구석을 800리쯤 돌아 광주송정역에서 멈춘다"는 경전선은 세상에서 가장 느린 기차라고 합니다. "경정선의 느린 풍경 속에 쉼표처럼 찍혀 있는 역은 모두 60개인데, 60개 중 폐역이 16곳, 기차가 서는 역이 34곳, 기차가 서지 않는 역이 10곳"이라고 합니다. 삼량진에서 광주송정까지 총 300.6km를 1년간 여행한 기록이 바로 이 책, <남도여행법>입니다.
 
저자는 "경전선 여행은 좀 더 느린 방식의 여행, 떠나기만 해도 치유가 되는 여행, 일체의 근심걱정을 떨칠 수 있는 여행"이며, "이 책은 단순한 여행안내서가 아니라 사라져 가는 것들의 기록, 잊혀가는 것들의 기록이다. 로드다큐이자 인문지리서이다. 또한 문화기행서이자 철도여행서이다"라고 소개합니다. 저자의 말처럼 남도의 삶과 역사와 문화를 찾아떠난 로드다큐 같은 분위기가 강합니다. 또한 <남도여행법>은 매끈한 자동차를 몰고 편리하게 옮겨다니는 여행이 아니라, 기차를 타고 내려서 걷고 때로는 버스로 이동하며 다시 또 기차를 타고 그렇게 천천히 이동하며 그곳의 풍경과 사람과 과거와 이야기와 하나가 되는 순례의 길이자, 그렇게 떠난 길 끝에서 또다른 나와 만나게 되는 구도자의 길과 같은 분위기가 짙게 풍깁니다!
 





부모님 고향이 남도인데도 어쩌자고 그렇게 동해쪽으로만 휴가를 갔는지, 이 땅에 태어나 40년 넘게 발 딛고 살았으면서도 이 책에서 소개하는 곳 중 어느 한 곳도 제대로 가본 곳이 없습니다. 그동안 뭘하면서 살았나 싶습니다.
 
남도 여행에 관한 정보를 얻으려고 펼쳐 들었던 책인데, 남도를 어떻게 여행해야 하는지를 배웠습니다. 아름다운 사진에 마음이 끌려 가보지 않고 벌써 남도의 풍경과 사랑에 빠졌습니다. 봉화마을에 가서 봉화산을 일러 '낮지만 높은 산'이라고 했던 노 대통령의 말의 의미도 알아보고, 마산역에 내려 예술인촌으로 조성된 골목길도 걸어보고, 함안역에 내려 왁자지껄한 가야시장과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함안 말이산 고분군도 찾아보고, 반성역에 내려 줄을 서서 사먹는다는 순두부집에 가서 줄도 서보고, 횡천역에 내려 스탬프도 찍어오고, 순천역에 내려 법정 스님이 계시다는 불일암에도 올라보고, 벌교역에 내려 그 유명한 꼬막도 맛을 보고, 코스모스 축제로 유명하다는 북천역에도 가보고, 전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간이역이라는 남평역에도 가보고 싶습니다. 아니, 새롭게 길을 낸 이 책을 따라 나도 삼랑진역에서 광주송정역까지 완주를 해보고 싶습니다. 친구와 함께 간다면 이 책에서 알게 된 코스모스의 슬픈 사랑이야기도 들려주고, "논두렁에 덩그러니 버려진 듯 무심하게 서 있"(232)다는 작은 불상(석조인왕상)도 꼭 찾아 보여주고 싶습니다.
 
언젠가 이유도 없이 끓어오르는 마음의 불안과 격동을 이기지 못하여 춘천행 기차에 홀로 몸을 실었던 20대의 그 어느 날처럼, 나는 또다시 낯선 길로 뛰어들고 싶어집니다. 조금 특별한 여행을 원한다면, 낯선 곳에서 나와 마주할 고독한 시간이 필요하다면, 과거로의 여행을 경험해보고 싶다면, <남도여행법>을 추천해드리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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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크리스천 The Christian - 세상이 기대하는 바로 그 사람
튤리안 차비진 지음, 정성묵 옮김 / 두란노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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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겉으로는 하나님의 영광을 추구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과연 어떤 목표와 꿈이 우리를 움직이는지 솔직히 돌아보라"(252).
 
 
동네 주민들과 유흥을 위해 주변 상가를 방문하는 사람들이 교회 주차장을 가득 메우는 바람에 저녁 기도회 때 성도들의 차를 주차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생각다 못해 스티커를 제작했고, 그 스티커가 붙어 있지 않는 차량은 교회 주차장 이용을 제안했습니다. 그랬더니 한 분이 교회를 찾아와 항의를 하며 스티커를 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 물었습니다. 행정적으로 말하면 교회에 교인으로 등록된 교인이어야 한다고 했더니, 그 자리에서 자기도 등록을 하겠다고 큰소리를 쳤습니다. 교회에 등록된 교인이 된다는 것을 무슨 동호회에 가입하는 것쯤으로 생각한 모양입니다.
 
지금 우리나라에는 등록된 교인수는 많지만 진짜 크리스천은 찾아보기 힘들다고 합니다. 교회가 모범이 되지 못하고, 비난의 대상이 되고 있는 실정입니다. 아니러니하게도 세상이 교회를 비난하는 것은 교회가 교회이기 때문이 아니라, 교회가 교회답지 못하다는 것 때문입니다. 지금 세상의 문제는 누가 크리스천이고, 누가 불신자인가가 아니라, 누가 참 크리스천이고, 누가 이름뿐인 크리스천인가입니다. 세상의 타락에 더 문제가 되는 것은 불신자가 아니라, 이름뿐인 크리스천입니다. 소돔과 고모라가 멸망한 것은 죄인 때문이 아니라 의인 10명이 없었기 때문이듯이, 세상은 이름뿐인 크리스천들 때문에 더 병들어가는 듯합니다. 천국을 보여주어야 하고, 무엇이 참 생명이고, 가치이며, 사랑인지 보여주어야 할 크리스천이 제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세상은 길을 찾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세상은 교회다운 교회를 절실히 필요로 한다. 말과 행동에서 하나님 나라의 시민다운 모습을 보여주는 교회가 절실하다. 이런 교회가 많아져야 세상 사람들이 자신의 왕국이 무너질 떄 어디에 몸을 의탁해야 할지를 깨달을 것이다"(134).
 
그런데 그 사람이 진짜 크리스천인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겉으로 보여지는 삶의 모양은 세상 사람들과 다르지 않습니다. 문제는 동기, 목표, 기준이 무엇이냐 하는 것입니다. 튤리안 차비진 목사님은 "어떤 목표와 꿈이 우리를 움직이는지 솔직히 돌아보라"고 일갈합니다. 크리스천이라는 분명한 정체성은 죄를 용서받았다, 이제 지옥에 가지 않는다는 정도가 아닙니다. 크리스천이라는 분명한 정체성은 하나님은 누구신가, 지금 하나님이 하고 계신 일은 무엇인가,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신 목적은 무엇인가라는 큰 그림 속에서 찾아집니다. 그리고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전적으로 '성경' 안에 있습니다.
 
<더 크리스천>은 창조, 타락, 구원, 회복이라는 성경의 큰 그림 속에서 크리스천이란 누구이며,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가의 문제를 풀어냅니다. 한마디로 이야기하면 크리스천은 이 세상에 속한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에 속한 시민이며, 이 세상을 회복하는 일에 부르심을 받은 사람이라고 설명합니다.
 
튤리안 차비진 목사님은 여기서 굉장히 흥미로운 성경 해석을 시도합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때 물리적인 세상, 즉 지구의 운명은 어떻게 되는가에 대해 신학적으로 의견이 갈립니다. 한편에서는 현재 세상과 새 세상 사이에 연속성이 없다고 주장합니다. 근거 구절 중에 하는 베드로후서 3장 7절 말씀입니다. 마지막 때에 하늘과 땅은 "타 버릴"(불사르다) 것이라고 번역되어 있습니다. 튤리안 차비진 목사님은 이 구절이 "찾아지다"로 번역될 수 있음을 지적합니다(91). "이 번역은 지구의 소멸이 아닌 일종의 정화를 함축한다"는 것입니다. 신학적 입장에 따라 논쟁의 대상이 될 수 있는 해석이지만, 하나님의 목적은 이 세상을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회복하는 것이라는 주장은 부정하기 어려울 듯합니다. 차비진 목사님은 여기서 그리스도인이 해야 할 일, 즉 사명이 무엇인지 분명히 합니다. "그리스도의 초림과 재림 사이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은 회복을 위한 하나님의 도구로 섬길 소명을 받았다. 우리의 회복이 만물의 회복으로 확산되게 만들어야만 한다"(107). 한마디로 "회복" 이것이 우리의 할 일이라는 것입니다. 회복의 사명은 영적인 측면에 국한되지 않습니다. "교회의 사명은 영적인 동시에 물질적이며 개인적인 동시에 문화적이다"(111). 그리스도인은 인간 문화의 "모든 영역"을 하나님 말씀의 기준 위에 다시 세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교회와 세상, 그리스도와 문화의 적절한 관계는 무엇인가?"(137)
 
 
<더 크리스천>은 이 세상을 회복할 사명을 가진 그리스도인들이 이 세상 속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돌아보는 책입니다. 이 책의 주장을 한 문장으로 요약한다면 "세상에서 살되 세상에 속하지는 말라"는 것입니다. 치비진 목사님은 "세상을 위해서 세상을 거스르는 자"가 되라고 거듭 거듭 반복하며 강조합니다.
 
그리스도인이 되고 나서 영적 순결을 보존하기 위해 세상의 악함으로 자신을 분리시키는 사람들(분리주의자)이 있고, 한 영혼이라도 더 구원하기 위해 '그들처럼'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차비진 목사님은 이에 대한 D. L. 무디의 멋진 비유를 소개합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배의 자리는 바다 한가운데입니다. 혹시 바닷물이 배 안으로 들어올 때는 하나님이 도와주십니다"(138). 세상을 외면하는 것은 물 밖에 있는 배와 같고, 세상에 물들어가는 것은 물 속으로 가라앉는 배와 같다는 것입니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에 라는 기치 아래 새로운 시대에 맞게 새로운 방법으로 복음을 전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여러 가지 전도 방법론을 제시하는 컨퍼런스가 성행합니다. 그러나 차비진 목사님은 세상과 접촉하겠다는 열의가 지나쳐 세상적인 스타일과 기준, 전략을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고 강조합니다(150). 세상을 위해 세상 속에 있지만 세상방식은 철저히 거부하는, 다시 말해 세상을 거스르는 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기독교가 세상을 변화시키는 데 최대의 걸림돌은 육체적 위험이 아니라, 세상적인 패턴이라는 것입니다. "세상적인 패턴은 영혼의 잠이다. 이 잠에 빠지면 세상의 지위와 쾌락, 안위가 매력적으로 보이고 성경의 진리는 뜬구름을 잡는 이야기처럼 보인다"(247).
 
너무 튀는 것을 두려워하고, 광신자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또 쿨한 그리스도인의 면모를 보여주기 위해 세상을 닮아가다 보면, 점점 더 세상에 필요 없는 존재가 될 것이라고 경고합니다. 세상과 구별되어야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분명한 사실을 깊이 새겨야겠습니다.
 
"세상에서 발을 빼지도 세상에 물이 들지도 말고 세상 속에서 저항 운동을 펼쳐야 한다. 세상과 접촉하면서 세상의 길과 충돌하는 것, 세상에 참여하되 세상에 흡수되지 않는 것, 세상을 버러지 않되 세상과의 불협화음을 유지하는 것, 바로 이것이 크리스천들의 숙명이다"(152).
 
그리스도인됨의 분명한 정체성은 하나님께 흠뻑 빠져드는 사랑 속에서만 찾을 수 있습니다. 튤리안 차비진 목사님은 복음의 완전한 은혜에 풍덩 빠진 사람입니다. 그래서 언제나 그의 책을 읽으면 복음이 주는 자유함과 충만한 은혜를 경험합니다. 그 안에서 우리가 붙들어야 할 목표, 걸어가야 할 방향,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분명하고 선명하게 보이기 때문에, 삶이 훨씬 단순해지고 가벼워지는 것을 느낍니다. 그리고 진짜 그리스도인, 믿음의 거인이 되고 싶은 거룩한 열정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그리고 차비진 목사님은 공부를 매우 열심히 하는 목회자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진가가 이 책에 고스란히 녹아 있습니다. <더 크리스천>은 교인된 우리가 다시 들어야 할 복음이고, 부름입니다. 주의 권능의 날에 주의 백성이 거룩한 옷을 입고 주께 나아오리라는 말씀처럼, 이 책은 주의 거룩한 백성들을 불러 모으는 하나님의 나팔 소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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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미안 꿈결 클래식 1
헤르만 헤세 지음, 박민수 옮김, 김정진 그림 / 꿈결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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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는 투쟁하며 알에서 나온다. 알은 세계다. 태어나려는 자는 한 세계를 파괴해야 한다. 그 새는 신에게 날아간다. 신의 이름은 아브락사스다"(144).
 
 
내 기억 속의 <데미안>은 질풍노도의 청소년이 친구의 어머니를 사랑하는, 다소 공감하기 힘들었던 고전문학 중 하나입니다. 이제 막 중학생이 됐을 무렵에 읽었기 때문인지, 알을 깨고 나오듯 내면의 폭풍을 겪은 뒤 드디어 자신을 찾아낸 주인공의 이야기에 나를 투영하지 못했고, 오히려 <데미안>은 가까이 하면 안 될 나쁜 친구처럼 불편했을 뿐입니다. 내가 목격한 싱클레어의 방황과 성장은, 일종의 공포였습니다.
 
꿈결에서 발간한 <데미안>은 "책을 열고 번역을 비교하라!"는 자신만만한 띠지 문구가 눈길을 끌었습니다. 어린 마음에 공감하지 못했던 고전이지만, 잘 된 번역으로 이 책을 다시 읽는다면 감상이 어떻게 달라질지 궁금했습니다. 어른이 된 뒤에 다시 찾았던 초등학교 운동장에서 내 기억이 얼마나 왜곡되어 있는지 알고 쓸쓸한 웃음과 함께 당황스러운 가슴을 쓸어내렸던 것처럼, <데미안>을 다시 읽는다면 내 기억 속에 왜곡된 채 남아 있는 불편한 공포를 지울 수 있을 듯했습니다.
 
꿈결의 <데미안>은 자신만만했던 띠지의 약속 그대로 잘 읽힙니다. 번역본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습니다. 중간 중간 삽입된 컬러 일러스트도 상상력을 자극해주어 좋았습니다. 책의 부록에 실린 박민수 교수님의 해제를 읽지 않았거나, 이 책과 함께 <프로이트와 함께하는 세계문학일주>(이병욱, 학지사)를 읽지 않았다면, <데미안>은 순수한 성장소설, 또는 청춘소설로 남았을 듯합니다. 부모님의 보호 속에서 경험하지 못했던 바깥 세계와 맞닥뜨린 뒤, 눈이 먼 것처럼 헤매 다니며 피폐해져가는 싱클레어의 모습이나, 아무도 눈치 채지 못하지만 그 안에서 들끓고 있는 거센 내면의 폭풍이나, 알을 깨고 나오 듯 불현듯 찾아든 불꽃 같은 깨달음의 순간에, 지나온 내 시간들이 겹쳐졌습니다. 이해받지 못했던 내 불안과 고통이 누군가에게 이해받는 듯하여 어쩐지 새삼 서럽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박민수 교수님의 해제와 <프로이트와 함께하는 세계문학일주>를 통해 헤르만 헤세가 <데미안>을 통해 진짜 이야기하고자 했던 실체를 알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데미안>은 방황하는 삶을 그린 전형적인 청춘소설이 아니라 검은(?) 속셈을 가진 아주 사적인(?) 프로젝트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일단 주목해야 할 것은 <데미안>은 정신분석(프로이트와 융의 심리학)에 깊은 영향을 받은 책이라는 것과, 헤르만 헤세가 융의 영향으로 아프락사스라는 이교도의 신을 신봉했다는 사실입니다. 그런 관점에서 다시 보면, 아버지를 경멸하며 죽이는 꿈을 꾸고, 데미안의 어머니를 사랑하는 싱클레어는 오이디푸스의 소망을 설명하는 정신분석의 교본 같이 읽힙니다. "이런 꿈 중 가장 끔찍했던 꿈, 내가 거의 미쳐버릴 듯한 상태에서 깨어났던 꿈은 내가 아버지를 죽이려 한다는 내용이었다"(54).
 
그리고 <데미안>에서 가장 유명한 문장에 수수께끼처럼 등장하는 신의 이름. "새는 투쟁하며 알에서 나온다. 알은 세계다. 태어나려는 자는 한 세계를 파괴해야 한다. 그 새는 신에게 날아간다. 신의 이름은 아브락사스다"(144). 싱클레어는 데미안을 통해 아브락사스의 이름을 알게 됩니다. "하지만 그의 이야기는 내가 소년 시절 내내 가슴속에 품고 있었으면서도 아무에게도 말한 적 없었던 수수께끼와 맞닿아 있었다. 하나님과 악마, 공인된 신의 세계와 묵살된 악마의 세계에 관한 데미안의 이야기는 바로 내가 생각하고 있던 신화였다"(98). 아브락사스는 신적인 것과 악마적인 것이 결합된 신성으로, 기독교의 신이 절대 선이라면, <데미안>은 절대 선이기만 한 신은 반쪽짜리 신이라고 말합니다. 선과 악을 동시에 지녀야 비로서 완전한 세계, 완전한 신이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아브락사스는 훨씬 더 많은 의미를 지닌 것 같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어떤 신성을 가리키는 이름쯤으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신적인 것과 악마적인 것의 결합이라는 상징적 사명을 지닌 신성 말입니다"(146). <데미안>을 통해 다시 보게된 헤르만 헤세는 아브락사스 숭배를 전파하는 이교도인의 모습이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세계 전체를 숭배할 수 있어야 하며, 따라서 동시에 악마이기도 한 신을 모시거나 신에 대한 예배 외에 악마에 대한 예배도 함께 올려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바로 아브락사스가 그처럼 신인 동시에 악마이기도 한 신성이었다"(147).
 
<프로이트와 함께하는 세계문학일주>에서 저자는 싱클레어는 "헤르만 헤세" 자신을, 아브락사스의 존재를 알려 준 데미안은 "융"을 상징한다고 해석합니다. 그리고 "융과 헤세는 기독교 문명이라는 단단한 알을 깨뜨리기 위해서 은밀한 성전을 벌였던 장본인들이었다"(149, 프로이트와 함께하는 세계문학일주)고 말합니다. 그러나 결국 기독교로 다시 선회했던 헤르만 헤세의 생애를 생각하면, "헤세는 평생 구도의 길을 걸었지만 어느 세계에도 안주하지 못한 채 영원한 방랑자로 머문 셈"(156, 위의 책)이라고 평합니다.
 
이 책의 부록에 실린 해제 "데미안을 찾아가는 싱클레어의 여정"을 읽어보면, 유럽의 정신, 즉 기독교 가치관 속에 단죄되고 금기시 되었던 것들과 지배적 가치관, 그리고 그에 반하여 나타났던 시대적 징후들과 분위기가 <데미안>이라는 소설 속에 정밀하게 녹아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헤르만 헤세가 누군가로부터 어떠한 영향을 받았건, 그가 어떤 속셈(?)을 가졌던, 우리에게 고전으로 남겨진 <데미안>은 "온전히 자신을 찾아가는 길"(269) 위로 독자를 인도합니다. 사람들이 말하는 질풍노도의 시기를 이미 오래 전에 지났지만, 내 안에 일었던 내면의 폭풍은 아직 계속 되고 있습니다. 몸은 어른처럼 자랐지만 이렇다 할 방향 없이 아무런 목표에도 이르지 못하고 흥겨워하다 이내 시들해지는 꿈, 사납고 광포한 욕망의 불꽃에 흔들리는 싱클레어의 독백에 마음을 들킨 것같은 기분이 드는 건, 내가 찾아야 할 '데미안'을 아직 찾지 못했다는 증거일 테니까요.
 
"나는 그저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대로 살고 싶었을 뿐이다. 그것이 왜 그토록 어려웠던지?"(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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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LA! 남미여행 100 - 남미에서 꼭 가봐야 할 여행지100 꼭 가봐야 할 여행지 100
박명화 지음 / 상상출판 / 2014년 5월
평점 :
절판


 

 


 

"유럽보다 섬세하고, 아프리카보다 야성적이며, 아시아보다 신비로운 중남미!"

 

우리나라에서 땅을 파고 곧장 내려가면 만난다는, 지리적 대척점에 있는 남이 땅! 비싼 항공료 때문에 내 평생에 한 번 가볼 수 있을까 한숨을 쉬며 포기해야 했던 남미 땅! 그런데 이 책을 보면서 일생에 한 번은 남미를 만나고 싶다고, 나에게 주는 선물로 남미 여행을 계획해 보아야겠다고 다짐했습니다. 내가 발 딛고 살았던 이 땅에 이렇게 멋진 곳이 있었다는 걸 알면서도 한 번도 직접 가보지 못했다면 죽을 때 반드시 후회할 것 같기 때문입니다.

 

 

 

 
 

<올라! 남미 여행 100>은 브라질, 아르헨티나, 칠레, 페루, 에콰도르, 쿠바, 멕시코 등 중남미 12개국 중 꼭 가봐야 할 여행지 100곳을 소개해주는 책입니다. 저자는 이 책을 활용하는 방법으로, 그리고 남미를 여행하는 팁으로 "중미와 남미에 녹여져 있는 유럽의 역사"를 꼭 알고 가라고 조언합니다. "중남미에는 역사적인 장소가 아주 많"은데 "배경을 모르고 간다면 후회의 눈물을 흘릴 정도로 흥미진진한 곳이 가득"하다고 알려줍니다. 흔히 그림은 아는 만큼 보인다고 하는데, 여행도 아는 만큼 즐길 수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올라! 남미 여행 100>의 저자는 "중남미를 가장 잘 아는" 사진작가입니다. 저자의 사진을 통해 만난 남미는 그야말로 매혹적입니다. 때로는 거대한 자연 앞에 경외심으로 가득 채워지기도 하고, 아름다운 풍경 속으로 풍덩 뛰어들고 싶기도 하고, 정렬이 가득한 이국적인 거리에서 자유를 만끽하고 싶기도 하고, 신비로운 땅으로 탐사를 떠나보고 싶기도 합니다.

 

 

 

  

<올라! 남미 여행 100>은 깨알같은 여행 정보가 가득한 가이드 북이 아닙니다. 사진과 짧막한 이야기로 여행지로서의 남미의 매력을 소개하고 그곳에 꼭 가봐야 할 이유를 알려주는 책입니다. 사진만으로도 남미의 매력에 빠져들기 충분합니다. 남미 여행을 계획한다면 이 책으로 남미를 먼저 만나고 여행지를 고르는 일부터 시작해야 할 듯합니다. 잘 알려진 곳만큼이나 숨겨진 명소가 많기 때문에 어디로 가야 할지 힘겨운 과제를 먼저 해결해야 할 테니까요.

 


 

 

 

<올라! 남미 여행 100>은 남미 여행의 큰 그림을 그리고 싶은 독자들에게 추천합니다. 책 뒷부분에 부록처럼 딸린 "중미와 남미를 내 맘대로 골라 즐길 수 있는 테마 여행 인덱스"에 보면, 가보고 싶은 여행 테마에 따라 축제&음식 여행, 트레킹&레저 여행, 박물관 여행, 세계 7대 불가사의 여행, 아름다운 풍광 여행, 자연 생태 탐사 여행, 역사 여행, 나를 찾아가는 여행, 도시 문화 여행 등으로 나에게 맞는 맞춤 여행지를 고를 수 있습니다.

 

남미 여행에 관한 구체적인 정보를 찾고 있는 독자들에게는 이 책 한 권으로 여행 계획을 끝낼 수 없다는 것이 다소 아쉬울 듯합니다. 그러나 남미에 꼭 가봐야 할 이유를 전혀 몰랐다든지, 남미를 한 번 가보고 싶은데 어디부터 가야할지 큰 그림이 그려지지 않는 여행자에게 추천합니다. 이 책을 통해 만나본 남미는 거리가 멀고, 항공료가 비싸고, 여행자들에게 위험한 곳이라는 장벽에도 불구하고 모험을 해보고 싶을 만큼 아름다운 곳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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