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의 융합 - 인문학은 어떻게 콜럼버스와 이순신을 만나게 했을까
김경집 지음 / 더숲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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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읽어야 한다. 그래야 우리가 제대로 살아갈 수 있다"(345).



지금 우리 사회에 불어닥친 '인문학 열풍'의 실상은 '인문학 빈곤'을 확인하는 반증에 지나지 않습니다. 인문학의 위기가 곧 우리의 위기라는 것은 간파했지만, 우리는 이미 그것을 어디에서부터 어떻게 시작해야 하는지 방법조차 알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인문학 열풍이 구호와 선언에서 그치지 않도록 끊임없이 대중에게 말을 걸어오는 김경집 선생님은 '다시 시작하는 인문학'의 최선봉에 선 선구자적인 인문학자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인문학은 밥이다>에서는 인문학이란 무엇인가를 명쾌하게 정의했다면, 이번 책 <생각의 융합>에서는 인문학을 하는 방법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인문학이란 이렇게 하는 것이다"를 보여주는 모범, 시범이라고 할까요. 독자는 이 책을 읽으며 "아, 인문학이란 이렇게 하는 것이구나" 하는 깨달음과 함께, 왜 인문학을 해야만 하는지 인문학이 가진 힘과 당위에 설득 당하고 말 것입니다.


<생각의 융합>은 동과 서의 역사를 종과 횡으로 넘나들며 시간과 공간을 가로지르는 역사 의식과 안목의 힘이 무엇인지 보여줍니다. 이러한 고찰과 통찰은 이야기의 힘이 무엇인지 보여주기도 하는데, 우리 삶과, 아니 나의 삶과 상관 없을 것 같은 콜럼버스와 이순신, 코페르니쿠스와 백남준, 에밀 졸라와 김지하, 호메로스와 제임스 조이스, 히딩크와 렘브란트, 나이팅게일과 코코샤넬, 두보와 정약용, 그리고 김수영 등의 이야기는 끊임없이 우리에게 지금 어떻게 살고 있는지를 물어오며,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고민하도록 만듭니다. 그것은 시대를 읽으라는 요청이기도 하며, 외면하지 말고 끊임없이 현재를 느끼라는 강제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그런 감각과 고민이 미래의 방향을 제시해줄 것이기 때문입니다.


<생각의 융합>은 동서양의 특정 인물과 사건을 중심으로 과학과 예술, 정치와 인권, 신화의 문학적 재생산, 시대를 극복한 '자유로운 개인', 전쟁과 여성해방, 역사를 가로지르는 시적 감흥이라는 주제를 다루는데, 새롭게 알게 된 것은 백남준 예술의 의미와 가치였습니다. 세계적인 비디오 아티스트라고만 알고 있었던 제 지식이 천박하게 느껴질 정도였습니다. 백남준은 단순한 비디오 아티스트가 아니라, 미술의 역사를 바꾼 위대한 세계인이었습니다. 김경집 선생님은 백남준을 "예술에 대한 근원적 정의를 바꿔놓았고 표현의 범위를 혁명적으로 확대"(108-109)한 예술가라고 평가합니다. TV라는 새로운 캔버스에 주목한 백남준은 "이전까지의 미술에서 꿈도 꾸지 못했던 '시간과 동작'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한꺼번에 잡은"(111) 혁명적인 예술가였다는 것을 이제라도 알게 되어 참 다행입니다.


가장 많은 생각과 고민을 던져준 주제는 정치와 인권, 바로 "에밀 졸라와 김지하" 이야기입니다. 정치는 우리 삶의 방식을 결정짓는 매우 중요한 요소라는 것, 국가주의를 내세우지만 사실 그들에게 더 중요한 것은 국가가 아니라 권력이었다는 걸 목격하며, 진짜 중요한 가치를 잃을 때 기득권자는 어디까지 악랄해질 수 있으며, 인간의 가치는 어디까지 퇴보할 수 있는지, 그리고 개인의 삶은 얼마나 무력해질 수 있는지 역사에서 배우지 못하고 있는 우리 현실이 참으로 안타깝고 답답했습니다. 그런 우리에게 가장 부족한 것이 잘못된 역사를 바로잡기 위해 냉혹할 정도로 철저했던 프랑스의 결단과 "자신들의 자유가 소중한 만큼 다른 이들의 자유도 존중할 줄 알고 공존의 지혜를 모색했던" 네덜란드의 관용의 힘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생각의 융합>은 단순한 역사, 단순한 시사가 아니라, 인문학을 통해 문화와 역사, 배경과 맥락을 정확히 짚어내고 분석하는 능력을 길러야 한다고 역설합니다. 그래야 창조와 융합의 시대에 살아남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인문학을 하는 방법을 시범보임으로 인문학이 가진 힘이 무엇인지 직접 보여주는 책이기도 합니다. <생각의 융합>은 "인문학의 근간은 인간에 대한, 인간의 가치에 대한 재발견"이라고 말합니다. 그런 맥락에서 "함께 살아가는 사람에 대한 예절과 배려, 사랑과 존중, 그것보다 더 중요한 가치는 없다"고 단언합니다. 이러한 인문학적 기준에서 보면 지금 우리의 교육은, 우리의 삶은 얼마나 천박한지요! 지금 우리의 삶이 얼마나 천박한지 깨닫지 못한다면, 그 천박함을 벗어버리려는 노력조차 하지 못하겠지요? 바로 그 천박함을 깨닫게 해주는 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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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맞이언덕의 안개
김성종 지음 / 새움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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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개는 내 목을 조여들면서 이렇게 속삭이고 있었다. 

'난 네가 무슨 짓을 한지 다 알고 있어.'

(349)



<달맞이언덕의 안개>는 한국 추리문학의 대부라 일컬어지는 김성종 작가의 연작 소설입니다. 드라마 <여명의 눈동자>의 원작자라는 것도 내겐 이 책을 읽어야 할 충분한 이유가 되어 주었습니다. 일본 추리소설의 홍수 속에서 우리나라에는 왜 이렇다 할 추리소설이 없을까 늘 아쉬웠거든요. <일곱 개의 고양이 눈> 이후로, 우리 작가가 쓴 추리소설을 읽어본 것은 이 작품이 처음입니다. 몇 년만인지 모르겠습니다. 


<달맞이언덕의 안개>는 부산 해운대에 있는 그 달맞이언덕입니다. 달맞이언덕의 풍경이 묘사될 때마다 눈앞에 영상이 그려지는 것이, 한국 소설을 읽는 재미가 이런 것이지 생각하며 혼자 웃기도 했습니다. 다음에 다시 부산에 가면 달맞이언덕에 정말 '죄와 벌'이라는 카페가 있는지 찾아봐야겠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달맞이언덕의 안개>는 평생 동안 추리소설만 써온 작가 '노준기'가 주인공입니다. 김성종 작가의 화신처럼 느껴지는 '노준기'는 일흔을 넘은 원로작가로, 지역 형사에게 '홈스 선생'이라 불릴 정도로 추리작가로서 명성을 누리는 꽤 유명인사입니다. 달맞이언덕에 있는 '죄와 벌'이라는 카페는 그의 아지트입니다. ''죄와 벌'에 드나들며 커피와 시칠리아산 와인 '도망간 여자'를 마시는 것이 노 작가의 일상이며 작은 행복입니다. 카페 '죄와 벌' 간판에는 "라스콜리코프가 노파의 머리통을 내려치기 위해 도끼를 높이 쳐들고 있는 모습이 생생하게 그려져 있습니다. 커피숍 간판치곤 너무 잔인하고 파격적인 그림이지만 '죄와 벌'이라는 카페, 그리고 언제나 그 '죄와 벌'을 뒤덮고 있는 달맞이언덕의 안개, 이 두 가지가 이 작품을 지배하는 분위기입니다. 


<달맞이언덕의 안개>는 노 작가와 '죄와 벌'이라는 카페, 그리고 달맞이언덕의 안개를 중심축으로 총 25편의 단편을 이야기하는데, 안개가 자욱한 달맞이언덕에서 벌어지는 뺑소니 사건, 살인사건, 노 작가의 비극적인 어린시절, 노 작가의 비극적인 가정사, 또 유럽과 일본을 무대로한 로맨스, 그리고 원전폭발 사고까지 서로 연결될 것 같지 않으면서도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 다양한 스토리가 이 책 한 권에 잘 버무려져 있습니다. 작가는 '노 작가'의 인생사를 통해 보일 듯 말 듯 자욱에 안개에 가려진 듯한 한국 역사와 사회의 곪아터진 단면을 날카롭게 해부하며, 독자들에게 서글픈 우리의 자화상을 불쑥 들이댑니다.




"모두가 잘 살고 있다는 착각. 그것을 자각하지 못하는 어리석음. 세상이 미쳐서 돌아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은 과연 몇 명이나 될까"(82)


<달맞이언덕의 안개>는 대한민국이 세계에서 가장 살기 어렵고 희망도 없는 나라로 추락한 채 끝이 납니다. "1미터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짙은 그 안개 속에 얼마나 많은 눈물과 애환이, 버려진 삶이 동물적 신음과 더러운 탐욕이 썩고 있는지"(413) 모른 채로 살아온 결과일지도 모릅니다. 이 땅에서 나고 자란 노 작가는 그래서 우리에게 "삶의 고통과 허무, 고독한 영혼, 눈물겨운 사랑과 피를 말리는 이별의 아픔, 시대의 고통과 민초들이 몸부림, 우리의 몸속에 흐르는 살인의 철학"을 우리에게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달맞이언덕의 안개>는 기본적으로 재미를 미덕으로 삼은 추리소설이지만, 시대적 고통, 역사의식을 더 자극하는 사회 소설처럼 읽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솔직히 추리소설적인 재미는 모르겠습니다. 날카로운 추리의 묘미나 기가막힌 반전의 전율보다는, 제게는 어떤 상징성을 읽어내는 재미가 더 있었던 소설입니다. 예를 들면, '죄와 벌'이라는 카페 이름이 주는 상징성, 더럽고 추악한 관능적 미스터리가 던져주는 불편한 진실, 비극적인 개인의 인생사(가정사) 속에 드러나는 역사의 진실 같은 것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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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랑이 이빨 - 최신 원전 완역본 아르센 뤼팽 전집 10
모리스 르블랑 지음, 바른번역 옮김, 장경현.나혁진 감수 / 코너스톤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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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도 신사 아르센 뤼팽, 그는 왜 영웅 페레나로 거듭나야 했는가?



<호랑이 이빨>은 "뤼팽의 기억 속에도 오랫동안 각인될, 뤼팽이 치렀던 아주 치열한 전투 중 하나"(106)입니다. 그런데 재밌는 것은 우리의 주인공이 신출귀몰, 난공불락의 뤼팽이 아니라, 베일에 싸인 신비로운 인물, "돈 루이스 페레나"로 등장한다는 것입니다. 뤼팽은 전쟁이 터지기 2년 전, "불타버린 자그마한 오두막 잿더미 아래에서 케살바흐 부인의 시체와 함께 그의 시체가 발견됨으로써"(813, 아르센 뤼팽 4권) 이미 대중들에게는 "죽은 사람"이었습니다. 물론, "초인적 활력과 놀라운 담력, 기막힌 상상력과 넘치는 모험심, 육체적 민첩함과 냉철한 정신력"을 자랑하는 페레나를 "대중은 자연히 아르센 뤼팽과 겹쳐 생각할 수밖에 없"었지만, "페레나는 한층 더 이상적이고 도덕적이며 무공을 세워 고귀해진, 귀팽보다 더욱 위대한 또 하나의 뤼팽"(147)이었습니다! 


뤼팽이 등장하지 않는 뤼팽 시리즈 7권 <포탄 파편>에서도 "괴도" 뤼팽이 잠취를 감춘 것은 "전쟁"이라는 특수한 시대 상황이 그 원인이지 않을까 짐작한 바 있습니다. 전쟁이라는 소용돌이는 세상을 어지럽히는 뤼팽이 아니라, 질서를 바로잡는 페레나라는 새로운 영웅을 더 필요로 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하여 <호랑이 이빨>에서도 추격 당하고 쫓기는 신세인 뤼팽이 아니라, 영웅적이고 도덕적인 페레나가 공권력의 편에 서서 범인을 추적하고 사건을 해결하는 명탐정으로서의 활략을 유감없이 발휘합니다. 


전작 <서른 개의 관>이 미신에 맞서는 과학적 사고의 승리였다면, <호랑이 이빨>은 치밀한 과학 범죄와의 한판 대결입니다. 한 달 전에 벌어졌던 살인 사건을 파헤치던 "베로 형사"가 의문의 죽음을 당하면서 사건이 시작됩니다. 베로 형사는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오늘 밤 두 명의 살인 사건이 발생한 것을 예고하며 이빨 자국이 찍혀 있는 초콜릿 조각을 단서로 남긴 채 숨을 거둡니다. 같은 날, 경찰청장 집무실에서는 코스모 모닝톤의 유언장이 공개되는데, 유산 상속 절차와 유산 상속의 조건이 발표되며, 만일 상속자가 단 한 명도 나타나지 않을 시에는 2억 프랑이라는 어마어마한 재산이 모닝톤의 친구인 페레나(뤼팽)에게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페레나가 유산 상속 집행인으로 지목된 가운데, 그날 밤을 기점으로 유언장에 따라 재산에 대한 권리를 소유한 사람의 순서대로 죽임을 당하는 연쇄 살인 사건이 벌이집니다.



"대체 누가 이토록 지독한 증오를 품을 수 있단 말인가?"(390)


페레나가 방문을 지키고 있던 밀실 안에서 벌어진 수수께끼 같은 살인 사건, 범인으로 의심 받는 페레나(뤼팽), 범죄 현장에 버려진 사과에 남아 있는 이빨 자국, 유산 상속자들을 둘러싼 음모! 사건의 실체에 조금씩 다가가는 페레나(뤼팽)는 이 사건이 악랄하기 그지 없는 증오로 빚어진 작품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사악한 천재성을 발휘해 치밀하고 정교하게 짜인 그물로 희생자를 옭아맨 수수께끼 같은 인물은 누구인가? 



"이 모든 재앙 한가운데에서 수수께끼 같은 여인이 맡은 역할을 과연 어떻게 정의하고 설명해야 할까?"(231)


아무래도 아르센 뤼팽 시리즈를 영화로 제작하려면 깜짝 놀랄만한 미모를 소유한 여배우가 많이 필요할 듯합니다. 지금까지 작품마다 미모의 여인들과 자주 사랑에 빠져왔던 뤼팽이지만 <호랑이 이빨>에서는 그 사랑이 더욱 심각합니다. 증오심을 품은 채 자신을 노리고 있을 게 분명한 여자인데도, 그녀를 향한 마음을 멈출 수 없는 뤼팽. 그는 과연 플로랑스의 비밀을 파헤치고 그녀와의 사랑을 완성해낼 수 있을 것인가? 자기를 죽이려는 여인을 사랑하게 된 아르센 뤼팽의 고독한 절규가 이 작품을 읽는 묘미이기도 합니다. "너는 누구냐? 정체가 무어냐? 가는 곳마다 시체를 널브러뜨리는 것이 정녕 네가 원하는 일이냐? 네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는 내 목숨까지 필요하더냐? 대체 너란 인간은 어디에서 왔고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이냐?"(232).



비범하고 위대하며 악명 높고 수상하고 신비롭고 전능하며 신출귀몰한 뤼팽, 그는 마치 모든 걸 본 사람처럼 능수능란하게 여러 사건을 꿰며 진실에 다가갑니다. 그의 초인적인 통찰력과 천부적인 재능은 "가장 위대한 탐정들의 가장 뛰어난 추론을 뛰어넘는"(333) 것이었는데, 작가는 전설과 현실을 통들이 이 세상의 가장 경이로운 영웅들과 견주어봐도 전혀 손색이 없는 인물이라 자평을 합니다!


아직 아르센 뤼팽 시리즈가 더 남아 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호랑이 이빨>은 마치 아르센 뤼팽의 고별 작품처럼 느껴집니다. "사랑하는 여인과 오래 오래 행복하게 살았답니다" 같은 동화 같은 결말로 막을 내리기 때문입니다. 그는 또 어떤 모습으로 우리 앞에 다시 서게 될지, 다음 작품이 벌써 기대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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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 개의 관 - 최신 원전 완역본 아르센 뤼팽 전집 9
모리스 르블랑 지음, 바른번역 옮김, 장경현.나혁진 감수 / 코너스톤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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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르스키, 왕의 아들인 너는 친구의 손에 죽을 것이며 네 아내는 십자가에 매달려 죽으리니"(15-16).



명탐정의 대명사 <셜록 홈즈>에 대중들이 그토록 열광한 것은 그가 과학수사의 포문을 열였기 때문이랍니다. 당시만 해도 아직 미신과 주술이 지배적인 분위기였는데, 방대한 양의 백과사전적 지식과 비상한 추리력을 자랑하는 셜록 홈즈는 본격적으로 과학시대의 태동을 알린 인물이기도 합니다. 그는 추리과학의 진수를 보여주며, 범죄 수사를 과학의 경지에 올려놓은 전설이 되었습니다. 그보다 늦은 시기에 활동한 <아르센 뤼팽>은 시대적인 분위기가 많이 달라졌지만, <셜록 홈즈>와 오버랩되는 면이 많습니다. 이미 과학시대에 접어 들었지만 아직 남아 있는 미신의 잔재를 이 <서른 개의 관>이라는 작품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서른 개의 관>은 비극적인 가정사에서 시작됩니다. 1902년 6월 어느 날, 친구들 사이에서 미녀로 통하던 베로니크가 납치 당하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베로니크는 아버지 데르주몽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왕족이라고 주장하는 납치범 보르스키 백작과 결혼을 감행합니다. 마지못해 결혼을 승락하기는 했지만 가장 잔인한 방식으로 복수하겠다고 먕세한 데르주몽은 자기 딸과 보르스키 사이에서 태어난 손자를 납치하는데, 곧 둘은 요트 사고로 죽었다고 알려집니다. 두 사람이 익사했다는 증언을 전해들은 베로니크는 그 길로 수녀원에 들어가버리고 맙니다(9-10).


그리고 14년 후, 베로니크는 14년 동안 한 번도 사용한 적이 없는 자신의 서명을 우연히 발견하고, 그 서명을 추척하다 "서른 개의 관"이란 별명을 가진 "사레크 섬"까지 들어오게 됩니다. 베로니크는 아버지와 아들이 살아있다는 소식을 듣고 벅찬 가슴으로 사레크 섬으로 향하는데, 사레크 섬은 온통 수세기 전의 예언에 의해 역사와 삶을 지배당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에게 전해내려오는 드루이드교의 기묘한 예언은 "서른 개의 관"과 "십자가에 매달린 네 명의 여자", 그리고 기적의 돌이라 불리는 "신의 돌"과 관련된 예언이었습니다. 예언된 대재앙이 일어나는 시점은 1917년이었고, 베로니크가 사레크 섬을 찾은 해가 바로 1917년이었습니다. 


베로니크가 섬에 도착하자마자 느닷없이 시작된 광기 어린 살육, 대재앙의 시작을 알리는 데르주몽의 죽음, 극도의 공포에 제정신을 잃고 끔찍한 악몽에 사로잡힌 채 날뛰는 사레크 섬 사람들! "베로니크를 괴롭히는 보이지 않는 존재들은 누구인가? 대체 누가 "서른 개의 관"이라는 예언대로 사레크의 관 서른 개를 채우려고 기를 쓴단 말인가? 누가 이 가련한 섬 주민을 깡그리 죽이고 있단 말인가? 여자들을 십자가에 매다는 그들은 대체 누구란 말인가? 그 뒤에 자리 잡은 극악무도한 목적은 무엇인가?"(122) 


미개한 시대의 광기와 무질서한 혼돈, 기괴한 발작 현상, 야만적인 범죄 행위 한복판에서 아들 프랑수아를 되찾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베로니크, 그녀는 대재앙이 시작된 사레크 섬에서 무사히 아들을 구해낼 수 있을 것인가? 




"모든 게 밝혀질 거야... 이런 잔혹한 수수께끼 뒤에는 사실 아주 단순한 원인이 있을 테지. 겉보기에는 초자연적으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나랑 똑같은 인간이 계획적으로 저지른 범죄일 뿐이라고. 모든 일은 분명 전쟁이 일어났기에 가능했던 거야. 전쟁은 이런 일이 벌어질 만한 독특한 환경을 만드니까 말이야. 그래봤자 결국 일상의 법칙을 벗어난 것도, 신기할 것도 하나 없어"(122).


황당무계한 전설적인 요소로 가득하지만, 괴도 신사 뤼팽의 눈부신 활약으로 엄연한 현실에 바탕을 둔 사건의 전말이 시원하게 밝혀집니다. <서른 개의 관>은 "전쟁으로 인한 광기와 방황의 시대"를 상징하는 괴물 같은 악인과 순수한 영혼, 초자연적인 기적과 자연과학의 한판 대결이기도 합니다. <서른 개의 관>에서도 뤼팽은 여전히 이 세상에 없는 인물이지만(전작에서 자살한 것으로 알려진 뒤), 순수의 절정체 꼬마 영웅 프랑수아는 "위험이 닥쳐 필요한 순간이 오면 아르센 뤼팽이 기적처럼 자기를 구하러 오리라 확신"(174)을 가집니다. 손을 씻기라도 한 듯, 언제부터인가 도둑질을 잠시 접어둔 우리의 뤼팽은 "어디선가 누군가에 무슨 일이 생기면 틀림 없이 나타나는 홍반장"로 거듭나는 분위기입니다. 

전설과 예언의 신비, 증오와 광기의 폭발, 그리고 과학에 대한 예찬으로 아르센 뤼팽 시리즈 중 가장 이색적인 분위기를 풍기는 <서른 개의 관>에는 또하나의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독특한 존재가 등장합니다. 바로 "만사사형통"이라는 이름을 가진 귀여운 강아지의 활약이 그것입니다. 결정적인 순간마다 앞길을 인도하듯 우리 앞에 나타나는 "만사형통"의 활약, 기대해도 좋숩니다! 만나보시면 "만사형통"의 매력에 푹 빠지게 될 것이라고 예언하는 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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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 삼각형 - 최신 원전 완역본 아르센 뤼팽 전집 8
모리스 르블랑 지음, 바른번역 옮김, 장경현.나혁진 감수 / 코너스톤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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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로맨틱해진 아르센 뤼팽 시리즈!



"오른손과 왼쪽 다리... 그리고 왼손과 오른쪽 다리... 사용하는 법만 잘 안다면 남아 있는 게 무엇이든 뭐가 중요하겠습니까? 무엇 떄문에 절망해야 합니까? 사회에서 각자 자리를 차지하고 후손을 남기는 가운데 이전과 지금의 우리가 달라진 게 무엇입니까? 아니, 어쩌면 더 나아졌을 수도 있지요. 우리 후손이 조국을 위해 바칠 팔과 다리가 없겠습니까? 부족한 게 있을까요? 오히려 우리에게서 불굴의 용기와 활력을 이어받을 겁니다"(33).


제1차 세계대전의 한복판에 있었던 작가 모리스 르블랑은 <황금 삼각형>이라는 작품에 왼쪽 다리 하나만 있거나 오른쪽 팔 하나만 있는 상이용사들을 등장시킴으로 전쟁의 상처를 입은 젊은이를 위로하는 듯합니다. 그래서인지 <황금 삼각형>은 프랑스에 대한 충성심과 애국심이 한층 더 강력해진 모습입니다. 전편 <포탄 파편>에 이어 <황금 삼각형>은 더 달달해진 로맨스를 그리고 있지만 사랑은 다른 주인공들에게 맡겨두고, 우리의 진짜 주인공 아르센 뤼팽은 조국 프랑스를 위해 대 활약을 펼치는 숨은 영웅으로 그려집니다. 물론, 이 작품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의 사랑을 열심히 응원하며 말입니다.



"우리는 이미 과거에 알 수 없는 무언가로 연결되어 있었고, 미래에도 다시 만나 헤어질 수 없는 운명입니다"(40).


신나는 모험처럼 뛰어든 전쟁에서 한쪽 다리를 잃은 파트리스는 중상을 입고 후송된 야전 병원에서 "코랄리 엄마"라 불리는 아리따운 여인의 극진한 간호를 받으며 그녀에게 사랑을 느낍니다. 그러덴 어느 날, 레스토랑에서 우연히 엿듣게 된 대화를 통해 누군가 "코랄리 엄마'를 납치할 계획이라는 걸 알게 됩니다. 파트리스 벨발은 상이용사들의 도움으로 코랄리 엄마를 무사히 구출해내지만, 인질로 붙잡아 두었던 남자가 동료들에 의해 살해되고 맙니다. 사랑하는 "코랄리 엄마"에게 또다른 위험이 닥치고 있음을 감지한 파트리스는 자신도 모르게 열정적으로 사랑을 고백하며 그녀를 도우려 하지만, 코랄리 엄마는 무언가를 두려워하는 듯한 태도를 보이며 누구도 자신이 인생에 들어오길 원치 않습니다. 


사실 파트리스는 코랄리 엄마를 사랑하지만 그녀가 부상자들에게 "엄마"로 불린다는 것 이외에는 그녀가 결혼을 하긴 했는지, 했다가 사별을 했는지, 사는 곳이 어디인지 하는 것들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상태입니다(28). 코랄리 엄마는 파트리스의 보호를 거절하지만, 우연히 서로가 알의 크기도, 색깔도 똑같은 깨진 자수정을 반쪽씩 몸에 지니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파트리스는 코랄리 엄마와의 인연이 운명임을 직감합니다. "우리의 인생은 서로 만나게 되어 있어요. 당신의 의지로도 방해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 거절해도 소용없어요. 당신에게 무언가를 요구하는 게 아닙니다. 그저 운명에 맡긴 채 기다리고 있지요. 우리를 하나로 묶어줄 운명 말입니다"(37).


알 수 없는 위험에 처한 코랄리 엄마의 인생에 뛰어들게 된 파트리스는 그녀가 '에사레스'라는 은행가의 아내이며, 코랄리는 남편을 증오한다는 것, 그리고 에사레스가 관련된 뭔가 끔찍한 음모 때문에 코랄리도 위험에 빠지게 되었다는 걸 알게 됩니다. 파트리스는 그녀를 남편과 위험으로부터 구해낼 결심을 하지만, 다음 날 이상한 전화가 걸려오고, 에라세스는 변사체로 발견되고, 에사레스가 그동안 7억 프랑의 황금을 밀반출했으며, 아직 그가 반출하지 않은 3억 프랑의 황금이 어딘가에 숨겨져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들에게 주어진 단서는 '황금 삼각형'이라고 적힌 쪽지 한 장과 죽은 에사레스 손에 쥐어져 있던 자수정, 그리고 누군가 파트리스와 코랄리를 어릴 때부터 배필로 정해놓고 둘을 이어주기 위해 노력하는 어떤 미지의 인물이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1800개의 황금 자루는 어디에?


두 사람의 운명적인 사랑과 그들을 방해하는 미지의 인물, 그리고 '황금 삼각형'이라는 단서 하나로 숨겨진 황금 자루를 추척하는 두 개의 서사가 톱니바퀴처럼 맞물리며,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는 가운데 흥미진진한 한 편의 추격전을 완성합니다. 전편과 달리 문제 해결의 중심에 선 아르센 뤼팽의 활약이 돋보이는데, 언제나 그렇듯 뤼팽의 자뻑 기질이 숭고한 애국심으로 승화되며 그는 한층 더 국민 영웅다운 면모를 갖춥니다. "나 나름의 방식으로 프랑스를 위해 헌신한다면, 그 방식이 그리 나쁘지만은 않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또한 전쟁 기간에 내가 이룬 업적에 대해서도 조국 프랑스는 정말 고마워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을 겁니다"(403). 이 작품이 전쟁 중에 나왔는지, 전쟁 후에 나왔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세계대전이라는 끔찍한 비극의 한복판에 있었던 사람들이 이런 작품을 쓰고, 또 읽는 여유를 잃지 않다는 것이 참 대단하게 느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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