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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맞이언덕의 안개
김성종 지음 / 새움 / 2015년 3월
평점 :
안개는 내 목을 조여들면서 이렇게 속삭이고 있었다.
'난 네가 무슨 짓을 한지 다 알고 있어.'
(349)
<달맞이언덕의 안개>는 한국 추리문학의 대부라 일컬어지는 김성종 작가의 연작 소설입니다. 드라마 <여명의 눈동자>의 원작자라는 것도 내겐 이 책을 읽어야 할 충분한 이유가 되어 주었습니다. 일본 추리소설의 홍수 속에서 우리나라에는 왜 이렇다 할 추리소설이 없을까 늘 아쉬웠거든요. <일곱 개의 고양이 눈> 이후로, 우리 작가가 쓴 추리소설을 읽어본 것은 이 작품이 처음입니다. 몇 년만인지 모르겠습니다.
<달맞이언덕의 안개>는 부산 해운대에 있는 그 달맞이언덕입니다. 달맞이언덕의 풍경이 묘사될 때마다 눈앞에 영상이 그려지는 것이, 한국 소설을 읽는 재미가 이런 것이지 생각하며 혼자 웃기도 했습니다. 다음에 다시 부산에 가면 달맞이언덕에 정말 '죄와 벌'이라는 카페가 있는지 찾아봐야겠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달맞이언덕의 안개>는 평생 동안 추리소설만 써온 작가 '노준기'가 주인공입니다. 김성종 작가의 화신처럼 느껴지는 '노준기'는 일흔을 넘은 원로작가로, 지역 형사에게 '홈스 선생'이라 불릴 정도로 추리작가로서 명성을 누리는 꽤 유명인사입니다. 달맞이언덕에 있는 '죄와 벌'이라는 카페는 그의 아지트입니다. ''죄와 벌'에 드나들며 커피와 시칠리아산 와인 '도망간 여자'를 마시는 것이 노 작가의 일상이며 작은 행복입니다. 카페 '죄와 벌' 간판에는 "라스콜리코프가 노파의 머리통을 내려치기 위해 도끼를 높이 쳐들고 있는 모습이 생생하게 그려져 있습니다. 커피숍 간판치곤 너무 잔인하고 파격적인 그림이지만 '죄와 벌'이라는 카페, 그리고 언제나 그 '죄와 벌'을 뒤덮고 있는 달맞이언덕의 안개, 이 두 가지가 이 작품을 지배하는 분위기입니다.
<달맞이언덕의 안개>는 노 작가와 '죄와 벌'이라는 카페, 그리고 달맞이언덕의 안개를 중심축으로 총 25편의 단편을 이야기하는데, 안개가 자욱한 달맞이언덕에서 벌어지는 뺑소니 사건, 살인사건, 노 작가의 비극적인 어린시절, 노 작가의 비극적인 가정사, 또 유럽과 일본을 무대로한 로맨스, 그리고 원전폭발 사고까지 서로 연결될 것 같지 않으면서도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 다양한 스토리가 이 책 한 권에 잘 버무려져 있습니다. 작가는 '노 작가'의 인생사를 통해 보일 듯 말 듯 자욱에 안개에 가려진 듯한 한국 역사와 사회의 곪아터진 단면을 날카롭게 해부하며, 독자들에게 서글픈 우리의 자화상을 불쑥 들이댑니다.
"모두가 잘 살고 있다는 착각. 그것을 자각하지 못하는 어리석음. 세상이 미쳐서 돌아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은 과연 몇 명이나 될까"(82)
<달맞이언덕의 안개>는 대한민국이 세계에서 가장 살기 어렵고 희망도 없는 나라로 추락한 채 끝이 납니다. "1미터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짙은 그 안개 속에 얼마나 많은 눈물과 애환이, 버려진 삶이 동물적 신음과 더러운 탐욕이 썩고 있는지"(413) 모른 채로 살아온 결과일지도 모릅니다. 이 땅에서 나고 자란 노 작가는 그래서 우리에게 "삶의 고통과 허무, 고독한 영혼, 눈물겨운 사랑과 피를 말리는 이별의 아픔, 시대의 고통과 민초들이 몸부림, 우리의 몸속에 흐르는 살인의 철학"을 우리에게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달맞이언덕의 안개>는 기본적으로 재미를 미덕으로 삼은 추리소설이지만, 시대적 고통, 역사의식을 더 자극하는 사회 소설처럼 읽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솔직히 추리소설적인 재미는 모르겠습니다. 날카로운 추리의 묘미나 기가막힌 반전의 전율보다는, 제게는 어떤 상징성을 읽어내는 재미가 더 있었던 소설입니다. 예를 들면, '죄와 벌'이라는 카페 이름이 주는 상징성, 더럽고 추악한 관능적 미스터리가 던져주는 불편한 진실, 비극적인 개인의 인생사(가정사) 속에 드러나는 역사의 진실 같은 것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