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고대 문명의 창조자들 - 10,000년 전 하이테크의 비밀
에리히 폰 데니켄 지음, 김소희 옮김 / 청년정신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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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천 년 전에 외계의 누군가가 이곳 지구에 왔었다!' (외계문명설)



그동안 사이가 좋지 않았던(?) 교회와 진화론자들이 오랫만에(?) 아니 처음으로 한 목소리를 낼 것 같습니다. 이 책은 교화와 진화론자 모두를 경악케 하는 책입니다. 어쩌면 진화론자들이 더 격분하여 "황당무계한 이야기"라고 일축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외계문명설의 고고학적 증거를 밝히고 있는 <초고대 문명의 창조자들>의 주장을 저자의 표현을 그대로 살려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홍수 이전에 외계 우주인들이 우리 행성을 방문했다. 석기시대의 우리 조상들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외계인들을 신이라고 믿었다. 당시 신이라 불린 존재들은 우리의 신화와 전설, 심지어 주요 종교에도 들어와 자리를 차지했다. 외계에서 온 방문객들은 인류에 대해 연구했다. 그들은 여기저기에 베이스 캠프가 필요했을 것이다. 호기심을 가진 인간이나 야생동물을 피해 기술 장비를 보관하기 위해서다. 그래서 그들은 하룻밤 사이에 푸마푼쿠를 지었다. 토착민들의 눈에는 영원의 도시 혹은 신들이 거주하는 곳이었다. 지구를 방문한 외계인들은 민족학 학자처럼 인간들을 연구했다. 그리고 소수는 토착주민들 가운데 일부 뛰어난 사람들에게 천문학을 비롯해 여러 실용적인 기술을 가르쳤을 것이다. 신전, 그러니까 여기 푸마푼쿠의 본질은 외계 기술 장비의 창고(베이스캠프)였다. 또한 토착민들 가운데 보다 앞서가고 호기심이 많은 이들을 가르치던 학교로 쓰였을 것이다. 외계인들은 떠나면서 먼 미래에 다시 돌아오겠다고 약속했다. 이러한 생각은 인간들이 믿는 종교에서 빠지지 않고 나오는 요소다. 외계인들이 떠난 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자연재해가 지구를 덮쳤다"(95-99). 그리고 이 책은 "신들의 귀환에 대처해야 한다"는 말로 끝이 납니다. "기성 주류학계나 기관이 더 이상 우리를 쥐고 흔들지 못하게 해야 한다. 그래야만 인류는 이른바 신들의 귀환에 더 잘 대처할 수 있다"(243).

저자는 이러한 주장을 뒷받침 하기 위해서 "선사학, 고고학, 문헌학, 언어학, 인류학, 진화론, 유전과학, 철학, 천문학, 천체물리학, 우주생물학, 우주여행까지도, 그리고 신학"까지 동원합니다. 저자는 외계인들이 초고대에 지구를 방문했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반박할 수 없는 증거들"를 내세워 주류학계에 도전장을 내밉니다. 저자가 자신 있게 제시하는 대표적 증거는 볼리비아 고지대의 '푸마푼쿠' 유적지입니다. 푸마푼쿠는 하룻밤 사이에 지어졌다는 전설(!)을 가진 석기시대의 거석문화입니다. 푸마푼쿠가 외계문명설의 결정적인 증거가 되는 이유는, 석기시대 사람들이 돌도끼를 가지고는 도저히 만들어 낼 수 없는 경이로운 기술들 때문입니다. 매끄럽게 작업된 석재 플랫폼들은 돌도끼든 끌이든 간에 석기시대 도구로 제작하는 건 불가능할 정도로 놀라운 기술력을 보여주는데, 가장 오래 전 시기에 만들어진 푸마푼쿠가 이처럼 기술적으로 가장 완벽하다는 것은 기술상의 진화 법칙과 정반대의 진실을 보여줍니다. 


뿐만 아니라, 천상과 지상을 연결하는 수많은 사인들, 고도의 천체물리학적 지식을 요하는 완벽한 달력, 현대과학이 이제 막 문을 연 이종교배의 흔적, 또한 최소한 고대 기록이나 증거물들을 보면 '거인들'이 지구에 존재했었다는 사실 등 석기시대인보다는 훨씬 진보한 존재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 명백한 유물들, 이집트 문명 이전에 분명히 존재했으나 어떤 이유에서인지(대재앙, 또는 홍수에 이해) 사라져버린 고차원 문명의 증거들을 제시합니다. 이 모든 유적(유물)들은 "우리가 당연시 하는 진화론을 완전히 뒤집는 것"(86)입니다. 때문에 저자와 같이 외계문명설을 주장하는 학자들은 주류 학자들로부터 학문적 멸시를 받고 있다고 폭로합니다. "당시 고고학계의 표준적인 관행은, 진화라는 멋진 이미지를 위협하는 것이라면 그 어떤 것이라도 억누르도 조작하고 속이고 날조했다. 고고학계는 진화론적 관점에 들어맞지 않으면 지질학적 사실들조차 깨끗이 무시했다"(82).


(저자의 주장에 따르면) 명백한 것은 푸마푼쿠에 사용된 기술은 석기시대 인류와는 전혀 상관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당연히 던져야 할 질문은 이것입니다. "어떻게 이 모든 게 가능했을까?" 저자는 이것이 해석의 문제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우리의 사고력은 정확한 과학이 내놓은 결과들에게서만 일방적으로 영향을 받는 게 아니다. 즉 인문학을 비롯한 해석이 필요한 학문들은 우리의 사고방식에 영향을 받는다. 종교가 이러한 범주에 들어간다. 철학, 민족한, 고고학도 마찬가지도. 무슨 소리인가? 고고학은 단지 증명된 발견들만 인용하는 종합학문이 아닌가? 물론 그렇다. 하지만 발견들을 해석해야 하지 않겠는가. 즉 여전히 해석의 대상이다. 그리고 해석은 이성이나 시대정신에 따라 달라진다. 그리고 물론 역사적 기록에도 의지한다"(130). 


저자는 이러한 유적(유물)의 증거 앞에 인류가 쌓아온 지식과 이론체계가 무너지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고, "무엇이든 일어날 수 있다는 접근법"이 필요하다고 역설합니다. 존경받는 과학철학자 폴 파이어아벤트는 "1975년, '무엇이든 일어날 수 있다'는 접근법을 발표했다. 다시 말해, 뭐든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에 대한 과학계의 반응은 두려움이었다. 뭐든 일어날 수 있다거나 뭐든 가능하다는 것은, 부단히 진실을 정립해온 과학 과정에 대한 오랜 믿음과 모순되는 얘기이기 때문이다"(137).



<초고대 문명의 창조자들>은 황당하기도 하지만 대단히 흥미로운 책입니다. 외계인이 지구를 다녀갔다는 저자의 해석에 동조하지는 않더라고도, 푸마푼쿠처럼 현존하는 과학적 지식이나 이론으로는 (아직) 풀 수 없는 초고대 유적(유물)들에 열린 마음으로 다가가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우리가 지금 알고 있는 게 진실이 아닐 수 있다는 두려움을 내던지고 말입니다. 신학자든, 고고학자든, 진화론자든, 천체물리학자든, 우주생물학자든, 어떤 분야에 있든 저자와는 또다른 입장에서 "어떻게 이 모든 게 가능했을까?"를 생각해보는 것도 무척 흥미로운 도전이 될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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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밍웨이의 작가 수업 - 키웨스트와 아바나에서의 일 년
아널드 새뮤얼슨 지음, 백정국 옮김 / 문학동네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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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로 살아 있는 작가들과 경쟁하지 말게. 그들이 훌륭한 작가인지 아닌지 알 길이 없으니까. 훌륭하다고 생각하는 죽은 작가들과 겨루게. 그들을 따돌릴 수 있다면 잘하고 있다고 여겨도 무방해. 좋은 작품이란 작품은 몽땅 읽어둬야 해. 그래야 이제껏 어떤 것들이 쓰였는지 알 수 있을 테니. 자네의 얘깃거리가 누가 이미 다룬 것이라면 그보다 더 잘 쓰지 않는 한 자네의 이야기는 초라할 뿐이야. 어떤 예술에서고 낫게 만들 수 
있다면 뭐든 훔쳐도 괜찮아. 단, 언제나 아래가 아니라 위를 지향해야 해. 그리고 남을 흉내내지 말게. 문체란 말이야, 작가가 어떤 사실을 진술할 때 드러나는 그 사람만의 고유한 어색함이라네. 자기만의 문체가 있다면 다행이지만, 만일 남들처럼 쓰려고 한다면 자기만의 어색함뿐만 아니라 다른 작가의 어색함도 아울러 갖게 돼. 즐겨 있는 작가라도 있나?"(33)



<헤밍웨이의 작가 수업>은 작가지망생 아널드 새뮤얼슨이 헤밍웨이와 보낸 1년의 기록입니다. 헤밍웨이의 단편소설 <횡단여행>을 읽고 그의 작품에 빠져든 아널드 새뮤얼슨은 길바닥에서 차편을 구걸해가며 미니애폴리스에서 3200여 킬로미터를 여행하며 무작정 키웨스트에 있는 헤밍웨이를 찾아갑니다. 단지 자신의 소설에 반해 그와 이야기를 좀 나눠볼 수 있을까 하고 무작정 그를 찾아나선, 부랑자나 다름 없는 모습으로 그의 앞에 선 한 청년에게 헤밍웨이는 단번에 호감(!)을 느낍니다. 그에게 일자리를 제공해가며 그가 헤밍웨이 곁에 머물 수 있도록 도우며 자연스럽게 우정을 쌓아갑니다. 


삶으로 가르쳐주는 사람을 '스승'이라고 한다고 합니다. 33세의 나이에 십자가에 달려 죽은 예수는 12명의 제자 외에는 아무것도 남겨 놓지 않았습니다. 그 12명의 제자들이 세상을 뒤집어 놓았고 그 영향력은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습니다. 예수는 제자들과 3년 반 동안 동고동락했으며, 삶으로 그들을 가르쳤습니다. <헤밍웨이의 작가 수업>을 읽으며 예수와 그의 제자들이 떠올랐던 건, 헤밍웨이가 삶으로 아늘드 새뮤얼슨을 가르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이 책은 작정하고 덤벼든 본격적인 '작가 수업'이라기보다 대문호가 삶으로 가르치는 작가 수업입니다. 대문호의 삶 속으로 풍덩 뛰어든 한 작가지망생의 눈을 통해 우리는 헤밍웨이의 성격, 취미, 글 쓰는 법 등에 관한 그의 생각이나 습관 등을 날 것으로 만날 수 있습니다. 


사실 이 책에서 기대한 것은 대문호 헤밍웨이에게 직접 듣는 작가 수업이었는데, 그보다는 한 편의 아름다운 소설(또는 에세이)로 읽힌다는 것이 이 책의 장점이자 단점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다고 이 책에 작가 수업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닙니다. 멈춰야 하는 시점을 알고 한 번에 너무 많이 쓰지 말라는 것, 잘라버릴 만한 건 모조리 잘라버리라는 것, 소질만 있으면 언제든지 드러나기 마련이니 꾸준히 쓰라는 것, 좋은 작품은 몽땅 읽어두라는 것 등 실제적인 조언도 많고, <무기여 잘 있거라>의 시작 부분은 적어도 쉰 번은 다시 썼으며, 언제 쓴 것보다 나아야 하니 잘 쓸수록 힘들어진다는 것, 단편 열 개를 써봤자 그중 하나 정도만 쓸 만한 뿐 나머지 아홉은 버린다는 것, 글을 쓰려고 앉을 때마다 지독한 무력감에 빠져 든다는 것 등 작가로서의 헤밍웨이의 고충도 엿볼 수 있으며, 살아오면서 누구의 입맛에 맞게 글을 써 본 적이 없으며, 소박한 낱말들이 언제나 최선이라는 헤밍웨이의 소신도 읽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인상적이었던 것은 헤밍웨이의 거침 없는 성격과 바다를 사랑하는 그의 열정이었습니다. 이 책은 헤밍웨이라는 대문호를 사랑하는 독자에게, 그를 보다 더 가까이에서 알고 싶은 독자에게 더 환영받는 책일 듯합니다. 헤밍웨이에게 특별한 관심이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영문학 점수는 늘 형편 없었다는 아널드 새뮤얼슨에게 "좋은 징조군. 대학에서 학점을 잘 따는 친구들은 대개 흉내쟁이들이지. 자기만의 것을 쓰는 법을 터득하지 못해. 그럴 가망도 없고"(28)라고 거침 없이 말하는 그에게 푹 빠져 이 책을 읽어내려갔습니다. "문명의 세계를 속임수로 보고, 인간의 비극적인 모습을 간결한 문체로 묘사한 20세기 대표작가"이자, 우울증과 알코올중독증에 시달리다 어느 날 아침 엽총의 총구를 입에 문 채 방아쇠를 당겨 자살로 생을 마감한 헤밍웨이는 내 머릿속에 다소 비극적이고 어두운 이미지로 각인된 작가였습니다. 그런데 그가 생각보다(!) 다정한 사람이었으며 얼마나 뜨거운 심장을 가진 사람이었는지 다시 보게 되었습니다. 작가를 보는 눈이 달라지면 그의 작품이 주는 의미도 달라지곤 하는데, 그의 작품을 다시 읽어보고 싶게 만드는 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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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정일의 공부 - 무엇에도 휘둘리지 않는 삶을 위한 가장 평범하지만 가장 적극적인 투쟁
장정일 지음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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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에도 휘둘리지 않는 삶을 위한

가장 평범하지만 가장 적극적인 투쟁!



책을 무척 좋아하는 동료가 있습니다. 그가 정성들여 읽는 책에는 언제나 눈길이 갑니다. 일명 '타임 킬용'(시간 죽이기용) 책은 거들떠도 보지 않고, 아무리 베스트셀러라고 해도 시간이 아깝다는 생각이 들면 바로 덮어버리는 걸 알기 때문입니다. 꼭 읽어야 할 책만 읽기에도 시간이 모자란 인생이라는 게 그의 독서철학입니다. 그처럼 깐깐하게 책을 고르는 사람이 천천히 아껴읽는 책을 보았으니 당연히 눈길이 갈밖에요. 그 책이 바로 <장정일의 공부>였습니다. 2006년에 초판된 책을 왜 다시 읽나 싶었는데 출간 10주년을 맞아 개정판이 나왔답니다. 10년 동안 꾸준히 독자의 사랑을 받아온 이 책의 정체가 궁금했습니다. 제목만으로는 어떤 장르, 어떤 주제의 책인지 감이 잘 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가장 먼저 든 생각은 '공부법을 가르쳐 주는 책인가?'였습니다. 


<장정일의 공부>는 한국 사회가 저자에게 불러일으킨 궁금증을 해소하기 위해 저자 스스로 책을 찾아 읽으며 공부한 결과물입니다. 때로는 한 권의 책에서 시작된 우연한 궁금증이 관련 도서를 찾아 읽으며 사유를 확장해가기도 하고, 때로는 대한민국의 현안과 관련된 주제를 풀어내고자 책을 파고들며 자신의 입장이나 생각을 정리합니다. 그런데 이런 공부를 시작한 동기? 목적?이 참 재밌습니다. 저자는 "확실하게 편들기 위해" 공부를 한다고 밝힙니다.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마흔 넘어 새삼 공부를 하게 된 이유는 우선 내 무지를 밝히기 위해서다. 극단으로 가기 위해, 확실하게 편들기 위해, 진짜 중용을 찾기 위해!"(서문 中에서). 


"확실하게 편들기"를 저자의 표현을 빌어 다른 말로 바꾸면 "중용의 무지에서 벗어나기"라는 말이기도 합니다. 저자는 국가나 어떤 사회적인 현안에 대해 난 '중립적이야'라고 말하는 것은 "사실 난 아는 게 없어"라는 말과 같다고 풀이합니다. "중용의 본래는 칼날 위에 서는 것이라지만, 많은 사람들에게 그것은 사유와 고민의 산물이 아니라, 그저 아무것도 아는 게 없는 것을 뜻할 뿐이다. 그러니 그 중용에는 아무런 사유도 고민도 없다. 허위의식이고 대중 기만이다. 그런데도 우리 사회에는 무지의 중용을 빙자한 지긋지긋한 '양비론의 천사'들이 너무 많다"(서문 中에서). 그러니까 사유과 고민이 없는 중용의 미덕은 사실 "아무 생각 없음"의 다른 말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저자의 "학력이 중학교 졸업밖에 되지 않는"(여호와의 증인 신도로서, 당시에 치러지던 고등학교의 학내 군사 훈련(교련)을 피하고자 진학을 포기했기 때문, 18)이라고 해서 찾아보니, "최연소 김수영문학상 수상자", "중졸의 대학교수"로 알려진 인물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저자의 지식이나 사유의 힘은 학교교육으로 길러진 것이 아니라, 순전히 <장정일의 공부>와 같은 독서로 쌓여진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듯합니다. 








이 책을 읽어 보면 그는 무서운 독서광이라는 이미지와 함께, 비판적인 책 읽기가 습관이 된 사람, 한마디로 책을 참 "잘 읽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뿐만 아니라, 그가 쓰는 단어 하나, 표현 하나가 절제되어 있으면서도 얼마나 적확한지 과녁의 정중앙을 명중시키는 듯한 매서움이 느껴집니다. 이 책의 부록에는 하나의 주제를 풀어내기 위해 "장정일이 공부한 책 목록"이 수록되어 있스니다. 지금까지의 독서가 부끄러워지면서 책을 읽으려면 이렇게 읽고, 적어도 어떤 사회적 현안에 대해 자신의 입장을 피력하려면 이 정도 공부는 하고 나서 말해야겠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장정일의 공부>는 우리가 핵심을 제대로 짚지 못하고 살았던 대한민국의 사회적 현안들에게 대해 눈뜨게 해주는 책이기도 하지만, 근본적으로 공부(독서)에 대한 목마름을 불러일으키는 책이기도 합니다. 지식이 확장될수록 확장된 지식이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것은 내가 무엇을 알고 있는가가 아니라, 우리가 아직 무엇을 모르는지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장정일의 공부>를 통해 나의 지식이 확장될수록 내 마음에 사무쳐 오는 한가지 진실은 내가 모르는 것이 이처럼 많구나 하는 것이었습니다! 등떠밀려서 했던 입시공부말고, 장정일식 공부를 해보고 싶은 마음이 간절합니다. 무엇에도, 심지어 내가 읽는 책에도 휘둘리지 않는 삶을 위해 말입니다. 


"공부 가운데 최상의 공부는 무지를 참을 수 없는 자발적인 욕구와 앎의 필요를 느껴서 하는 공부다"(서문 中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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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보다 멋진 럭셔리여행 - 우리나라 럭셔리 여행지 올 가이드
유철상 지음 / 상상출판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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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럭셔리 여행을 꿈꾸기엔 가난한 사람입니다. 직장에 매여 있으니 시간이 가난합니다. 여행 한 번 가려면 몇 달 며칠을 눈치보며 시간을 벌어야 합니다. 사람도 가난합니다. 함께 갈 사람이 없이 포기한 여행도 많습니다. 경험도 가난합니다. 행여나 어떤 돌발상황에 맞닥뜨리게 될까 훌쩍 떠날 용기도 없습니다. 그래도 제일 문제는 돈의 가난이지요. 꼭 가보고 싶은 여행지가 있는데 어쩌다 시간도 되고, 함께 갈 사람도 있고, 훌쩍 떠날 용기도 있지만, 여행 경비에 발목이 잡혀 그냥 주저앉아 버린 것이 몇 번인지요. 


래서 일까요? 럭셔리 여행이라고 하면 늘상 해외 여행을 떠올리곤 했습니다. 열심히 모은 돈으로 어렵게 떠나는 여행, 이왕 과감하게 투자를 한다면 유럽이나 세계적인 휴양지를 찾는 게 남는 거 아니겠냐는 나름의 계산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책 제목을 처음 접했을 때 다소 회의적이었습니다. <천국보다 멋진 럭셔리> 국내여행이라고? 책을 펼쳐 보기도 전에 같은 비용이라면 차라리 해외여행지를 찾겠다 싶었습니다. 이런 선입견으로 책을 펼쳐 보다 한 방 먹었습니다. "럭셔리(!)" 여행에 대한 개념이 달랐던 것입니다. 







 


 




럭셔리 여행으로 인생의 쉼표를 찍어라!



<천국보다 멋진 럭셔리 여행>은 무조건 값비싼 숙소에서 귀족 노름을 하는 그런 여행지를 소개하는 책이 아닙니다. 물론,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럭셔리 호텔과 리조트도 소개되어 있습니다. 보기만 해도 정말 (조금 오버를 하지면) "여기가 천국인가?" 싶은 럭셔리한 숙소들에 눈이 휘둥그레집니다. 내 생애 한 번이라도 이런 호사를 누려볼 기회가 올까 싶은 그런 곳들입니다.


그런데 이 책이 가이드 하는 이런 럭셔리한 숙소는 사실 7분의 1정도입니다. 다시 말해, 무조건 비싸고 호화로운 여행지를 소개하는 책은 아니라는 이야기입니다. 책장을 넘기다 보면 왜 이런 여행지도 <천국보다 멋진 럭셔리 여행>에 선정되었을까 의구심이 드는 곳들도 많습니다. 예를 들면, 인천 차이나타운 같은 곳입니다. 익숙함은 경멸을 불러온다고 했던가요. 인천 차이나타운은 사무실과 가까운 거리에 있고, 몇 번 가본 곳이라 제게는 그리 새로울 것이 없는 여행지입니다. 게다가, 이 책에서 당일치기 일정에 식비 1만 원을 여행 경비로 산정해놓았습니다. 그러니 인천 차이나타운을 "천국보다 멋진 럭셔리 여행"으로 꼽았다는 게 이해가 가지 않은 것이지요. 


그러다 문.득 깨달아졌습니다. "럭셔리 여행"은 무조건 많은 돈을 들여야 하는 여행이 아니란 것을 말입니다. 이 책에서 말하는 "력셔리"는 값비싼 호화로움보다는 여행의 '고급함'을 말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여행전문기자로 살아오면서 접한 많은 여행지 중에 그래도 이 정도는 가주어야 고급진 국내여행이라 할 만한 여행지를 추천하는 가이드북이라고 보면 더 정확할 듯합니다. 

 





 






 벚꽃이 물러난 자리에 돋아난 야생차의 신록이 마음을 설레게 하는 하동!



이 책에서 소개받은 여행지 중에 한 번도 꿈꿔본 적이 없으나 가장 먼저 가보고 싶어진 곳이 있으니 바로 "하동"입니다. "계곡과 산비탈에 촘촘하게 이랑을 이룬 차밭의 풍경"이 눈길을 사로잡았기 때문입니다. <천국보다 멋진 럭셔리 여행>은 1박 2일 일정으로 하동 여행을 추천하는데, 교통비(10만원), 식비(7만원), 숙박비(5만원), 여기에 여비(5만원)까지 보태도 큰 부담이 없는 여행일정입니다.





 




 




하동에는 "광양 백운산 북쪽 자락의 단압면 일대에 무성하게 피어나는 매화"가 절정을 이룬다는 3월 하순경에서 4월 초에 다녀와야겠습니다. 하동을 마음에 품고 다가올 "봄날의 화려한 외출"을 꿈꾸어봅니다. <천국보다 멋진 럭셔리 여행>의 콘셉트는 인생의 쉼표 같은 휴식 여행이고, 낭만 여행이고, 웰빙 여행입니다. "여긴 죽기 전에 꼭 가봐야 해" 하는 조바심보다는 "느긋하게 한 번 즐기고 올까" 하는 기분을 불러일으킨다고나 할까요. 많은 국내여행지 중에 시간을 아끼고 경비를 아껴서 꼭 가봐야 할 곳이 어디인가 궁금한 분들에게 이 책을 추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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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횡무진 한국사 세트 - 전2권 - 남경태의 가장 독창적 역사 읽기
남경태 지음 / 휴머니스트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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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는 지배층 단독으로만 이끌어가는 게 아니기 때문에 

역사적인 평가에서는 

부패한 지배층을 응징하지 못하고 한 차례의 혁명조차 시도하지 못한 

민중도 책임을 면할 수 없다(2권, 516). 

"맑은 거울을 보는 것은 모양을 살피기 위해서요, 지나간 일을 돌이켜 보는 것은 지금을 알기 위해서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을 뒤집어 보면, 대한민국은 지금의 본 모습을 제대로 알지 못한 채, 찌끄러진 자화상을 가지고 살고 있다는 말도 됩니다. 우리나라 역사교육과 국정교과서에 문제가 많다는 건 이제 삼척동자도 다 아는 사실인데, 왜 우리 역사 안의 식민사관을 바로잡자는 요구는 계속해서 묵살 당하고 제대로 된 검정 회의조차 이루지지 않는 것일까요? 학계의 기득권, 그리고 뿌리가 통째로 흔들리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일까요?


공교육이 이렇다 보니 우리 역사를 제대로 공부하려는 사람들은 학교 '밖'으로 눈을 돌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학교 '밖'으로 눈 돌리는 독자들에게 역사공부를 시작하는 책으로 "남경태의 가장 독창적 역사 읽기" <종횡무진 한국사>를 추천해드리고 싶습니다. <종횡무진 한국사>는 "인문학자의 역사 읽기"라고 이름붙이고 싶습니다. 사를 거꾸로 읽거나 뒤집어 보려는 시도는 그래도 꽤 있었던 것 같은데, 우리 역사를 이처럼 종횡무진 읽어낸 것은 첫 시도가 아닐까 싶습니다. 이 책은 "역사 교과서의 지루함과 엄숙주의를 거부"하고 "좌충우돌하며 자유분방하게 역사를 서술"하고 있는데, 어쩌면 그가 통사에 익숙한 역사학자가 아니라 역사적 상상력을 지닌 인문학자이기 때문에 가능한 시도가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그런데 저자는 이 책이 "한민족의 역사"가 아니라 "한반도의 역사"에 중점을 두었다고 경계를 분명히 합니다(18). 민족의 역사가 아니라, 땅의 역사라는 말입니다. 저자의 이러한 분명한 선 긋기는 한국의 "민족주의"가 어떻게 형성되어 왔고 어떤 담론을 형성해왔는지를 알면 더욱 의미심장해집니다. 장정일은 고미숙의 <한국의 근대성, 그 기원을 찾아서 : 민족, 섹슈얼리티, 병리학>을 서평하며 민족주의가 어떻게 정치적으로 이용되어 왔는지 폭노합니다. "이 땅의 민족주의가 갖는 특징은 "민족의 핵심적 지표로 인종적 순수함"을 내세우는 것이다. 바로 그 인종적 순수함이라는 근대화 이데올리기 속에 개혁되고 시정되어야 할 정치적, 경제적 차이와 대립은 번번이 무화되고 통합과 화합이라는 두루뭉술한 상투어 속에 실종한다"(장정일의 공부 中에서). 일제하의 민족주의 사학자들이 신화화한 민족 담론은 단군이라는 이름을 유발나게 칭소하기도 하는데, <종횡무진 한국사>는 우리가 시조로 숭상하는 '단군'이 중국에서 한반도로 이주하여 한반도 원주민을 복속시킨 중국인일 것이라고 단언합니다. 


<종횡무진 한국사>는 우리가 알고 있는 일반적인 역사 상식을 뒤흔듭니다. 아마도 불편함과 거부감을 느낄 독자가 많을 것입니다. 바로 어제가 6.25한국전쟁의 65주년이었는데, 우리나라 보수 우익이 국부로 떠받드는 '이승만'의 실체를 제대로 알고 계신가요? 재평가받는 인물 중에 이승만만큼 평가가 엇갈리는 인물도 없을 듯합니다. 그런데 <종횡무진 한국사>가 밝히는 역사의 진실은 충격을 넘어 경악의 수준입니다. 이승만이 정권을 정악한 것이 한반도 전체로 볼 때 얼마나 크나큰 불운이었는지 폭로하는데, 한반도의 통일을 더 집요하게 반대한 인물이 바로 권력욕에 물든 이승만이었다는 사실,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분단을 바랄 수밖에 인물이 우리 정치를 이끌었다는 사실은 분노를 넘어 깊은 좌절감에 빠져 들게 만들었습니다. "한국전쟁은 남북한의 두 집권 세력이 '정권 수호의 차원에서' 전 국민을 볼모로 잡고 피비린내 나는 권력 다툼을 벌인 것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저자는 "남한과 북한은 아무런 전통성도 없는데다가 자질에서도 문제가 많은 자를 지도자로 선택함으로써 결국 파멸을 자초했다"고 평가합니다. 


그러나 이 책이 진짜 말하고자 하는 바는 자질 없는 지도자를 향한 분노는 우리 스스로에 대한 비판으로 이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책을 읽으며 아프게 가슴에 새겨진 한마디는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 역사는 숱한 고통을 겪고 무수한 고비를 넘겼으면서도 혁명의 진통이 없었다. 

혁명의 본질은 과거와의 단절이다. 

혁명은 세계 어디서나 구체제를 무너뜨리는 과정으로 진행된다. 


우리 역사는 내적으로나 외적으로나 단절의 계기가 여러 차례 주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구체제와의 단절을 경험한 적이 없다.

한마디로 혁명이 부재한 역사다. 


렇게 보면 우리 민중처럼 지배층의 잘못에 너그러운 경우도 보기 드물다. 

다른 나라라면 얼마든지 쿠테타나 민중의 반란으로 지배층이 교체되어야 마땅했을 상황에서도 

우리 역사에서는 좀처럼 그런 현상을 찾아볼 수 없으니까(2권, 515).


"민중은 무능한 지배층을 언제나 그대로 놔두었다"는 것입니다. 다시 읽어도 참 기가막힙니다.



고려의 현종과 조선의 선조가 북쪽(거란)과 남쪽(일본)의 외침을 맞아 각기 남쪽(나주)과 북쭉(의주)으로 도망쳤을 때도 왕조는 바뀌지 않았다. 고려의 무신정권과 조선 인조 정권이 백성들을 버리고 강화도로 들어갔을 때도 왕실은 다시 나와 멀쩡히 권력을 이어갔다. 대한제국의 고종이 을사보호조약을 나 몰라라 하고, 순종이 한일합병조약을 물리치지 못했을 때도 우리 민중은 복종하고 나중에는 그 못난 왕들이 죽었을 때 수십만 명의 인파가 모여 애도해주었다. 해방 후에 친일파를 단죄해야 할 때도, 이승만이 한국전쟁 발발 사흘 만에 서울을 사수하겠다는 약속을 팽개치고 한강 인도교를 끊으며 도망쳤을 때도, 박정희 유신독재가 끝난 뒤 신군부의 군부독재가 계속 되었을 때도 민중은 무능한 지배층을 언제나 그대로 놔두었다(2권, 515-516).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합니까? 한마디로 역사에 대한 철저한 비판이 부재했기 때문입니다. 역사의 원리는 반복된다는 걸 알면서도, 역사를 통해 아무런 교훈도 얻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역사를 바로잡는 과정이 없었기 때문에 혁명도 있을 수 없었고 혁명이 부재했기 때문에 지배층의 그런 작태를 우매하게도 계속 용납해 왔다는 것입니다. 저자는 혁명이 부재한 간극을 메우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역사를 비판적으로 보는 관점이 필요하다고 역설합니다. 

<종횡무진 한국사>는 1000페이지에 이르는 방대한 책입니다. 무거워서 들고다니며 읽기도 불편한 책입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지루하기만 했던 역사는 잊어도 좋습니다. 역사가 이렇게 재밌을 수도 있다는 걸 확실히 알게 될 것입니다. 단, 우리가 가진 일반적인 역사 상식을 뒤흔들기 때문에 거부감이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저자는 그런 거부감으로 얼마든지 이 책을 비판하라고 오히려 촉구합니다. 그렇게 우리가 알고 있는 상식을 의심하고, 재검토하고, 비판하는 과정 가운데 우리 역사가 바로 세워지기를 누구보다도 간절히 바라기 때문입니다. 100% 동의할 수 없을지라도, 그렇다면 더욱 비판적인 시각으로 이 책을 한 번 읽어보시기를 권합니다. 역사가 재밌습니다. 그것만은 확실히 보증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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