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이 인간과 함께한 시절 - 명화와 함께하는 달콤쌉싸름한 그리스신화 명강의!
천시후이 지음, 정호운 옮김 / 올댓북스 / 2017년 8월
평점 :
절판


 

"그리스의 달빛은 유난히 아름다울 것이다. 왜냐하면 하늘 속에 온갖 신과 설화가 있고 땅 위의 풀 한 포기, 이슬 한 방울까지도 어떤 요정의 풋풋한 감성을 담고 있으며 또한 달을 관장하는 신은 매우 아름답고 고상한 여신이기 때문이다"(9).

어릴 때부터 '이야기'를 탐했던 아이였습니다. 어떤 이야기들은 가슴에 담겼고, 어떤 이야기들은 기억에 담겼고, 어떤 이야기들은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시간따라 함께 떠내려가버렸지만, 가슴 한 가운데 콕 박힌 보석같은 이야기도 있습니다. 그중 하나가 바로 전쟁의 신 '아레스'에 관한 그리스신화입니다. 만화책이었고, 급하게 읽은 탓인지 제목도 전체 줄거리도 기억나지 않지만,
이상하게 '전쟁의 신, 아레스'라는 남자 주인공 이름은 가슴 속에 깊이 새겨졌습니다. 그가 짊어져야 했던 운명의 무게가 제 가슴에도 낙인을 남기듯 말입니다. 전쟁의 신이라는 자신의 운명을 짊어진 채, 사랑하는 여인을 뒤로 하고 황량한 바람 속으로 사라져가던, 긴 창을 들고 말을 타고 떠나가던 그 쓸쓸한 장면 하나가 정지된 화면처럼, 남자 주인공의 전형처럼 그렇게 기억 속에 남아 있습니다. 그 이야기가 그리스신화를 모티브로 하고 있다는 걸 안 건 한참 후의 일입니다.

<신이 인간과 함께한 시절>은 그리스신화에 등장하는 '전쟁의 신, 아레스'의 이야기를 이렇게 풀어냅니다. "그런데 매우 모순되면서도 흥미로운 점은 이토록 잔인하고 난폭하며 지혜의 큰 적이자 인간에게 더없이 무자비한 아레스가 글쎄 사랑의 신 아프로디테(로마신화의 베누스, 영어 이름 비너스)의 애인이었다는 점이다. 아레스는 자주 사랑의 신 아프로디테의 품에서 평온과 안정을 찾았는데, 둘의 스캔들은 훗날 수많은 막장드라마의 원형이 되었다"(103). (지금 생각해보니, 늘 그랬던 것처럼 이 둘의 비극적 운명이 한 만화작가에게도 영감을 주었었나 봅니다.)

중국의 한 대학교에서 명강의로 손꼽히는 내용을 책으로 담아낸, <신이 인간과 함께한 시절>은 그리스신화의 원형을 있는 그대로 들려주지 않고, 현대적인 시각에서 재해석을 시도했습니다. '전쟁의 신, 아레스'의 운명을 놓고도 이런 질문을 던집니다. "'여자는 나쁜 남자를 좋아한다'는 속설이 정말 사실이었던가?"(103) 하고 말입니다. "전쟁의 신은 직업이 '살인'이고, "사랑의 신은 직업이 '방화'니까 이 둘은 거의 비슷한 업종"이라는 유머(?)도 섞어서 말입니다. 

일면 장난스러운 면도 있지만 장난으로 끝나지는 않습니다. 이런 진지한 해석도 덧붙입니다. "전쟁의 신은 오직 사랑의 신의 품안에서만 평온을 찾을 수 있다. 그러한 점에서 일부 신화학자들의 해석은 꽤 그럴듯하다. "이 전설은 아마도 폭풍우가 지나간 후에 더 아름답고 찬란한 봄날이 다가오고 대지에 생기가 흘러넘친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 생겨났을 것이다. 아레스가 분노를 가라앉힌 후 모든 생명처럼 사랑의 신이 발산하는 강력한 매력에 빠지게 된 것이다." 물론 그리스신화에서는 사랑 자체가 충돌과 유혈사태의 원인이 되는 경우가 많았다"(103-105).

위에 인용한 '전쟁의 신, 아레스'의 이야기는 이 책의 분위기를 잘 설명해줍니다. 그리스신화의 원형과 현대적 해석, 그리고 유머와 통찰이 흥미롭게 녹아들며 인류가 간직해온 이야기 속으로 우리를 초대합니다. 저자는 "그리스신화는 신이 인간 세상에 함께했던 시절의 이야기다"(9)라고 정의합니다. 그리스신화의 가장 큰 특징은 신이 인간과 매우 닮았다는 점일 것입니다.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고, 남녀 성별이 있으며, 인간의 여러 가지 감정과 욕망을 가지고 있으며, 정해진 운명과 숙명을 벗어날 수 없다는 것 등이 말입니다. 저자는 이렇게 덧붙입니다. "종교성과 천상의 위엄은 훨씬 약하지만 대신 삶의 재미와 인문학적인 정신을 더 많이 담고 있다. 그들은 세속적이고 발랄하며 낭만적이고 활기 넘친다"(8). 신이지만 "이기적이고 제멋대로며 허영을 좋아하고 향락을 즐"기며, "고상한 품격을 지키는 경우가 아주 적다"(13)는 것이 그리스신화에서 만나볼 수 있는 신들의 매력이며, 이 책이 보여주는 그리스신화의 매력입니다. 

이것도 선입견이고 편견일지 모르겠는데, 중국인들이 집필한 책을 읽을 때마다 그들이 공부하는 방식이 신선하게 다가옵니다. 방대한 이야기를 참 호방하게 훑으며 일목요연하게 정리하는 능력이 탁월하다는 생각을 많이 합니다. 그리스신화를 처음 읽는 것은 아니지만, 서로 복잡하게 얽히고 섥혀 있는 그리스신화 속 신들의 이야기가 머릿속에 정리되는 느낌이 강하게 듭니다. 사실  '시시포스' 신화처럼 그 부분만 따로 떼어내며 들으면 엄청난 영감을 주는 이야기도, 그리스신화라는 전체적인 이야기 속에서 보면 다들 너무 '제멋대로' 생성된 이야기처럼 '막' 돌아다닌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많았습니다. <신이 인간과 함께한 시절>에는 명화도 함께 수록되어 있습니다. 이 책 속에서 명화는 이야기를 '거들 뿐'이지만, 상상력을 자극하고 이야기를 더욱 풍성하게 하는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명강의 주인공이기도 한 저자는 카를 야스퍼스의 말을 인용하며 이 책을 마무리합니다. "개체적 자아의 모든 위대한 성장은 고전 세계를 다시 접하는 데서 비롯된다. 이 세계가 잊힐 때마다 늘 야만적인 상태가 다시 나타났다"(483). 어쩌다 인간은 '신'이라는 관념을 갖게 된 것일까요? 우리 삶의 뿌리에는 어떤 이야기가 있는 것일까요? 우리는 어떤 이야기를 간직한 채, 어떤 이야기 속에서, 어떤 이야기를 남기며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요? 무슨 이유로 야스퍼스는 고전 세계가 잊힐 때마다 야만적인 상태가 다시 나타났다고 단언한 것일까요? 고전 세계가 남긴 이야기가 오늘 우리의 삶에 던져주는 영감은 무엇일까요? 이런 질문을 가진 독자, 이런 질문에 흥미를 느끼는 독자들에게 이 책의 일독을 권합니다.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세월 속에서도 오랫동안 인류가 소중하게 간직해온 이야기라면, 그만한 이유가 있지 않을까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레티시아 - 인간의 종말
이반 자블론카 지음, 김윤진 옮김 / 알마 / 2017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미디어가 없었다면, 전국 방방곡곡으로 전해진 충격적인 전파가 없었다면 레티시아 페레는 존재하지 못할 것이다. 그녀를 알지 못했던 수천만의 사람들이 그녀가 실종되는 순간 그녀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 텔레비전, 라디오, 언론, 인터넷은 부재하기에 현존하고 죽었기에 살아 있는 모순적인 인물을 만들어냈다"(108).

2011년 납치되어 살해된 18세 프랑스 소녀. 우리가 이제 와서 그 소녀의 죽음에 얽힌 진실을 알아야 할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녀를 알지 못했던 우리가 이제와서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소녀의 이름과 그 삶을 기억해야 할 이유는 무엇일까요? 

<레티시아>는 "2011년 1월 18일 밤에서 19일 사이에 납치"되어 잔인하게 살해 당한 한 소녀의 삶과 죽음을 복원한 '르포'(기록문학)입니다. 역사학자이며 작가이기도 한 저자는 단순히 '희생자'로 기억될 '레티시아'라는 한 존재를 우리 안에 생생하게 복원해내었습니다. 저자는 이것이 "그녀의 본모습과 존엄성과 자유를 그녀에게 되돌려주는"(9) 일이라고 단언합니다. 

<레티시아>는
처음 사건이 터졌을 때 톱뉴스가 되리라고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던 '한 소녀의 실종 사건'이 어떻게 언론과 정치에 의해 철저히 소비되며 국가적 사건으로 확대되어 갔는지를 보여줍니다. "게다가 레티시아의 경우는 스토리텔링이 기가 막히게 용이했다. '괴물'의 손아귀에 떨어진 '천사', '미치광이'에 의해 살해된 '순결한 소녀', 기분 나쁜 커플로 묶인 두 인물의 - 아직도 그리고 여전히 - 관계도에서 희생자와 살인자는 죽음 속 단짝이 된다. 소녀의 실종과 발견되지 않은 시신을 둘러싼 서스펜스, 사건의 재빠른 정치화, 비탄에 빠진 가족들 …. 이만하면 소비될 준비가 된 이야기다"(129). 어쩌면 이 책도 결국은 그녀의 이야기를 소비하기 위함이 아닌가 하는 의심의 눈초리를 보낼 독자들도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레티시아>는 그보다 훨씬 큰 것, 보다 본질적이고 핵심적인 문제를 고발하고 통찰합니다. 저자가 주목한 것은 두 가지입니다. 

"레티시아는 과잉 살해를 당했다"(429).
<레티시아>는 폭력적인 친아버지와 "애정의 대가로 강간을 거래"한 위탁가정의 양부에게 한 소녀가 어떤 학대를 당하며 어떻게 파되되어 왔는지, 그리고 결국 그러한 폭력이 또다시 어떻게 잔혹한 죽음이라는 폭력으로 이어지며 그녀의 죽음을 사회적 구경거리로 전락시켰는지를 밀도 있게 보여줍니다. 이 과정에서 국가의 역할, 범죄자들에 대한 감시, 형벌 정책의 문제점 등이 노출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목해야 할 핵심은 레티시아 살해는 '여성으로서 죽임을 당한' 여성 혐오 범죄였다는 것입니다. "레티시아가 세 살일 때, 그녀의 아버지는 그녀의 어머니를 폭행했다. 그다음 양부가 그녀의 언니를 성추행했으며, 그녀 자신도 18년밖에 살지 못했다. 이러한 드라마는 여성들이 모욕당하고 학대받고 구타당하고 강간당하고 살해되는 세상에 우리가 살고 있다는 사실을 환기한다. 여성들이 완벽하게 권리를 가진 존재들이 아닌 세상, 희생자들이 역정과 구타에 체념과 침묵으로 답하는 세상, 언제나 같은 사람들만 죽어 나오는 출구 없는 방"(10). 스마트폰의 혁신적인 기술말고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을 더 나은 세상으로 만들 수 있는 길은 없을까요? 체념과 침묵말고 무자비한 폭력에 더 나은 방법으로 저항할 수 있는 비폭력적 방법은 없을까요? 언제나 같은 사람들만 죽어나오는 출구 없는 방에 작은 탈출구라도 만들 수 있는 길은 정녕 없을까요? 일단 <레티시아> 같은 작업이 그 한 방안이요, 시도라는 것에 작은 희망이라도 품어봅니다.  

"살자, 저항하자, 사랑하자"(483).
책을 읽어보면, 왜 이 책이 르포 문학의 진수이며, 문학 장르가 아니면서도 어떻게 메디치상과 르몽드 문학상을 수상하게 되었는지 납득이 갑니다. 사실 이 책은 대중적으로 인기를 끌기보다, 여성학이나 여성문제를 다루는 대학, 대학원 수업의 '읽기과제', '토론과제' 도서로 활용될 가능성이 가장 높아보입니다. 그러나 한 사람의 역사학자가 파헤친 '진실'이 수업적 용도로만 소비되지 않고, 이 사회, 그리고 전세계의 사람들에게 경종이 되기를 바래봅니다. 범죄의 직접적인 희생자가 되지 않는 한 비극의 추상 수준을 낮추지 못하는 우리에게, 모든 여성에게 일어날 수 있는 비극을 생생하게 '느끼게' 해준다는 점에서 모두에게 이 책의 일독을 권하고 싶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여섯 번째 사요코 모노클 시리즈
온다 리쿠 지음, 오근영 옮김 / 노블마인 / 2017년 8월
평점 :
절판


 

 

"당신은 이런 게임을 아는가"(8).
요즘도 학교마다 전해져 내려오는 전설 하나쯤 있을까? 내가 다니던 초등학교에도 전설이 있었다. 작은 산을 다져 세워진 학교였는데, 무덤이었던 터 위에 교실이 지어진 탓에 12시 땡하면 반쪽은 여자, 반쪽은 남자 얼굴을 한 귀신이 나타난다는 것이었다. 주의해야 할 점은, 귀신을 만나더라도 절대로 눈이 마주쳐서는 안 된다는 것! 이 별 것 아닌 이야기를 친구들과 비밀스럽게 주고받으며 꽤 떨었던 기억이 나는데, 지금 그 학교를 다니는 후배들에게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면, 어떨가? 진지하게 들어주기는 할까?

올해 고3이 되는 마사코, 유키오, 슈가 다니는 학교에는 '사요코의 전설'이 존재했다. 게임의 '범인' 같은 존재를 그들은 '사요코'라고 불렀다. 15년 전쯤, 3년에 한 번 축제가 열리는 해에 <사요코>라는 1인극이  공연되었다. 익명의 대본은 꽤 성공적이었고 그해 진학률도 좋았던 탓에, 3년 후 <사요코>를 다시 공연하자는 이야기가 나왔다. 그런데 '두 번째 사요코' 역을 맡은 전학생이 불의의 사고로 죽음을 당하고, 그해 대학 합격률이 사상 최저를 기록하면서 '사요코'는 전설의 색을 띠기 시작했다.

누구에 의해, 왜 시작되었는지 모르지만, 그들의 학교에는 축제가 열리는 해, 그러니까 3년마다 '사요코'가 되는 학생이 나온다. '사요코'가 누구인지는 '사요코' 자신과 그 '사요코'를 지명하는 바로 전의 '사요코'밖에 알지 못한다. 이 메시지를 받은 사람은 자신이 '사요코'가 될 것을 승낙했다는 증거로 새 학기가 시작되는 날 아침에 자기 교실에 빨간 꽃을 꽃아야 한다. 빨간 꽃이 꽂힌 순간부터 그해의 게임은 시작되는 것이다. 단, '사요코'는 자신이 '사요코'임을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 "우리가 졸업하던 해는 '여섯 번째 사요코의 해'라고 불렀다"(10).


"너도 붉은 꽃을 꽂으러 온 거야?'(17)
그런데 새학기가 시작되는 첫날부터 "여섯 번째 사요코의 해"에 불길한 그림자가 드리운다. 이미 올해의 게임은 시작되었는데, '사요코'라는 이름을 가진 전학생이 학교에 나타난 것이다. 같은 여학생도 반할 만큼 예쁘고 완벽한 '사요코'. 그런데 그녀는 왠지 이질적이면서도 불길한 분위기를 풍긴다. '여섯 번째 사요코의 해'에 이미 '사요코' 게임이 시작되고 있는데, 또 하나의 '사요코'가 나타났다. 우연일까? 누가 진짜 여섯 번째 사요코인가. 여섯 번째 사요코는 게임에서 이길 것인가. 그보다 사요코의 전설을 통해 학교 전체를 연주하는 숨은 인물은 누구일까? 누구의 의지에 의해 이 사요코의 전설은 계속 되며 정교해지는 것일까?


"우리는 대체 무엇을 시험당하고 있는 걸까?"(147)
<여섯 번째 사요코>는 학교라는 '닫힌 공간' 안에서 '사요코 전설'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미스테리를 다룬 판타지 소설이다.  <여섯 번째 사요코>가 주목하는 것은 '학교'라는 공간의 폐쇄성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학교'라는 공간에 의미를 부여하고, 집착한다. 1년 전에도 2년 전에도 같은 시간을 공유하며 똑같은 책상에 앉아 똑같은 공부를 하는 똑같은 나이의 학생들을 통해 '사요코 전설'은 해마다 전설이 더해지고 상상이 더해지며 정교해지고 견고해진다. 그렇게 더 강해지는 '사요코 전설'의 위력. "왜"는 중요하지 않다. 마치 지구에 던져진 우리네 삶처럼, 그  공간, 그 이야기 속에 있다는 사실만이 중요할 뿐.

청춘물처럼 느껴지는 구석도 있지만, 이야기 전반에 흐르는 불길한 공포가 청춘물 특유의 풋풋함을 잡아먹어 버린다. 미스테리하지만, 결국 '범인'이나 '반전'이 중요하지 않은, (역)반전이 뒤통수를 치는 (색다른) 추리소설로 읽힌다. 사실 뿌려놓은 떡밥은 무수한데 그런 것은 하나도 중요하지 않다는 듯, (무수한 떡밥이 다소 싱겁게 회수되고 몇몇 떡밥은 회수되지 않은 채) 미스테리에서 판타지로 넘어가는 듯한 급작스러운 결말이 다소 황당하고 아쉽다. 처음부터 미스테리한 부분에 과도하게 집착하고 몰입한 탓일 수도 있다. 결말과 마지막 문단을 꼽씹을수록 황당함은 기분 나쁜 공포로 바뀐다. 이래 저래 뒷맛이 개운하지 않다. 그래도 오랫만에 팽팽한 긴장감을 유지한 채 한 눈 팔지 않고 읽은 미스테리한 판타지 소설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시간과 공간이 정지하는 방
이외수 지음, 정태련 그림 / 해냄 / 2017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공간도 입체고 시간도 입체다.
따라서 당연히 시간에도 옆구리가 있다.
거기 시간의 옆구리, 작은 골방 하나를 나는 알고 있다.
가끔 나는 그 골방으로 들어가 명상을 하거나 글을 쓰거나 그림을 그린다.
그때는 시간도 공간도 정지한다.
그리고 모든 현실은 사라져 버린다(34-35).

가끔 작은 골방 같은 책을 만납니다. 그런 책을 만나면 시간과 공간이 정지하고, 나를 둘러싸고 있던 작은 세계가 사라져버리지요. 세상에 책이 많아질수록 그런 책을 만나기가 어렵다는 것은, 독자 입장에서는 매우 열불나는 아이러니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런 인쇄물 더미 속에서 골방 같은 책을 만나면 기쁨이 30배, 60배, 100배가 되니, 그 또한 웃픈 아이러니입니다.

<시간과 공간이 정지하는 방>은 제게 그런 골방이 되어 준 책입니다. 조금 일찍 눈을 뜬 새벽, 다시 잠들지 않고 이 책을 펼쳐 들었습니다. 잠깐 읽으려던 것이 어느 새 끝 페이지까지 다 읽고 나서야 정신이 들었습니다. 덕분에 한 두 시간 출근이 늦어버렸지만, 오랫만에 기분 좋은 충만함으로 가득 채워진 덕에 오히려 즐거웠습니다. 몰입의 여운 탓인지, 당황하기보다 하루 지각하고 말지, 하는 배짱도 생겼습니다.


나는 글이나 책이, 읽는 이를 알게 만들고, 느끼게 만들며, 깨닫게 만든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아는 쪽보다는 느끼는 쪽이 더 낫고, 느끼는 쪽보다는 깨닫는 쪽이 더 낫다는 믿음도 가지고 있다(16-17).

<시간과 공간이 정지하는 방>은 우리가 잘 알고, 사랑하는 작가, '이외수'라는 한 사람의 시각을 통해 세상을 알고, 느끼고, 깨닫는 시간이었습니다. 알기보다 느끼고, 느끼기보다 깨닫는 시간이었다고 표현하고 싶습니다. 이외수 선생님의 글이 시간과 공간을 정지시킨다면, 정태련 선생님의 그림은 시간과 공간에 쉼을 주고 있습니다. 거창하지 않아도 절실함이 있고, 잔뜩 힘을 주지 않았어도 진정성이 묵직하게 다가옵니다.

책을 읽으며 그런 생각을 했으면, 나는 이외수 선생님이 완벽한 작가이기를 바랐던가. 아닙니다. 그랬다면 이외수 선생님의 글을 그렇게 좋아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외수 선생님의 글을 좋아하는 것은, 투명하게 자신을 내비치고, 온 마음과 삶으로 글을 쓰는, 그래서 시시껄렁해 보이는 일상의 작은 순간들까지도 함께 공유하며 함께 웃을 수 있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시간과 공간이 정지하는 방>에서도 그런 순간들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존버'라는 단어를 찾아보기도 하고(존나게 버티기라고 합니다!), 아름다운 문장들과 생생한 단어들과 삶과 사랑을 위한 전력투구와 진심어린 위로들을 꼽씹으며 오늘을 아름답게 살아갈 힘과 방법을 느끼고 깨달았다고 고백하고 싶습니다. 무엇보다 "늘 정신과 영혼을 가꾸는 일에만 골몰해 왔는데 이제부터는 몸을 가꾸는 일에도 관심을 기울여야겠다"(102)는 이외수 선생님을 보며, 정신은 물론 몸을 가꾸는 일에도 게으른 난 도대체 어떤 인생인가 심각하게 반성도 했습니다.

<시간과 공간이 정지하는 방>, 다른 사람에게도 읽히고 싶은 책입니다. 읽는 맛과 감동이 있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브로크백 마운틴 에프 모던 클래식
애니 프루 지음, 전하림 옮김 / F(에프) / 2017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무자비하고 혹독한 자연을 배경으로 거칠고 폭력적인 인간 본성을 날카롭게 포착해 비틀어 내며 거장의 반영에 오른 애니 프루는 드물게 독자와 평론가 양쪽의 사랑을 받는 작가이다"(앞 날개 中에서).

<브로크백 마운틴>은 동명의 영화 '브로크백 마운틴'(2005년 개봉, 이안 감독)의 원작 소설을 포함한, '애니 프루'의 단편집입니다. '금세기 최고의 단편'으로 평가받은 <가죽 벗긴 소>와 오헨리 단편소설 상을 수상한 <진흙탕 인생>을 비롯해 총 11편의 작품을 담았는데, 특이하게도 모두 '와이오밍'이라는 서부 지역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인디언어로 '대초원'이라는 뜻의 와이오밍주는 미국 서부 로키산맥과 대평원 사이에 위치해 있"다고 합니다(394). 작품을 읽기 전에, 와이오밍을 이미지 검색해보면 좋을 듯합니다. 작품을 상상하고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됩니다. 

영화 '브로크백 마운틴'을 기억하고 있는 독자에게 '브로크백'이라는 거대한 자연환경은 압도적인 영상미와 함께 태곳적 안식처와 같은 곳으로 기억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사랑했기에 도망쳐야 했던 잭과 에니스에게 '브로크백'은 그들이 자유로울 수 있는 유일한 장소였고, 죽어서라도 다시 찾고 싶은 품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아름다움과 신비를 기대한 독자들에게 이 책은 무자비하고 혹독합니다.

어쩌면 우리는 잭과 에니스에게 눈 멀어 브로크백을, 그리고 와이오밍을 제대로 보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이 책은 창조주에게 동산을 선물로 받은 인간들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사방에서 불행한 사건 사고가 끊임없이 이어진대도", 그 앞에 서면 "인간사의 비극이라는 건 한없이 보잘것없"는 것이 되고 마는 무심하고도 사나운 땅과 싸워야 하는 인간들의 이야기입니다. 아름답고 풍요로운 동산이 아니라, 사나운 광풍, 황량하고 공허한 땅, 길이 없는 광활한 초원, 질식할 것 처럼 찍어누르는 바위 절벽, 금방이라도 괴물을 토해낼 것처럼 큰 나무들이 빽빽하게 들어선 숲에서 살아남아야 하는, 자연의 폭력에 폭력으로 맞서며, 벌거벗겨지는 거칠고 초라한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애니 프로의 작품에서 와이오밍이라는 배경은 이토록 특이하고도 특별한 장소다. 그의 작품에서는 와이오밍이라는 환경이기에 발생할 수 있는 사건과 사고가 주를 이룬다. 자연뿐만이 아니다. 거친 본능과 여과되지 않은 본성이 판을 치는 와이오밍의 인간 세계도 그러하다. 다른 곳이라면 도무지 납득할 수 없을 만한 일도 와이오밍에서는 어쩌다 보니 '있을 수 있는 일'이 된다. 즉, 와이오밍은 일반 상식으로서는 재단할 수 없는 혹은 재단해서는 안 되는 별개의 현실이 존재하는 곳이라고 말하는 듯하다"(394). 


"작은 목장에서, 주민이 고작 세 명에서 열일곱 명에 지나지 않는 외딴 교차로에서, 무모하고 난폭한 광산촌의 트레일러 캠프장에서, 그 어떤 종류의 살육이나 잔혹한 일이 벌어진대도, 그 어떤 사고나 살인이 일어난대도, 하늘에 떠오르는 여명의 빛을 늦출 수 있는 것은 없다. ... 이 모두가 덧없는 하루살이에 지나지 않는다. 사람이 만든 것은 뭐든 유한의 시간 동안만 머물렀다 사라질 뿐이다. 중요한 건 오로지 대지와 하늘이다. 매일 끝없이 되풀이되는 아침의 여명이다"(지옥에선 모두 한 잔의 물을 구할 뿐, 123-124).

미디어를 통해 가상 환경을 살고 있는 우리에게, <브로크백 마운틴>은 숲과 산이 우리의 삶의 터전이었던 때를 다시금 기억하게 합니다.
자연을 유희의 대상으로 삼고 있는 지금의 삶에 축배라도 들어야 하나 싶을 만큼 그 체험이 너무도 강렬하고 잔혹합니다. 황량한 땅과 맞서는 모습이 꼭 산 채로 가죽이 벗겨져 살갗이 다 드러난 채 붉게 충혈된 두 눈으로 절대적인 증오를 쏘아보내는 소의 모습과 닮았습니다. 삶과 통제에 대해 많은 것을 생각해보게 하는데, 환경을 통제하고 싶은 욕구가 우리를 자꾸만 가상의 세계로 끌어들이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해봅니다. 


"겨울철 뜨거운 온천 위로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증기 구름처럼, 여러 해가 가도록 미처 말하지 못한 것들 그리고 이제는 차마 말할 수 없는 것들 - 인정, 고백, 수치심, 죄책감, 두려움 - 이 그 둘 주위를 둘러싸고 피어올랐다. ... 결국, 아무것도 없었다. 끝난 것도, 새로 시작된 것도, 해결된 것도"(브로크백 마운틴, 381).

다른 이야기들에 비하면 잭과 에니스의 <브로크백 마운틴>은 낭만적입니다. 다른 작품에서는 자연 안에서 드러나는 인간의 본성이 거부감이 들 정도로 야만적이고 폭력적인데, 유독 동성애적 본능만은 '거부할 수 없이' '자연스럽고' '아름다운' 욕구로 그려낸 것이 특이해보입니다. 살아남으려고 버둥거릴수록 자연의 무자비한 힘이 더 커보이는 것처럼, 잭과 에니스가 두려움에 떨수록 인간의 금기가 더 무자비하게 느껴지는 효과를 가져옵니다. 거칠고 파괴적이더라도 본능을 따라 살아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요?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버티는 힘이다. 바로 그거다. 오래 버티고 서 있다 보면 언젠가 앉을 때가 오는 법이다"(세상 끝자락의 레더월 목장, 194). 

무심하게 반복되는 자연의 거대한 흐름 속에 '한낱' 인간일 뿐인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으며, 무엇을 해야 할까요? 인간을 아주 왜소하게 만드는 소설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운명 같은 환경 속에서 무엇을 통제한다는 생각은 허상에 지나지 않을까요? 통제되고 있다고 생각했던 모든 것, 대자연의 난폭한 본성과 인간의 파괴적인 본능을 우리가 과연 통제할 수 있을까 하는 물음을 절망적으로 던져주는 책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