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티시아 - 인간의 종말
이반 자블론카 지음, 김윤진 옮김 / 알마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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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가 없었다면, 전국 방방곡곡으로 전해진 충격적인 전파가 없었다면 레티시아 페레는 존재하지 못할 것이다. 그녀를 알지 못했던 수천만의 사람들이 그녀가 실종되는 순간 그녀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 텔레비전, 라디오, 언론, 인터넷은 부재하기에 현존하고 죽었기에 살아 있는 모순적인 인물을 만들어냈다"(108).

2011년 납치되어 살해된 18세 프랑스 소녀. 우리가 이제 와서 그 소녀의 죽음에 얽힌 진실을 알아야 할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녀를 알지 못했던 우리가 이제와서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소녀의 이름과 그 삶을 기억해야 할 이유는 무엇일까요? 

<레티시아>는 "2011년 1월 18일 밤에서 19일 사이에 납치"되어 잔인하게 살해 당한 한 소녀의 삶과 죽음을 복원한 '르포'(기록문학)입니다. 역사학자이며 작가이기도 한 저자는 단순히 '희생자'로 기억될 '레티시아'라는 한 존재를 우리 안에 생생하게 복원해내었습니다. 저자는 이것이 "그녀의 본모습과 존엄성과 자유를 그녀에게 되돌려주는"(9) 일이라고 단언합니다. 

<레티시아>는
처음 사건이 터졌을 때 톱뉴스가 되리라고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던 '한 소녀의 실종 사건'이 어떻게 언론과 정치에 의해 철저히 소비되며 국가적 사건으로 확대되어 갔는지를 보여줍니다. "게다가 레티시아의 경우는 스토리텔링이 기가 막히게 용이했다. '괴물'의 손아귀에 떨어진 '천사', '미치광이'에 의해 살해된 '순결한 소녀', 기분 나쁜 커플로 묶인 두 인물의 - 아직도 그리고 여전히 - 관계도에서 희생자와 살인자는 죽음 속 단짝이 된다. 소녀의 실종과 발견되지 않은 시신을 둘러싼 서스펜스, 사건의 재빠른 정치화, 비탄에 빠진 가족들 …. 이만하면 소비될 준비가 된 이야기다"(129). 어쩌면 이 책도 결국은 그녀의 이야기를 소비하기 위함이 아닌가 하는 의심의 눈초리를 보낼 독자들도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레티시아>는 그보다 훨씬 큰 것, 보다 본질적이고 핵심적인 문제를 고발하고 통찰합니다. 저자가 주목한 것은 두 가지입니다. 

"레티시아는 과잉 살해를 당했다"(429).
<레티시아>는 폭력적인 친아버지와 "애정의 대가로 강간을 거래"한 위탁가정의 양부에게 한 소녀가 어떤 학대를 당하며 어떻게 파되되어 왔는지, 그리고 결국 그러한 폭력이 또다시 어떻게 잔혹한 죽음이라는 폭력으로 이어지며 그녀의 죽음을 사회적 구경거리로 전락시켰는지를 밀도 있게 보여줍니다. 이 과정에서 국가의 역할, 범죄자들에 대한 감시, 형벌 정책의 문제점 등이 노출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목해야 할 핵심은 레티시아 살해는 '여성으로서 죽임을 당한' 여성 혐오 범죄였다는 것입니다. "레티시아가 세 살일 때, 그녀의 아버지는 그녀의 어머니를 폭행했다. 그다음 양부가 그녀의 언니를 성추행했으며, 그녀 자신도 18년밖에 살지 못했다. 이러한 드라마는 여성들이 모욕당하고 학대받고 구타당하고 강간당하고 살해되는 세상에 우리가 살고 있다는 사실을 환기한다. 여성들이 완벽하게 권리를 가진 존재들이 아닌 세상, 희생자들이 역정과 구타에 체념과 침묵으로 답하는 세상, 언제나 같은 사람들만 죽어 나오는 출구 없는 방"(10). 스마트폰의 혁신적인 기술말고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을 더 나은 세상으로 만들 수 있는 길은 없을까요? 체념과 침묵말고 무자비한 폭력에 더 나은 방법으로 저항할 수 있는 비폭력적 방법은 없을까요? 언제나 같은 사람들만 죽어나오는 출구 없는 방에 작은 탈출구라도 만들 수 있는 길은 정녕 없을까요? 일단 <레티시아> 같은 작업이 그 한 방안이요, 시도라는 것에 작은 희망이라도 품어봅니다.  

"살자, 저항하자, 사랑하자"(483).
책을 읽어보면, 왜 이 책이 르포 문학의 진수이며, 문학 장르가 아니면서도 어떻게 메디치상과 르몽드 문학상을 수상하게 되었는지 납득이 갑니다. 사실 이 책은 대중적으로 인기를 끌기보다, 여성학이나 여성문제를 다루는 대학, 대학원 수업의 '읽기과제', '토론과제' 도서로 활용될 가능성이 가장 높아보입니다. 그러나 한 사람의 역사학자가 파헤친 '진실'이 수업적 용도로만 소비되지 않고, 이 사회, 그리고 전세계의 사람들에게 경종이 되기를 바래봅니다. 범죄의 직접적인 희생자가 되지 않는 한 비극의 추상 수준을 낮추지 못하는 우리에게, 모든 여성에게 일어날 수 있는 비극을 생생하게 '느끼게' 해준다는 점에서 모두에게 이 책의 일독을 권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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