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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이 인간과 함께한 시절 - 명화와 함께하는 달콤쌉싸름한 그리스신화 명강의!
천시후이 지음, 정호운 옮김 / 올댓북스 / 2017년 8월
평점 :
절판
"그리스의 달빛은 유난히 아름다울 것이다. 왜냐하면 하늘 속에 온갖 신과 설화가 있고 땅 위의 풀 한 포기, 이슬 한 방울까지도 어떤 요정의 풋풋한 감성을 담고 있으며 또한 달을 관장하는 신은 매우 아름답고 고상한 여신이기 때문이다"(9).
어릴 때부터 '이야기'를 탐했던 아이였습니다. 어떤 이야기들은 가슴에 담겼고, 어떤 이야기들은 기억에 담겼고, 어떤 이야기들은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시간따라 함께 떠내려가버렸지만, 가슴 한 가운데 콕 박힌 보석같은 이야기도 있습니다. 그중 하나가 바로 전쟁의 신 '아레스'에 관한 그리스신화입니다. 만화책이었고, 급하게 읽은 탓인지 제목도 전체 줄거리도 기억나지 않지만, 이상하게 '전쟁의 신, 아레스'라는 남자 주인공 이름은 가슴 속에 깊이 새겨졌습니다. 그가 짊어져야 했던 운명의 무게가 제 가슴에도 낙인을 남기듯 말입니다. 전쟁의 신이라는 자신의 운명을 짊어진 채, 사랑하는 여인을 뒤로 하고 황량한 바람 속으로 사라져가던, 긴 창을 들고 말을 타고 떠나가던 그 쓸쓸한 장면 하나가 정지된 화면처럼, 남자 주인공의 전형처럼 그렇게 기억 속에 남아 있습니다. 그 이야기가 그리스신화를 모티브로 하고 있다는 걸 안 건 한참 후의 일입니다.
<신이 인간과 함께한 시절>은 그리스신화에 등장하는 '전쟁의 신, 아레스'의 이야기를 이렇게 풀어냅니다. "그런데 매우 모순되면서도 흥미로운 점은 이토록 잔인하고 난폭하며 지혜의 큰 적이자 인간에게 더없이 무자비한 아레스가 글쎄 사랑의 신 아프로디테(로마신화의 베누스, 영어 이름 비너스)의 애인이었다는 점이다. 아레스는 자주 사랑의 신 아프로디테의 품에서 평온과 안정을 찾았는데, 둘의 스캔들은 훗날 수많은 막장드라마의 원형이 되었다"(103). (지금 생각해보니, 늘 그랬던 것처럼 이 둘의 비극적 운명이 한 만화작가에게도 영감을 주었었나 봅니다.)
중국의 한 대학교에서 명강의로 손꼽히는 내용을 책으로 담아낸, <신이 인간과 함께한 시절>은 그리스신화의 원형을 있는 그대로 들려주지 않고, 현대적인 시각에서 재해석을 시도했습니다. '전쟁의 신, 아레스'의 운명을 놓고도 이런 질문을 던집니다. "'여자는 나쁜 남자를 좋아한다'는 속설이 정말 사실이었던가?"(103) 하고 말입니다. "전쟁의 신은 직업이 '살인'이고, "사랑의 신은 직업이 '방화'니까 이 둘은 거의 비슷한 업종"이라는 유머(?)도 섞어서 말입니다.
일면 장난스러운 면도 있지만 장난으로 끝나지는 않습니다. 이런 진지한 해석도 덧붙입니다. "전쟁의 신은 오직 사랑의 신의 품안에서만 평온을 찾을 수 있다. 그러한 점에서 일부 신화학자들의 해석은 꽤 그럴듯하다. "이 전설은 아마도 폭풍우가 지나간 후에 더 아름답고 찬란한 봄날이 다가오고 대지에 생기가 흘러넘친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 생겨났을 것이다. 아레스가 분노를 가라앉힌 후 모든 생명처럼 사랑의 신이 발산하는 강력한 매력에 빠지게 된 것이다." 물론 그리스신화에서는 사랑 자체가 충돌과 유혈사태의 원인이 되는 경우가 많았다"(103-105).
위에 인용한 '전쟁의 신, 아레스'의 이야기는 이 책의 분위기를 잘 설명해줍니다. 그리스신화의 원형과 현대적 해석, 그리고 유머와 통찰이 흥미롭게 녹아들며 인류가 간직해온 이야기 속으로 우리를 초대합니다. 저자는 "그리스신화는 신이 인간 세상에 함께했던 시절의 이야기다"(9)라고 정의합니다. 그리스신화의 가장 큰 특징은 신이 인간과 매우 닮았다는 점일 것입니다.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고, 남녀 성별이 있으며, 인간의 여러 가지 감정과 욕망을 가지고 있으며, 정해진 운명과 숙명을 벗어날 수 없다는 것 등이 말입니다. 저자는 이렇게 덧붙입니다. "종교성과 천상의 위엄은 훨씬 약하지만 대신 삶의 재미와 인문학적인 정신을 더 많이 담고 있다. 그들은 세속적이고 발랄하며 낭만적이고 활기 넘친다"(8). 신이지만 "이기적이고 제멋대로며 허영을 좋아하고 향락을 즐"기며, "고상한 품격을 지키는 경우가 아주 적다"(13)는 것이 그리스신화에서 만나볼 수 있는 신들의 매력이며, 이 책이 보여주는 그리스신화의 매력입니다.
이것도 선입견이고 편견일지 모르겠는데, 중국인들이 집필한 책을 읽을 때마다 그들이 공부하는 방식이 신선하게 다가옵니다. 방대한 이야기를 참 호방하게 훑으며 일목요연하게 정리하는 능력이 탁월하다는 생각을 많이 합니다. 그리스신화를 처음 읽는 것은 아니지만, 서로 복잡하게 얽히고 섥혀 있는 그리스신화 속 신들의 이야기가 머릿속에 정리되는 느낌이 강하게 듭니다. 사실 '시시포스' 신화처럼 그 부분만 따로 떼어내며 들으면 엄청난 영감을 주는 이야기도, 그리스신화라는 전체적인 이야기 속에서 보면 다들 너무 '제멋대로' 생성된 이야기처럼 '막' 돌아다닌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많았습니다. <신이 인간과 함께한 시절>에는 명화도 함께 수록되어 있습니다. 이 책 속에서 명화는 이야기를 '거들 뿐'이지만, 상상력을 자극하고 이야기를 더욱 풍성하게 하는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명강의 주인공이기도 한 저자는 카를 야스퍼스의 말을 인용하며 이 책을 마무리합니다. "개체적 자아의 모든 위대한 성장은 고전 세계를 다시 접하는 데서 비롯된다. 이 세계가 잊힐 때마다 늘 야만적인 상태가 다시 나타났다"(483). 어쩌다 인간은 '신'이라는 관념을 갖게 된 것일까요? 우리 삶의 뿌리에는 어떤 이야기가 있는 것일까요? 우리는 어떤 이야기를 간직한 채, 어떤 이야기 속에서, 어떤 이야기를 남기며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요? 무슨 이유로 야스퍼스는 고전 세계가 잊힐 때마다 야만적인 상태가 다시 나타났다고 단언한 것일까요? 고전 세계가 남긴 이야기가 오늘 우리의 삶에 던져주는 영감은 무엇일까요? 이런 질문을 가진 독자, 이런 질문에 흥미를 느끼는 독자들에게 이 책의 일독을 권합니다.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세월 속에서도 오랫동안 인류가 소중하게 간직해온 이야기라면, 그만한 이유가 있지 않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