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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말을 먹는 나무
프랜시스 하딩 지음, 박산호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7년 9월
평점 :
품절
"내게 거짓말을 해줘!
더 중요할수록,
더 널리 퍼질수록
더 큰 비밀을 알려줄 테니까 …."
도망치듯 '베인'이라는 외딴 섬으로 이주해온 선더리 목사의 가족. 그의 딸 페이스는 목사이자 저명한 자연과학자로서 아버지의 평판에 치명타를 가하는 사건이 벌어졌음을 눈치챈다. 어떻게든 아버지를 돕고 싶었으나, 처음으로 아버지를 도왔다고 생각했던 그 밤이 지나고 다음 날 아침, 아버지는 변사체로 발견된다. 아버지의 죽음이 자살이라고 확신한 어머니(머틀)는 어떻게든 남편의 죽음을 사고사로 처리하기 위해 애쓰지만, 페이스는 아버지가 살해 당했음을 직감한다. 그 권총, 자정까지 집에 돌아와야 한다고 서두르던 아버지, 그 신비로운 식물을 필사적으로 감추려고 했던 아버지, 아버지는 누구를 두려워한 것일까? 아버지 죽음에 대한 진실을 파헤치기 위해 고군분투하던 페이스는 아버지가 숨겨 왔던 거대한 비밀과 마주하게 되고, 환상 같은 거짓과 진실의 소용돌이 속으로 빨려 들어가게 된다.
아버지의 일기장에서 발견하게 된 거대한 비밀은 거짓말을 먹고 비밀을 토해내는 나무, '거짓말을 먹는 나무'에 관한 것이다. 이 나무는 거짓말을 '먹을 때'만 열매가 맺히는데, 그 열매는 그것을 먹은 사람이 가장 알고 싶어 하는 지식을 가르쳐주는 신비한 힘이 있다. 나무에게 거짓말을 먹이는 방법은 나무에 대고 거짓말을 속삭이고 나서 그 거짓말을 널리 퍼뜨리는 것이다. 거짓말의 중요한 것일수록, 그 거짓말을 믿는 사람들이 많을수록, 더 큰 열매가 맺힌다(223-224).
지식을 갈구하는 사람일수록 한 입만 먹으면 아무도 갖지 못한 비밀(지식)을 토해내는 이 나무에 큰 유혹을 받았다. 페이스의 아버지 선더리 목사도 마찬가지였다. 그가 알고 싶은 창조에 관한 진실. 선더리 목사는 그 비밀을 알기 위해 '거짓말을 먹는 나무'에 거짓말을 먹이기 시작한다. 그리고 '거짓말을 먹는 나무'는 자신이 먹은 거짓과 관련된 지식(비밀)을 토해낸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그러니까 창조에 관한 진실을 알고 싶으면 창조에 관한 거짓말을 퍼뜨려야 하는 것이다. 알고 싶은 진실과 관련된 거짓말을 먹이기 위해 선더리 목사는 자신을 파멸시킬 거짓말을 속삭이기 시작한다.
"거짓말 나무는 가장 큰 비밀이자 보물이자 파멸의 원인이 된다"(245).
아버지 죽음과 관련된 진실을 밝히기 위해 거짓말을 먹는 나무에 거짓말을 먹이기 시작하는 페이스는 거짓말의 속성, 즉 거짓말을 더 많은 사람들이 믿게 하려면 다른 사람들이 믿고 싶어하는 거짓말을 골라야 한다는 것, 그리고 거짓말은 일부만 제공해도 나머지는 다른 사람들의 상상력으로 채워지며 커져간다는 것, 몇 개의 암시를 던지고 침묵하면 거짓말은 쑥쑥자라 새로운 형태를 갖춰간다는 것 등을 깨달으며, 스스로 만들어낸 거짓말의 불길 속에 자신을 내던진다.
맹수의 이빨처럼 사람들을 물어뜯는 거짓말의 노골적인 공포가 이 책의 분위기를 지배하고 압도한다. "거짓말은 불과 같다는 걸 페이슨 알게 됐다. 처음에는 보살피고 연료도 줘야 하지만 아주 조심스럽고 부드럽게 해야 한다. 살짝 바람을 부쳐주면 이제 막 피어오른 불길이 커지겠지만 너무 세게 부치면 꺼져버릴 것이다. 어떤 거짓말들은 처음부터 기세 좋게 퍼지면서 신나게 타닥거리며 타올라 더 이상 연료를 줄 필요가 없다. 하지만 그 거짓말은 더 이상 내가 처음에 퍼뜨린 거짓말이 아니게 된다. 그 거짓말은 나름의 생명력과 형태를 가지고 홀로 커져가면서 아무도 통제하지 못하게 된다"(366).
거짓말을 먹는 나무를 통해 폭노되는 거짓말의 속성만큼이나 이 책의 분위기를 지배하고 읽는 재미를 주는 것은 여성에 대한 편견과 차별에 관한 고발이다. 페이스는 "소녀들이 품어서는 안 되는 갈망"에 저항하지만, 아무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14살짜리 소녀는 눈에 환히 보이는 곳에 있어도 보이지 않는 존재일 뿐이며, 가만히 있어도 성가신 그 무엇이 되고 만다. "네가 아들이라면 언젠가는 세상에 두각을 나타내고 가족의 재산을 늘려서 그 은혜에 보답할 수도 있겠지. 하지만 딸은 절대로 그러지 못해. 넌 절대로 명예롭게 군대에 복무할 수도 없고, 과학 분야에서 명성을 얻을 수도 없고, 성직이나 의회에서 명성을 얻을 수도 없고. 일을 해서 잘 살 수도 없어. 어차피 넌 평생 내 지갑을 털어가는 짐밖에 안 돼. 네가 결혼한다고 해도 지참금 때문에 우리 집 재산이 크게 축날 거다"(147).
거짓말을 먹는 나무는 보이지 않지만 저마다의 방식으로 싸우고 있는 여자들의 전쟁을 교묘한 방식으로 드러낸다. "여긴 전쟁터야, 페이스! 남자들만 전쟁에 나가는 것이 아니라 여자도 마찬가지야. 세상은 우리에게 무기도 주지 않고 싸우는 모습을 보여서도 안 된다고 하지. 하지만 우리는 싸우지 않으면 이대로 죽게 될 거야"(434).
<거짓말을 먹는 나무>는 창조와 진화의 긴장이 팽팽하게 당겨지며 얼핏 보면 진화의 승리로 분위기를 몰아가지만, 과학 아래 숨은 편견과 무지도 함께 폭노하고 있다. "두개골이 클수록 뇌도 더 크고 지능도 높지. 남자와 여자의 두개골 크기 차이만 봐도 알 수 있어요. 남자 두개골이 더 커서 지능의 왕이란 점을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지"(86). "과학이 그녀를 배신했다"(86). "페이스가 자연과학 연구를 계속하면 여지이기 때문에 아마 평생 동안 남자들에게 조롱당하고, 비하되고, 무시를 받고, 하대를 당할 것이다"(539).
<거짓말을 먹는 나무>는 신앙과 과학, 거짓과 진실, 이성과 미신, 논리와 환상, 편견과 차별이 섬세한 대칭을 이루는 다양한 색실이 되어 한땀 한땀 수를 놓듯이 정교하게 한 폭의 그림을 완성해간다. '거짓말을 먹는 나무'라는 소재는 냉정하고 분석적인 추리와 맞물리며 판타지적 요소가 가미된 새로운 분위기의 스릴러를 완성해낸다. 작가의 필력이 잘된 번역을 통해 생생하게 살아나는 느낌을 주는 책이다. 뱀과 여자와 선/악과처럼, 뱀과 여자와 거짓을 먹고 진실을 토해내는 나무는 신화적(환상적)인 분위기를 재현하고, 신비로운 식물을 둘러싼 비밀과 음모는 '인디아나존스' 스타일의 모험을 만들어내고, 창조와 진화의 긴장, 여성과 왼손잡이에 대한 차별을 고발하는 장면들은 한편의 극사실주의적인 역사소설과 같고, 그 와중에 작은 희망처럼 피어나는 가족애와 우정은 카타르시스적인 따뜻한 위로를 건넨다. 완벽하다고 할 수는 없지만 분명 매혹적인 이야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