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야 - 기도로 밤을 뚫다
이규현 지음 / 두란노 / 2022년 3월
평점 :
품절






금요철야기도회가 한국 교회에서 사라졌다(16).

이제는 교회도 '메타버스'에 올라 타야 한다는 고민에 빠져 있던 중에 이 책을 읽었습니다. '철야', 너무 낡은 이야기가 아닐까, 시대를 역행하는 구습의 답습은 아닐까, 자꾸만 좋았던 옛 시절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의 관성은 아닐까, 주저하는 마음이 컸습니다. 그러나 어두운 밤을 기도로 뚫어내던 <철야>가 어둡던 제 마음도 시원하게 뚫어내었습니다. 시대가 아무리 변해도 교회의 근간, 영성의 뿌리는 달라질 수 없다는 사실을 다시 뜨겁게 깨닫게 해주었습니다. 교회가 시대를 관통하기 위해 운행하려고 하는 메타버스의 엔진도 결국 기도일 테니 말입니다!

<철야>는 뜨겁기로 소문난 수영로교회의 금요철야기도회의 정신이 무엇인지를 담아낸 책입니다. 구체적인 운영 방안이나 노하우가 아니라, 왜 '철야'기도회여야만 하는지를 뜨겁게 호소하고 있습니다. <철야>는 먼저 한국 교회에서 사라진 '금요철야기도회'를 애통해합니다. '금요철야기도회'의 실종은 한국 교회의 영적 태만과 변질의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금요철야기도회'를 뜨겁게 이어가고 있는 수영로교회는, 한국교회가 금요철야기도회를 잃어버린 것은, 팽배해진 물질주의가 가장 큰 원인이라고 분석합니다(16). 가난했던 심령이 이제 물질로 배부르게 된 것입니다. 돈 버느라 정신이 없었던 세대는 이제 번 돈을 쓰느라 정신이 없고, 배부른 교회는 기도대신 이제 하품을 쏟아내고 있습니다. 고난이 깊을수록 하나님께 매달릴 수밖에 없었던 우리에게, 오히려 축복이 독이 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의 자리에 돈이 앉아 있고, 기도하기보다 돈으로 해결하는 일이 더 빠르고 편리해지니, 무엇보다 하나님을 절실히 찾아야 할 이유가 없어져버린 것입니다.

타협도 문제입니다. 당장 우리 교회만 해도 이름은 '금요철야기도회'인데, 밤 9시에 시작해서 늦어도 11시면 끝이 나니, 철야가 아니라 저녁기도회라 해야하겠지요. 그마저도 코로나19 여파로 가정예배로 전환되어 있는 상태입니다. <철야>를 읽으며 생각해보니, 한창 뜨거웠던(?) 시절에는 밤 9시에 시작해서 새벽 4시까지 이어지는 기도회를 우리는 '철야'라고 불렀고, '철야기도회'는 그렇게 드려지는 것이 당연했데 말입니다. 우리의 철야기도회가 어쩌다 추억이 되어 버렸는지, 하나님 앞에서 죄송할 따름입니다.



금요철야기도회는 파수꾼의 사명이다.

모두가 잠들어 있을 때 깨어 기도하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

깨어 있으려면 남들과 다르게 살아야 한다. 세상의 흐름에 역류해야 한다.

모두가 자는 밤에 일어나 기도하는 것은 일종의 역류다.

나만 깨어 있을 것이 아니라 자는 자들을 깨워야 한다.

깨어 있는 영성으로 공동체를 지키고 시대를 지켜 내야 한다(57).

<철야>가 던지는 호소 가운데 정신이 번쩍 들게 하는 두 가지 문장이 있었습니다. "기도에 대해서 무관심해졌다면 하나님으로부터 받을 것이 없다"는 것(42), "성도들도 어디를 가야 내 영혼이 살 수 있을지 방황하며 찾고 있다"(93)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굳이 '금요철야기도회'가 아니더라도, 새벽기도회, 수요예배 등 기도를 쉬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고 변명을 해보지만, 성도들이 영적 무기력증을 앓으며, 영적 패배주의자로 살아가고 있는 책임이 목회자가 먼저 편리와 타협하고, 시대와 타협한 탓이라고 하는 채찍질이 느껴졌습니다. 교인들이 기도 없이도 잘 수 있다고 믿고 있다면, 그것은 기도의 DNA를 깨우지 못한 담임 목회자의 탓이라는 사실에 온몸이 떨려옵니다. "야성을 가진 신앙인이 되려면 편안한 일상과 싸워야 한다"(54).

수영로교회의 <철야>는 말합니다. 시대정신에 저항력을 키우려면, <철야>만한 것이 없다고 말입니다. 밤을 새워 부르짖는 금요철야기도회는 죄의 열기로 뜨거운 세상에 기도의 열기로 맞붙을 놓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영적인 온도를 높이려면 시간에 구애를 받지 않는 <금요철야기도회>가 답이라고 말입니다.

따라서 교회는 하나님이 충분히 역사하실 수 있는 시간과 공간을 만들어 놓아야 한다.

금요철야기도회는 하나님의 역사를 기대하는 열린 공간이다(83).

한국 교회의 기도의 화력이, 세상 유혹을 다 떨치고 교회로 몰려들 만큼 세상보다 강력하기를! 다음세대를 집어삼키는 죄의 유혹으로부터 다음세대를 넉넉하게 지켜낼 수 있는 강력한 영적 보호막이 되기를! 이러한 간절한 소망을 품고 기도의 용사들과 함께 뜨겁게 일어나 외치고 싶습니다. "역류하자!"고 말입니다!

"금철 미룰 이유가 없다"는 <철야>의 외침이 저에게 성령님의 음성이 되어, 우리 교회도 2022년 4월 29일 다시 금요철야기도회를 연다고 선포했습니다. 기도회를 전진배치하는 것입니다. <철야>를 통해 한국 교회의 기도의 열기가 들불처럼 번져가기를 소망합니다. 우리의 금요일 밤이 기도의 열기로 다시 뜨거워져서, 교회가 영적 권세를 되찾고 도시의 영적 기선을 제압할 수 있기를 기도드립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다시 한번 날게 하소서 - 이어령의 서원시
이어령 지음 / 성안당 / 2022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벼랑 끝에서 새해를 맞습니다.

우리에게 날 수 있는 날개를 주소서.

비상非常에는 비상飛翔을 해야 합니다.

벼랑 끝에서 날게 하소서.

제게 '이어령'이라는 이름을 각인시켰던 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독일의 절약 정신을 본받아야 한다는 이야기를 많이 하던 시절이었는데, 그들은 얼마나 절약 정신이 강한지 담배를 피울 때도, 성냥개비 하나를 아끼기 위해 몇 사람이 모일 때를 기다렸다가 그제야 불을 붙인다는 것이었습니다. 모두가 이러한 독일을 칭송할 때, 이어령 선생님은 우리는 그럴 필요가 없다고 했습니다. "불 좀 빌립시다"라는 한마디면 된다는 것이었지요.

이어령 선생님은 획일성에 갇혀 있는 사고의 문을 활짝 열어제끼며, 자유로운 생각의 힘이라는 것이 얼마나 강한 힘인지 가르쳐주셨던 '생각 선생님'이셨습니다. 무엇보다 익숙해서 미처 알아채지 못했던 '우리 것의 위대함'을 알아볼 수 있게 해주셨지요. 얼마나 감동이었던지요. 그리고 그러한 선생님의 가장 강한 무기는 바로 '이야기'였습니다. 어찌나 이야기를 재미있게 잘 하시는지, 선생님의 책을 읽으면 늘 시간가는 줄 몰랐습니다. 이야기를 통해 각인된 선생님의 교훈은 오랫동안 잊혀지지 않았고, 어떠한 상황에서도 조금만 생각을 달리 하면, 보이지 않던 세계, 새로운 세계가 열린다는 것을 늘 기억하려 애썼습니다. 비상(非常)에는 비상(飛翔)해야 한다는 선생님의 노래(시)처럼 말입니다.

'이어령의 서원시'라는 부제가 붙은 <다시 한번 날게 하소서>는 이어령 선생님이 어떤 분이셨는지를 가장 잘 설명해주는 책이 아닌가 싶습니다. 이어령 선생님이 일생 어떤 일을 해오신 분인지, 우리에게 들려주고자 하셨던 이야기가 무엇인지, 우리에게 무엇을 남겨주고 떠나셨는지를 다시 한번 생각해볼 수 있었습니다. 또한 이어령 선생님은 우리의 교육이 세뇌가 아니라, 천 개의 빛을 만들어내는 아름다운 반란, 상상력의 색깔을 만들어는 창조의 세계가 되기를 꿈꾸셨던 분임을, 이 책, <다시 한번 날게 하소서>가 증언하고 있습니다.

시인처럼 연인처럼 혹은 광기 어린 사람처럼 일상성에서 탈출하는 탈영병이 되어라(68).

<다시 한번 날게 하소서>라는 책을 통해 이어령 선생님이 남겨주신 이야기 중에서, 가장 위로가 되었고, 큰 힘이 되었던 이야기는 많이들 알고 있는 '우물에 빠진 당나귀'이야기였습니다.

당나귀가 빈 우물에 빠졌는데, 농부는 슬프게 울부짖는 당나귀를 구할 도리가 없었습니다. 마침 당나귀도 늙었고, 쓸모없는 우물도 파묻으려고 했던 터라, 농부는 동네 사람들에게 도움을 청해 우물을 파묻기로 했습니다. 사람들은 제각기 삽을 가져와서는 흙을 파 우물 속으로 던졌습니다. 당나귀는 더욱더 울부짖었습니다. 그러나 조금 지나자 놀라운 광경이 벌어졌습니다. 당나귀는 위에서 떨어지는 흙더미를 털고 털어, 바닥에 떨어뜨렸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자기를 묻으려는 흙을 이용해 무사히 그 우물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습니다.

선생님은 이 이야기를 다시 한번 들려주시며, "사람들이 자신을 매장하기 위해 던진 비방과 모함과 굴욕의 흙이 오히려 자신을 살린다"(55-56)고 하십니다. 그러니 "나를 음해하는 진흙이 나를 구해주는 기적의 사다리가 된다"(56)는 것을 기억하라고 말이지요! '벽을 넘는 두 가지 방법'도 이 이야기와 맥락을 같이 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벽에 의지하고 벽에 반발하는 앰비버런스ambivalence(모순)에서 회회가 생겨난다. 그림은 벽에 뚫어놓은 마음의 창이기 때문이다. 창을 벽의 상처라고 말하듯, 그림 또한 피가 흐르는 벽의 상처인 것이다"(69).

<다시 한번 날게 하소서>는 세상을 읽어내고 해석하는 이어령 선생님의 방식을 가장 잘 보여주는 책이기도 합니다. 그것을 대부분 서양의 것과 우리의 것과의 차이를 통해 선명하게 드러날 때가 많은데, 이 책에서도 선생님 특유의 그러한 은유가 가득합니다. 예를 들면, 양옥과 한옥이 집을 올리는 방식의 차이가 그렇습니다. 왜 한옥은 벽을 터도 무너지지 않지만, 양옥은 집 전체가 무너지고 마는지를 알고 싶다면, 이 책을 읽어보시기를 권해드립니다. 또한 우리나라에서는 왜 "국물도 없다"는 말이 욕이 되지도요.

<다시 한번 날게 하소서>에 담긴 이어령 선생님의 이야기들은 '관계론적 사고'의 중요성을 가르쳐주고 있기도 합니다. 예를 들면, 이순신 장군의 거북선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거북선'이라는 실체론적 사고에만 갇혀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거북선의 위대함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순신 장군이 거북선을 가지고 싸우려고 했던 일본의 배가 어떤 것이었는지 알아야 하는 것이지요. 이순신 장군의 위대함은, '적'을 알 때 더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이어령 선생님은 이러한 사고를 '관계론적 사고'라고 말합니다.

이러한 관계론적 사고는 함께 어우러짐의 삶의 철학으로 구현되기도 합니다. 예를 들면, 소음(노이즈)을 제거하는 방식의 서양 음악과 소음을 적극적으로 끌어들이고 포용할 때 완성하는 우리 음악의 차이, 재고 따지고 계산해서 정확한 치수로 만들어지는 양복과 재지 않고서도 평안하게 입을 수 있도록 디자인된 한복 바지의 차이, 넣을 물건이 있을 때나 없을 때나 그 자체로 독립적이며 자기주장이 강한 가방과 이에 비해 물건의 부피에 따라 커지기도 하고 작아지기도 하며 쌀 것이 있을 때는 존재하다가 쌀 것이 없으면 하나의 평면으로 돌아가 사라져버리는 보자기의 차이, 서양의 침대와 한국의 이불(요)의 차이, 사방이 박힌 지하실의 벽과 가변적이고 신축인 우리나라 병풍의 차이, 코스별로 나오는 서양식 상차림과 우리의 한 상 차림의 차이가 그것을 말해주고 있음을 알 수 있지요.

이어령 선생님의 <다시 한번 날게 하소서>는 우리가 신축성, 융통성, 어우러짐, 그리고 그 안에서 빚어진 합리성이라는 위대한 날개를 가진 사람들임을 다시 한번 일깨워줍니다. 이어령 선생님의 서원시처럼, 우리에게 생각의 날개를 주고 싶었던 선생님의 꿈이 오롯이 전해집니다.

요즘 전세계적으로 K-팝, K-브랜드, K-세일 등 K-문화라는 이름으로 K-열풍이 심상치 않는데, 아마도 이런 K-문화의 힘을 통찰하고, 예견하고, 선도했던 시원에 이어령 선생님이 계시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듭니다. 모두에게 이 책의 일독을 권하고 싶지만, 특히 (어떤 상황, 환경에 갇혀 있다고 느끼는) 청년들에게 이 책의 일독을 꼭 추천해주고 싶습니다. 무엇보다, 달걀 꾸러미를 반만 감싸는 방식으로 포장했던 우리 선조들의 위대한 지혜, 그 놀라운 이야기를 꼭 들어보라고 당부드립니다! 달걀 포장 이야기는 창의적인 분야에서 일하는 분들에게 놀라운 통찰력을 제공해줄 것이라 믿습니다.

이어령 선생님은 웃으며 이렇게 경고합니다. "견고한 틀과 사고로 무장한 사회와 조직은 생사람을 잡아요"(19). 갇힌 사고에서 나오는 신념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위험하고 폭력적일 수 있습니다. 유연한 생각의 힘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강할 수 있고요. 우리가 맹신하는 돈의 힘보다 훨씬 강하다고 믿습니다. 그러니 어려울수록, 아니 벼랑 끝이라는 비상 상황일지라도, 하늘 보고, 바람 맞고, 꽃을 보고, 날아가는 새를 보면서, 이 책 한 권 읽어보자고, 먼저 읽은 독자로서 기쁘게 청해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슬기로운 메타버스 교회학교 - 이 시대의 땅끝, 메타버스에 복음을 전하다
신형섭.신현호 지음 / 두란노 / 2022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코로나19 팬데믹 속에서 이전과 전혀 다른 형태의 예배와 기도, 찬양과 교제, 성경 공부와 양육, 심방과 선교를 시행하면서 우리는 다시금 하나님의 영적 작전 타임 앞에 서게 되었다"(18).

<슬기로운 메타버스 교회학교>는 코로나19 팬데믹으로 모든 것이 멈춘 것 같은 바로 지금 이 시간이, 하나님 앞으로 모든 사역자를 불러 모으는 하나님의 영적 작전 타임이라고 알립니다. 지금 이 멈춤의 시간은 강력한 충전의 시간이면서, 동시에 새로운 경기를 준비해야 하는 시간이라는 것입니다. <슬기로운 메타버스 교회학교>는 이를 이렇게 비유합니다. "코로나19 팬데믹은 날씨가 아니라, 기후 자체를 바꾸어 버렸다." 멈추어 선 것 같지만, 사실 세상은 지금 아무도 경험해보지 못한 새로운 환경 속으로 빠르게 이동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인류는 이제 3개의 세상에서 살아가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아날로그 세상', '디지털 세상', 그리고 새롭게 열리는 '메타버스 세상'이 그것입니다.

메타버스, 이 시대 복음 전파의 땅끝이 되다

코로나19 팬데믹으로 대면 예배가 어려워졌을 때, 그때 막 개척을 시작했던 우리 교회는 '줌'과 같은 화상 예배로 전환하자는 의견이 많았지만, 저는 끝까지 대면 예배만을 고집했습니다. 여러 가지 어려운 사정이 있어지만, 아마도 가장 큰 이유는 비대면 예배에 익숙해지는 것에 대한 저항감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슬기로운 메타버스 교회학교>는 저의 고집을 단번에 박살내 버렸습니다. 세상은 이미 메타버스 세상으로 빠르게 이동 중이었고, '메타버스'라는 영역 안에 하나님 나라의 깃발을 꽂는 것은, 선택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 생존의 문제라는 것이 깨달아졌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책을 통해 주님은, 이것이 긴급한 부르심이라는 경종을 울리고 계셨습니다!

아이들은 이미 거기서 살고 있다

올해 초, 고등학교에 진학하는 청소년을 축하하고 격려하기 위해 온 성도가 마음을 합쳐 '기프트 박스'를 준비한 일이 있습니다. 함께 예배드리는 장년 세대가 준비한 선물 중에는 다이어리나 펜과 같이 필기를 할 수 있는 도구들도 많았는데, 요즘 아이들은 학교에서 필기를 하지 않는다는 말을 듣고 깜짝 놀라는 일이 있었습니다. 디지털 세상에서 성장한 세대가 얼마나 다른 삶을 살고 있는지 단적으로 알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슬기로운 메타버스 교회학교>는 다음 세대에게 온라인 세계는 이미 익숙한 세계이며, 그들에게 온라인 세상은 차선이 아닌 우선이라는 것을 직시하도록 돕습니다. 다시 말해, 그들이 살고 있는 '세상 속으로' 들어가 복음을 전해야 할 사명을 일깨우는 것이지요. 다음 세대에게 메타버스 세상은 미래에 언젠가 경험할 공간이 아니라, 이미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 놀이터이자 삶의 현장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제 교회는, 전혀 다른 목회 생태계의 변화 앞에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를 고민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메타버스, 어떻게 해석하고 활용할 것인가?

가상 현실과 증강 현실을 통한 신앙 교육을 고민할 때, 교회가 절대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복음의 본질, 예배의 본질이겠지만, 이와 함께 병행되어야 할 것은 바로 다음 세대에 대한 따뜻한 공감과 이해가 아닐까 생각됩니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메타버스 세상에 대해 교회가 오해하기 쉽고, 실수하기 쉬운 몇 가지 지점을 날카롭게 교훈해줍니다.

첫째는, 기존의 교회학교 현장을 메타버스로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대체가 아닌 확장과 상보성이라는 관점으로 접근해야 함을 강조합니다. 그리고 둘째는, (일방적으로) 보여 주는 방식이었던 신앙 교육을 '참여'하는 자리로 전환하는 것이 핵심이라고 강조합니다. 그런 관점에서 메타버스 교획학교는 확장과 눈높이 교육을 위한 중요한 선교지인 것입니다. "이 시대는 지식을 넘어 경험을, 동의를 넘어 참여를, 사고보다는 이미지를, 단절보다는 관계적 공동체 안에서 반응하고 변화하는 세대가 되었다. 책보다는 동영상을 통하여 학습하는 일에 익숙하고, 수동적 학습보다는 적극적인 참여로 성장하는 것을 선호하는 다음 세대에게 보다 상호 학습적이고 다중적 채널의 의사소통이 열려 있는 메타버스에서의 경험은 매우 환대적이며 안전한 공간으로 인식된다"(50).

"결국, 진짜 중요한 것은 다음 세대 예배와 양육이 대면이냐, 비대면이냐가 아니라, 어떤 접근이든 우리의 사역이 다음 세대에게 '하나님 대면'을 하도록 돕고 있는가다"(59).

<슬기로운 메타버스 교회학교>를 통해 지금이 얼마나 중요한 하나님의 영적 작전 타임 시기인지, 그리고 어떻게 메타버스 세상을 준비해야 하는지, 그리고 현재 교회학교 현장에서 어떻게 활용되고 있는지, 기초 개념부터 차근히 배울 수 있었습니다. 앞으로 조금 더 구체적이고 직접적으로 메타버스 세상에 입문할 수 있는 매뉴얼도 나오기를 기대해봅니다. 이런 세상이 있다는 것은 알게 되었으니, 이제 그 세상 안으로 발을 들여놓으려면 어디서부터 어떻게 시작해야 하는지 (기술적인 면에서?) 구체적으로 더 배워보고 싶습니다.

"그렇기에 우리가 주목하고 견고히 붙들어야 할 본질적 대상은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게 했던 전통과 양식이 아닌, 그 전통과 양식을 통해 은혜를 공급해 주신 하나님의 현재적 부르심과 응답이다"(30).

이 책을 읽으며, 우리는 이제 더 이상 코로나19 이전 세상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확실히 인정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주어진 과제는, 변화하는 세상 속에서 우리가 은혜를 경험했던 방식을 고집하고 재현해 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현재적 부르심에 응답하여 하나님이 열어가시는 새로운 길을 믿음으로 걸어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책의 저자는, "많은 사람이 '모이는 호수' 같은 교회가 아닌, 세상을 향하여 힘 있게 '나아가는 강' 같은 교회"가 되자고 외칩니다. 그동안 교회 건물 안으로 모이는 데에 열중해왔다면, 이제는 세상 속으로 흘러 들어가 곳곳을 새롭게 하는 꿈을 다시 꾸어야 할 때인 것입니다.

<슬기로운 메타버스 교회학교>는 하나님 나라를 위해, 복음을 위해 일하는 일꾼으로 부름받은 모든 이가 반드시 읽어야 할 책입니다. 많은 이들이 기업의 이동, 부의 이동, 직업의 이동에 초점을 두고 메타버스에 주목할 때, 복음의 마지막 주자들은 그곳이야말로 복음이 선포되어야 할 땅끝임을 인식하고 보다 전략적으로 접근할 필요가 있겠습니다. 낯선 세계에 대한 불안과, 다음 세대가 이미 살아가고 있는 세상을 부정하거나 알려고 하지 않는 우리의 나태함을 회개하고, 땅끝을 향해 담대히 행진하는 데 이 책이 하나님의 나팔소리가 되어줄 것을 믿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목회와신학 (월간) : 1년 정기구독
두란노서원 / 2000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발 빠른 회개보다 묵묵하게 고난의 현실을 살아가는 힘이 필요하다.

교회 개척을 시작하고, 늘 아쉬운 점이 하나 있습니다. 목회 방향에 대한 고민이나, 목회 현장에서 겪는 어려움들을 함께 나눌 동료 목회자가 없다는 것입니다. 많은 목회자와 동역하는 것이 습관처럼 당연했다가, 이제는 모든 것을 혼자 결정하고 준비해야 하니 외롭기도 하고, 어렵기도 합니다. 또 혼자서 여러 가지 사역을 감당하다 보니, 교계 소식에 둔해지기도 하고, 목회 현장에서 발생하는 이슈를 뒤늦게 전해들을 때는 아무런 대안이 없다는 사실에 순간 긴장감이 확 몰려올 때도 있습니다.

오랫만에 정독하게 된 <목회와 신학>, 그리고 <그말씀>이 유난히 반가웠던 건, 이 때문입니다. 그리고 새삼, <목회와 신학>이 목회 현장에 있는 목회자들에게, 특히 개척 교회 목회자들에게 얼마나 좋은 동역자인지를 실감할 수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당장 눈앞에 닥친 우리 교회만의 당면 과제뿐 아니라, 이 시대의 고민은 무엇이며, 그 대안은 무엇인지, 목회 현장은 어떻게 변화하고 있으며, 어떤 준비를 필요로 하는지를 함께 고민해볼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목회와 신학> 2월호에서는 '스페셜 인터뷰'로 남포교회 원로목사님이신 박영선 목사님의 인터뷰를 만나볼 수 있었는데, 첫 페이지부터 충격적이었습니다. "발 빠른 회개보다 묵묵하게 고난의 현실을 살아가는 힘이 필요하다"는 목사님의 한마디가 묵직한 교훈으로 다가왔기 때문입니다. 고난을 극복해야 하는 개념으로만 이해하면, 인생 속에 일어난 실패와 자책을 회개로 지워버리려는 시도를 하게 된다는 말씀이 충격적이었습니다. "신앙 인생에서 실패를 회개로 지워버리는 것이 아니라 그 실패를 다음을 위한 실력과 지혜가 되는 데까지 나아가야 하고 자라야 한다"는 말씀에, 우리가 목회 현장에서 얼마나 많이 이런 실수를 반복해왔던가 반성하게 되었습니다. 특히 어려운 시기를 살아내는 성도들에게, "지금 우리가 사는 시대에서는 고난을 짊어지고 오해와 왜곡과 부당한 삶 속에 살아가야 합니다"(36)라는 박영선 목사님의 메시지를 깊이 있게 나눠보고 싶습니다. 그리고 그 고난을 '살아낼' 믿음의 실력을 함께 키워야겠다는 각오가 다져집니다.



<목회와 신학> 2월호는 <MZ세대를 품는 목회>를 특집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미디어를 통해 요즘 세대를 'MZ세대'라고 부른다는 것은 알고 있었는데, 목회 현장에서 그들을 어떻게 이해하고, 또 어떤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하는지를 깊이 있게 고민해볼 수 있어 신선했습니다. 그중에서도 "교회는 '내가 희생하여 섬겨야 하는 공동체'라기보다는 '나에게 종교 서비스를 제공하는 교역자(또는 리더) 집단'으로 여긴다."는 것과, "교회를 종교 서비스 기관으로만 대한다면 교회는 늘 불만스러울 수밖에 없다"는 것에 대해 생각이 많아졌습니다. 목회 현장에서 MZ세대를 만날 때, 가끔 외계인 같다고 농담을 할 정도로 놀랄 때가 많은데, 그들을 진심으로 이해하려는 노력이 부족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목회와 신학>을 통해, 목회 현장에서 발행하는 고민에 신학적인 대안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다시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목회와 신학>, 그리고 <그말씀>이 주는 또 하나의 큰 유익 중에 하나는, 목회 현장에서 선포되어지는 '설교'가 늘 신학적으로 검증되어지고, 더 깊이 있게 연구되어야 한다는 점을 긴장감 있게 일깨워줄 뿐만 아니라, 그것을 적극적으로 도와준다는 점입니다. 목회 현장에 있으면 가장 중요하면서도 부담을 많이 느끼는 사역이, 설교를 준비하는 시간일 것입니다. 성경을 묵상하고 연구하는 시간은 늘 충분하게 느껴지지 않고, 시간에 쫓기며 설교문을 작성하다 보면 뭔가 채워지는 느낌보다 소모되는 느낌에 시달리기 때문입니다. <목회와 신학>은 목회자들의 그러한 고민을 가장 가까이에서, 가장 직접적으로 도와주는 전문적인 동역자가 아닐까 싶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나는 나의 것이 아니다 - 이 세상에서 하나님에게 속한다는 것의 의미
앨런 노블 지음, 정성묵 옮김 / 두란노 / 2022년 1월
평점 :
품절




"우리는 이런 식으로 살도록 창조되지 않았다."

이 책은, "내 인생은 나의 것"이라는 인간의 '독립 선언'이 어떻게 인간 삶을 병들게 했는지를 폭로합니다. '주코시스'(zoochosis)라는 말을 아십니까? 동물원(zoo)과 정신병(psychosis)의 합성어인 주코시스는, "동물원의 사자들이 우리 안을 불안하게 서성거리는 증상을 지칭하는 용어"라고 합니다(27). <나는 나의 것이 아니다>의 저자 '앨런 노블'은, 동물원에 갇힌 사자처럼 현대인들이 주코시스를 앓고 있다고 진단합니다.

동물원을 아무리 사자의 서식지와 비슷하게 조성한다 해도 동물원은 동물원일 뿐이며, 동물원에 갇힌 이 불쌍한 짐승은 병들지 않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 불쌍한 동물들은 동물원에 갇혀 살도록 창조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사자를 미치게 하고 있지만, 우리는 이 불쌍한 동물을 위해 해줄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고 느낍니다. "대부분의 동물원 방문객들은 불안감과 강박증에 시달리는 동물을 보며 마음은 불편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라는 결론을 내"립니다(29). 그리고 저자는 바로 이것이 현대인들이 앓고 있는 병이며, 그 병을 대하는 태도라고 지적합니다.

이 책에 의하면, 지금 현대 세상은 중병을 앓고 있습니다. 이토록 많은 사람이 우울증, 불안증, 목적 없음에 시달리는 것은, 우리 안의 사자처럼 어색하기 짝이 없는 환경, 즉 자신과 맞지 않는 환경 속에서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소비하는 방식, 자신을 이해하는 방식, 서로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방식, 노동하는 방식, 쉬는 방식 모두 질병의 증상을 보이고 있습니다. 현대 사회는 인간이 살아가야 할 마땅한 방식을 거스르고 있습니다. 인간은 이처럼 자신에게 전혀 맞지 않는 환경에서 살고 있으면서도, 마치 동물원의 사자를 바라보는 마음처럼, 마음은 불편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삶의 질병을 바로잡는 일에는 손을 놓고 있습니다. 인간이 이렇게 속수무책이고, 무기력한 것은, 문제의 원인(뿌리)이 어디에 있는지 통찰하지 못하기 때문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내가 나의 주인이다." 이는 현대 사회의 큰 거짓말이다.

현대 세상이 중병을 앓고 있는 이유는, "내가 나의 것이며 나에게 속했다는 가정에 따라 사회를 건설했기 때문"(41)이라는 것이 저자의 통찰입니다. 이 책은, 인간이 '자기 주인'이 될 때, 즉 내가 나의 것이라는 믿음이 어떻게 비인간적인 사회를 형성하는지를 날카롭게 추척해냅니다. 또한 내가 나의 것이고 나에게 속했다는 사실이 인간에게 얼마나 무겁고 버거운 짐이 되고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내가 나의 것이고 나에게 속했다는 것은 나의 존재와 거기에 따르는 모든 것에 대한 책임이 나에게 있다는 뜻이다. 목적 있는 삶을 사는 것, 내 정체성을 정의하는 것, 의미 있는 사건들을 해석하는 것, 내 가치를 선택하는 것, 내가 어디에 속할 지를 선택하는 것에 대한 모든 책임이 나에게 있다"(15).

저자는, 자기 삶의 의미에 대해 스스로 책임을 져야 한다는 사실이 정체성 구축과 표현을 통해 삶을 정당화하려는 절박한 욕구로 나타난다고 봅니다. 그리하여 사회는 관심과 의미를 얻으려는 개인들 사이의 지독한 경쟁의 장이 되고 맙니다. 스스로 자신의 심판관이요 구속자가 되어야 하는 인간은, 끝없는 자기 개선의 굴레에서 고갈과 공허함을 다루기 위해 자기 치료를 해야 합니다. 어떤 이들은 술을 마시고, 어떤 이들은 폭식을 일삼고, 어떤 이들은 밤새도록 드라마를 보고, 어떤 이들은 게임이나 일중독에 빠지고, 어떤 일들은 밤새도록 인스타그램을 보고, 어떤 이들은 건강이나 미모에 집착하기도 합니다. 다시 말하지만, 인간은 이렇게 살도록 창조되지 않았습니다. "인간은 '어떤 사람이 되는 것'에 관해 걱정하는 유일한 피조물이다(80).



"누구에게 속하는 것이 안전한가"

<나는 나의 것이 아니다>는 비인간적인 사회를 치료하는 대안은 하나 뿐이라고 잘라 말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그리스도께 속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속했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때, 우리의 삶은 어떻게 달라지게 될까요? 우리가 그리스도께 속하는 것은 그분의 은혜 안에서 우리의 존재를 찾고, 그분 앞에서 투명하게 사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 속하면 필연적으로 우리는 그분의 몸인 교회, 그리고 가족과 이웃에게 속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런 속함에서 자연스럽게 비롯하는 의무, 미덕, 사랑의 제약을 기쁘게 받아들 수 있습니다. 속함은 한계를 요구하는데, 하나님께 속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한계를 알고 지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한계 안에서 살도록 창조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정하신 그 한계가 우리를 지켜주는 질서요, 안전장치인 셈입니다.

"내가 나의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것이라면 우리의 삶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할 수 있는 일도 없고 해야 할 일도 없다. 자아를 실현하거나 우리의 존재를 정당화하기 위한 노력은 그릇된 가정에서 출발한다. 누군가 우리의 삶을 정당화할 필요가 없다거나 스스로를 증명해 보일 필요가 없다고 말하면 대개 그것은 이런 뜻이다. "당신은 있는 그대로 특별하고 중요합니다"(215).

<나는 나의 것이 아니다>, 이 책은, 인간 삶의 전방위적 통찰을 통해, 인간에게 독립선언보다 더 위대한 선언은 <나는 나의 것이 아니다>라는 진리에 있다는 것을 일깨워줍니다. 우리 삶과 사회를 갉아먹는 질병의 뿌리가 "내 인생은 나의 것"이라는 거짓말에 있다면, 이 사회를 치유할 유일한 치료제는 "내 삶은 주의 것"이라는 인정에 있다는 것입니다. 아마도 기독교적 신앙에 거부감을 가진 독자라면 이 책이 제시하는 대안에 저항하고 싶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스스로에게 솔직하게 이 책을 정독한다면) 나는 나의 것이라는 가정에 따라 건설된 인간 사회가 병들어 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내가 나의 것이라고 고집한다면, 계속해서 불안을 겪을 수밖에 없다는 것도 인정해야 할 것입니다. "오직 인간만이 자신의 환경을 비인간적으로 만들 수 있다"(30)는 한마디가 참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줍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이 병들어 있다는 것, 무엇인가 잘못되어 있다는 것을 느끼며, 근본적인 대안을 찾기 원하는 독자들에게 일독을 권하고 싶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