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의 사람 - 제142회 나오키상 수상작
시라이시 가즈후미 지음, 김해용 옮김 / 레드박스 / 2013년 2월
평점 :
절판


 

 

 

"만나야 할 사람은 언젠가 꼭 만나게 된다고 들었어요."

- 영화 <접속> 중에서 -

 

사랑이라는 걸 처음 꿈꾸기 시작했을 때, "이 사람이다" 한 눈에 알아볼 수 있는 운명의 짝이 있을 거라 믿었습니다. 그 사람이 운명의 짝인지 어떻게 알아 볼 수 있는지는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그건 어떻게든 알게 될 거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어떤 드라마에서는 심장이 먼저 그를 알아보고 뛰었습니다. 어떤 소설에서는 그 사람 뒤로 후광이 비쳤다는 고백이 있었습니다. 어떤 영화에서는 그를 본 순간 그를 제외한 모든 것이 정지되는 현상이 일어났습니다. 만약 세상에 이런 일이 실재하지 않는다면, 이런 이야기들이 만들어질리가 없다고 혼자 이론을 세우기도 했습니다.

 

 

"사랑이란 게 처음부터 풍덩 빠지는 것인 줄로만 알았지, 이렇게 서서히 물들어버릴 수 있는 것인지 몰랐어."

- 영화 <미술관 옆 동물원> 중에서 -

 

그러다 알았습니다. 첫 눈에 알아보는 운명의 짝도 있지만, 옆에 있어도 그 운명을 알아보지 못할 수도 있다는 것을 말입니다. 처음부터 풍덩 빠지는 사랑만이 운명이라고 생각했던 제게 이것은 뼈아픈 교훈이었습니다. 사랑에 풍덩 빠져들려고만 했지, 만들어갈 줄은 몰랐기 때문입니다. 가슴이 뛰지 않는다는 이유로 모두를 보내버린 뒤, 나타나지도 않는 인연을 기다리느라 어느새 풋풋한 사랑을 할 나이가 훌쩍 지나 있다는 것도 눈치채지 못했습니다.

 

 

"그게 아니야. 모두 철저하게 찾지 않았을 뿐이야.

가장 좋은 상대를 발견한 사람은 모두 그 증거를 가지고 있다니까."

- <운명의 사람>, 153 -

 

그런데 사랑에 회의가 들기 시작한 것은 운명의 짝을 못 만났기 때문이 아닙니다. 운명인줄 착각하고 빠져들다 그 운명에 된통 걷어차이는 사람들을 너무 많이 목격했기 때문입니다. 어떤 만화책에서 이런 글을 읽은 기억이 납니다. "사랑이 영원하다고 믿는 것은 사람들이 100년밖에 살지 못하기 때문이다." 오-래- 살다보면 운명 같은 사랑도 빛이 바래고, 열병 같은 사랑도 식어진다는 것, 그것은 이미 보편적인 진리입니다. 그러고 보면 사랑의 최대 천적은 '시간'인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시라이시 가즈후미의 <운명의 사람>은 제목이 다소 클래식(?)합니다. 그러나 그 내용은 다분히 '현실적'입니다. 나오키상 수상작인 <운명의 사람>은 평단으로부터 "남녀 간의 문제를 정면으로 잘 다룬 작품이다. 남녀 관계에 도사리고 있는 역학의 문제를 본인만의 독특한 설정과 참신한 문장으로 제대로 표현해낸 수작"이라는 극찬을 받았습니다. 남성 작가도 이런 사랑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다는 사실이 새삼스럽습니다.

 

이 책에는 2편의 사랑 이야기가 담겨 있습니다. 첫 번째 사랑은 <이 세상에 단 하나뿐인 너>이고, 두 번째 사랑은 <그 누구보다 소중한 너>입니다. <이 세상에 단 하나뿐인 너>는 명문가의 자제로 태어났으나 잘난 가족들 틈에서 열등한 자신을 사랑하지 못하는 한 남자가 주인공입니다. 주인공 아키오는 우연히 들어간 술집에서 운명 같이 찾아온 여인을 만납니다. 술집에서 일하는 나즈나는 아키오를 보고 감이 딱 왔다고 말합니다. "전에도 말했지만 우리 아버지가 그 모양이라서 난 정식으로 남자를 사귀면 절대 바람피우지 않는 사람과 사귀겠다고 다짐했어요. 또 내가 일하는 곳이 그런 곳이라서 남자들 생리를 잘 알거든요. 그런데 아키오 짱을 보는 순간 '앗, 찾았다' 하고 감이 딱 왔어요." 둘은 그렇게 만나 결혼까지 합니다. 아키오는 그녀와 결혼하기 위해 집안과의 인연도 끊다시피 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사랑이 삐끄덕거리기 시작합니다. 아키오를 보고 감이 딱 왔다고 했던 나즈나에게 사실 다른 사랑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옛 연인에게 마음이 흔들리는 나즈나, 어느새 나즈나가 자신에게 가장 좋은 상대는 아니라고 생각하게 된 아키오. 불행히도 그들은 서로에게 운명의 사람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부부로 인연을 맺었지만, <이 세상에 단 하나뿐인 너>는 서로가 아니었던 것입니다. 아키오는 나즈나와의 문제로 골치를 앓느라 운명의 사람을 옆에 두고도 알아채지 못합니다. 그러나 나즈나를 처음 보았을 때처럼 풍덩 빠져들지는 않았지만, 그 운명의 사랑에 서서히 물들어갑니다.

 

<그 누구보다 소중한 너>는 약혼자가 있지만, 몇 년 전 인연을 맺었던 유부남 구로키와 다시 만남을 갖고 있는 한 여자가 주인공입니다. 주인공 미하루의 사랑은 무덤덤하기만 합니다. 미하루는 어떤 소설가의 글을 떠올립니다. "이 세상엔 반드시 있어야 하는데 없는 게 두 가지 있다. 그 중 하나는 정의, 다른 하나는 바로 드라마이다"(224). 그녀는 자신의 인생에 드라마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약혼한 후 구로키와 다시 만난 것은 분명 큰 이유가 있었지만, 그녀는 그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합니다. 그렇게 두 남자 사이에서 어정쩡하게 서 있던 미하루는 결혼식 전날, 구로키의 집을 찾아갑니다. 두 사람 사이에 존재하는 것은 다소 변태적인 형태의 섹스가 전부였습니다. 그런데 자신의 생일날이면 구로키가 "습관"처럼 케이크를 산다는 것을 알았을 때 미하루는 온몸이 떨릴 만큼 놀랍니다(291). 열병처럼 들떠 사랑을 고백하지도 않고, 자신을 흔들지도 않는 그 남자가 줄곧 자신을 기다려왔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있을 때는 절대로 모른다. 헤어져봐야 아는거야, 얼마나 사랑했는지는..."

- 영화 <사랑을 놓치다> 중에서 -
 

<운명의 사람>은 두 편의 결말이 독특합니다. 모두 '사랑하는 사람의 부재'로 이야기를 끝맺습니다. 작가는 독자에게 "운명의 사랑은 반드시 있다, 그러니 포기하지 말고, 적당히 타협하지 말고, 그 상대를 열심히 찾으라"는 메시지를 던져줍니다. 그런데 왜 두 편의 사랑 이야기 모두 '사랑하는 사람의 부재'라는 설정으로 이야기를 끝냈을까요? 정말 소중한 것은 잃어버렸을 때 비로서 알게 된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요? 열심히 증거를 찾지 않으면 결국 사랑을 놓친 후에 후회하게 된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요?

 

평범한 일상을 함께하면서도 그 사람이 운명인줄 몰랐던 아키오도, 온몸을 전율시키는 남자와 사랑을 나누면서도 그 사람이 운명인줄 몰랐던 미하루도 그것이 운명이라는 '증거'를 이미 가지고 있었습니다. 몰랐을 뿐입니다. 뒤늦게 서로가 운명이라는 것을 알았지만, 아키오는 또다른 운명으로 사랑을 잃어야 했고, 미하루의 사랑은 시작도 하기 전에 끝이 나고 말았습니다.

 

 

"그러니까 사람의 인생은, 죽기 직전 마지막 하루라도 좋으니까, 그런 가장 좋은 상대를 발견하면 성공한 거야.

말하고 보니 보물찾기랑 비슷하네."

- <운명의 사람>, 153 -

 

운명의 짝은 분명히 있을까요? 그 사람이 운명의 짝이라는 것은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운명의 사람>은 운명의 상대를 만나는 것은 보물찾기와 비슷하다고 말합니다. 보물찾기를 하는 것처럼 그 '증거'를 열심히 찾으라고 합니다. 철저하게 찾는다면 확실한 증거를 '반드시' 발견하게 될 것이라고 약속합니다.

 

운명적인 사랑은 환상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어른들은 찾아봐야 별 사람 없다고도 합니다. 그런데 어쩌면 그런 상대가 없는 것이 아니라, 알아보지 못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터무니 없는 욕심 때문에, 이기심 때문에, 헛된 꿈 때문에, 상처받지 않으려는 보호본능 때문에 우리의 눈이 어두워져 있을 지도 모릅니다. 성경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지혜는 명철한 자의 앞에 있거늘 미련한 자는 눈을 땅 끝에 두느니라." 아직 사랑을 꿈꾸고 있다면, 운명의 상대가 있다고 믿고 있다면, 먼 곳만 쳐다보다 가까이에 있는 사랑을 알아보지 못하는 일이 없도록, 너무 늦은 깨달음으로 사랑을 잃은 후에 아파하는 일이 없도록, 주변부터 샅샅이 살펴볼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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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를 바라보라 - 나를 빚으신 주님이 내게 바라시는 것
켄 가이어 지음, 최요한 옮김 / 아드폰테스 / 2013년 2월
평점 :
절판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 _ (히브리서 3:1)

 

교회력으로 지금은 사순절 기간입니다. 사순절은 "우리 위해" 당하신 예수님의 고난을 깊이 묵상하며, 그 고난에 동참하는 절기입니다. 예수님의 고난을 묵상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십자가를 바라보라>의 저자 켄 가이어는 독특한 접근을 시도했습니다. 미켈란젤로의 조각품 <피에타>를 그 도구로 삼은 것입니다.

 

켄 가이어의 <십자가를 바라보라>는 사진작가 로버트 훕카에게 신세를 지고 있습니다. 로버트 훕카는 1964년 뉴욕 세계 박람회에서 미켈란젤로의 <피에타>가 전시되었을 때 그 기록 사진을 찍은 작가입니다. 그는 "여러 날에 걸쳐 각도와 조명을 달리해서", "수천 장에 달하는 사진을 찍고 또 찍었"습니다. 신기하게도 로버트 훕카의 사진은 "각도가 다르면 주제도 다르고, 보는 이의 생각과 느낌도 달라"집니다(9). 켄 가이어는 바로 이 사진작가가 포착해낸 <피에타>의 여러 주제를 십자가의 메시지와 연결시킵니다.

 

켄 가이어는 "이 위대한 예술 작품을 통해 하나님이 말씀하고 싶으신 것", 그것을 찾아내었습니다. <피에타>가 주는 감동을 타고 하나님 나라의 메시지가 우리 심장까지 흘러옵니다. 그 메시지는 큰 소리를 내지 않지만 조용히 우리 삶을 바꿔놓는 힘을 가졌습니다. 켄 가이어는 이것이 바로 "영혼을 들썩이는 예술의 힘"이라고 표현합니다.

 

 

  

 

"나는 대리석에서 천사를 보았어. 그래서 그가 풀려날 때까지 조각하고 또 조각했어"(26).

 

켄 가이어는 미켈란젤로가 일했던 방식에서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식을 봅니다. 예술가가 돌 안에 갇힌 형상을 풀어놓기 위해 정과 끌을 들고 돌을 깍아내듯이, 하나님도 우리에게 그렇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성경 강의를 하신 분들의 강의안을 보면 켄 가이어의 말이 많이 인용되어 있습니다. 단순하면서도 핵심을 찌르는 그의 문장은 깊은 묵상으로 독자를 인도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생의 '모든' 상황을 연장으로 사용하신다. 그분이 일하시는 방식은 미켈란젤로가 일했던 방식과 똑같다. 투박하게 잘린 자아라는 돌 안에는 그리스도의 형상이 갇혀 있다. 그 형상을 풀어놓기 위해 그분은 예수가 아닌 모든 것을 깎아내신다(60-61).

"우리는 그분이 손수 만드시는 작품이다"(67).

 

켄 가이어는 "조각의 본질이 돌을 버리는 것이듯 그리스도의 형상을 본받는다는 것의 본질도 자아를 버리는 것"(66)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우리 안에 숨어 있는 그리스도의 형상이 드러나기까지 우리의 자아를 깨뜨리는 수고를 쉬지 않으십니다. "그리스도의 아름다움. 그게 우리의 목적지이다"(68).

 

우리를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로 만드는 것. 이것이 하늘에서 가장 중요한 일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열정적인 예술가이시므로 마음에 그리신 모든 걸 완성하실 때까지 쉬지 않으신 것이다(빌 1:6).

"누가 우리를 괴롭히든지 우리의 고통은 하나님이 뭔가를 만들어내시는 원재료이다"(93).

 

그런데 문제는 돌에게는 그 과정이 고통이라는 데 있습니다. "과정이라는 시기는 혼란스럽다. 그 시간에는 돌이랄 수도 없고 예술품이랄 수도 없다. 채석장에 있는 것도 아니고 미술관에 있는 것도 아니다"(66).

 

<십자가를 바라보라>는 인생에게 닥치는 '고통'의 의미를 새로운 각도에서 바라보게 해줍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손길이며, 예술품이 탄생하는 과정이며, 우리가 받아들여야만 하는 무엇이며, 무엇보다 '아름다움'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메시아를 계획하셨고, 메시아의 고난과 죽음을 계획하셨다는 사실은 감동으로 받아들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닥쳐오는 고난에 대해서는 언제나 "왜?"라는 의문을 갖습니다. 하나님은 마치 우리의 고난을 없애주시기 위해'서만' 존재하는 분으로 생각합니다. 이유를 알 수 없는 고통, 인생을 낭떨어지로 밀어버리는 것 같은 고난을 만나면 하나님을 부인하고 하나님을 떠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켄 가이어는 미켈란젤로의 <피에타>를 통해 돌에게는 잔인하기만 한 망치와 서늘한 끌이 결국 무엇을 만들어내는지를 봅니다. 그리고 그 예술가의 손길에서 동일한 하나님의 손을 봅니다. "돌덩이는 점점 조각품으로 변모한다. 돌의 내면에 뿌리박힌 저항을 깨고 영원한 뭔가가 드러나는 게 보인다. 돌은 점점 더 아름답게 변화한다"(67).


 

  

"이 사람이 정말로 왕이었다면 궁금한 게 있다. 그 나라는 어떤 나라일까"(123).

 

켄 가이어는 미켈란젤로의 <피에타>를 감상하며 놀라운 통찰을 보여줍니다. <피에타>가 보여주고 있는 예수는 "가장 비참한 그리스도의 모습"입니다. 세상의 권력자, 영웅의 조각상들은 하나 같이 모두 위엄과 권위를 가진 형상을 하고 있습니다. 켄 가이어는 한 전시회에서 클레오파트라의 전신상을 감상한 일을 적고 있습니다.

 

전시장에는 클레오파트라 진신상이 여럿 있었다. 모두 당당하게 서서 한 손으로는 장수의 상징인 이집트 십자가를, 한 손으로는 풍요의 상징인 뿔을 들고 있었다. 앞머리를 장식한 것은 왕족의 상징, 즉 머리가 크게 부푼 코브라 세 마리였다. <피에타>의 이미지와는 사뭇 달랐다. 클레오파트라는 강해보였다. 그리스도는 약해보였다(122).

<피에타>가 우리에게 보여주는 그리스도의 형상은 세상의 영웅과 정반대의 모습입니다.

 

초라하게 팔과 다리와 몸통을 잡아당기는 중력의 포로가 된 그리스도. 왕의 위엄은 고사하고 품위마저 찾아볼 수 없다. 그리스도는 당당하게 서 계시지 않고 여인의 무릎에 생기 없이 누워 계신다. 어의를 입고 계신 것도 아니다. 겨우 작은 천으로 몸을 가리고 계실 뿐이다(123).

성경은 이 분이 우리의 왕이라고 선포합니다. 그런데 그분은 클레오파트라와 같이 "당당한 모습으로 일어나 한손으로는 생명에 대한 절대 권력을 쥐고 한 손으로 확실한 복을 쥐고 있는 권력자"의 모습도 아닙니다. 미켈란젤로의 또다른 작품 <다비드>처럼 "물매를 손에 들고 적을 노려보는 강인한 용사"도 아닙니다. 미켈란젤로가 조각한 <모세>처럼 "법의 준엄함이 느껴지는 표정으로 십계명 석판을 들고 재판관 자리에 앉아 있는 입법자"도 아닙니다. 우리의 왕은 "스스로를 깨끗이 비우셨던 예수님. 하늘나라에서의 지위, 즉 신성과 왕권을 포기하셨던 예수님. 명예를 포기하셨던 예수님. 종이 되기 위해 존귀한 자리를 포기하셨던 예수님"(123-124)이십니다.

 

 


 

"십자가는 '자아'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태양계에 일대 코페르니쿠스의 혁명을 일으킨다"(125).

 

<십자가를 바라보라>는 왜 우리의 왕이 이처럼 연약한 모습을 하고 있는지를 설명해줍니다. 그분의 모습은 "스스로의 욕심을 채우고, 자신을 의지하고, 제멋대로 행하고, 자기를 방어하고 보존하고 자랑하는 모든 자아에 대해 죽은 자의 형상"입니다.

 

공전하고 있는 '내 인생'이라는 작은 별은 지난날 내가 상상했고 지금도 간간이 상상하는 태양계의 중심이 아니다. 예수님이 중심이시다. 중심축은 십자가이다. 우주 전체가 십자가를 중심으로 움직인다. 우리가 십자가를 중심축으로 삼는다면 더 이상 우리를 위해 살지 않고 그분을 위해 살게 된다. 그리고 그분을 위해 살면 그분처럼 나보다 남을 위해 살게 되는 것이다(빌 2:3-5). 이것이 <피에타>가 그리는 예수님의 형상이다(125).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의 의미, 예수님을 닮는다는 것의 의미를 이보다 더 명확하게 설명한 문장은 만나보지 못했습니다. 오직 인간만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습니다. 타락으로 인해 우리는 그 형상을 잃어버렸지만, 예수님은 우리가 잃어버린 그 하나님의 형상을 다시 회복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우리 안에 회복되어야 할 형상은 '나'를 중심으로 살지 않고, '너'를 중심으로 사는 그리스도인의 모습입니다.

 

예수님은 세상과 정반대의 원리로 세상을 정복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습니까? 예수를 따른다고 하면서도 여전히 세상의 논리를 따릅니다. 세상의 기준으로 살아갑니다. 세상의 원리에 지배를 받습니다. <십자가를 바라보라>는 우리의 삶이 얼마나 그리스도의 형상으로부터 빗나가 있는지 통렬하게 고발합니다.

 

우리가 세상에 보여주는 그분의 형상을 보라. 건강과 부의 능력이 자기 손 안에 있다고 자부하는 클레오파트라와 같은 모습. 우리를 향해 달려드는 문화의 골리앗에 맞서 정치적인 근육에 힘을 주어 반대표를 던질 자세를 취하는 다비드와 같은 모습. 아니면 십계명 석판을 껴안듯 성경을 가슴에 꼭 품고 무서운 얼굴로 재판관의 자리에 앉아 있는 모세와 같은 모습(127).

 

 

"돌은 스스로 돌이 되길 고집한다. 예술가는 그 돌이 예술이 되길 바란다"(170).

 

미켈란젤로의 <피에타>를 통해 예수님의 십자가를 묵상하는 일은 독특한 경험이었습니다. 켄 가이어는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의 통치를 온 땅에 실현하는 싸움은 언어의 싸움이라기보다는 이미지의 싸움이다(57).

켄 가이어의 <십자가를 바라보라>는 예수의 제자들이 닮아가야 할 그리스도의 형상, 그리스도처럼 된다는 것이 어떤 뜻인지, 예수님이 지신 십자가의 의미,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루고 계신 일들을 "이미지"로 보여줍니다. 이미지로 혼란스러운 문화와 교회에게 우리가 품어야 할 "이미지"가 무엇인지 명확하게 보여줍니다. <십자가를 바라보라>에서 본 예수님의 형상은 아름다운 충격이었습니다. 그 선명한 충격은 오래도록 잊히지 않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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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 의지는 없다 - 인간의 사고와 행동을 지배하는 자유 의지의 허구성
샘 해리스 지음, 배현 옮김 / 시공사 / 201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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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 의지는 없다"는 선언이 몰고올 파장은 어느 정도일까요? 아마도 인류 최대의 쓰나미가 될 것입니다. <자유 의지는 없다>의 저자 샘 해리스도 지적하듯이 "과학계에서 자유 의지는 환상에 불과하다고 선언해버린다면, 진화론이라는 주제를 두고 벌어진 논쟁보다 더 치열한 문화 전쟁을 촉발하게 될 것"(7)입니다. 그것은 도덕, 법률, 정치, 종교, 공공정책, 사적인 관계, 죄책감, 개인의 성취 등 "우리가 중요시하는 거의 모든 것들을 건드"립니다. 가장 심각한 문제는 인간 행동에 대한 "처벌", 다시 말해 죄와 책임의 문제가 아닐까 합니다. 저자가 자신의 논지를 시작하며 '극악한 범죄'의 실례를 사용한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일 것입니다. "자유 의지가 없다고 해보자. 그렇다면 도덕적으로든 법률적으로든 죄를 저지른 자들은 그저 시간이 잘못 맞춰진 시계에 불과할 테고, 그런 자들을 처벌하는 데 초점을 맞춘 정의라는 관념은 앞뒤가 전혀 맞지 않는 것으로 보일 것이다."

 

인류의 기원을 설명하는 <성경>은 오늘날 '모든' 문제의 '원인'이 인간의 타락(죄)에 있으며, 그것은 '자유 의지'에 기인한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만약 '자유 의지' 자체가 환상에 불과하다는 것이 증명된다면 인간은 그 "모든" 책임으로부터 진짜 자유를 얻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자유 의지는 없다>는 이 선언은 신과의 전쟁을 선포하는 도발로 받아들여집니다.

 

<자유 의지는 없다>는 부록을 제외하면 100페이지가 되지 않는 얇은 책입니다. 그러나 쉽게 읽히지 않는 책입니다. 저자가 말을 어렵게 하는 것인지, 번역의 문제인지, (독자의 이해력이 문제일 수도 있겠지만) 아무튼 내용이 어렵다기보다, 짜증날 정도로 '문장' 자체의 명확한 논지가 쉽게 파악되지 않습니다. 그래서인지 이 대가의 책이 제게는 '궤변'으로 느껴지는 부분이 많았습니다.

 

 

"사람들은 자기 사고와 행동의 주인이라고 느끼거나 그렇게 간주하지만, 이는 환상에 불과하다. 만약 사람들이 의식적 선택을 내리기 몇 초 전에 두뇌 스캐너를 통해 그 선택을 미리 감지할 수 있있다면, 사람들은 이내 충격에 휩싸일 것이다(33).

 

저자는 "자유 의지란 단연코 환상이다. 우리의 의지는 우리 스스로 만드는 것이 아니다. 사고와 의도는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고 의식적으로 통제할 수도 없는 배경 원인으로부터 발생한다. 우리는 스스로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바로 그 자유를 가지고 있지 않다"(12)고 주장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주장이 철학적 유물론에 근거하지 않고 '과학'(엄밀히 말해서 신경과학)에 근거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그의 '주장'과 '논리'는 '과학적'이 아니라, '사변적'입니다. 인간이 어떤 결정을 내리고 행동으로 옮기기 전(7-10초 전), 어떤 결정을 내릴지에 대한 정보를 두뇌 스캐너를 통해 80퍼선트의 정확도로 예측할 수 있다면? 저자는 그것을 "우리의 뇌가 우리가 뭘 할지를 이미 결정해 놓은" 것으로 해석합니다. "나의 다음 의식적 사고와, 사고 그 자체를 점화하는 최초의 신경생리학적 사건 사이에는 늘 약간의 시간 차가 있다"(17)는 뜻입니다. 저자는 이러한 사실로부터 이런 결론을 도출합니다. "나는 어떤 생각이나 의도가 떠오를 때까지는 다음에 무엇을 생각하고 의도할지 결정할 수가 없다. 나의 다음 심리 상태는 어떻게 될까? 나는 모른다. 그저 그렇게 될 뿐이니까. 여기에 무슨 자유가 있는가?"(18)

 

저자가 주장하는 과학적인 근거는 이것 하나입니다. 대부분의 주장과 근거는 그가 '환경 결정론'자가 아닌가 하는 의심을 갖게 만듭니다. "우리는 의지에 앞선 원인들에 의해 결정되므로 우리는 그 원인들에 책임이 없거나, 그 원인들은 우연의 산물이므로 우리는 그것들에 책임이 없기 때문이다"(12). 저자의 이러한 논지는 범죄자에 대해서도 관대한 입장을 갖게 합니다. 어떤 사람을 범죄자로 만든 것은 그의 선택(책임)이 아니라 우연한 환경의 결과이기 때문입니다. "사형선고를 받은 사람들은 나쁜 유전자, 나쁜 부모, 나쁜 환경, 나쁜 생각 등이 일정하게 결합된 사람들이다. 그들은 이런 요인들 중에서 정확히 무엇을 책임져야 하는가? 세상의 그 어떤 이도 자신이 물려받은 유전자나 양육된 방식에 책임이 없다. (...) 우리의 사법 제도는 누구든지 아주 다른 삶을 살 수도 있었다는 사실을 감안해야만 한다. 실제로 도덕성 자체에 운이 얼마나 크게 개입하는지 인정하지 않는 것은 비도덕적인 것 같다"(68). 저자는 만일 우리가 극악한 범죄를 저지른 사람과 "똑같은 상태에서 똑같은 유전자와 인생 경험 그리고 똑같은 두뇌(또는 영혼)를 가지고 있었다고 가정한다면, 나는 그가 행동한 그대로 행동했을 터이다. 지적으로 이를 부정할 수 있는 입장은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11)고 주장합니다.  

 

<자유 의지는 없다>는 읽으며 가장 큰 혼란을 느낀 것은 도대체 저자는 무엇을 "자유"라고 생각하는가에 대한 의문이었습니다. 저자는 인간에게는 환경을 통제할 능력이 없기 때문에 자유가 없다고 말합니다. 환경은 '주어진' 것이지 우리의 선택의 결과가 아니니까요. 저자는 인간의 '욕망'에도 같은 관점을 적용합니다. 목이 말라서 물을 먹는 것은 필요한 행동을 하도록 강제받는 것이지, 여기 어디에 자유가 있느냐고 반문합니다. 욕망에 영향을 줄 길이 전혀 없기 때문에, 스스로 원인이 되는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기 때문에 책임감을 느낄 필요도, 자유도 없다고 말합니다.

 

저자의 주장을 성경에서 말하는 '자유 의지'에 적용한다면, '선악과'라는 환경은 '주어진' 것이기 때문에 그것에 대한 어떤 선택도 이미 인간의 자유가 아니라고 하는 듯합니다. 주어진 환경 안에서의 선택은 이미 자유 의지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저자의 환경 결정론적인 논지는 인간이 환경(욕망)까지 통제하지 못한다면 진정한 자유가 없는 것이라는 주장인 듯합니다. 인간이 가진 모든 '한계'를 거부하는 발언입니다. 그런데 "한계'라는 개념이 없다면 "자유"라는 개념이 존재할 수 있을까요? 저자가 원하는 '자유'는 신이 가진 '자유'의 경지입니다. 어떤 것에 대한 자유가 없는 것과, (선택에 대한) 자유 의지가 없는 것과 같은 의미일까요? 한계가 없는 자유는 자유는 이미 자유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한계가 없으면 자유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한계가 없는데 무슨 선택의 문제가 있을 수 있겠습니까? 저자는 자유에 대한 정의부터 다시 내려야 할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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팀 켈러의 왕의 십자가 - 위대하신 왕의 가장 고귀한 선택
팀 켈러 지음, 정성묵 옮김 / 두란노 / 201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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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 역사에서 "예수"만큼 논쟁이 되는 인물도 없을 듯 합니다. 예수는 사람이면서 동시에 하나님이라고 하는 인물이니까요. 그런 주장을 한 사람이 '예수'만은 아니었지만, 역사(시간)가 흐를수록 오히려 그 영향력이 더 커지고 강력해지는 인물은 오직 '예수'뿐입니다. 교회를 다니든 다니지 않든, 그를 하나님으로 믿든 믿지 않든, 많은 사람이 예수가 누구신지 궁금해합니다. 그런데 실제로 그 답을 열심히, 구체적으로 찾아나서는 사람은 적습니다. 예수 이야기를 제대로 들어본 적도 없으면서 그를 마치 잘 알고 있는 듯이 착각을 하고, 그를 제대로 탐구해본 적도 없으면서 예수는 믿지 못할 이야기라고 경솔하게 결론을 내리고 사는 사람이 많습니다.

 

예수가 누구신지 알고 싶다면 무엇보다 먼저 "예수님의 이야기를 담은 역사적 문건인 복음서를 살펴봐야" 합니다(21). 복음서는 "목격자들의 직접적인 증언을 기록한 구두 역사"입니다(23). "예수님의 삶에 직접 참여했던 사람들이 그분의 죽음과 부활 이후 오랫동안 이 사건을 만방에 다니며 외쳤"던  이야기를 글로 쓴 것이 복음서입니다. <팀 켈러의 왕의 십자가>는 예수 이야기를 기록한 마태, 마가, 누가, 요한의 것 중에서 마가복음을 선택하여 예수의 이야기를 재조명한 것입니다.

 

<팀 켈러의 왕의 십자가>는 마가복음의 구조를 따라 목차가 구성되어 있습니다. 총 16장으로 구성되어 있는 마가복음은 딱 중간은 8장을 기준으로 전반부와 후반부가 나뉩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는 예수님의 질문에 대한 베드로의 고백이 그 하이라이트입니다. 학자들은 이것을 "고백구조"라고 부릅니다. 마가복음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복음의 시작이라"는 선언과 함께 시작되며, 하이라이트인 8장에 이르기까지 예수님을 만나는 사람들의 입을 통해 계속해서 "예수 그는 누구인가?"를 묻습니다. 8장에서 베드로의 신앙고백이 있은 후, 예수님은 대속 제물로 오신 예수님의 사명을 밝히시며 곧장 십자가를 향해 걸어가십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지켜 본 로마 백부장은 "이 사람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라고 고백합니다. <팀 켈러의 왕의 십자가>의 전반부는 마가복음의 증언은 토대로 예수는 우리에게 오신 "가장 위대하신 왕"이심 보여주며, 후반부는 그 왕이 선택한 "십자가"의 의미를 풀어줍니다.

 

저자이신 팀 켈러 목사님은 해박한 신학적 지식과 날카로운 성경적 통찰을 기반으로 마가복음의 증언에 담긴 깊은 영적인 의미를 풀어줍니다. 신앙생활을 오랜하고 마가복음에 이미 익숙한 독자(성도)들도 그 영적 깊이 놀라며, 진리를 깨달을 때 주어지는 짜릿함과 눈이 밝아지는 시원함과 나를 묶고 있는 속박을 벗어버리는 자유함을 깊이 맛볼 수 있을 것입니다. 수년 간 교회에서 사역하며 마가복음 강의도 수차례 한 바 있는데, 책을 읽어나가며 페이지 페이지마다 밑줄을 긋지 않은 페이지가 없을 정도입니다.

 

 

 

예수, 그가 누구인지 아는 일이 왜 이렇게 중요할까요? 저자 팀 켈러는 이렇게 선언합니다. "예수님의 이야기를 통해서 보면, 세상 전체의 이야기와 그 세상 속에서 우리 자신의 위치를 가장 분명하게 이해할 수 있다"(20-21). 예수님(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신지를 알면 우리 삶을 바라보는 시각이 완전히 달라지고, 이 "세상"이라고 하는 것의 정체가 분명하게 눈에 들어오며,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분명히 깨닫게 됩니다.

 

<팀 켈러의 왕의 십자가>를 통해 얻은 가장 큰 영적 교훈은 삼위일체 하나님은 춤추는 분이시며, 그 춤 속으로 우리를 초대하시기 위해 우리를 창조하셨다는 성경 진리입니다. 마가는 창조와 구속이 삼위일체 하나님의 작품(프로젝트)라는 사실을 의도적으로 보여줍니다. 여기에는 놀라운 하나님의 속성이 계시되어 있습니다!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은 서로를 영화롭게 하십니다.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은 서로 상대방을 중심으로 돌아간다. 상대방을 찬양하고 높인다. 그렇게 서로에게 찬양과 사랑을 아낌없이 주기 때문에 삼위일체 하나님은 지극히 행복하시다"(35). C. S. 루이스는 이것을 "춤"이라고 표현합니다. 그리고 이 "춤"이 우리의 삶에도 나타나야 한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춤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 그것이 우리 삶의 목적이다. 우리는 삼위일체와 함께 춤을 추기 위해 창조되었다"(39).

 

이 책을 추천해주시는 많은 분들의 증언처럼 <팀 켈러의 왕의 십자가>는 우리 영혼으로 예수님과 함께 춤추게 해줍니다. 삼위일체 하나님과 함께 사랑의 춤을 추고 싶은 열망으로 가득차게 만들어줍니다. 예수님이 주신 새계명은 "서로 사랑하라"라는 것을 익히 알고 있었지만, 이처럼 간절히 사랑하는 삶을 살고 싶다는 열망, 사랑하겠다는 결단을 하게 만들어준 책은 지금까지 없었습니다. 그 하나가 제 삶의 유일한 목표가 되고 있습니다.

 

 

  

<팀 켈러의 왕의 십자가>는 복음의 비밀, 복음의 본질, 복음의 핵심을 보여줍니다. 왕의 왕이신 분이 왜 그토록 잔혹한, 폭력적인 십자가를 지셔야 했는지, 왜 그 죽음이 필연적으로 요청되었는지 성경의 깊은 진리를 풀어줍니다. 그 중에서도 제 마음을 울린 복음의 원리는 이것입니다. 기독교 역사가 앤드류 월스는 "다른 종교들의 경우에는 하나같이 발생지가 지금까지 중심지로 남아 있"는데, 기독교만이 예외라는 사실을 밝힙니다. "기독교의 중심지는 끊임없이 이동 혹은 순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191).

 

다른 종교들의 중심지는 그대로인데 기독교의 중심지만 끊임없이 변하는 이유는 뭘까요? 월스의 대답은 이것입니다. "기독교의 중심에는 낮아짐이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바로 십자가의 낮아짐이지요"(192). 월스는 "기독교의 중심이 권력과 부를 떠나 끊임없이 이동한다"고 말합니다. "내 능력은 권력과 돈을 사랑하는 사람들을 떠나, 나처럼 권력과 돈을 아낌없이 나눠주는 사람들에게로 흘러간다. 너는 어떻게 살려느냐?(207)

 

복음을 알고, 복음을 배우며, 복음을 소유하고 있는 교회, 그런 성도는 많습니다. 그런데 복음을 따르고, 복음으로 사는 성도는 적다는 질타와 반성과 긴장의 목소리가 여기 저기서 들려옵니다. 복음으로 살지 못하고 있다면 그것은 복음을 제대로 모르는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복음대로 살기가 어렵기 때문이 아니라 복음이 본질, 그것을 놓치고 있기 때문이고, 우리를 변화시키는 그 능력 속으로 들어가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팀 켈러의 왕의 십자가>를 읽으며, 무엇보다 강력하게 느낀 것은 바로 나를 변화시키는 복음의 강력이었습니다. 앞으로 이 책이 저의 베스트 추천 도서가 될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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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자 시 100선 연암서가 고금문총
주희 지음, 장세후 옮김 / 연암서가 / 201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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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曲君看架壑船  셋째 구비에서 그대는 보겠네,

                       산허리에 얹힌 배를,

 

不知停櫂幾何年  알지 못하겠네, 노 쉰 지

                       몇 해나 되었는지를?

 

桑田海水今如許  뽕나무 밭이 바다로 변한 지

                       지금 얼마나 되었는가?

 

泡沫風燈敢自憐  거품같이 사라지고 바람 앞의 등불 같으니

                       어찌 스스로 가련하게 여기지 않으랴?

 

 

셋째 구비에 들어서면 그대는 바위산 골짜가의 허리에 배처럼 생긴 관이 꽂혀 있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그 배가 그대로 꽂힌 채 얼마나 오랫동안 노를 젓지 않고 쉬고 있는지를 모르겠다.

세상이 몇 번이나 바뀌어 뽕나무 밭이 바다가 된 지 지금까지 그 얼마나 되었을까 하고 가만히 생각해본다.

그 긴 세월에 비하면 우리의 짧은 인생은 그저 잠깐 일었다가 사라지는 물거품이 된다.

또한 언제 꺼질지 모르는 바람 앞의 등불과 같으니, 감히 스스로 가련하게 느껴지지 않겠는가?(249-251)

미국에서 신경숙 작가의 <엄마를 부탁해>라는 소설이 큰 사랑을 받았습니다. 어떤 인터뷰에서 신경숙 작가에게 그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지 물었습니다. 신경숙 작가의 첫 대답은 "일단 번역이 되었기 때문에"였습니다. 한국 문학작품 중에 좋은 작품들이 굉장히 많은데 "번역이라는 난관에 처해서 한국 안에 갇혀 있기 때문에" 조명을 받을 기회조차 없다는 것입니다.

 

외국 작품을 읽고 감상하는 일에는 '문학적' 수준의 번역 작업이 요청됩니다. 번역의 문제가 가장 큰 장벽으로 와닿는 문학장르는 '시'가 아닐까 합니다. 우리나라에서도 고은 시인이 노벨문학상 후보로 거론되었지만, 수상에 실패했습니다. 많은 분들이 번역의 문제를 제일 과제로 꼽았던 기억이 납니다. 독특하고 아름다운 시어, 그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끼리 더 잘 통할 수 있는 정서를 외국어에 담는다는 것이 그리 녹록치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 면에서 문학 작품의 번역은 그 자체가 또 다른 예술(문학) 창작의 과정이라고 생각됩니다.

 

어릴 때부터 아버지가 한시를 많이 읊어주셨습니다. 휴일이면 함께 등산을 하는 날이 많았고, 산 정상에 오르면 아버지는 이런 저런 시를 멋지게 암송하곤 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도 그런 멋을 아는 사람이 되었으면 하셨습니다. <주자 시 100선>에 끌린 이유도 아마 이런 이유 때문일 것입니다.

 

그런데 <주자 시 100선>을 처음 대할 때, 이것이 '시'라는 문학 장르이고, 외국 사람의 것이라는 사실을 정확하게 인지하지 못했습니다. 교과서에서 배운 시조들도 '한문'으로 기록된 것이고, 그것을 배우고 감상함에 있어 한자를 잘 모른다는 것 외에는 별다른 문제를 느끼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익히 아는 "태산이 높다 하되 하늘 아래 뫼이로다"라든지, "이 몸이 죽어가서 무엇이 될꼬 하니"와 같이 그렇게 읽고 그렇게 감상하면 되겠지 하는 막연한 기대가 있었을 뿐입니다. 막상 <주자 시 100선>을 읽어보니 그 시의 맛과 멋을 제대로 느끼기가 어려웠습니다. 한자의 운율이나 리듬에도 독특한 느낌이 있을 터인데 제게 한자는 그저 외국어이고, 눈은 어느새 번역자의 주석을 읽으며 의미를 파악하는 데 급급했습니다. 번역된 시어로는 그 본래의 멋을 알 수 없는 궁색한 실력이지만, 해설처럼 풀어 쓴 글이 있어 읽는 재미는 놓치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시를 읽는다는 것이, 그것도 '번역된 시'를 읽는다는 것이 생각만큼 쉽지 않다는 것을 새삼 깨닫습니다. 그러나 세월을 넘어, 국경을 넘어 공감하고 공유할 수 있는 정서가 있다는 것이 또 새삼 신기합니다. 배우기 위해 노력하고, 지혜를 깨닫고 기뻐하고, 아름다운 자연을 노래하고, 친구와 나누는 우정과 학문에 만족함을 느끼고, 그리움에 잠 못드는 밤이 있고, 덧 없는 세월 앞에 한숨 짓고, "한 없이 한가로워 보이는 봄날의 분위기"에 젖어 여유를 만끽하는 시인과 (어설프지만) 마음을 나눌 수 있었습니다.

 

주자는 "성리학의 수준을 크게 끌어 올린" 성리학의 대가로 평가되지만, "문학 방면에도 두루 뛰어났"고, "그 중 시에서 가장 두각을 나타내"었다고 합니다. 그가 남긴 약 1,500수의 시 가운데 100수를 엄선한 것이니 관심과 여유를 갖고 읽어볼 만한 시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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