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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의 사람 - 제142회 나오키상 수상작
시라이시 가즈후미 지음, 김해용 옮김 / 레드박스 / 2013년 2월
평점 :
절판
"만나야 할 사람은 언젠가 꼭 만나게 된다고 들었어요."
- 영화 <접속> 중에서 -
사랑이라는 걸 처음 꿈꾸기 시작했을 때, "이 사람이다" 한 눈에 알아볼 수 있는 운명의 짝이 있을 거라 믿었습니다. 그 사람이 운명의 짝인지 어떻게 알아 볼 수 있는지는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그건 어떻게든 알게 될 거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어떤 드라마에서는 심장이 먼저 그를 알아보고 뛰었습니다. 어떤 소설에서는 그 사람 뒤로 후광이 비쳤다는 고백이 있었습니다. 어떤 영화에서는 그를 본 순간 그를 제외한 모든 것이 정지되는 현상이 일어났습니다. 만약 세상에 이런 일이 실재하지 않는다면, 이런 이야기들이 만들어질리가 없다고 혼자 이론을 세우기도 했습니다.
"사랑이란 게 처음부터 풍덩 빠지는 것인 줄로만 알았지, 이렇게 서서히 물들어버릴 수 있는 것인지 몰랐어."
- 영화 <미술관 옆 동물원> 중에서 -
그러다 알았습니다. 첫 눈에 알아보는 운명의 짝도 있지만, 옆에 있어도 그 운명을 알아보지 못할 수도 있다는 것을 말입니다. 처음부터 풍덩 빠지는 사랑만이 운명이라고 생각했던 제게 이것은 뼈아픈 교훈이었습니다. 사랑에 풍덩 빠져들려고만 했지, 만들어갈 줄은 몰랐기 때문입니다. 가슴이 뛰지 않는다는 이유로 모두를 보내버린 뒤, 나타나지도 않는 인연을 기다리느라 어느새 풋풋한 사랑을 할 나이가 훌쩍 지나 있다는 것도 눈치채지 못했습니다.
"그게 아니야. 모두 철저하게 찾지 않았을 뿐이야.
가장 좋은 상대를 발견한 사람은 모두 그 증거를 가지고 있다니까."
- <운명의 사람>, 153 -
그런데 사랑에 회의가 들기 시작한 것은 운명의 짝을 못 만났기 때문이 아닙니다. 운명인줄 착각하고 빠져들다 그 운명에 된통 걷어차이는 사람들을 너무 많이 목격했기 때문입니다. 어떤 만화책에서 이런 글을 읽은 기억이 납니다. "사랑이 영원하다고 믿는 것은 사람들이 100년밖에 살지 못하기 때문이다." 오-래- 살다보면 운명 같은 사랑도 빛이 바래고, 열병 같은 사랑도 식어진다는 것, 그것은 이미 보편적인 진리입니다. 그러고 보면 사랑의 최대 천적은 '시간'인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시라이시 가즈후미의 <운명의 사람>은 제목이 다소 클래식(?)합니다. 그러나 그 내용은 다분히 '현실적'입니다. 나오키상 수상작인 <운명의 사람>은 평단으로부터 "남녀 간의 문제를 정면으로 잘 다룬 작품이다. 남녀 관계에 도사리고 있는 역학의 문제를 본인만의 독특한 설정과 참신한 문장으로 제대로 표현해낸 수작"이라는 극찬을 받았습니다. 남성 작가도 이런 사랑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다는 사실이 새삼스럽습니다.
이 책에는 2편의 사랑 이야기가 담겨 있습니다. 첫 번째 사랑은 <이 세상에 단 하나뿐인 너>이고, 두 번째 사랑은 <그 누구보다 소중한 너>입니다. <이 세상에 단 하나뿐인 너>는 명문가의 자제로 태어났으나 잘난 가족들 틈에서 열등한 자신을 사랑하지 못하는 한 남자가 주인공입니다. 주인공 아키오는 우연히 들어간 술집에서 운명 같이 찾아온 여인을 만납니다. 술집에서 일하는 나즈나는 아키오를 보고 감이 딱 왔다고 말합니다. "전에도 말했지만 우리 아버지가 그 모양이라서 난 정식으로 남자를 사귀면 절대 바람피우지 않는 사람과 사귀겠다고 다짐했어요. 또 내가 일하는 곳이 그런 곳이라서 남자들 생리를 잘 알거든요. 그런데 아키오 짱을 보는 순간 '앗, 찾았다' 하고 감이 딱 왔어요." 둘은 그렇게 만나 결혼까지 합니다. 아키오는 그녀와 결혼하기 위해 집안과의 인연도 끊다시피 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사랑이 삐끄덕거리기 시작합니다. 아키오를 보고 감이 딱 왔다고 했던 나즈나에게 사실 다른 사랑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옛 연인에게 마음이 흔들리는 나즈나, 어느새 나즈나가 자신에게 가장 좋은 상대는 아니라고 생각하게 된 아키오. 불행히도 그들은 서로에게 운명의 사람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부부로 인연을 맺었지만, <이 세상에 단 하나뿐인 너>는 서로가 아니었던 것입니다. 아키오는 나즈나와의 문제로 골치를 앓느라 운명의 사람을 옆에 두고도 알아채지 못합니다. 그러나 나즈나를 처음 보았을 때처럼 풍덩 빠져들지는 않았지만, 그 운명의 사랑에 서서히 물들어갑니다.
<그 누구보다 소중한 너>는 약혼자가 있지만, 몇 년 전 인연을 맺었던 유부남 구로키와 다시 만남을 갖고 있는 한 여자가 주인공입니다. 주인공 미하루의 사랑은 무덤덤하기만 합니다. 미하루는 어떤 소설가의 글을 떠올립니다. "이 세상엔 반드시 있어야 하는데 없는 게 두 가지 있다. 그 중 하나는 정의, 다른 하나는 바로 드라마이다"(224). 그녀는 자신의 인생에 드라마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약혼한 후 구로키와 다시 만난 것은 분명 큰 이유가 있었지만, 그녀는 그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합니다. 그렇게 두 남자 사이에서 어정쩡하게 서 있던 미하루는 결혼식 전날, 구로키의 집을 찾아갑니다. 두 사람 사이에 존재하는 것은 다소 변태적인 형태의 섹스가 전부였습니다. 그런데 자신의 생일날이면 구로키가 "습관"처럼 케이크를 산다는 것을 알았을 때 미하루는 온몸이 떨릴 만큼 놀랍니다(291). 열병처럼 들떠 사랑을 고백하지도 않고, 자신을 흔들지도 않는 그 남자가 줄곧 자신을 기다려왔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있을 때는 절대로 모른다. 헤어져봐야 아는거야, 얼마나 사랑했는지는..."
- 영화 <사랑을 놓치다> 중에서 -
<운명의 사람>은 두 편의 결말이 독특합니다. 모두 '사랑하는 사람의 부재'로 이야기를 끝맺습니다. 작가는 독자에게 "운명의 사랑은 반드시 있다, 그러니 포기하지 말고, 적당히 타협하지 말고, 그 상대를 열심히 찾으라"는 메시지를 던져줍니다. 그런데 왜 두 편의 사랑 이야기 모두 '사랑하는 사람의 부재'라는 설정으로 이야기를 끝냈을까요? 정말 소중한 것은 잃어버렸을 때 비로서 알게 된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요? 열심히 증거를 찾지 않으면 결국 사랑을 놓친 후에 후회하게 된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요?
평범한 일상을 함께하면서도 그 사람이 운명인줄 몰랐던 아키오도, 온몸을 전율시키는 남자와 사랑을 나누면서도 그 사람이 운명인줄 몰랐던 미하루도 그것이 운명이라는 '증거'를 이미 가지고 있었습니다. 몰랐을 뿐입니다. 뒤늦게 서로가 운명이라는 것을 알았지만, 아키오는 또다른 운명으로 사랑을 잃어야 했고, 미하루의 사랑은 시작도 하기 전에 끝이 나고 말았습니다.
"그러니까 사람의 인생은, 죽기 직전 마지막 하루라도 좋으니까, 그런 가장 좋은 상대를 발견하면 성공한 거야.
말하고 보니 보물찾기랑 비슷하네."
- <운명의 사람>, 153 -
운명의 짝은 분명히 있을까요? 그 사람이 운명의 짝이라는 것은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운명의 사람>은 운명의 상대를 만나는 것은 보물찾기와 비슷하다고 말합니다. 보물찾기를 하는 것처럼 그 '증거'를 열심히 찾으라고 합니다. 철저하게 찾는다면 확실한 증거를 '반드시' 발견하게 될 것이라고 약속합니다.
운명적인 사랑은 환상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어른들은 찾아봐야 별 사람 없다고도 합니다. 그런데 어쩌면 그런 상대가 없는 것이 아니라, 알아보지 못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터무니 없는 욕심 때문에, 이기심 때문에, 헛된 꿈 때문에, 상처받지 않으려는 보호본능 때문에 우리의 눈이 어두워져 있을 지도 모릅니다. 성경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지혜는 명철한 자의 앞에 있거늘 미련한 자는 눈을 땅 끝에 두느니라." 아직 사랑을 꿈꾸고 있다면, 운명의 상대가 있다고 믿고 있다면, 먼 곳만 쳐다보다 가까이에 있는 사랑을 알아보지 못하는 일이 없도록, 너무 늦은 깨달음으로 사랑을 잃은 후에 아파하는 일이 없도록, 주변부터 샅샅이 살펴볼 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