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서적으로 건강한 제자 - 삶의 깊은 변화를 동반한 제자의 길 Emotionally Healthy 시리즈 4
피터 스카지로 지음, 정성묵 옮김 / 두란노 / 2021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우리 교회는 역동적으로 움직였지만 리더들, 특히 우리 부부에게는 전혀 즐거운 곳이 아니었다. 그래서인지 사역자들의 사임이 잦았다. 하지만 우리는 그것을 영적 전쟁과 뉴욕 시의 혹독한 목회 환경 탓으로 돌렸다. 주변에서는 그것이 큰 조직과 사업체에서 흔히 나타나는 자연스러운 성장통이라며 나를 격려했다. 하지만 우리는 사업체가 아니었다. 우리는 교회였다!(13)

<정서적으로 건강한 제자>는 한 사역자의 충격적인 고백으로 시작됩니다. 그는 자신을 가리켜 "하나님 나라를 위한 열심으로 천하를 얻고도 자기 영혼을 잃은 자들이었다"고 합니다. 성공적인 교회 개척, 급성장 하는 교회, 가난한 사람들을 창의적으로 섬기는 사역들, 수많은 리더의 양성, 끊임없이 늘어나는 소그룹, 이토록 열심이었고, 눈부신 성과도 거두었는데 무엇이 문제였던 것일까요?

<정서적으로 건강한 제자>의 저자 '피터 스카지로' 목사님은 겉만 화려할 뿐 내적 상태는 그리 좋지 못했다고 털어놓습니다. 갈등이 끊이질 않았고, 하나님을 향한 열정으로 불타오르고 있었지만 사람들에게는 비판적이고 믿을 만하지 않은 부담스러운 사람으로 인식되었으면, 무엇보다 교회는 역동적으로 움직였지만 그 교회가 전혀 즐거운 곳이 아니었다고 합니다. 미성숙하고 유치한 행동이 반복될수록 분노와 상처로 가득한 모습을 감춘 채, 사역은 점점 무거운 짐이 되어갔고, 탈진했으며, 결국, 교회를 그만 다니기로 결정했다는 것입니다!

피터 스카지로 목사님의 이 고백이 더 충격적으로 다가왔던 까닭은, 이것이 정확히 대형 교회에서 사역할 때의 제 모습이었기 때문입니다! 교회에서는 칭찬받는 사역자, 열심 있는 사역자, 성과를 내는 사역자였지만, 나의 내면은 하나님을 섬기는 기쁨을 잃은지 오래였고, 동역자들과의 갈등이 끊이지 않았으며, 그럴수록 교회의 '일'을 더 잘해내려고 했고, 몸은 이미 오래전에 탈진 상태였지만, 성과에 더 집착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무엇이 문제였던 것일까요?

<정서적으로 건강한 제자>는 한마디로 우리의 '제자훈련'에 문제가 있다고 일갈합니다. 제자로 훈련받고 제자를 키워 온 방식에 문제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사람들의 표면적인 삶 아래를 다루어 그들이 깊은 변화를 이루고 나아가 세상에 장기적이고도 지속 가능한 영향을 미치도록 만드는, 완전히 새로운 방식의 제자훈련", "바로, 변화적인 모델이 필요했다"(23)고 증언합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성공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람이 되어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을 하나님의 방식과 시간표대로 하는 것"이다(55-56).

이 책이 새롭게 제안하는 것이 바로 "정서적으로 건강한 제자훈련"(EHD)입니다. 기존의 제자훈련 방식과 가장 큰 차이점이 있다면 '규격화'된 제자훈련이 아니라, '맞춤형' 제자훈련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동안 제자훈련을 쉽게 할 수 있도록 규격화하여, 똑같은 훈련방식을 '모두'에게 적용해왔습니다. <정서적으로 건강한 제자>는 이것이 "제조공장의 컨베이어 벨트"와 같은 방식으로 제자를 양산하는 것과 같다고 지적합니다. 우리의 가장 큰 실수는 규격화된 프로그램에 매달리느라, 예수님이 본을 보여 주신 관계적 제자훈련을 놓쳤다는 것입니다(59).

<정서적으로 건강한 제자>에서 얻은 가장 큰 유익, 가장 큰 교훈은, "하나님이 주시는 감정의 소리에 귀 기울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동안 어떤 상황에서든, 어떤 문제를 대하든, '믿음'으로 반응하는 것을 강조하며, '감정적'으로 동요하는 것을 경계해왔습니다. 어떤 역경과 문제 앞에 마음이 흔들리고, 감정이 무너질 때마다, 그 감정을 부인하고, 믿음의 눈을 들어 승리를 바라보며, '이김'을 선언할 것을 강요해왔습니다. 감정은 거짓된 것이며, 믿음을 약하게 만드는 것으로, 극복해야 할 무엇으로 간주해왔습니다. "그리스도와 올바른 관계를 맺기 위해서는 내 감정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크리스천 리더로서 나는 깊은 내면의 여정을 뒷전으로 한 채 조직을 정비하고 문제를 해결하는 식의 '활동'에만 매달렸다"(98).

그런데 <정서적으로 건강한 제자>는 하나님께서 바로 '감정'을 통해 말씀하신다는 사실에 눈이 열리게 만들어주었습니다! <정서적으로 건강한 제자>를 통해 감정을 느끼고, 침묵의 시간을 가지며, 예수님과 교제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배울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최근 몇 주 동안, 나의 감정과 사역과 관계 가운데 놀라운 변화를 일으켰습니다. 나와 동역자의 감정을 더 예민하게 살핀 덕분에 함께 훨씬 기분 좋은 상태에서 동역할 수 있었고, 감정을 통해 예수님과 교제할수록 사역이 '일'처럼 느껴지기보다 훨씬 더 큰 '기쁨'으로 다가오기 시작했습니다. 감정에 귀를 기울이자 하나님을 위한 '일'이 아니라, 하나님과 '함께'하는 데에 더 집중하는 데에도 도움이 되었습니다.

또한 <정서적으로 건강한 제자>를 통해 큰 위로도 경험할 수 있었는데, 그것은 "약함을 바탕으로 한 교회로 변화하라"(301)는 가르침"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약함을 통해 일하신다는 것을 알았지만, 정직하게 돌아보니 대형 교회에서 오랫동안 사역하는 내내 "강함"과 "강점"에만 매달려왔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이제 교회 개척을 시작한 지금, 나의 약함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 속에서 나의 한계와 나의 약함을 고백하는 일이 자연스러워졌는데, <정서적으로 건강한 제자>는 바로 그것이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능력을 전혀 새로운 차원에서 경험할 수 있는 비결이라는 확신을 더하여 주었습니다! "리더는 진정성을 보여 줌으로써 건강한 제자훈련 문화를 창출해야 한다. 그래서 약함과 흠이 드러나는 순간에 어떻게 헌신할 것인가는 매우 중요하다. 그리고 그런 순간은 우리 모두에게 찾아온다"(302).

사실 그동안 제자훈련이라고 하면, 예수님 안에서 잘 훈련된 하나님 나라의 군대, 강한 군사를 세워가는 일이라는 이미지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정서적으로 건강한 제자>는 이런 이미지를 박살내주었습니다. 하나님의 강한 군대는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고, 성과를 통해서가 아니라 슬픔과 상실을 통해 성장하는 법을 배우며, 약함을 통해 일할 줄 아는 제자였던 것입니다.

<정서적으로 건강한 제자>는 하나님을 향한 열정으로 타올랐으나, 실패한 제자, 실패한 사역자라는 쓰라림 속에서 고통받고 있는 리더들에게 먼저 일독을 권하고 싶은 책입니다. 실패한 제자, 실패한 사역자라는 고통을 가진 사람이라는 것은, 그만큼 하나님을 향한 열심이 뜨거웠다는 반증일 수도 있습니다. 열심을 내본 사람만이, 그런 실패도, 그런 쓰라림도 경험할 수 있는 것이니까요. <정서적으로 건강한 제자>는 그런 분들에게 새로운 길을 열어주는 출구와 같은 역할을 해줄 것입니다.

또한 <정서적으로 건강한 제자>는 제자훈련을 담당하고 있는 모든 리더(사역자)들이 읽어야 할 필독서라고 생각합니다. 프로그램화된 제자훈련의 맹점이 무엇인지, 한 영혼, 한 영혼에게 초점을 맞춘 제자훈련이란 무엇인지 중요한 인사이트를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무엇보다 제자훈련을 담당하고 있는 모든 사역자들에게 하나님의 위로와 같은 '쉼'이 주어지지 않을까 예상해봅니다. 이제 제자훈련은 교회의 '일'이 아니라, 하나님과 동행하는 발걸음이 될 테니까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앨저넌에게 꽃을 (아트 리커버 에디션) - 운명을 같이 했던 너
대니얼 키스 지음, 구자언 옮김 / 황금부엉이 / 2021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분노와 의심이 내 주위의 세상을 향한 첫 번째 반응이었던 것이다"(93).

베르나르 베르베르가 '내 인생의 책'으로 꼽았다는 이 책을 읽으며, '무엇이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가'라는 질문을 계속해서 했습니다. 그리고 인간이란 얼마나 대단한 착각 속에서 오만하게 살아가는 '이기적인 개새끼(개에게 미안)'인가 하는 자괴감이 들어 슬펐습니다.

지능이 낮아 어눌한 '찰리'는 항상 똑똑하고 싶고 바보가 아니기를 바랐습니다. 뇌수술로 인간의 지능을 높이는 실험을 하고자 했던 과학자들은 찰리를 실험대상으로 선택합니다. 찰리가 선택된 것은 낮은 지능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배우려는 의지가 강했기 때문입니다. 이 책의 제목에 등장하는 '앨저넌'은 찰리와 똑같은 실험의 대상이었던 쥐의 이름입니다. 앨저넌은 수술 후 높은 지능을 유지하는 최초의 동물이었고, 앨저넌과 미로 찾기 대결에서 늘 지기만 했던 찰리 또한 뇌수술 이후, 지능이 좋아진 최초의 인간이 됩니다.

찰리가 똑똑해지고 싶었던 이유는 한 가지입니다. 친구들을 사귀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찰리는 자기가 주변 사람들처럼 똑똑해지면 많은 친구를 사귈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습니다. 그들과 더 잘 소통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찰리가 똑똑해질수록 더 많은 문제들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찰리는 똑똑해질수록 가슴속이 텅 빈 것처럼 느꼈습니다. 사람들의 겉모습 뒤에 무엇이 있는지가 보이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기억 속에 있는 사람들의 웃음이 그를 향한 미소가 아니라, 멸시라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그들과 함께 웃었던 자신을 떠올리며 그는 부끄러움을 느꼈고, 지금까지 사람들이 자신을 어떻게 대해왔는지 진실을 알아낼수록 그는 친구라고 믿었던 사람들을 잃어갔습니다.

친구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찰리가 자신들보다 열등하다고 느꼈을 때는 괜찮았는데, 그 바보가 놀랍게 성장하자 그들은 위축되었고, 그 '바보' 앞에 자신들의 무능력함이 드러날수록 똑똑해진 찰리를 증오했습니다. "이제 그들은 내게 지식과 이해력이 있다고 미워한다"(163). 이것은 찰리가 미처 예상치 못했던 일이었습니다.

"사람들은 내가 기대했던 방식으로 날 자랑스러워하지는 않는다"(105).

지능이 천재적 수준으로까지 좋아진 찰리는 그가 천재적일수록 새로운 친구도 사귈 수 없었습니다. 누구도 그의 지식을 따라오지 못했고, 그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찰리이 높은 지식은 지식인이라고 자부하는 사람들에게 모멸감을 안겨 주었기 때문입니다. 그가 똑똑하게 말할수록 사람들은 그에게 적의를 느꼈고, 찰리는 똑똑해질수록 모든 즐거움이 사라져갔습니다.

'나도 사람이에요, 사람. 부모도 있고, 지난 일도 기억하고, 과거도 있어요. 그리고 당신들이 나를 저 수술실로 옮기기 전부터 난 존했다고요!"(238)

찰리와 유일하게 소통하는 과학자들에게도 찰리는 하나의 실험대상일 뿐이었습니다. 그는 사람들이 자신을 실험 쥐와 같은 취급을 한다는 사실에 모욕감을 느꼈습니다. 그의 높아진 지능을 관찰하고, 놀라고, 자랑스러워하는 사람들조차, 그를 하나의 인격체로 대하지 않다는 사실이 그를 고독하게 만들었습니다. "니머 교수가 나를 창조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과연 어떻게 그에게 이해시킬 수 있을까?"(215)

찰리는 고독해지고 말았습니다. 과학자들이 그를 위해 모든 것을 했지만, 그것이 아무리 근사한 일이라고 해도, 그를 실험실 동물처럼 다룰 권리는 없다는 사실을 이해시킬 수가 없습니다(357).

"들꽃 한 다발을 앨저넌의 무덤에 올려놓으며 나는 울었다"(372).

지능이 낮은 사람을 아무렇지도 않게 학대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학대의 의미조차 이해할 수 없음을 비웃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행위를 우리는 과연 지능 있는 태도라고 할 수 있을까요? 그 어줍잖은 '지능'이 우리의 삶을 스스로 고독 속으로, 지옥 속으로 몰아넣고 있음을 봅니다.

이 세상에 누군가에게 의미 있는 한 사람, 의미 있는 친구이고 싶었던 찰리에게 유일한 친구는, 같은 운명을 지녔던 '앨저넌'뿐이었습니다. 찰리는 기꺼이 앨저넌과 친구가 되었습니다. 누가 더 똑똑한지 앨저넌과 경쟁하기를 원하지 않았고, 앨저넌과 함께 놀기를 원했던 찰리는, "바보 같고 감상적이지만", 앨저넌이 죽었을 때 소각로에 넣어져 태워질 앨저넌을 뒷마당에 묻어주었고, "들꽃 한 다발을 앨저넌의 무덤에 올려놓으며" 울었습니다(372).

누군가는 실험실의 '쥐'였던 앨저넌의 무덤에 꽃을 올려놓는 것을 어리석게 여겼고, 생쥐와 친구였다고 말하는 찰리를 미친 사람 취급했지만, 찰리의 행동을 보며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지능이 낮은 사람이 보통 사람들과 친구가 되기 위해 부단히 애쓸 것이 아니라, 지능이 높은 사람들이 그들과 친구가 되기 위해 부단히 애써야 하는 것 아닌가. '지능'은 그렇게 쓰라고 신이 우리에게 허락한 능력이 아닐까. 지능이 높은 사람이 서로 소통하는 방법을 더 잘 찾을 수 있을 텐데도, 우리를 왜 그 노력을 지능이 낮은 사람의 몫으로 여기는가. 우리는 어째서 이처럼 엄청난 모순 속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살아가는 것인가!

베르나르 베르베르가 왜 <앨저넌에게 꽃을>이라는 이 책을 '내 인생의 책'으로 꼽았는지 알 것 같습니다. 이 이야기는 슬픈 이야기입니다. 사랑을 갈구하지만 누군가를 사랑할 능력이 우리에게 없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는 책입니다. 그 사랑 없음으로 인해, 지능과 지식이 아무리 높아져도 우리는 사실 죽은 것과 다름없는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을 아프게 깨닫게 해주는 책입니다. 시합만 할 줄 알았지, 함께 노는 법을 잊어가는 인간은 점점 더 고독해지리라는 것을 슬프게 보여주는, 애가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실버베이
조조 모예스 지음, 김현수 옮김 / 살림 / 2021년 3월
평점 :
절판


"그러다가 언제나 그렇듯, 호기심이 할 수 없었던 것을 탐욕이 해내게 된다"(40).

사람들은 끼리끼리 모여 산다고들 말하는데, 그것이 충돌하는 지점이 있습니다. 이 작품에서는 호주의 작은 해변 '실버베이'와 그곳에 있는 '실버베이 호텔'이 그 충돌 지점입니다.

낡고 초라한 호텔이지만 실버베이를 사랑하는 이들은, "고요한 바다 위에 오직 나와 돌고래들, 그때가 최고의 순간이란걸"(67) 알고 있으며, 여기에 충분히 만족하며 살아갑니다. 고래 관광으로 생계를 꾸려가는 그들에게 적절한 균형은 아주 미묘한 문제입니다. 고래 구경을 오는 관광객이 너무 적으면 그들의 사업이 위태로워지고, 너무 많으면 그곳 바다 생물들을 위협하게 될 터였습니다. 고래 관광 사업이 그들을 부자로 만들어주지는 않았지만, 생계를 꾸려가기에 부족하지 않을 정도면 충분했습니다. "그게 실버베이에 가장 좋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해안의 위아래 동네 이웃들이 돈을 많이 벌어들이는 과정을 지켜보았다. 그들은 성공에 따른 예상치 못했던 결과물들까지 끌어안고 살아가야 했다. 교통 체증, 술 취한 휴가객들, 끝없이 이어지는 업데이트와 리노베이션의 압박. 바로 평화의 상실이었다"(40).

그런데 실버베이 호텔에 그들의 평화를 위협할 만한 한 인물이 찾아들며, 불길한 충돌의 기운이 감지됩니다. 투자가들이 떠나가기 전에, 최상의 서비스와 초호화 시설을 갖춘 복합 레저 단지 부지를 확보해야 하는 '마이크'는 실버베이 호텔에 머물며 지역 탐색을 시작합니다. 문제는, '마이크'가 자신이 실버베이를 찾은 진짜 목적을 숨긴 채, 실버베이 호텔을 지키고 있는 일흔여섯의 할머니 '캐슬린'과 그녀의 조카 '라이자', 그리고 '라이자'의 딸 '해나'의 일상 속으로 너무 깊숙이 스며들어버렸다는 것이지요.

"내가 사랑에 빠졌구나."

그 말이 그냥 그렇게 무심코 튀어나왔다.

나는 멍해져서 소파에 기대앉아 다시 한번 말했다.

"맙소사. 사랑에 빠진 거였어"(292).

<실버베이>는 환경과 개발의 가치가 충돌하고, 자신의 현재를 감추고 있는 남자와 자신의 과거를 감추고 있는 여자가 충돌하는 이야기입니다. 자신이 무슨 일로 실버베이에 왔는지 말하지 못했던 '마이크'와 그리워 하는 것, 슬프게 하는 것, 그리고 자기 가족 얘기조차 과거의 이야기는 그 어떤 것도 입에 올리지도 못하게 하는 '라이자'. 그들의 닫아 건 입을 열게 만든 건, 바로 돌고래였습니다. 돌고래와 사랑에 빠지게 된 마이크는 고수익보다 바다 생물에게 어떠한 위협도 주지 않는 개발을 원하게 되었고, 자신의 과거로부터 그토록 도망치기 원했던 '라이자'는 "돌고래의 방문을 받는 삶의 축복'을 지켜낼 수만 있다면 과거의 공포와 마주해보기로 합니다. 마이크와 라이자가 서로의 그물에 걸려들기 전에, 그들의 삶의 그물에 먼저 걸려든 것은 '(돌)고래'였고, 자연을 사랑하는 그 원초적인 감정이 마이크와 라이자 안에 숨어 있던 수치심과 죄책감과 탐욕을 치유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그러면 나의 그 얘기가 누구를 구원할 수 있을지 당신이 말해줘요"(352).

<실버베이>는 고래의 삶을 지켜주기 위해, 그리고 서로의 삶을 지켜주기 위해, 남자는 자신이 온 힘을 다해 쌓아올린 성을 허물어뜨리고, 여자는 자신이 온 힘을 다해 피해왔던 진실과 마주할 용기를 갖게 되는 이야기입니다. 자신을 희생하는 선택을 한 것입니다. 이것은 사랑 이야기이고, 사랑의 다른 말은 희생이라는 것을 일깨워주지요. <실버베이>는 영화 <콘스탄틴>의 한 장면을 떠오르게 합니다. 지옥으로 떨어질 운명에 처했던 '콘스탄틴'이 결정적인 순간에, 그를 지옥으로 끌고 가려는 악령의 손아귀에서 벗어나 천국으로 향하게 되는데, 그 비밀이 바로 '희생'에 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순간말입니다. 이기적인 인간이 자신을 보호하고자 하는 욕망과, 가져도 가져도 채워지지 않는 탐욕을 이겨내고 누군가를 위해 '희생'할 수 있는 힘은 어디에서 올까요? (어쩌면 인간은 그런 힘을 지켜내기 위해 <실버베이>와 같은 이야기 안에 그것을 감춰두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분명한 것은, 희생이 구원으로 들어갈 수 있는 유일한 출구라는 것입니다.

<실버베이>를 읽으며, 왜 사랑이 우리를 구원하는 힘인지 새삼 깨닫습니다. 조조 모예스는 감동적인 로맨스로 유명한 작가라고 합니다. 그 명성은 익히 들었으나, 조조 모예스와의 만남은 <실버베이>가 처음입니다. <실버베이>는 보편적인 이야기입니다. 조조 모예스는 어쩌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그 보편적인 이야기라는 것을 다시 일깨워주고 싶은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자꾸만 더 특별한 것, 더 특별한 것을 원하다가, 정말 중요한 보편적인 이야기를 잃어가고 있으니까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팀 켈러의 부활을 입다 - 인생 단 하나의 희망, 하나님의 위대한 반전
팀 켈러 지음, 윤종석 옮김 / 두란노 / 2021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기독교는 "여기 당신이 살아가야 할 방식이 있다"로 시작하지 않고 "여기 예수님이 역사 속에서 당신을 위해 이루신 일이 있다"로 시작한다(34).

<팀 켈러의 부활을 입다>를 읽으며, 기도 노트를 다시 작성했습니다. 당뇨 때문에 일주일에 3일 이상을 투석하며 신장 이식을 기다리는 오빠, 코로나19 이후로 매달 월세가 공포가 된 성도들, 공항장애와 우울증 약을 복용하고 있는 청년들, 구치소에 수감되어 있는 제자, 보증을 잘못 서서 거액의 빚을 떠안게 된 성도, 이들의 문제는 달라지지 않았지만, <팀 켈러의 부활을 입다>는 그들을 위한 간구가 달라지도록 만들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그들의 문제 가운데로, 그들의 절망 가운데로, 그들의 낙심 가운데로 침략해 들어가기를, 예수님의 부활이라는 하나님의 대반전이 그들의 삶을 속속들이 재창조해주시기를, 예수님의 부활을 통해 하나님 나라가 그들의 현재 속으로 침투해들어가기를 간구하기 시작하면서부터, 제 마음 안에 숨어 있던 낙망도 떠나가고 있음을 느낍니다. "기도하고 있습니다"라고 위로하면서도 그들에게 '절대 희망'을 말하지 못했던 나약함은 이제 없습니다. 기도밖에 할 수 있는 것이 없을 때, 기도밖에 할 수 없는 상황이 무기력하게 느껴지는 일도 더는 없습니다. <팀 켈러의 부활을 입다>를 읽은 후로는 말입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이 우리에게 약속하는 것은 단지 미래의 위로가 아니라, 완전한 희망, 절대 희망이니까 말입니다!

"성경의 놀라운 메시지는 예수님이 부활하실 때 미래의 하나님 나라를 현재 속에 들여놓으셨다는 것이다. 그 나라는 아직 이 땅에 완성되지는 않았지만 엄연히 실재한다. 이미 와 있는 그것을 몰라서 누리지 못한다면 그리스도인의 삶이 빈곤해진다"(66). <팀 켈러의 부활을 입다>는 천국, 즉 하나님의 나라를 '통치권'의 개념 안에 가둬두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통치하심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우리의 현재 가운데로 침투하여 어떻게 실제 인간들의 삶을 변화시키고 있는지 이보다 더 생생하게 설명해주는 책이 있을까요? <팀 켈러의 부활을 입다>는 우리가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믿음으로 연합할 때, 우주를 재창조할 만큼 강력한 그 미래의 능력이 우리 안에 들어와 어떤 대반적의 역사를 이루어놓는지를 날카롭게 포착해냅니다! 진리 안에서 하나님의 불이 우리 가운데로 떨어져, 우리의 심장이 그 하나님의 불에 붙게 하는 것, 이것이 팀 켈러 목사님의 최고 강점이지요.

바울의 놀라운 자아상을 보라. … 그는 자신이 여전히 사도 중에 가장 작은 자이며 또한 "죄인 중의 괴수"(딤전 1:15)라 하면서도 동시에 가장 많은 열매를 맺었다고 말했다. 우리는 이런 자아상을 잘 모른다. … 그는 자체적으로 여전히 버림받아 마땅한 흠 많은 죄인이었지만, 동시에 하나님의 은혜로 사랑받으며 풍성한 열매를 맺었던 것이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라고 고백한 그가 어떻게 죽음을 담대히 비웃고, 자신을 죽을 수 있는 왕들에게 직언하며, 역사를 바꾸어 놓은 운동을 이끌 수 있었을까?(60-61)

저는 제가 개척했던 교회에서 쫓겨난 목회자입니다. 하나님께서 교회 개척에 대한 꿈과 소명을 주셨지만, 여자 혼자서 교회를 개척하는 일에 큰 부담을 느꼈던 저는 하나님께 간절히 동역자를 구했고, 부교역자로 대형 교회 안에서 오랫동안 함께 사역하며 교제했던 동역자 부부와 뜻을 합할 수 있습니다. 교회는 모두가 놀랄 만큼 빠르게 성장했지만, 몇 년이 못가, 그 목회자 부부에 의해 교회에서 내쳐지고 말았습니다. 제게는 몇 가지 죄목도 덧입혀졌습니다.

하나님께서 다시 교회를 개척할 기회를 주셨을 때, 도저히 그 자리를 감당할 자신이 없었습니다. 스스로에게 목회자로서 사형선고를 내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모두가 어렵다고 하는 이 시기에 하늘에서 뚝 떨어지듯 새예배당까지 선물로 주시며 교회 개척의 사명을 회복해주셨지만, 예수님만 바라봐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연약한 나, 결함이 많은 나, 못난 나, 부족한 나의 모습이 저를 괴롭혔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나는 죽었다는 고백은 절절하게 터져나왔지만, 예수와 함께 부활했다는 고백에는 이르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팀 켈러의 부활을 입다>에서 만난 한 문장 앞에서 꼬꾸라졌습니다. "그분은 연약함에도 불구하고가 아니라 연약함을 통해 구원하신다"(119).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나를 사용하시는 것이 아니라, 연약하기 때문에 나를 사용하신다는 하나님의 음성이 제 심장을 파고들었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주시는 기쁨은 "슬픔에도 불구하고가 아니라 슬픔을 통해서 오는 기쁨"(303)이었습니다. 패한 듯 보이지만 그것이 진정한 승리라는 것, 약함에도 불구하고가 아니라, 바로 그 약함을 통해 승리할 것이라는 약속을 다시 붙잡습니다! 빈털터리이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것을 소유했음을 진정으로 노래하고 있는 저의 모습을 봅니다. 바울의 놀라운 자아상이 그리스도께 '산 소망'을 둔 결과였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이제야 제대로 알게 된 것같습니다.

<팀 켈러의 부활을 입다>는 그동안 팀 켈러 목사님이 전하여 온 '복음'의 진수, '복음'의 핵심이 하나로 녹아져 있는 책입니다. 부활의 주님을 만나고 하룻밤 사이에 제자들의 세계관이 송두리째 바뀐 것처럼, <팀 켈러의 부활을 입다>는 하룻밤 사이에 우리의 세계관을 송두리째 바꿔놓을 힘을 가진 책입니다. 우리의 삶 더 큰 이야기, 우주적 이야기, 영원한 이야기의 영광스러운 일부라는 것을 아직 제대로 깨닫지 못하고 있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이 책의 일독의 권합니다. 세상의 탁자를 뒤엎으시며, 어둠의 세력에 맞서 위대한 침투 작전에 동참하라고 지금 우리를 부르고 계신 주님의 음성에 전율하게 될 것입니다! 왜 이 책의 제목이 부활을 <입다>인지 그 비밀을 풀어보시기를 강력히 권해드립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보라 통독 - 하나님을 알아가는 90일 성경읽기
이상준 지음 / 두란노 / 2021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하나님이 말씀하신다.

"내가 이 언어를 네 입에 떠줘도 안 먹겠다고 하고 네 마음에 깨우쳐줘도 어렵다고 한다면,

그것은 성경이 어려운 것이 아니라 행할 마음이 없는 것이다."

- 이상준, <보라 통독>, 두란노, 138

<보라 통독>은 말합니다. 성경을 이해하기 어렵고 지키기 어렵다면, 그것은 신의 언어가 내 영혼의 언어가 아니기 때문이라고 말입니다. 언어가 다른데 어떻게 소통이 되겠느냐고 일침합니다. 또한 말씀이 나를 지켜주기를 바라는데 내가 말씀을 지키려니 어려운 법이라고 말입니다. 우리는 그동안 얼마나 하나님의 마음을, 그리고 성경을, 그리고 율법을 오해하며 신앙생활을 해왔던가요. 도대체 이런 오해는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요? <보라 통독>은 시종일관 이것은 '사랑'의 문제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 사랑의 문제는 곧 언어의 문제였던 것입니다.

<보라 통독>은 온 우주에 가득한 것이 하나님의 음성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자연 만물'을 통해, '성경'을 통해 말씀하시며, 또 말씀이신 그분이 우리와 소통하시기 위해 아예 사람이 되어 내 곁으로 오셨으며, 이제는 말씀의 저자이신 '성령'께서 직접 오셔서 저자 직강으로 깨우쳐주고 계시니 말입니다. 말씀하시는 분이신 하나님은 이제 여기에 <보라 통독>까지 더하여 <말씀>을 직접 읽어주고 깨우쳐주고 계시니 우리는 더 이상 핑계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도대체 이 모든 다양한 계시적 채널을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끊임없이 보여주고 들려주고 깨우쳐 주려고 하시는 것은 무엇일까요?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우리와의 '사귐'입니다. <보라 통독>은 하나님이 내 하나님이 되시고, 내가 그분의 자녀가 되는 것이 하나님의 로망이라고 말합니다.

<보라 통독>이 원하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마음을, 하나님의 사랑을 알아, 죽기까지 나를 사랑하시는 분과 사랑에 빠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 하나님의 사랑을 모른 채 '열심'만 있는 우리의 신앙생활을 안타까워합니다. <보라 통독>은 우리가 위대하신 하나님과 놀라운 사랑에 빠지려면, 반드시 '신의 언어'를 습득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보라 통독>은 우리에게 바로 그 '신의 언어'를 가르쳐주는 책입니다!

애정 어린 그분의 말씀을 사랑하라.

신의 언어를 습득하라.

그리고 그분과 같은 언어로 대화하라.

- 이상준, <보라 통독>, 두란노, 139

<보라 통독>은 90일 간 성경을 1독 할 수 있도록 이끌며, <말씀> 안에 숨겨진 메시지를 읽을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성경>을 읽어주는 성경 책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보라 통독>과 함께 <성경>을 읽는 재미도 있었지만, 솔직히 <보라 통독> 자체를 읽는 재미도 컸습니다. 성경 통독 가이드북 중에 가장 재미 있게 읽히는 책이 아닌가 싶습니다. 혹시 90일 간 <보라 통독>과 함께 <성경> 통독을 하는 것이 어려운 분들은, <보라 통독>만이라도 통독해보시기를 권해드리고 싶습니다. <성경>이 얼마나 재미있고 놀라운 책인지 <보라 통독>만으로도 그 매력을 알아보기에 충분할 것입니다.

요즘 세상에서 들려오는 소리들을 보면, 악한 영들이 온갖 매체를 활용하여 하나님을 대적하는 메시지를 뿌려대며, 우는 사자와 같이 삼킬 자를 찾아헤매고 있음을 느낍니다. 특히 다음 세대를 향한 맹공격을 퍼붓고 있는 형세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우리 자녀들을, 다음세대들을 악하고 더러운 메시지들로부터 지켜낼 수 있을까요? 안 듣고, 안 보게, 귀와 눈을 닫고 세상을 살아가게 할 수가 없는데 말입니다. <보라 통독>과 함께 <성경>을 통독하며, 악하고 더럽고 폭력적인 메시지로부터 우리 아이들을 지켜내려면, 아이들에게 <말씀>을 먹이는 일에 우리의 전부를 걸어야 한다는 것을 새삼 더 강렬하게 깨닫습니다. 진리를 가득 채워 거짓을 몰아내야 한다고 말입니다. 우리가 '신의 언어'를 모르는데, 어떻게 다음 세대에게 '신의 언어'를 가르칠 수 있겠습니다! 우리가 살 수 있는 오직 한 길, 우리 자녀 세대를 지킬 수 있는 오직 한 길은 '신의 언어'를 습득하는 데 있음을 깨닫습니다. <보라 통독>과 함께 자녀들과 매일 <말씀>을 먹는 시간을 가져보면 어떨까요. <말씀>은 가졌지만, '신의 언어'를 잃어버린 죽은 신앙생활, 병든 신앙생활을 회개하며, <보라 통독>을 가이드 삼아 우리의 심령을 <말씀>으로 배부르게 하는 일들이 불길처럼 일어나기를 소망합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