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비우스 로마사 1 - 1000년 로마의 시작 리비우스 로마사 1
티투스 리비우스 지음, 이종인 옮김 / 현대지성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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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연구는 병든 사람을 치료하는 가장 좋은 약이다. 왜냐하면 역사서는 모든 사람이 뚜렷이 볼 수 있는 무한히 다양한 인간 경험을 기록하기 때문이다"(17).

책의 표지에 보면 두 명의 아이가 암 늑대의 젖을 먹고 있는 장면이 나옵니다. 늑대 소년을 떠오르게 하는 저 모습은 로마 기원 설화에 등장하는 늑대 이야기입니다. 두 소년이 7개의 언덕에 도시를 세워 신생 로마가 탄생했다는 이 전설 같은 이야기를 <리비우스 로마사 Ⅰ>는 극적 긴장감이 극에 달한 한 편의 연극처럼 극적으로 들려줍니다. 형의 보위를 찬탈했던 아물리우스가 후일 불미스러운 싹을 잘라버리기 위해 조카 딸 레아 실비아를 신전의 여제관으로 만들어버렸는데, 영원히 처녀로 남게 할 심산이었으나 레아 실비아는 군신 마르스의 두 아들(쌍둥이)를 낳게 됩니다. 왕은 그 두 아들을 강에 내던져 익사시키라고 명령했으나 운명의 개입으로 갓난아기들을 넣은 바구니는 마른 땅으로 밀려갔고, 강에 목을 축이러 왔던 암 늑대가 바구니에 담긴 아이를 발견하고 두 아이에게 자신의 젖을 물려 살렸다는 전설을 로마인들은 자신들의 기원 설화로 간직하고 있습니다. <로마사>를 쓴 리비우스는 이 로마 기원 설화에 다음과 같은 해석을 덧붙입니다. "파우스툴루스는 아이들을 그의 오두막으로 데려가 아내 라우렌티아에게 건네주어 양육하게 했다. 어떤 사람들은 이 이야기의 근원을 다음의 사실에서 찾고 있다. 즉 라우렌티아는 평범한 창녀였는데 당시에 목동들에 의해 늑대라고 불렸다는 것이다"(24). 

이것이 제가 아는 로마 제국의 기원 설화입니다. 그러나 로마 제국의 기원은 사실 더 먼 과거로부터 시작됩니다. <리비우스 로마사 Ⅰ>은 "라티움의 작은 언덕들에서 이탈리아 중부의 라티움 지방의 중심부로 부상하는 과정을 다루고 있습니다"(11). 그 이야기는 트로이 전쟁에서 트로이가 멸망할 때 그곳을 떠나 다양한 모험을 겪었던 '아이네아스'와 '안테노르'에서부터 시작됩니다. <리비우스 로마사 Ⅰ>이 보여주는 신생 로마의 모습, 그 천 년의 시작은 "열강의 틈바구니에서 갓 태어난" 아기에 지나지 않습니다. 독자는 이 미미한 존재에 지나지 않았던 로마인들이 어떻게 신의 제국 다음으로 가장 강성한 제국을 건설할 수 있었는지, 그 폭력적이고 맹렬하고 치열하며, 혼란과 비통함과 재앙과 승리와 영광이 반복되는 운명적인 과정을 재미있는 역사소설을 읽듯 흥미롭게 읽어내려 갈 수 있습니다.

리비우스의 <로마사> 이후 "그 이전의 저술된 로마 역사서는 모두 빛이 바랬다"라는 극찬을 듣는 '리비우스'는 로마의 위대한 3대 역사가로 손꼽힌다고 합니다. 책의 완성도나 문장의 아름다움도 그렇지만, 그보다 먼저 가장 큰 차별점은 "당대 역사사가 쓴 로마사"라는 데 있습니다. 로마를 직접 살아낸 로마인의 증언인 셈입니다. 

리비우스는 이 책을 저술한 목적, 즉 독자들이 자신의 책을 이렇게 읽기를 권했습니다. "나는 독자들이 우리의 조상이 어떤 종류의 삶을 살았고, 그들이 어떤 사람이었으며, 로마의 권력이 처음 획득되어 그 후 계속 확장되어나가는 과정에서 어떤 정치와 전쟁의 수단을 사용했는지 등을 좀 더 진지하게 고려해 보기를 촉구한다. 그런 다음 우리나라의 도덕적 쇠퇴의 과정을 살펴보기를 권한다"(16). 이 책의 추천사를 쓴 김덕수 교수는 이를 이렇게 해석합니다. "리비우스가 주목하려 했던 것은 로마의 성공 신화가 아니었다. 그가 살던 시대는 "우리의 악덕을 견디지도 못하고 또 그 악덕을 치료하는데 필요한 조치를 감당하기도 어려운 시대"였다. 따라서 "우리나라의 쇠퇴의 과정을 살펴보라"고 그는 권고한다"(11). 그동안 로마의 성공 신화에만 매달려 그 역사를 미화시키기에 바빴던 우리가 이 역사가에게 한 방 먹은 기분입니다. 

강철비라는 영화에 이런 대사가 등장합니다. 현 최고 통치권자와 남북문제에 대처하는데 있어서 팽팽한 의견 대립을 보였던 한 정치인의 일갈입니다. "불행이지. 너 같이 역사의식 없는 놈이 임기가 남았다는 게." 역사의식이란 게 무엇일까요? 거대한 역사의 물줄기에 위에서, 그 커다란 흐름 안에서 자신의 역사적 위치와 시대적인 사명을 자각하는 작업이 아닐까요. 로마 역사의 가장 전성기에 있었던 한 문인이 한탄하면서 썼다는 <리비우스 로마사>가 일깨워주고자 한 것도 바로 그 역사의식일 거란 생각이 듭니다.

로마사에 대한 조각 지식마저도 미천하고, 그리고 이제 막 이 방대한 <리비우스 로마사> 1권을 빠르게 한 번! 읽었을 뿐이고, 로마사 연구의 주요 쟁점이나, 믿기 어려운 고대 전승이 무엇인지, 다른 로마 역사와 비교해 봤을 때 <리비우스 로마사>만의 독창적인(?) 관점이 무엇인지를 구별해 낼 수가 없는 독자라서 이 책을 평하기에는 무리이고, 또 자격도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다만, 키케로에 관한 상당한 분량의 장편소설을 읽었을 때와 같은 재미가 있었다는 것만은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독자와 직접 이야기를 나누듯이, 독자 앞에서 직접 이야기를 들려주듯이 생생하게 전하는 리비우스가 역사가이기에 앞서 탁월한 이야기꾼인 것만은 분명합니다. "들리는 바로는 이렇다는 이야기가 있다"거나, "따라서 우리는 해당 내용을 불확실한 채로 남겨두어야 한다. 안개에 싸인 고대는 늘 꿰뚫어볼 수 있는 것은 아니니까"(392)라는 식의 서술 방식이 이 역사가에 대한 신뢰도를 오히려 높이는 역할을 하기도 합니다. 천 년의 로마 역사를 꿰뚫어 보는 작업이 쉬운 일은 아니겠지만, <리비우스 로마사>에 계속 도전하고 싶다는 열정이 생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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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화로 보는 일리아스 명화로 보는 시리즈
호메로스 지음, 김성진.강경수 엮음 / 미래타임즈 / 201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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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리아스>는 일리오스(트로이아)의 이야기라는 뜻인데, 10년간에 걸친 트로이아 전쟁 중 그 마지막 해를 다루었으며, 전사들의 무용담이나 영웅들의 이야기, 결투 따위를 내용으로 하고 있다"(500).


현존하는 그리스 최대 최고의 대서사시요, 서양 최초의 문학 작품으로 "필독서 맨 앞자리"를 차지한다는 <일리아스>는 전쟁과 전쟁 영웅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성경은 창조주께서, 그러니까 경쟁자 없는 한 분 하나님이 아름다운 예술작품을 만들어 내듯이 아름다운 질서가 있고 체계가 있는 세상을 창조하셨다고 전하는데, 인간들은 지략과 권모와 술수가 난무하고, 혼돈과 폭력이 뒤섞인 전쟁, 그러니까 전사가 전투에서 승리하는 방식으로 세계가 만들어진다는 이야기를 더 선호하는 듯합니다. 예술가보다 전쟁 영웅을 더 원하는 것일까요?

무엇을 위한 전쟁인가는 중요하지 않아 보입니다. 오직 승자가 필요할 뿐이지요. 강함에 대한 동경과 환상이 우리 속에 숨어 있는 듯합니다. <일리아스>는 "누가 영웅인가"를 묻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재밌는 것은 힘의 세계, 폭력으로 다스려지는 세계를 격동시키고, 이끌어가는 원동력은 다름 아닌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신들도, 전쟁 영웅들도, 사랑 앞에서는 나약한 포로가 되고, 사랑을 위한 투쟁이 결국 서로를 죽고 죽이는 크고 작은 전쟁을 불러 일으킵니다. 때문에 <명화로 보는 일리아스>는 힘찬 근육과 용맹한 모습의 전사만큼이나 관능적인 남녀의 모습이 넘쳐 납니다. 결국 사랑을 차지하는 자가 영웅이라는 뜻일까요? 그러나 뺏고 빼앗기는 사랑과, 승리와 패배를 반복하는 전쟁에서 영원한 승자는 없다는 것이 <일리아스>의 결론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테티스의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아킬레우스가 불멸의 몸을 얻을지라도 전쟁 중에 죽음을 맞을 운명이다"라는 신탁의 예언을 받고 태어났기 때문에 그녀는 노심초사하였다. 테티스는 제우스의 제안대로 아기 아킬레우스를 이승과 저승 사이에 흐르는 스틱스 강물에 담겼다. 그러나 그녀가 잡고 있었던 발목 부분엔 강물이 닿지 않았기 때문에, 발목 뒤 힘줄은 아킬레우스가 상처를 입을 수 있는 치명적 약점으로 남았다. 이 전설에서 치명적인 약점을 뜻하는 '아킬레스건'(아킬레스는 아킬레우스의 라틴어 발음)이라는 단어가 유래했다>(31-33).

지금까지도 <일리아스>에서 가장 사랑받는 영웅은 아킬레우스가 아닐까 싶습니다. 영화 <트로이>에서 '브래드 피트'가 아킬레스(아킬레우스) 역을 연기한 탓일지도 모르지만요. 삼손과 드릴라처럼 영웅 아킬레우스를 죽음으로 이끈 것은 아름다운 여인이었습니다. 폴릭세나의 아름다운 모습을 보고 그녀에게 반한 아킬레우스는 그녀에게 열정적인 사랑을 맹세하지만, 폴릭세나는 아킬레우스의 약점이 발뒤꿈치라는 사실을 알아내어 파리스에게 은밀히 귀뜸해줌으로써 우리의 영웅 아킬레우스는 너무도 허무한 죽음을 맞이하고 맙니다(468). 

<명화로 보는 일리아스>는 "오로지 힘과 지략이 넘치는 전쟁터에서 진정한 영웅의 면모를 보여주는" 이는 헥토르라고 해석합니다. 비록 아킬레우스에게 패배하기는 했지만, 진정한 영웅은 "가장 뛰어난 맹장이지만 자신의 분노를 다스리지 못했던" 아킬레우스가 아니라, "인간적으로 따뜻했고, 나라에 충성하고, 군사들을 아꼈던" 헥토로라는 것입니다(462).

<명화로 보는 일리아스>는 일리아스의 방대한 스토리를 이해할 수 있도록 편집된 책입니다. 유명 화가들의 생생한 명화는 스토리 이해는 물론, 명화 그 자체를 감상하는 재미를 더해줍니다. <일라이스> 정독에 몇 번이나 도전했다 실패한 경험에 비추어 보면, 가장 읽기 쉽고 편한 책입니다. 편집점에 따라 스토리 연결이 조금 끊기는 듯한 느낌이 드는 부분도 있지만, 지금까지 읽었던 어떤 책보다 재미있었고, 무엇보다 <일리아스>의 전체 줄거리를 파악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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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처럼 아름다운 수학 이야기 - 최신 개정증보판
김정희 지음 / 혜다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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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을 통해서 수학으로 가는 길!

"어린이에게도 고독이 필요하다. 고독은 창조력을 만든다. 고독은 내적 풍요와 외적 경험을 만든다. 자기 안에 있는 마음의 고향으로 기꺼이 들어가라"(21). 수학이 취미인 이 소설가는, 미국 사회학자이자 경제학자인 일리즈 보울딩의 말을 인용하여 수학보다 먼저 고독을 이야기합니다. 그녀에게 수학은 고독한 순간을 즐기는 놀이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이 책을 쓴 이유이기도 합니다.

수학이 놀이 친구인 이 소설가는, 책을 사는 데 돈을 아끼지 않는 편인데도 수학 참고서를 살 때는 가끔 아깝다는 생각이 들어 아파트의 분리수거일이나 헌책방에서 철지난 문제집을 구해오기도 하지만, "머리가 복잡하거나 무기력증에 빠질 때 수학 문제를 풀면 머리가 맑아지고 개운한 게 양치질을 하고 난 후의 느낌이 나고, 훌륭한 고전문학을 한 편 읽고 났을 때의 느낌"(31)이 난다고 합니다.

수학은 아름답다고 말하는 이 소설가는, 수학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많이 가르치는 나라에서 이토록 수포자가 많은 것은 "대중을 위한 수학보다는 엘리트를 위한 수학을 배워왔기 때문"이라고 진단합니다(34). 이 책은 수학을 못하는 아이들, 아니 수학의 재미를 한 번도 배워보지 못하고, 제대로 느껴보지
못한 채 수학과 멀어진 사람들을 위한 책입니다. 만일 수학 엘리트가 이런 책을 썼다면, 수포자들은 또 한 번 깊은 좌절감을 맛봤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쉽고 재미있다고 약속하지만 그 약속을 배신하는 수학 엘리트들의, 결코 대중적일수 없는 수학적 교양도서들이 그 증거입니다.

수학하는 즐거움을 노래하는 이 소설가는, 무시무시한 진도의 공포에 시달리며, 수학 시간에 선생님께 뺨을 맞은 이후로 더더욱 수학을 무서워했던 학생이 어떻게 소설을 통해 수학에게 다가갈 수 있었는지, 어떻게 수학과 친해질 수 있었는지를 털어놓습니다. 그녀의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무엇인가를 안다는 것의 즐거움, 일상에서 수학적인 순간을 즐기는 법을 천천히 배울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저마다 가슴에 깊은 우물 하나쯤은 가지고 있어 제 속으로 저 혼자 깊어 간다. <베를린 천사의 시>라는 영화에서처럼 '나는 왜 저 사람이 아니고 나일까, 저 사람은 왜 내가 아니고 저 사람일까' 하는 마음속의 고독한 성찰이 위대한 철학을 발생시켰다. 수학도 철학과 그 뿌리를 같이하므로, 다르지 않다. 수학은 다분히 철학적이다. 수학 속엔 문학과 예술, 역사와 인생이 숨어 있다"(57).

<소설처럼 아름다운 수학 이야기>는 수학은 단순히 숫자를 다루는 학문이 아니라는 것, 수학은 음악이며, 문학이며, 놀이이며, 움직이라는 것, 우리가 살고 있는 자연계 그 자체가 수학적이라는 것, 신은 알고 보면 초월적인 기하학자라는 것을 흥미롭게 가르쳐주는 책입니다. 어느 날 갑자기 수학천재로 태어난 것이 아니라, 자신만의 역사를 가지고 수학적 세계로 들어가는 길을 내기 위해 "예술가처럼 영감을 기다리며, 뼈아프게 철학"(241)한 수학자들의 이야기도 들려줍니다. 피아노를 배우는 것과 같이 어떻게 하면 수학을 손으로 몸으로 익힐 수 있는지에 대한 힌트도 제공합니다. 

밑줄을 많이 그으면서
읽은 책입니다. 홀로 생각할 시간을 찾고 싶을 때, "역사 속 수학 이야기"(2장)를 한 단원씩 천천히 읽어도 좋을 듯합니다. 할 일 없는 사람처럼, 절대 빨리 읽어서는 안 되는 책처럼 말입니다. 이 책을 읽으니 어떤 과목이든 문제를 잘 풀려면 문제를 이해할 수 있는 독해력, 즉 국어 실력이 좋아야 한다는 말이 생각납니다. 수학도 공식이나 문제풀이가 아니라, 이렇게 이야기로도 배울 수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기 때문입니다. 


"영혼 속에서 시를 노래하지 않고서는 수학자가 될 수 없다."
- 소피아 코발레스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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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전한 순종 세계기독교고전 59
앤드류 머레이 지음, 김원주 옮김 / CH북스(크리스천다이제스트)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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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가지야, 너는 포도를 맺는 것 말고 달리 할 일이 있니?"
"아니, 없어요."
"그러면 너는 다른 아무것에도 쓸모가 없니?"
"다른 아무것에도 쓸모가 없습니다!"(176-177)

이 작은 토막 이야기가 제 영혼에 큰 울림을 주었습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지나치게 복잡하고 어렵게 생각하고 있었구나 하는 것을 가르쳐 주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로 사는 일을 너무 거창하게 생각하고 있었구나 하는 것을 깨닫게 해주었기 때문입니다. 기도의 초점을 완전히 다시 맞추어야겠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포도나무에 붙어 있는 가지가 포도를 맺는 것 말고, 다른 열매 맺기를 소원하고 또 소원하고 있는 것만 같았기 때문입니다.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 '순종'이라고 보았던 앤드류 머레이는 <완전한 순종>을 강조합니다. "완전한 순종"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앤드류 머레이는 그것을 포도나무의 뜻에 자신을 완전히 맡기고 있는 작은 가지에 비유합니다.
포도나무의 뜻에 완전히 맡겨져 있는 작은 가지처럼, 완전한 순종은 그리스도께 나를 완전히 드려 "그분이 행하기를 바라시는 바를 행하시도록 하는 것"(34)이라고 설명합니다.

앤드류 머레이의 <완전한 순종>은 우리가 실제로 하나님과 얼마나 불완전한 교제 속에 있는지를 깨우쳐 주는 책입니다. 완전한 순종은 성령님과의 친밀한 교제 속에서 가능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언제 어디서든 간편하게 성경 말씀을 읽을 수 있고, 손가락만 몇 번 움직이면 유명한 목사님들의 설교가 홍수처럼 쏟아지고, 좋은 시설과 많은 프로그램 속에서 풍요로운 신앙생활을 하고 있으면서도, 우리는 그동안 "하나님을 바라보는 법",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법"을 충분히 배우지 못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자아 계발이 아니라, 자기 부인을 요구하셨음에도 불구하고, 내 안에 강하게 살아 있는 '자아'는 여전히 하나님께 자신을 맡기기를 두려워한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완전한 순종>은 기꺼이 내 자신을 완전히 하나님 손에 내어주려면 자아로부터의 구속이 있어야 하는데, 이것을 성령의 열매, 베드로의 회개를 통해 설명합니다. 오직 성령의 열매인 사랑만이 우리의 이기심을 쫓아내고 정복할 수 있으며, 이것은 본성의 변화, 즉 회개를 통해 시작된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이 일은 오직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할 일은 온전히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바를 내게 행하실 수 있도록 나를 완전히 맡기는 것, 그것말고는 없는 것입니다. "완전한 순종의 생활은 단순히 어려운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훨씬 그 이상의 어떤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사람들에게 절대적으로 불가능한 생활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인해, 하나님의 능력으로 인해,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님의 권능으로 인해 우리가 도달하게 되어 있는 생활이고, 감사하게도 우리에게 가능한 생활입니다"(32).

완전한 순종은 하나님의 정당한 위치, 우리의 정당한 위치를 찾는 일이기도 합니다. 앤드류 머레이는 이 책을 지적으로 무엇인가를 얻으려고 읽기보다, "죄인으로서 죄에서 구원받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이 책을 읽어야 한다"(20)고 말합니다. <완전한 순종>은 그리 재미있는 책은 아닙니다. 지적인 희열을 가져다주는 책도 아닙니다. 신앙생활을 성실하게 오래한 분이라면 이미 알고 있는 말씀이요, 새로울 것 없는 설교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다시 한 번, 우리의 위치, 우리가 드려야 할 기도, 하나님을 신앙하는 자세가 무엇인지를 가르쳐 주는 책입니다. 이 책을 읽고 제 기도는 이렇게 달려졌습니다. 

"주님, 제가 저를 완전히 주님께 드리기를 원하나이다."
"그리스도시여, 내가 선택한 것은 바로 주님께 대한 전적 순종입니다."
"나는
매일 그리스도께서 자기의 원하시는 바를 내게 행하실 수 있도록 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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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는 누구인가? - 예수가 하나님임을 증거하는 8가지 조각들
조정민 지음 / 두란노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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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 직접 듣는 것이야말로 하나님을 아는 지름길입니다"(8).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는 예수님의 물음에, 한국 교회는 교단 신학에 따라 답변이 조금씩 다를 수 있음을 지적한 어느 교수님의 글이 기억납니다. <예수는 누구인가?>는 "사람의 말로 가감된 예수가 아니라 예수님 스스로 밝힌 자기소개이자 하나님 선언입니다"(8). 조정민 목사님은 예수님에게서 직접 듣는 예수님 소개를 위해 <요한복음>의 증언에 주목했습니다. "이미 순교한 제자들보다 훨씬 더 오래 살면서 예수님을 가장 오래, 그리고 가장 많이 묵상한"(138) 요한은, 8가지 선언을 통해 예수님께서 스스로를 어떻게 계시하셨는지 증언했습니다. 그리고 이 책은 그 8가지 선언을 자세히 살피며, 그 강조점이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다"는 선언에 있다고 힘주어 말합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임을 분명히 아는 일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며, 유일한 기초이며, 전부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생명의 떡이다. 썩을 양식을 위해 일하지 마라. 영원한 영식을 먹어야 한다. 나는 세상의 빛이다. 어둠 속에 다니지 마라. 빛 가운데 살아라. 나는 양의 문이다. 다른 곳을 넘어 다니지 마라"(52).
예수님에게서 직접 듣는 예수님의 소개는 힘찬 생명력과 진리의 빛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예수님을 소개하는 "생명의 떡, 세상의 빛, 양들의 문, 선한 목자, 부활 생명, 길과 진리, 포도나무, 내가 그라"는 이 8개의 조각은 죽음을 넘어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예수님께로 데려가는 열쇠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무엇을 주시고, 무엇을 약속하고 계시는지 생생하게 증언합니다. 예수를 믿는 기쁨이 무엇인지 알고 싶다면 이 책을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습니다. 


"죽지 않는 생명을 위해 죽을 목숨을 쓰라"(79).
이 책은, 결국은 죽을 목숨을 위해 우리의 생명을 써야 하는 비극적인 인간의 실존을 예리하게 꼬집습니다. 누구도 죽음에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그러나 모두에게 소망이 있음을 선포합니다. 이 책은 죽음으로부터의 자유, 죽음으로부터의 대해방의 선언입니다. 나는 죽지만, 결코 죽지 않는다는 영생의 소망을 이처럼 확실하게 심어주는 책을 아직 만나보지 못했습니다. 이 책에 담긴 메시지의 가치에 비하면, 책값이 지나치게 착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새신자와 구도자를 위한 책이지만, 기존 성도들에게도 목자는 양을 훈련시키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58),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권세의 진짜 의미(79), 가지가 열매를 맺는 비결(119-134)에 대해 이 책을 통해 다시 배워보라고 권하고 싶습니다. 예리하게 찌르지만, 진리가 주는 시원함과 자유함을 통쾌하게 맛볼 수 있는 설교입니다. 






예수님은 억지로 우리에게 무슨 일을 시키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짐을 지우지 않습니다. 
양들은 원래 아무 짐도 지지 못하는 짐승입니다.
나귀나 노새는 짐을 지는 것이 사명이고,
양들은 그냥 목자를 따라다니는 것이 사명입니다. 
우리가 할 일은 그분을 따르는 것입니다.

- 조정민의 <예수는 누구인가> 中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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