줄이 다시 시작되는 곳 - 판을 흔드는 생각의 힘 내인생의책 그림책 130
페르 디비그 지음, 조기룡 옮김 / 내인생의책 / 202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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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을 흔드는 생각의 힘

'그림책'이라고 하면, '어린아이 전용'이라고 쉽게 단정짓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림책에 대한 보통의 선입견이 작동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 그림책은 제목이 심상치 않습니다. <줄이 다시 시작되는 곳>. 부제는 사뭇 더 묵직합니다. <판을 흔드는 생각의 힘>. 어떤 이야기를 담은 책일까요? 표지를 살펴 보면, 각양각색의 동물들이 긴 줄을 이루며 늘어서 있습니다. 신문을 들고 있는 듯한 동물도 보이고, 엄마 손은 붙잡은 아기 동물도 보이고, 출근하는 길인 것처럼 보이는 동물도 있고, 여행을 떠나려는 듯한 동물의 모습도 보이는 것 같습니다. 버스를 타려고 줄을 선 것일까요? 그런데 어쩐지 동물들의 표정이 그리 즐거워 보이지는 않습니다. 그래도 표지만 봐서는 어떤 이야기를 담고 있는지 전혀 감이 오지 않습니다.


트위그는 심심해요.

숲을 샅샅이 헤매고 다녔지만

함께 놀 친구를 찾지 못했어요.


이야기의 주인공은 '트위그'입니다. 심심한 트위그는 함께 놀 친구를 찾아보지만 함께 놀 친구가 보이지 않습니다. 동물 친구들은 다 어디를 간 것일까요? 그런데 이 짧은 문장만으로도 숲 속의 공기가 적막하다는 것이 느껴지니 신기합니다.

그때, 트위그는 저기, 저 아래에서 뭔가 천천히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알아챕니다. 그것은 동물 친구들이 길게 늘어서 있는 줄이었습니다. 그들은 줄을 선 채, 위도 보고, 아래도 보고, 옆도 바라봅니다. 트위그는 그 줄에 들어가 같이 놀고 싶어졌습니다.

"안녕! 너희 뭐 하고 있어?

이거 줄이야? 재미있어 보인다! 나도 껴도 돼?"

친구들은 이건 놀이가 아니라, 줄이라고 했습니다. 함께하고 싶으면 맨 뒤에 서야 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끝이 보이지 않습니다. 줄은 끝도 없이 길었습니다. 이들은 아주 오랫동안 줄을 서 있었다고 합니다. 트위그는 어떻게든 그 줄에 껴보려 했지만 쉽지 않습니다. 트위그에게 자기 자리를 내주려는 친구가 없었거든요. 줄은 아주 길었고, 맨 뒤는 너무 멀리 있있고, 모두 오랫동안 자기 자리를 지키고 있었기 때문에, 아무도 트위그를 끼워주려 하지 않습니다. 심심했던 트위그가 이젠 외로워 보입니다.

"이제 우리는 나뭇잎 때문에 한 발도 못 움직여!"

트위그는 줄 속으로 끼여들려는 시도를 멈추었지만, 어디선가 세차게 바람이 불어보는 바람에 나뭇잎들이 마구 떨어져 줄이 나뭇잎에 파묻혀 버렸습니다. 큰일입니다. 모두들 꼼짝 못하게 되어 버린 것입니다. 동물 세계는 그렇게 줄을 선 채 멈춰버리고 마는 것일까요?

줄이 다시 시작되는 곳

이 책은 동물들이 왜 긴 줄을 이루며 서 있는지 말해주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들이 무얼 하려고 줄을 선 것인지 알 수 없습니다. 이유도 모른 채 길게 늘어서 있는 동물들의 줄을 보며, 내가 오랫동안 서 있었던 줄, 그러나 눈에 보이지 않았던 그 줄이 보이는 듯 했습니다. 그 줄은, "태어났으면 어린이집에 가야 해, 어린이집을 졸업했으면 유치원을 가야 해, 유치원을 졸업했으면 초등학교를 가야 해, 초등학교를 졸업했으면 중학교를 가야 해, 중학교를 졸업했으면 고등학교를 가야 해, 고등학교를 졸업했으면 대학교를 가야 해, 대학교를 졸업했드면 취직을 해야 해"라는 줄입니다. 우리는 왜 그 줄에 서야 하는지 미쳐 깨닫기도 전에 줄 서기를 시작했고, 어쩌면 나는 여전히 그 줄에 서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제 그 줄에서 벗어나고 싶어도 나뭇잎에 파묻혀 움직일 수 없었던 동물처럼, 꼼짝하지 못한 채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주인공 "트위그"가 동물 친구들을 구출해 낼 묘수를 찾았습니다. 그 줄 안에 끼어 있지 않았던 트위그에게는 줄을 보는 다른 눈이 있었거든요. 그것은 판을 흔드는 생각의 힘이었습니다. 이야기는 그렇게 새로운 줄이 시작된다는 것을 알리며 끝이 납니다. 줄이 사라지지 않고 새로운 '줄'이 다시 시작된다는 결말이 조금은 아쉽게 느껴졌지만, 만약 줄이 우리 삶의 필수 요소라면, 이 책은 무엇이 '공정'인가를 다시 생각해보도록 하는 것 같습니다. 이토록 묵직한 메시지라면 아이들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읽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아니, 사회의 '어른들'이 먼저 읽어야 할 책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노르웨이 아동문학의 기준을 끌어올리다"라는 찬사가 빈 말이 아니었습니다. 그림책 수업이나, 독서지도용 도서로 추천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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