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섭은 눈앞이 어찔해졌다. 정식 출두 명령을 받고 경찰서로 가서 자세한 설명을 들을 수 있었다. 그간 송 감독이 해먹은 게 한두 건이 아니었다. 물까지 엎지르며 어설프게 쇼핑백을 챙기던 모습이 베테랑의 노련한 연기였다니. - P193

누군가 어깨를 흔드는 바람에 요섭은 눈을 떴다. 꿈을 꾼 것 같은데 기억이 나지 않았다. 가시나무에 휘감겨 허우적거리는 느낌만 살갗에 감돌았다. 요즘은 늘 그랬다. 부쩍 꿈을 자주 꾸는데 정작 꿈의 내용이나 이미지는 남아 있지 않았다. - P206

오른쪽 경관을 돌아보며 물었다.
"네가 체포된 곳. 장미 정원을 경계로 거긴 퀴르발 남작의 영지야." - P216

요섭이 그리는 새로운 청사진의 핵심은 가족의 복원이었다. 지금이야말로 가장의 역할이 필요한 시점이었다. 넝마쪽을 붙들고 징징거릴게 아니라, 꼼꼼히 이어 붙여 세련된 퀼트 양탄자로 재탄생시킬 것. - P225

현실이 절망적인 만큼 공상은 달콤했다네. 그런데 현실을 지탱해주던 공상을 현실로 실현하자 현실이 무너지며 뒤죽박죽이 돼버린 거야. - P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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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흙길이 황무지를 가로지르며 이어졌다. 길가의 말라 죽은 나무들이 머리 위로 성긴 그물을 드리웠다. 무너진 건물 잔해와 엉성한 나무 십자가를 꽂아놓은 무덤이 이따금 눈에 띌 뿐, 아무리 걸어도 생명의 흔적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머리 위에서 빙빙 원을 그리며 따라오는 독수리가 정겹게 보이기 시작했다. - P185

십자가를 등지고 걸으며 나는 머릿속 백지에 여인의 초상화를 그렸다. 남편을 살해하고 감옥에서 아이를 낳은, 앞길 창창한 총각 목사한테 자식을 떠맡기며 자신은 죽은 것으로 해달라고 당부한 여인. - P1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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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세아와 요시야의 유일신론은 단지 이스라엘이 오직 야웨만을 예배해야 한다는 것을 요구했다. 그것은 다른 신들이 실제인지에 관해서는 어떤 것도 말하지 않았다. 대조적으로 제2이사야는 심지어 다른 신들이 존재한다는 것 조차 거부하는, 최초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는 성서 본문이다. - P116

유대인들은 이사야 53장에 있는 고난받는 종을 자신들의 고통과 궁극적인 구속에 관한 상징으로 간주했다. - P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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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대아-바빌로니아인들은 당시 유다의 왕 여호야김을 계속 왕위에 있게 했다. 그러나 그는 이집트에 의해 권력을 얻었고, 따라서 친-이집트적이었다. - P95

이 사건들은 유다인들의 두 가지 핵심 믿음들을 심각하게 약화시켰다. 곧, 예루살렘이 함락될 수 없는 하나님의 도시였다는 것, 그리고 하나님이 다윗의 후손이 예루살렘에서 영원히 왕이 될 것을 보장한다는 것 말이다. - P98

구약성서의 많은 부분은 이 유다 포로민들과 그 후손들의 저술모음집이다. - P106

트라우마 고유의 자기 비난에 사로잡힌 포로민들은 이전에 그렇게 하찮게 여겼던 심판 예언자들을 진지하게 생각했고, 포로기를 죄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된 심판으로 간주했다. - P107

포로기 초기에 활동했던 다른 주요 예언자는 에스겔의 동시대인 예레미야다. 예레미야가 계속해서 예루살렘 안에 머물렀다고 할지라도, 그 또한 백성의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고통의 상징으로 기능했다. 에스겔이 아내의 상실로 인해 고통을 겪었다면, 예레미야는 가혹한 예언들로 인한 장기간의 거부와 고립으로 고통을 겪었다. - P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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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왜 뜬금없이 한 번씩 엉뚱한 짓을 하는 걸까?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평소라면 절대로 하지 않을 짓을 귀신에 씐 거야, 귀신에. 요섭은 자신의 소행을 은근슬쩍 귀신에게 떠넘겼다. - P95

요섭은 봉사의 시혜자가 누리는 만족감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그렇다고 봉사가 유해한 바이러스라는 소신까지 수정할 정도는 아니었다. 이건 돌발적인 일탈이 주는 일회성 쾌감일 뿐이라는 걸 그는 알고 있었다. 금지된 사랑이나 불량식품 같은. - P105

요섭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배당된 사건을 빼앗기는 건 변호사로서 자존심이 걸린 문제였다. 아무리 냄새나는 쉰밥일지언정 내 밥통에 있던 건데. 그걸 누구보다 잘 아는 장 선배가, 국으로 입 다물고 사건을 넘기라니. 그깟 사소한 규정 위반 때문에, 그것도 호시탐탐 자신의 영역을 노리는 오소리한테 이것들이, 고분고분 시키는 대로 따라줬더니 날 호구로 보나. - P119

일이 커졌다. 발단은 피해자 유소연이 인터넷에 올린 호소문이었다. 부유층 유학생 자제들의 패스트푸드점 알바생 성폭행 사건. 감정의 양념을 적절히 뿌려 사실관계를 정리한 후 수면 아래 감춰진 의혹들을 신중하게 언급한 글이었다. - P137

매일매일 똑같은 일이 반복되었다. 나는 소복 여인이 읽어주는 『헨젤과 그레텔』을 들으며 깨어났고, 그녀의 남편이 휘두르는 야구방망이에 맞아 정신을 잃었다. 그 사이의 짧은 일과도 한결같았다. - P171

요섭은 흥분 상태에서 한참을 떠들었다. 절반은 정체를 밝히라는 요구였고 나머지 절반은 정체를 밝혀내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으름장이었다. 말없이 듣고 있던 남자는 한마디를 덧붙이고 전화를 끊었다.
음절 사이사이마다 서리가 낀 것 같은 목소리였다.
"최 변・・・・・・님, 너무 흥분하지 마세・・・・・・ 이제 시작인데." - P1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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