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정은 양강 때문에 돌아가신 사부님들을 생각하면 지금도 이가 갈리지만 어차피 양강이 죽었으니 증오의 마음도 잊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곽정은 의형제를 맺었던 옛 정을 생각해 양강의 시체를 수습하여 절 후원에 장사 지내 주었다. "양강, 오늘 내가 너의 시체를 장사 지내 준 은혜를 생각해서 용이를 찾을 수 있도록 도와 다오. 그럼, 살아 생전에 네가 저지른 모든 잘못을 용서하마 - P65
구양봉은 다시 손을 뻗어 곽정의 장력을 받았다. 그 역시 항룡십팔장에 대해서는 훤히 꿰뚫고 있었다. 또한 곽정이 홍칠공에게 직접 전수를 받아 장력이 대단하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정작 정면으로 힘이 전해지니 뜻밖에 몸이 흔들릴 정도로 충격을 받았다. 고수의 힘이 서로 부딪칠 때는 그 진기(眞氣)가 조금만 역류해도 중상을 입게 된다. 조금만 방심했더라면 곽정에게 당할 뻔했다는 생각에 구양봉은 크게 놀랐다. ‘내가 늙어 기운이 떨어지기를 기다릴 것도 없이 그 전에 이 녀석에게 따라잡히겠구나.‘ - P109
곽정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내가 그렇게 하겠다면 넌 무엇을 해주겠느냐?" "앞으로 세 번, 선배님이 제 수중에 걸려도 목숨을 살려 드리겠습니다." 구양봉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웃음을 터뜨렸다. - P112
곽정은 황용을 다시 만날 수 있다고 굳게 믿고 있었지만, 정작 이렇게 만나고 보니 놀라움 반, 기쁨 반으로 꿈을 꾸고 있는 것만 같았다. 두 사람은 잠시 서로를 바라보다가 서로를 향해 뛰기 시작했다. 봉우리 꼭대기는 온통 얼음이라 굉장히 미끄러웠지만 두 사람은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결국 두 사람은 동시에 미끄러져 바닥에 쓰러졌다. - P137
"노독물이 견디다 못해 죽기로 작정했구나!" 황용은 손뼉을 치며 즐거워하다 조금씩 표정이 바뀌었다. "응? 이상하네? 어떻게 저럴 수가……." 지켜보고 있자니 구양봉의 몸이 수직으로 떨어져 내리는 것이 아니라 공중에서 천천히 흔들리며 연처럼 내려오고 있었다. 곽정과 황용은 어찌 된 영문인지 알 수가 없었다. 저 높은 봉우리에서 떨어진다면 곧장 떨어져 가루가 되어야 하는데, 어찌 저 자는 저렇게 천천히 내려온단 말인가? - P147
"대칸께서 이들의 목숨을 살려 주시기를 바랍니다." "후회하지 않겠느냐?"" 테무친의 목소리는 깊이 잠겨 있었다. 곽정은 혼사를 취소하라던 황용의 말이 떠올랐다. 지금 이 좋은 기회를 놓치면 대칸의 환심을 잃게 되는 것은 물론이요, 황용과의 인연도 물거품이 될 터였다. 그러나 눈앞에서 수십만 백성들이 비명에 죽어 가는데 그냥 보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다시 마음을 수습했다. "후회하지 않습니다." 테무친도 곽정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음을 느꼈다. - P163
구양봉은 심오한 무공을 가진 자라 곽정의 연공을 살펴보면서 경전 중 많은 요지를 깨닫게 되었다. 그러나 자신이 얻은 경전과 대조를 하니 전혀 연결이 되지 않았다. 생각할수록 이해가 되지 않아 더욱 곽정의 연공을 독촉해댔다. 그러니 곽정의 무공은 한 달이라는 시간 동안 오히려 비약적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 P184
"나의 이 두 손을 두 명의 적이라고 생각해라. 구양봉, 구천인 저 두 놈은 당연히 네 적이니까 너 혼자서 네 명의 적을 상대해 보는 거야. 한 번 해보자. 이런 재미있는 놀이는 너도 처음 해보지?" 곽정은 주백통의 말을 전혀 듣지 못하다가 갑자기 세 사람이 동시에 자신에게 맹공을 퍼붓자 죽을힘을 다해 피할 수밖에 없었다. 주백통은 계속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걱정 마, 걱정 말라고, 위험하면 내가 도와줄게." - P196
대칸은 품에서 비단 주머니를 꺼내어 각각 하나씩 건네주었다. 주머니 입구는 옻을 불로 지져 밀봉되어 있었는데, 옻 위에는 대칸의 인장이 찍혀 있었다. "대량에 도착하기 전에 함부로 풀어 보아서는 안 된다. 또한 주머니를 열기 전에 서로 주머니 입구에 손상된 흔적이 있는지 살펴보아라." - P205
이평은 말을 하면서 곽정의 품에서 그 비수를 꺼내 손잡이에 새겨진 곽정‘ 이라는 글자를 가리키며 말했다. "구 도장은 네 이름을 곽정이라고 짓고, 양 숙부 아이의 이름을 양강이라고 지어 주셨단다. 그게 무슨 뜻인지 알지?" "구 도장께서는 저희들에게 ‘정강의 치욕‘을 잊지 말라는뜻에서 그렇게 지어 주셨습니다." - P215
이평은 곽정을 한참 동안 묵묵히 바라보았다. 아들을 바라보는 표정이 그렇게 부드러울 수가 없었다. "얘야. 너 자신을 잘 보살펴야 한다!" 이평은 말을 마치고 비수로 곽정의 손에 묶인 밧줄을 끊은 다음, 순식간에 칼날을 돌려 자신의 가슴을 찔렀다. 곽정은 손이 풀리자마자 급히 막으려 했지만 비수는 예리하기 그지없어 이미 손잡이만 남기고 가슴에 깊이 꽂혀 있었다. - P216
"저는 앞으로 다시는 무공을 사용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차라리 무공을 다 잊어버리게 되면 좋겠는데, 이미 익힌 무공을 잊어버릴수도 없고……. 방금도 저 때문에 장정 하나가 머리에서 피를 흘리지 않았습니까?" - P229
차분히 내뱉는 서생의 말에 구천인은 고개를 쳐들고 크게 웃어 젖혔다. "무공으로 하겠다면 당신들은 여럿이고 나는 혼자이니, 상대가 되지 않을 거요. 하지만 시비, 선악을 따진다면, 헤헤…… 나 혼자 이 자리에 있을 테니 평생 사람 죽여 본 일 없고, 죄를 저질러 본 적도 없는 자가 있다면 나서 보시오. 그런 사람의 손에 죽는다면 곱게 죽어 드리리다. 눈썹 하나라도 찡그린다면 내 사내대장부가 아니올시다." - P264
사부님은 평생 231명을 죽였다고 하셨지. 하지만 그들은 모두 악인이었어. 선량한 사람을 실수로 죽이지만 않는다면 마음에 거리낄 것도 없겠지. 구천인을 꾸짖을 때 사부님은 정말 당당한 모습이셨어. 구천인의 무공도 사부님보다 크게 떨어질 것 없지만, 악이 선을 이길 수는 없는 법이지. 사부님의 당당한 기세에 눌릴 수밖에 없는 거야. 나의 무공을 의롭고 선한 일에 쓸 수 있다면 굳이 잊으려 할 필요는 없겠지? - P271
곽정은 아이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아이의 반듯한 용모를 보니 양강과 의형제를 맺은 일이 생각나 한숨이 절로 나왔다. "오라버니께서 이 아이에게 이름을 지어 주세요." 목염자의 눈물어린 부탁에 곽정은 한참 동안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나는 이 아이의 아버지와 의형제를 맺었소. 끝이 좋지 않았으니, 나도 도리를 다하지 못한 것이 평생 한으로 남을 거요. 이 아이는 커서 잘못이 있으면 고치고 인의를 실천하는 사람이 되었으면 하오. 용아, 나는 글을 잘 모르니 네가 이름을 지어 줘." 황용은 그래도 될지 목염자를 쳐다보았다. "그래, 오라버니의 기대를 넣어서 네가 아이의 이름을 지어 줘." "그러면 이름은 양과(楊過)라 하고, 자는 개지(改之)라고 하는 것이 어떨까요?" "좋아요! 아이가 오라버니와 용이가 바라는 것처럼 자랐으면 좋겠어요." - P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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